머리말
5·18에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들의 경우처럼 필자 또한 이 엄청난 사건과 연관될 의사도 없었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황해도에서 피난 내려온 부모님으로부터 휴전 직전 1953년에 부산에서 출생하여 곧 서울로 올라와 필자의 기억은 모두 서울, 인왕산 밑 효자동, 신교동에서 자란 것이 전부다. 그 그 동네는 조용한 중산층 주택가였지만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지 부근이었고 따라서 적어도 몇 년에 한 번씩은 어린 나이에 섬뜩한 역사의 현장들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아왔다. 어려서 집 근처에 살던 신익희 씨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온 동네에 전화(戰禍)가 감돌던 일, 국민학교 2학년 때 4·19가 나서 온 동네가 아수라장이 되고, 총 소리에 공포에 떨던 일, 신교동으로 이사 오자마자 새벽에 총 소리가 나고 5·16이 나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도 기관총, 기관포 소리가 동네에 진동하던 일이 심심치 않았다. 1·21 사태, 일본항공 여객기가 서울 상공에 들어왔던 날 밤의 기관포 소리와 밤하늘을 날던 예광탄들, 그리고 10.26···…. 모두 지척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계엄령이 났을 때는 집에서 멀지 않은 청와대, 중앙청 앞에 탱크들과 주변에 ‘허리 총’을 한 군인들을 휘둥그레 보곤 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건들이 나 자신과 직접 연관될 수 있다는 느낌은 받지 않았다. 전쟁과 피난을 겪었던 부모님은 늘 걱정을 하셨지만 필자는 유복한 가정에서 온갖 보호를 받아가며 그저 하루하루 별 긴장감 없이 학교를 왔다 갔다 했을 따름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매일 청와대 앞을 지나 언덕을 넘어 학교를 다녔지만 경찰 아저씨들은 웃는 낯에 친절하기만 했다. 1968년 북한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한 1·21 사태 전까지는 경찰들은 총을 휴대하지도 않았다. 청와대 앞에서 행인들을 검문하고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 10월 유신이 터진 후였다.
10월 유신은 필자 같은 세상모르는 학생이 느끼기에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바로 전 해에 위수령이 발동되어 수경사 군인들이 고려대학교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한 사실을 친구들에게서 전해 듣고 무서워한 기억이 난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도 어떤 형태로든지 저항의 표현을 해야만 했고 당시 우리 과 학우 두 명이 데모를 주동하여 퇴학, 제적을 당했다. 당시 필자는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가기로 마음먹고 있어서 연기원을 내지 않은 상태였고 ‘어차피 군대나 갈 텐데 제대하고 공부하지’ 하는 생각에 매일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 소주, 맥주로 세상을 등지고 살았다. 하긴 유복한 환경에서 입시 지옥의 초창기에 자란 필자 같은 학생에게 친구와 술, 그리고 소설책들은 당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 흥분된 교육 현장이었다. 필자가 지금 사회과학에 열정을 갖고 있다면, 그 좌절의 계절부터 친구들과의 목적 없는 대화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조금씩이나마 엿보았고 이러한 실천을 아직도 나름대로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1974년 입대하자 곧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다. 보안대에서는 신병 훈련소에까지 나와 훈련병이던 필자에게도 선배이던 이철 등을 아느냐고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당시 이철 선배와 약간의 안면이 있어 ‘안다’고 하자, 곧 506 범진사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필자는 끝없는 자술서를 공중전화 박스만한 취조실에서 써야 했다. 그들은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지르고 겁을 주었지만 잔뜩 겁먹고 있는 불쌍한 훈련병을 패지는 않았다. 그리고 보호실에서 꿈에 그리던 짜장면 곱배기 한 그릇을 시켜 먹고 뜻밖에 친구 정윤재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3, 4일 만에 귀대했다.
복학하자 학교는 관악산의 그 삭막한 곳으로 옮겨 가 있었고 상황은 살벌했다. 식당에는 늘 ‘학생 반 경찰 반’이었다. 여러 곳에서 나왔겠지만 짧은 머리에 특이한 눈매들을 한 그들을 누구나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긴급조치 시대의 데모 원천 봉쇄 전략이었다. 당시는 휴교도 하지 않아 지겹게 학교에 다녔다. 이따금 데모가 나면 웬 최루탄이 군에 갔다 온 사이 그렇게 매워졌는지, 연기도 나지 않는데 꼼짝할 수가 없었다. 복학생으로 외롭게 학교 다니다 1979년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시는 공부에 꽤 흥미를 느껴 방에 들어앉아 공부만 하던 때였다. 하루는 10·26이 나고 얼마 안 되어 시내에 나가보니 관공서를 지키던 키 큰 군인들이 키 작고 후줄근한 전투복을 입은 군인들로 바뀌어 있었다. 12·12였다. 당시에 전해들은 이야기는 무지막지한 군인들의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1980년 초에는 학교에서 수업이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미국 유학 갈 준비를 하던 필자는 당시 3, 4월쯤 시카고 대학에서 입학 허가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이 읽는다는 맑스(Marx)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어렵게 구해 읽고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은 당시 정국의 꼴이 그 책에 나오는 얘기하고 너무나 흡사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처지라 살벌하기로 소문난 시카고 대학에서 적응할 인내심을 훈련할 겸 또 재미도 있고 해서 4월쯤부터는 커다란 범선 모형을 만드는 일에 몰두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만 엄청난 장난감이었다. 비지땀을 흘리며 인내와 집중력을 시험하던 참이었다.
