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관주의자 vs 낙천주의자
이 책의 저자 매트 리들리에 따르면 우리는 더 이상 지구온난화에 대해서, 유전자변형농작물(GMO)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책 곳곳에서 이 ‘이성적 낙관주의자’가 풀어놓은 낙관의 증거를 만날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그의 낙관은 인간의 특이성에 근거한 셈인데, 그 특이성의 실체는 다름 아닌 ‘과학기술’ 문명입니다. 그의 비전이 400여 년 전 그와 같은 땅에 살았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뉴 아틀란티스’를 닮은 까닭입니다.
리들리의 낙관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어로 번역 출간된 마크 보일의 『돈 한푼 안 쓰고 1년 살기』는 마치 『이성적 낙관주의자』라는 책의 반대토론 패널 같습니다. 영국 남서부에서 꼬박 1년간 ‘돈 한푼 안 쓰고 살기’를 성공적으로 실험한 보일은 이를테면 ‘낙천주의자’입니다. 보일은 인류 미래의 비전을 어둡게 보지만 특유의 낙천적 힘을 발휘, 몸소 체험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보일의 유토피아냐, 리들리의 유토피아냐”라는 양자택일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두 책은 우리가 잃어버린 질문을 환기합니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가?” - 편집자
내 책상 위에는 크기와 형태가 비슷한 인공물이 두 개 놓여 있다. 하나는 컴퓨터용 무선 마우스고, 다른 하나는 약 50만 년 전 중석기시대의 주먹도끼다. 둘 다 인간의 손에 맞도록 디자인됐다. 인간에 의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제약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양자는 크게 다르다. 전자는 많은 재료를 사용해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내부 디자인도 복잡하다. 다양한 계통의 지식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후자는 한 가지 재료에 단 한 명의 솜씨가 반영되었다. 양자의 차이는 오늘날 인간의 경험이 50만 년 전과 비교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인간 사회의 빠르고 지속적이며 중단 없는 변화를 다루고 있다. 다른 동물들의 사회는 이런 식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생물학자에게 이것은 설명이 필요한 현상이다. 지난 20년간 나는 네 권의 책을 썼다. 인류가 다른 동물들과 얼마나 비슷한지를 다루는 내용이었다. 이번 책은 인류가 여타 동물들과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다룰 것이다.
인간의 생활방식은 떠들썩하고도 지속적으로 바뀌어왔다. 인간에게 어떤 점이 있어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인간의 본성이 바뀌기라도 한 것일까? 주먹도끼를 잡았던 손은 오늘날 마우스를 쥐는 손과 똑같이 생겼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먹을거리를 찾고, 섹스를 갈망하며, 자손을 돌보고, 지위를 얻기 위해 경쟁하며, 고통을 기피한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인간종에 고유한 많은 특징 역시 그대로 남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깊숙한 오지로 여행을 간다 해도 당신은 예상할 수 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노래, 웃음, 연설, 성적 질투심, 유머감각과 마주치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이중 어떤 특징도 침팬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셰익스피어, 호메로스, 공자, 부처를 만난다 해도 당신은 그들의 동기에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32,000년 전 프랑스 쇼베 동굴에 코뿔소를 그린 사람을 생각해보자. 만일 만날 수 있다면, 그가 심리적으로 모든 면에서 지금의 우리와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는 물론 변화하지 않는 부분이 대단히 많다. 하지만 3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의 삶이 똑같다고 한다면 어리석은 소리가 될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우리 종의 구성원은 약 300만 명에서 거의 70억 명으로, 수천 배 늘어났다.
인류는 여타 종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이기利器와 사치품을 스스로에게 제공했다. 지구상에서 거주 가능한 모든 지역에서 살고, 거주 불가능한 거의 모든 지역을 조사했다. 세계의 외관과 유전학과 화학을 바꿔놓았으며, 모든 지상식물 소출의 약 23퍼센트를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차지했다. 인류는 기술이라 불리는, 독특하고 작위적인 원자의 배열로 자기 주위를 둘러싸버렸다. 그리고 거의 지속적으로 기술을 발명하고, 재발명하고, 버린다.