5월 들어 학생들이 기어이 시내에 진출하고 시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신군부가 쿠데타를 하기 위해 학생들을 시내로 끌어냈다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참으로 착잡한 시절이었다. 그때 마침 새벽마다 다니던 조기 테니스 클럽에서 허리가 삐끗한 부상을 당했다. 그것이 디스크가 되는 것 같아 한의원에 매일 침을 맞으러 다녔다. 하루는 안국동에서 광화문 쪽으로 차를 타고 오는데 별판을 깐 승용차들이 줄줄이 보안사 쪽으로 가고 있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곧 5·17 쿠데타가 터졌다. 다음날 시내에 잠깐 나갔다 광화문에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세종문화회관 앞 넓은 인도에서 수경사 군인들이 시민들을 겁주려고 착검을 한 채 악을 쓰며 총검술을 하고 있었다. 심히 불쾌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침에 후배 황태연(현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이 집에 전화를 했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형, 광주에서 지금 크게 터진 모양이여! 예비군 동원령이 꺼꾸로 내려부렀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나 곧 ‘아이고,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서울은 너무나 조용했다. 한 도시의 저항의 끝은 당시 느껴지던 신군부의 태도로 보아 너무나 캄캄하기만 했다. 당시 생각에는 도저히 ‘잘됐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곧 수많은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반나절쯤 지나서 라디오와 TV로 공식 발표를 들었다. 물론 발표로는 희생자가 아직은 많지 않은 것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TV에서 문화방송이 밤에 불타던 모습을 자꾸 비추어주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TV에서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과의 대담’이라는 프로를 방영했다. 참으로 가관이었다. 허연 화장을 잔뜩 하고 나와서 우습지도 않은 너스레를 떨고는 히쭉히쭉 웃음을 날리는 모습이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미국으로 떠날 때는 ‘삼청교육대’, ‘언론통폐합’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난무했고, ‘유언비어 살포’ 등등에 대한 말도 나돌아 떠나는 내 모습이 너무나 매정하게 느껴졌다. 꽁꽁 얼어붙은 동토의 조국을 나 혼자 살기 위해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하던 때 사람들은 광주에 대한 이야기들을 꽤 많이 했지만 별로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언젠가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필자는 ‘깡패, 넝마주이’ 등의 이야기를 했다가 ‘수억이 형’에게 야단맞은 기억이 난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TV와 신문에서 광주에 대해 하던 이야기들, 말하자면 군부의 담론에 말려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아마 지금도 많은 국민들은 5·18에 대해 그때 귀가 따갑게 들었던 그 이야기에 묻혀 있을지 모른다.
아마 1985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 서울에서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어렵게 입수해왔다. 동네 친구들이 책 한 권을 돌아가며 모두 읽었다. 그 책을 처음 읽던 때를 잊을 수 없다. 손이 떨리고, 숨이 가빠왔다. 가끔씩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어야만 했다. 한참 동안 머릿속에 그려진 모습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5·18에 대해 뚜렷한 관념이나 역사적 의미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어쩌면 그 경험이 필자로 하여금 우리 정치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오랫동안 미루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해된 역사의 현장에 젊은 혈기로 서둘러 접근하기보다는 긴 지적 여행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너무나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뒤 시카고 시내에서 5·18 필름 상영회가 있었다. 극장이 꽉 찰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너무나 진지한 분위기였다. 필름이 상영되기 시작할 때부터 끝나고 집에 올 때까지 아무도 서로 대화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물론 그 필름은 대개 우리가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많이 본 그런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그때부터 5·18과 한국 정치에 대해 죄의식을 갖게 되었는지 모른다. 5·18은 분명 필자가 한국에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외지에 와서야 비로소 책과 영화로 단편적이나마 알게 되었다는 것은 깊은 충격이었다. 그때 영화에서 본 장면들, 거리의 모습, 뛰어다니는 시민들, 나팔바지에 더벅머리 청년들, 수많은 버스, 트럭, 택시들은 모두 바로 내가 살던 나라의 너무나 친숙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의 얼크러진 모습들을 만리타향 땅에서 처음 본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된 일이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이나 5·18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지 못했고 서서히 잊어버리는 과정에 있었다.
1989년에 귀국하여 1990년부터 모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단 한 번도 정치 문제 때문에 휴학이나 휴강을 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투쟁의 분위기가 꽤 남아 있었다. 운동권 노래들을 부를 때는 반동도 착착 맞았고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학생들의 분위기는 빠르게 변했다. 처음에는 운동권 분위기가 너무 경직되어 있어 학생들이 논문을 쓰는 과정 등에서 균형을 맞춰주느라 꽤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곧 문제는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학생들의 공부에 대한 정열이 전에 비해 많이 식어 있었다. 취직, 고시 등의 현실적인 문제에 매달려 그들은 젊은이로서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차라리 1990년대 초반까지 운동권 출신들의 논문을 지도하며 힘들어했던 때가 훨씬 보람 있었다.
그러던 중 1997년 필자는 한국정치학회 연구이사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는 고려대학교 최상용 교수께서 회장이셨고 절친한 친구들, 임혁백 교수, 이정희 교수 등이 같이 상임이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초에 상임이사회에 광주시청에서 오신 몇 분이 참석하셨다. 전 5·18 담당관 송태주 국장님, 전문위원 안종철 박사 등이었다. 광주시청에서는 5·18에 대한 학술회의를 지원하겠다는 것이었고 모든 일은 학회에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학자들은 모두 긴장했다. 5·18은 정치학자들에게는 제일 ‘무서운’ 사건이었다. 하지만 회장님 이하 모두 학자의 양심으로서는 도저히 5·18 연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모두에게 5·18은 이미 연구했어야 하는 사건이었고, 그간 오로지 우리가 비겁해서 오랫동안 피해왔던 문제였다. 학자의 양심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또 광주시청에서 오신 분들은 모두 시원시원하고 흔쾌한 분들이었고 서로 박자가 잘 맞아 논의는 쉽게 풀렸다. 5월 초에 프레스센터에서 회의를 갖기로 합의했다.
다음 문제는 누가 어떤 주제를 연구해서 발표할 것인가였다. 회장님 이하 모든 사람의 의견은 그간 5·18에 대해 글을 썼던 사람들은 매우 제한된 수였고 무언가 큰 진전이 있기 위해서는 새로운 학자들이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모두 동의했다. 그러자 참석했던 손호철 교수가 돌연 필자를 가리키며, “최 교수, 당신이 좀 해봐!” 하는 것이었다. 순간 모든 눈초리가 모아졌다. 눈앞이 아찔했다. 아직 한국 정치에 대해 단 한 줄도 써본 일이 없는 사람에게 청천벽력이었다. 그렇게 하소연하자 모든 사람들 이야기가 “바로 그래서 당신이 하는 게 좋겠어”라는 것이었다. 도망갈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 나보고 대표로 나가서 공수부대와 싸우라는 것인지 원망스럽기만 했다. 하여튼 어떻게 된 일인지 최상용 회장님과 손호철 교수, 두 사람의 주도에 의해 필자는 ‘덤터기’를 써야 했고 앞으로의 일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래도 손호철 교수는 당시 본인이 하고 싶었던 주제라며 ‘5·18의 담론분석’을 해보면 어떻겠는가 하고 제안했다. 당시 필자는 5·18에 대해서는 초보자 하수로서 경험자의 충고에 따르는 것이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 교수에게는 지금도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다.
당장 자료부터 준비하기 위해 다음날 손 교수 연구실에 들렀다. 가장 중요한 자료라며 처음 내게 준 책이 바로 그 무지막지한 《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이었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 읽었던 ‘황석영’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처음 5·18에 접근하며 느낀 것은 두 가지였다. 필자는 광주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물론 그곳 출신 친구들이 간혹 있었지만 그들 고향에 대해 별로 관심은 없었다. 광주 사람들을 만나고 광주에 내려가보면서 광주라는 고장은 필자에게 급격히 가까워졌다. 음식은 물론이고 사람들도 약간 거친 듯하면서도 개성이 강하고 적극적인 모습들이 부모님이 이북 출신인 나에게는 쉽게 다가왔다. 그런가 하면 5·18이라는 사건은 점점 더 커져갔고 무거워져갔다.
5·18은 우리가 사회과학에서 흔히 대하는 종류의 사건이 아니었다. 무언가 선사시대의 전설의 세계를 헤매는 것 같기도 했고, 그렇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사건이었다. 아직도 그날 싸웠던 전사들이 시퍼렇게 40세 전후로 살아 있는 바로 어제의 사건이었다. 그날의 대부분의 전사들은 몇몇 사람들을 빼고는 필자보다 어린 나이라는 사실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당시 시민군 총사령관인 박남선도 1954년생이니까 필자보다 한 살 아래인 처지다. 그 젊은이들이 싸웠던 모습은 역사를 시작했던 전설의 시대의 거인들이고, 사회과학자로서의 필자는 분명히 5·18이 열었던 새로운 시대의 자식임이 분명했다.