다른 동물에게는 이런 일이 없다. 침팬지나 병코돌고래, 앵무새나 문어처럼 지능이 높은 종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들도 때로 도구를 사용하고 가끔 생태적 지위를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거나 경제 성장을 누리는 일은 없다. 빈곤해지는 일 역시 없다. 생활양식이 진보하는 일도 없고 이를 개탄하는 일도 없다. 농업, 도시, 상업, 산업, 정보 혁명도 없다. 르네상스나 종교개혁, 대공황, 내란, 내전, 냉전, 문화전쟁, 신용 붕괴는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내가 앉은 책상 주위에 있는 전화, 책, 컴퓨터, 사진, 클립, 커피잔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원숭이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다. 디지털 정보를 화면에 띄우는 것은 어떤 병코돌고래도 꿈꿀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날짜, 일기예보, 열역학 제2법칙 등의 추상적인 개념을 알고 있다. 어떤 앵무새도 근접하지 못할 지식이다. 나는 정말로 다르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별난 존재로 만드는가?
다른 동물들보다 뇌가 크다는 것만으로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은 평균 뇌 용량이 나보다 컸지만 이처럼 급속한 문화적 변화를 겪지 않았다. 더구나 내 뇌가 다른 동물종들보다 크기는 하지만, 나는 커피잔이나 클립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일기예보는 고사하고 말이다.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Daniel Gilbert가 좋아하는 농담을 보자. 모든 전문직업인은 자신의 경력 중 어느 시기에 다음 문장의 빈칸을 채워넣을 의무가 있다.
“인간은 _______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에게만 있는 특징으로 제시되는 목록은 정말 길다. 언어, 인지적 추론, 불, 익히는 요리, 도구 제작, 자의식, 사기, 모방, 예술, 종교, 다른 손가락과 마주볼 수 있는 엄지손가락, 쏘는 무기, 직립, 조부모의 손자 돌보기… 하지만 그러기로 한다면야 땅돼지나 하늘다람쥐도 엄청나게 긴 목록을 작성할 수 있는 독자적인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모든 특징은 정말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특징들이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원인ape-man, 猿人이 한없이 팽창하는 혁신적인 개혁가로 급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 위에서 열거한 인간의 모든 특징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같은 변화를 설명하기에는 특징이 나타난 시기가 맞지 않거나, 역사상 꼭 맞는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고 나는 주장하려 한다. 여기서 언어는 예외일 가능성도 있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특징은 역사상 출현 시기가 너무 일러서 내가 말하는 생태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보디페인팅을 하고 싶어 하거나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을 추론할 정도로 의식수준이 높은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생태적인 세계 정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인간이 현대 기술문명의 생활방식에 적응하는 데 큰 뇌와 언어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인간이 사회적 학습에 매우 능한 것도 분명하다. 심지어 침팬지와 비교해도 우리는 충실하게 모방하는 데 거의 강박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큰 뇌와 모방과 언어는 그 자체만으로는 번영과 진보와 빈곤을 설명할 수 없다. 이들 자체가 생활수준의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한다. 네안데르탈인도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큰 뇌와 (아마도 복잡한) 언어, 다양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존의 생태적 지위에서 뛰쳐 나오지 못했다.
우리 종의 예외적인 변화 능력을 설명하려면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의 머릿속을 들여다봐서는 소용이 없다. 뇌 속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뇌와 뇌 사이에서 무언가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집단적 현상이었다.
주먹도끼와 마우스를 다시 한 번 보라. 둘 다 사람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전자는 한 명이, 후자는 수백 명 어쩌면 수백만 명이 만들었다. 내가 말하는‘집단지능’이란 바로 이런 뜻을 담고 있다. 개인으로서 컴퓨터 마우스 제조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장에서 마우스를 조립한 직원은 유정油井을 굴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플라스틱은 석유를 원료로 만든다). 그것을 아는 사람 역시 마우스 조립 방법은 모른다.
어느 시점에선가 인류의 지능은 집단적이고 누적적인 성질을 갖게 되었다. 다른 어떤 동물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말이다.
정신의 짝짓기
변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문화다. 이것이 나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내가 진화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류는 폭발적인 진화적 변이를 겪고 있다. 이를 일으키는 것은 고풍스럽고 훌륭한 다윈주의적 자연선택이다. 다만, 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은 유전자들이 아니라 아이디어들 사이에서다. 아이디어의 거주지는 인간의 뇌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과학에서는 이와 같은 인식이 출현할 조짐이 오랫동안 있어 왔다. 프랑스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는 1888년 이렇게 썼다. “하나의 발명이 모방을 통해 조용히 퍼져나가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이를 사회의 진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1960년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 진화의 결정적인 요소는 ‘성공적인 제도와 습성을 모방하는 것에 의한 선택’이다.”