1997년 5월 초의 회의장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학술회의는 늘 심심치 않게 참석해왔지만 그런 청중은 평생 처음이며 앞으로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단상에 앉아보니 꽉 들어찬 각양각색의 청중들은―아마 1980년 5월 21일 도청 앞에 모인 30만 광주 시민, ‘민중’의 모습도 그랬을지 모른다―집중된, 진지한 눈초리로 단상을 바라보며 요지부동이었다. 화장실에 가는 사람도 없었고 로비에서 환담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5·18의 무게를 바로 그곳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참석했던 많은 사람들은, 광주에서 올라온 사람이나 서울에 살던 사람들이나, 5·18에 참전했던 용사들 또는 부상을 입고, 구속되어 고생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에 발표가 끝나고도 5·18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고 그에 대한 관심은 계속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5·18의 핵심으로 접근할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98년에 다시 한국사회학회 발표에 참석하게 되고부터는 ‘5·18 신드롬’이란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주변 친구들은 자기들끼리 ‘최 교수 만나면 5·18 얘기 시키지 마라, 끝이 안 난다’는 충고를 서로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필자는 1997년부터 ‘5·18 중독’ 내지는 ‘5·18 신드롬’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1980년 5월, 그 열흘의 열기는 그 근처에도 가보지 않았던, 자료나 읽고 있는 제삼자에게도 오싹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증세가 필자를 연구에만 몰두하게 하는 행복을 준 것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아직도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5·18 공포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필자의 눈에 너무나 선명하게 보인다. 동료 학자들을 만나 “요즈음 뭐 하며 지내냐?”는 질문에, “5·18 연구합니다” 하고 대답하면 십중팔구는 꼭 다시 쳐다보며 의아한 눈초리로 “건 또 왜? 웬일이야?” 하고 반문한다. 어떤 때는 길게 대답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귀찮아서 얼버무리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최 교수는 집안 고향이 그쪽인가?” 하고 물어보기도 한다. 사실 이런 질문들, 눈초리들을 몇 번 대하고 나면 ‘열 받치지’ 않을 수 없고 맥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경험들은 필자에게 5·18과 당사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소문에 둘러싸인 무인도’, 광주의 통한의 한 자락이 가슴을 스친다. 간혹은 연세가 높으신 분들 중에는 아직도 그야말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착오적 코멘트를 하는 경우도 있고 한참이나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다. 불편하다고 해서 5·18을 연구한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지만 분명히 뭔가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눈치는 일반적이다. 물론 호남 출신 학자들은 반가워하기도 하고 고마워하기도 한다. 어느 틈엔가 그들하고 ‘같은 편’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실 필자는 5·18 참가자도 아니고, 근처에서 배회하던 사람도 아닌 주제에 5·18에 대해 책을 쓴다는 것은 좀 멋쩍은 감이 없지 않은 게 또 현실이다. 아직도 체험자들 나이가 40밖에 안 되었는데 제삼자의 글이 무슨 큰 의미를 갖겠는가 하고 나름대로 체념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나 아직도 서울의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은 그런 눈으로 5·18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 필자를 괴롭게 만든다는 그 사실이 바로 필자가 5·18에 대해 글을 써야만 하겠다는 의무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1997년 초에 광주시청에서 정치학회에 학술회의를 요청한 바로 그 이유가 정확하게 타당한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지 한 해가 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면 우리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바뀌고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쉽게 변하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지금 생각해보면 확실히 정치가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학자들에게 수많은 연구 자금을 제공한다 해도 결코 문제는 쉽지 않다. 연구 자금 덕에 나오는 연구 업적이 학계나 지성계에서 갖는 위치로는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 우리의 정치가 우리의 역사, 특히 정치사의 올바른 이해에 근거하여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치라는 권력의 장 밑에서 학술과 지성의 활동이 건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학자가 아주 최근의 사건을 다루는 경우에도 결코 정치인들의 심부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우리 사회에는 분명히 있고 그것은 정치가들이나 활동가들이 딛고 춤을 출 수 있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마루를 까는 일이다. 역사적 현실이 학자들에 의해 확보되지 못한다면 정치가들은 날아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에도 수많은 우리 사회과학자들은 5·18은 운동권이나 다루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또 그들은 누구나 5·18을 연구하면 멀쩡한 사람이 운동권으로 ‘휙-!’ 돌아버릴지 모른다고 5·18을 무슨 ‘메두사의 대가리’처럼 생각하고 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현실만을 보고, 과격한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종류의 현실만을 본다. 그래야 그 이념이 유지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고방식이다. 이런 생각은 보수적인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라는 사람들도 유사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 진보가 되려면 노동 문제나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우선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은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모든 문제를 대면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며 어떤 특정한 문제들을 외면한다면 그 이념이나 사상은 스스로 위선임을 자백하는 것이다.
5·18에 대해 책을 쓴다는 것은 필자 개인에게 큰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정치학자로서 당연한 관심이다. 나아가서 그간 개인적으로 사건 이후 10여 년간 그 어마어마한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학자연하고 살아왔다는 것은 개인적인 수치였고 이제 그 수치를 약간 만회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5·18은 밖에서 얼핏 보았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사건이며 이 사건을 연구함으로써 많은 새로운 이론적인 업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5·18은 사건으로서 엄청난 사회과학 이론적 함의를 갖고 있다. 이 ‘금광’을 이제 바로 우리 앞에서 찾았다는 것은 부끄럽지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글의 첫 번째 목적은 5·18이라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치학, 나아가서 사회과학의 이론적인 소재로서 5·18을 다루어보고자 함이다.
개인적으로 또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5·18 신드롬’을 치료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1997년에 시작한 이래 5·18은 필자의 머리 꼭대기에 자리 잡고 떠나지 않아 다른 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부끄럽지만 배짱으로 책이라도 하나 내고 나면 나름대로 머릿속이 정리도 되고 5·18로부터 당분간이라도 자유로워질 여유가 생길지 모른다는 바람도 있다. 결국은 양심의 문제로 종합될 수 있을지 모른다. 현대 한국 사회, 198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는 5·18과 5·18의 신화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로빈슨 크루소는 외딴 무인도에서 서양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마찬가지로 외딴 섬 나라 ‘광주’는 우리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이 변화의 원인과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대 한국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책은 5·18에 대해 전혀 모르던 사람들에게 그 사건을 알려주기 위한 책은 아니다. 적어도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정도는 읽고 개요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쓴 책이다. 즉 이 책은 사건을 이론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나아가서 이 책은 5·18의 많은 부분들을 다 다루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광주 주변 지역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양민학살 사건들은 다룰 수 있는 여유를 찾지 못했고, 광주 외 지역에서의 저항 운동도 거의 다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이론적인 재구성을 위해 큰 줄거리 위주로 논의를 진행시키다보니 주변의 수많은 사건들은 희생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필자가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사실 크게 보아서 작은 사건들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피와 눈물이 얽혀 있으며, 사건 하나하나의 위치는 5·18이라는 큰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독자적으로 모두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부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모두 하나씩 제대로 조명하리라고 마음먹고 있다.
이 책은 종전의 5·18에 대한 많은 증언록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쓰여졌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아직 우리는 5·18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도 규명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사망자 숫자만 해도 현재의 공식적인 숫자를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나아가서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가 등의 사실들은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공식적 직함을 가진 학자가 이 사건에 대해 책을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 역사학적 역사 비판은 무언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관청의 문서가 가장 타당한 증거이며, 학자라면 우선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역사학에 속은 역사가의 생각일 뿐이다. 문서란 의도적으로 역사의 행위자들이 역사가들에게 읽을 것을 강요하고 유인한 인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히 그들이 정직했다면 별 문제겠지만 그들이 정직하지 않았다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문서의 신빙성을 판별할 수 있는 경우에도 문제는 없지 않다. 늘 문서에 기록되지 않은 사실들은 기록된 사실들보다 훨씬 많다. 이 경우 기록된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기록된 사실부터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 또한 문제가 없지 않다. 엄청난 양의 문서가 존재하는 경우 그 문서들을 다 읽고 나면 흰머리가 성성할 것이며 기록되지 않은 사실로 접근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야 가능할 것이다. 5·18에 관하여 군부의 비밀문서가 존재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거의 모두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당시 핵심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언젠가 사실을 고백할지 무덤에까지 갖고 갈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학자가 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간 우리는 진상규명을 부르짖으며 ‘사실’들에 매달려왔다. 그러한 사실들이란 주로 제삼자가 밖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200명 죽었다’, ‘2,000명 죽었다’ 등의 이야기는, 사실 ‘one little Indian, two little Indian……’처럼 밖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14시 30분, 금남로에 시위대 3,000, 제봉로에 1,500……’ 등의 경우는 높은 곳에서, 헬리콥터에서 본 모습을 말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선 시위를 진압하려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일 것이다. 그리고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가?’에 대한 답은 그 사람을 법정에 세워 사형 언도를 받아내는 데 필요한 사실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역사적 ‘사실’이라고 흔히 부르는 것은 대부분 ‘남’의 사실이지, 우리 자신들의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비록 아직 정확한 사망자의 숫자도 알려져 있지 않은 처지지만 그러한 숫자 말고도 우리에게는 분석해야 할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 말하자면 이미 5·18 진상의 95% 이상은 시민들의 증언을 통해 다 드러난 것이 현실이며 군부의 핵심 자료가 없다고 해서 연구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어불성설일 것이다.
이 책의 첫 부분은 이른바 ‘담론 분석’으로 1997년 5월에 발표한 글을 약간 보강한 것이다. 담론 분석이란 쉽게 말하면 그간 5·18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언어들이 만들어지고 오고 갔는가를 조망하는 것이다. ‘담론’이라고 할 때는 말을 일단 현실과 분리해서 보는 것을 뜻한다. 현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말이란 누군가 현실의 어떤 부분을 강조하고 싶어 하고, 어떤 부분을 가리고 싶어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일부를 왜곡하려 하기도 하고 또 전혀 다른 현실을 만들기도 한다. 언어를 그런 각도에서, 현실과의 관계의 여러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분석하는 것을 ‘담론 분석’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 첫 부분에서는 5·18에 대해 시기별로 군부와 광주 시민들 간에 5·18에 대해 무어라고 서로 말하고 있었고 이들은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었는가를 분석한다. 담론 분석은 직접 폭력이 행사되는 현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사상 또는 문화의 수준에 대한 분석이라 할 수 있다.