1976년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는 문화적 모방의 단위를 뜻하는 ‘밈meme’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경제학자 리처드 넬슨Richard Nelson은 1980년대에 경제 전체가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한다고 설명했다.
내가 ‘문화가 진화한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10만 년 전의 어느 시점에 문화 자체가 다른 종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문화에 복제와 돌연변이, 경쟁과 자연선택, 변이의 축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유전자들이 수십억 년 동안 해온 일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말이다. 눈이 자연선택에 의해 누적적으로 한 단계씩 생겨나듯, 인류의 문화적 진화도 계속 누적돼서 ‘하나의 문화’나 ‘한 대의 카메라’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침팬지는 끝을 날카롭게 만든 막대기로 갈라고원숭이를 찌르는 방법을 서로 가르쳐줄 수 있다. 범고래도 해변에 있는 바다사자를 물어채는 방법을 서로 가르쳐줄 수 있다. 하지만 개체가 아니라 집단의 문화를 누적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빵 한 덩어리나 협주곡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누적된 문화의 힘이다.
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째서 그런가? 왜 범고래는 못하고 우리만 할 수 있는 걸까? “인간은 문화적으로 진화한다”고 말해봤자, 이는 독창적이지도 않고 설명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하필 인류만이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모방과 학습은 아무리 정교하고 풍부하게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인류에게만 있고 범고래에게는 없는 그 무엇 말이다. 그 답은 다음과 같다고 나는 믿는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에 아이디어들이 만나 서로 짝을 짓고 섹스를 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설명을 해보겠다. 생물학적 진화를 누적시키는 것이 바로 섹스다. 각기 다른 개체의 유전자들을 한데 합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개체에서 일어난 돌연변이가 다른 개체에서 일어난 돌연변이와 힘을 합칠 수 있게 된다.
이는 박테리아의 경우에 비유하면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박테리아는 자기복제를 하지 않는 순간에도 유전자 교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다른 종의 박테리아로부터 항생제에 대한 면역성을 얻는다.
미생물들이 20억~30억 년 전에 유전자 교환을 시작하고 동물들이 섹스를 통해 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눈을 만드는 모든 유전자가 한 동물의 몸에 모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다리나 신경이나 뇌를 만드는 유전자들도 모두 마찬가지다. 각각의 돌연변이는 해당 혈통에만 고립된 채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라. 어느 물고기는 발생 단계의 폐를 진화시키는 중이고 다른 물고기는 사지를 진화시키는 중이지만, 어느 쪽도 뭍으로 올라가지는 못하는 상황 말이다.
진화는 섹스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속도는 엄청나게 더딜 것이다.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문화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의 습성을 배우는 것으로만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곧 정체될 것이다. 누적적인 성격을 갖기 위해서는 아이디어들이 서로 만나 짝을 지을 필요가 있다. ‘아이디어의 타가수정cross-fertilization of ideas’이라는 표현은 케케묵은 것이지만, 무심결에 상상력을 담은 표현이기도 하다. “창조한다는 것은 재조합하는 것”이라고 분자생물학자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가 말하지 않았던가.
상상해보라. 철로를 발명한 사람과 기관차를 발명한 사람이 심지어 제삼자를 통해서도 접촉할 방법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종이와 인쇄기, 인터넷과 휴대전화, 석탄과 터빈엔진, 청동의 재료인 주석과 구리, 바퀴와 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려 한다. 선사시대의 어느 시점에 뇌가 크고 문화적이며 학습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서로 물건을 교환하기 시작했다고. 일단 교환을 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문화가 누적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경제적 진보라는 위대한 실험이 급속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교환이 문화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은 섹스가 생물의 진화에 미치는 영향과 같다. 교환함으로써 인간은 ‘노동의 분업’을 발견했다. 즉, 쌍방의 이익을 위해 노력과 재능을 특화할 수 있게 되었다.
만일 어떤 영장류학자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관찰한다면, 이와 같은 분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로 비칠 것이다. 그 종의 생태나 위계질서, 미신에 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일부 원인猿人이 식량이나 도구를 다른 이들과 교환한 결과, 각자 더 잘살 수 있게 되었고 서로가 자신들의 분야를 전문화할 수 있게 되었다.