다음 두 부분, 5·18의 투쟁 시기에 대한 부분과 해방광주에 대한 부분은 직접 현실에 대한 분석이다. 첫 부분, 절대공동체에 대한 글은 1998년에 발표한 글을 약간 보강한 것이며, 해방광주에 대한 글부터는 1999년에 쓴 글이다. 담론 분석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현실로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 뒤에 놓은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도, 적어도 학자가 자료를 통해 접근하는 현실도 증언이라는 형식의 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제는 당시에 공식적으로 제기되던 담론의 층위는―흡사 구름층과 같은―현실과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연후에야 어디가 구름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별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야 정확히 현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 대한 분석은 최대한 증언과 확인된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은 외관으로서의 사실을 지나 시민들이 겪었던 내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사실’로 사건에 접근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증언을 통해 시민들이 당시 가졌던 생각, 감정 상태 등을 감정이입을 통해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만이 우리의 경험, 우리의 사건으로서의 5·18의 참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5·18의 경험은, 많은 인간의 경험이 그렇듯이, 충분히 언어화되지 못한 부분들이 남아 있다고 가정하고 접근해야 한다. 경험이란 원초적으로는 느낌이며 어떤 느낌은 쉽게 언어로 이름 붙여지고 설명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들도 있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다’라는 경험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언어화시키는 훈련을 통해 느끼는 경험이다. 그러나 ‘배가 뜨끔뜨끔하다’, ‘배가 살살 아프다’ 등의 말은 그 경험에 아직도 말로 정확히 표현되지 않은 어떤 감각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5·18과 같이 시민들이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 섬뜩함, 환희 등을 겪은 경우는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겪은 감정 변화 등을 추적하여 섬세하게 증언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증언자들은 그냥 지나쳐버린 경우도 많다. 또 내적 경험에 대한 증언은 결코 어떤 경우에도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해야 하며 많은 경우 연구자는 스스로 그 입장에 들어가 함께 느끼는 시도를 통해서만 접근 가능할 수도 있다.
이러한 내적 경험으로 사건에 접근하는 방법을 흔히 베버(Max Weber)적인 이해(verstehen)하기 위한 사회과학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베버가 발명한 특이한 방법론이라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우리가 역사적 사건이나 어떤 역사적 시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흔히 사용하는 ‘생각하는 방법’을 베버가 재구성하여 정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방법론은 실증주의 사회과학에서 사용하는 방법론과는 대조적인 것이며 따라서 베버의 글 어디를 보아도 모두 실제로 해보기 전에는 알쏭달쏭한 말들뿐이며 그대로 따라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침은 없다. 다만 분석자와 분석 대상은 서로가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지성적 인간이라는 인간성의 이해 가능성의 끈을 놓고 추적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방법론은 확실성의 보장도 없고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다는 문제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을 물질적 이해관계로 판단하고 외부에서 관찰한 모습으로만 이해하려는 유물론적 방법론이나 행태론적 방법론보다는 이러한 내면을 추적하는 사회과학만이 인간과 인간의 역사에 대하여 몇 백 배 깊이 있는 이해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5·18이라는 사건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피해의 규모 문제 외에 특이한 차원이 있다. 필자도 서두에서 되풀이했지만 5·18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되돌아보게 한다. 5·18은 우리 역사에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다시 시작하게 만든 사건이며, 아울러 우리 모두에게 각자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단적으로 5·18은 구조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구조를 만든 사건이었고 모든 인간적 사회적 요인들을 다시 배열시킨 사건이었다. 5·18은 우리의 몸에서 출발하여 영혼을 일깨운 사건이었다.
이 글을 쓰는 데는 물론 필자의 상당한 양의 노동이 투여되었지만 주변 여러 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우선 최상용 교수님의 적극적인 지원과 격려가 없었더라면 필자의 5·18 연구는 감히 시작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필자에게 이 연구를 강요했던 손호철 교수는 당시에는 미웠지만 돌이켜보면 필자에게 너무나 큰 힘을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광주에 가끔 들를 때마다 실제로 자료 공급 외에도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광주광역시청의 전 5·18 담당관 송태주 국장님, 안종철 박사님, 김병수 전문위원님 외에 수많은 직원 여러분들의 도움은 필자에서 큰 힘과 채찍이 되었다. 그리고 바쁜 시간에도 직접 증언과 대담에 응해주셨던 당시 5·18 용사들, 양동남 씨, 김태찬 씨, 이재의 씨, 전용호 씨, 나의갑 씨, 이광영 씨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꽤 많은 자료를 읽었다고는 하지만 이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지 못했다면 아마 감히 5·18에 대해 글을 쓸 엄두를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1992년에 필자가 《지식국가론》을 출판했을 때 학교에 같이 계시는 하영선 교수님이 “다음에는 ’무식국가론‘을 내면 어떨까” 하는 충고를 하셨는데, 이를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5·18은 몸과 몸의 부딪침이었으니 이 책은 가히 ‘무식국가론’에 방불할 것이다. 그러나 5·18의 출발은 그랬는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진정한 지성과 문화를 출범시킨 사건이었기에 제목이나 부제로 그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 교수님은 이 충격적인 예언뿐만 아니라 가끔씩 5·18에 대한 필자의 지겨운 이야기를 가장 끈질기게 들어주시고 코멘트와 더불어 늘 질문과 추임새도 곁들여주신 분이었다. 하 교수님께는 특별한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그 외에도 주변에 수많은 동료, 친구, 선후배들의 귀중한 조언들은 연구 과정에서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황태연, 강정인, 김주성, 장현근, 장인성, 김영호, 김용직, 신욱희, 정해구, 김창진 교수님들의 인내와 관심에 경의를 표한다.
최정운
1장 침묵의 역사
5·18 담론의 가장 큰 부분은 침묵
5·18은 가히 세계사에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그토록 엄청난 규모의 잔학한 폭력이 국민들에게 백주에 도심에서 가해졌다는 점에서 우선 그러하며 더욱이 불과 인구 80만 명의 도시에서 무려 3개 여단 3,000명에 가까운 국군 최정예 공수특전단을 시민들이 싸워 한때 물리쳤다는 점에서 또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이라 할 것이다. 사상자 면에서 5·18은 일방적인 시민 학살이었지만 반면 그곳에는 온 시민이 피와 눈물 등 한마음으로 융화된 공동체가 있었고, 한때 승리의 환호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자기 고장과 그들의 가치를 위해 초연히 죽음을 선택한 수많은 ‘칼레의 시민’(14세기 영국과 프랑스가 싸운 백년전쟁 때 프랑스의 칼레 시를 구한 영웅적 시민)들이 있었다. 5·18은 데이터로 나타나는 사건의 규모로 보나 그 안의 모든 사람들의 경험의 깊이로 보나 우리 현대사의 최대 사건이며 오늘 우리에게 느껴지는 그 결과와 의미 또한 가늠하기 어려운 무게를 갖는다.
이 모든 5·18의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간 5·18 담론의 가장 큰 부분은 침묵이었다. 5·18은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기에 감히 우리의 세치 혀로, 간사스런 붓 끝으로 담아낼 수 없고 담아내려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침묵은 여러 방면에서 부과되었다. 사건 초부터 군사정권은 철저히 보도를 통제했고, 보도가 시작된 후에도 여러 수단을 동원하여 공식적 발표 외에는 침묵을 강요했다. 군사정권은 1980년 6월, 5·18을 일방적으로 규정한 후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모든 5·18 유관 단체들과 관계자들에게 아무 말도 못하도록 탄압했다. 5·18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학생운동권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였고 정치적 분위기가 바뀐 1985년 총선 이후 그리고 무엇보다 그해 5월 서울 미문화원 점거 사태 이후의 일이었다. 1987년의 6월 항쟁을 거쳐 1988년, 89년 국회 청문회에서 비로소 진상의 일부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5·18의 진상이 모두 밝혀졌다고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른 지역에는 보다 복합적인 침묵이 드리워져 있었다. 초기에는 5·18에 대하여 군사정권의 통제로 그들이 발표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정보도 접할 수 없었고 그들의 독점적 언술의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며 입과 입을 통해 5·18의 진상이 전해졌을 때 타 지역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그 내용은 차마 입에 담기 힘든, 가족이나 친구에게 쉽게 전할 수 없는 엽기적인 것이었다. 5·18은 오랫동안 ‘유언비어(流蜚通信)’의 주제였다. 이윽고 국회 청문회에서 많은 실제 경험들이 전해지자 대부분 사람들은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개했다. 그러나 5·18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며 동시에 진행된 ‘재야(在野)’와 학생운동권 그리고 노동운동의 확산과 그들 언어의 과격화의 흐름에서 5·18에 대한 이야기 자체는 운동권의 독점물이 되고 우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타 지역 중산층들이 결코 군사정권을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 스스로 5·18 증언을 듣고 분개한 경험에 비추어 5·18에 대한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과격하게 만들고 사회를 불안하게 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나아가서 5·18의 승리의 순간, 예를 들어 TV에서 보아온 차량시위의 장관이나 MBC 방송국이 불타던 모습들은 타 지역 중산층에게는 불안한 경이(驚異)였다. ‘민중’은 새로운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민중은 가끔 소란을 일으키지만 5·18에서 그들은 무장(武裝)했고 그리고 국군 최정예 공수부대를 물리쳤다는 사실에서 민중의 새로운 힘은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서구 선진국의 중산층도 나름대로 ‘군중’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었고 이 공포는 민주화와 사회 개혁의 동기로 작용했다. 광주 시민들이 5·18에서 동질적 민족공동체를 경험했다면, 타 지역 사람들은 5·18을 통해 민족을 이질적으로 보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1987년의 민주화에서 민중에 대한 공포는 큰 역할을 했고 따라서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는 광주의 피를 대가로 이루어졌다. 타 지역 사람들은 5·18의 함성과 민주화에 동의하고 그 시절 광주 시민들과 공감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5·18에 대한 피상적 이해로 민중과 호남 사람들을 불편한 마음으로 보아왔다. 현재 우리 정치에서 차라리 민중에 대한 공포는 호남 사람들의 단합에 대한 공포와 경이에 비해 무해(無害)할지 모른다. 5·18 이후 호남 지역의 철저한 집단 투표, 그리고 사석에서 농담 반으로 들은 ‘전라민국’, ‘전남공화국’ 얘기는 타 지역 사람들을 은연중에 압박해왔다. 5·18에 관한 한 타 지역 사람들은 아직도 ‘두 마음’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광주사태와 5·18민주화운동
침묵은 광주를 탄압하고 방조한 사람들만의 몫은 아니다. 군사정부의 탄압은 차제하고 5·18 당사자나 목격자 치고 언어의 좌절을 맛보지 않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광주 시민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습에 ‘이게 꿈이냐 생시냐’며 서로 껴안고 치를 떨며 울부짖었다. 그들의 경험은 너무나 엄청나서 말하려 하면 가슴의 응어리에 숨이 막히고, 담배 몇 대를 피워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난감했을 것이다. 어렵사리 꺼내고 나면 그 말은 너무나 싱거워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용기를 내어 증언했지만 그들이 겪은 현실에 비해 언어는 너무나 싱겁고 왜소했으리라. 말은 초라한 배신자로 전락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건을 규정하는 폭력적 언어 앞에 5·18의 경험은 찌그러지고 마는 것이 5·18 담론의 현실이다. 아직도 광주와 5·18은 고독과 침묵에 싸여 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의 시간은 이전의 시간과 다르고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과도 다르다고 보여졌고 이 시대 구분은 군부나 광주 시민이나 모두에게 공통적이다. 그 시대를 일컫는 말은 다양하게 제기되어 아직도 갈등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에서 대부분 학자들은 그 시대를 ‘5·18’이라는 발가벗은 달력의 숫자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5·18’이라는 중립적 이름이 최근에 처음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1980년 5월 22일 해방광주에서 처음 만들어진 공식 조직은 ‘5·18수습대책위원회’였다. 이 수습위원들은 18일부터의 시간은 우연히 찾아온 시간이며 총을 모두 거두어 계엄군에게 반납하면 마치 없었던 일로 ‘물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건을 중립적으로 일컫는 것도 이미 하나의 입장일 수밖에 없다. 그 밖에 주로 많이 쓰인 이름은 ‘광주사태’, ‘광주시민의거’, ‘광주민중항쟁’, ‘광주학살’, ‘광주민중혁명’, ‘5·18민주화운동’, ‘5·18민중항쟁’ 등이 있으며 이 말들은 각각 고집스레 독특하게 그 시대를 규정해왔다.
‘민화위’가 활동을 시작한 이래 지난 10여 년간 정부는 공식적으로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해왔고 정부를 따르지 않는 또는 보수적이 아닌 사람들은 주로 ‘민중항쟁’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전자는 ‘6공’ 이후 정부는 자신이 5·18의 적자(嫡子)이며 5·18 또한 기존 정부의 이념에 따라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정치적 입장을 담고 있다. 후자는 비교적 시대의 현실감을 살린 서술적 이름이라 볼 수 있다. 1980년대에 등장한 ‘민중’이라는 말은 민주화운동의 연합 세력으로의 의미와 5·18 투사들의 계급적 성격을 동시에 내포한다. ‘광주사태’라는 말은 1980년 5월 21일 석간 《동아일보》에서 처음 사용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호남 이외 지역의 일상 대화에서 그 사건을 일컫는 가장 보편적인 말로 쓰이고 있다. 이렇듯 용어가 다양하게 제기되고 갈등해온 것은 5·18이 4·19나 5·16에 비해 대단히 복잡한 경험이며 한 가지 말로 규정하기 힘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1980년 5월의 그 열흘은 누구에게나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석의 다양성은 아직 5·18을 둘러싼 침묵의 벽을 깨지 못했다. 군사정권의 담론 기제들 특히 ‘유언비어론’은 아직도 작동하며 세인의 입을 막고 있고, ‘진보적’ 정치 집단들도 나름대로 도그마를 만들어 자신들의 담론의 골을 지켜왔다. 오늘에도 5·18은 결코 아무나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제시된 여러 해석들에는 상충되는 면들이 있었지만 논쟁이 제기된 적은 별로 없었다. 한편으로 5·18 해석은 말의 다툼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폭력이나 권력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일이었고, 다른 한편 군사정권 외의 여러 입장들은 민주화 투쟁의 전우로서 언쟁을 피해왔다.
이 글은 5·18에 대해 그간 제기되어왔던 여러 담론들을 분석하여 어떻게 구조되어왔는가를 밝히고 사건 자체의 다양성과 깊이를 배경으로 담론들의 한계를 드러내어 5·18에 관한 논쟁의 판을 벌이고자 함이다. 5·18의 여러 규정적 해석들은 그간 정치적 언술과 이념으로 제시되어왔고 그 와중에 사건 자체는 왜곡되어왔다.
5·18이 순수한 정신이 되기 위해서는 망자들은 이제 하늘로 떠나보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젠 고집스런 산 자들끼리의 말이 아니라 망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들이 죽은 이유와 하늘로 떠나야 하는 이유를 서로 말해주어야 할 것이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입으로 말하여 시신을 다시 찢어놓을 것이 아니라 산 자는 산 자의 입으로 말하고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입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산 자와 죽은 자의 입을 가르고 대화하도록 하는 일에는 학문과 굿이 다를 바가 없다. 그간의 세월은 한 사건을 역사로 묻기에는 너무 짧은 세월이며 5·18에 대한 연구는 아직 과학적 엄밀성을 기하기에는 이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후일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지금, 아직 기억이 생생할 때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5·18에 관한 한 ‘세월이 약’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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