전문화는 혁신을 촉진했다. 도구 제작용 도구를 만드는 데 시간을 투자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시간이 절약됐다. 번영이란 바로 시간 절약을 말하며 이는 분업의 정도에 비례한다. 사람들은 소비자로서 다양화할수록, 생산자로서 특화할수록, 그리고 서로 교환할수록 더 잘살 수 있다. 과거에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좋은 소식은 이 과정에 불가피한 ‘막장’ 같은 것이 없다는 점이다. 세계 전역의 사람들이 분업을 더 많이 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전문화하고 교환할 수 있으며 우리는 더 부유해질 것이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경제 붕괴, 인구 폭발, 기후 변화, 테러리즘, 빈곤, 에이즈, 경기 침체, 비만 등의 문제 말이다. 물론 해결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가능하고 정말로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이 출간되고 한 세기 후인 2110년이 되면 인류는 오늘날에 비해 엄청나게 잘살고 있을 것이고, 생태환경도 같은 정도로 좋아질 것이다. 이 책은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성적인 낙관주의를 갖고, 그럼으로써 인류의 복지를 증진하고 인류가 살아가는 세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감히 제안하는 것이다.
내 주장이 1776년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했던 말의 단순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스미스의 통찰력에 도전, 수정, 강화가 필요한 많은 일이 일어났다. 뿐만 아니다. 예컨대 그는 자신의 시대가 산업혁명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나는 개인으로서 스미스의 천재성에 필적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엄청나게 유리한 것이 하나 있다. 그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스미스의 통찰력도 그의 시대 이후 다른 통찰력들과 짝짓기를 해왔다.
더구나 내가 점점 더 놀라게 되는 사실이 있다. 문화가 야단법석을 떨며 변화한다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 세상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게 되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덜 의존하게 되었다거나, 자신이 좀 더 자급자족을 하면 더 잘살게 된다거나, 기술적 진보는 생활수준을 전혀 개선하지 못했다거나, 세상이 점점 나빠진다거나, 물건과 아이디어를 서로 교환하는 것은 쓸데없는 과잉이고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말이다.
번영의 정의는 무엇인가? 우리 종에게는 왜 번영이라는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해, 훈련된 경제학자들(나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그래서 이 책을 씀으로써 나 스스로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내가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요즘 전대미문의 경제적 비관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세계의 은행 체제는 붕괴 직전이 되었고, 빚으로 빚어진 거대한 경제 거품이 붕괴해버렸고, 세계 무역은 위축되었으며,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세계 전역에서 실업이 급증하고 있다. 가까운 미래는 사실 삭막해 보인다. 몇몇 정부는 공공부채 규모를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나, 이는 다음 세대의 번영 능력을 해칠 위험이 크다.
후회스럽게도 나는 노던록 은행의 비상임의장으로 있으면서 이런 재앙의 일부에 한몫 거들었다. 노던록은 경제 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수많은 은행 중 하나다. 그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자본시장과 자산시장을 불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화와 용역의 시장은 열정적으로 지지한다.
내가 예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하는 지식이 있다. 경제학자 버넌 스미스Vernon Smith 팀이 (실험실에서의) 실험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나에게 이런 지식이 예전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팀이 확인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발이나 햄버거처럼 즉각적으로 소비되는 재화와 용역의 시장은 너무나 잘 기능하기 때문에 효율화와 혁신이 일어나지 않도록 설계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자산시장은 너무나 자동적으로 거품과 붕괴가 발생하기 때문에 제대로 작동이라도 하게끔 설계하기가 어렵다.”
투기, 군중심리에 의한 과열, 비이성적 낙관주의, 지대 추구, 뇌물의 유혹은 자산시장을 과열과 추락으로 몰고 간다. 자산시장에 세심한 규제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나는 언제나 이를 지지해왔다(하지만 재화와 용역의 시장은 규제를 줄여야 한다).
이성적 낙관주의는 세계가 현재의 위기에서 벗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왜냐하면 재화와 용역과 아이디어의 시장은 모두의 번영을 위해 인류가 정직하게 교환하고 전문화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모든 종류의 시장을 아무 생각 없이 칭송하거나 비난하는 서적이 아니라, 교환과 전문화라는 시장 과정에 대한 조사서다.
교환과 전문화는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전부터, 더 공정하게 이루어져왔으며 인류의 미래를 낙관할 방대한 근거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나는 조사를 통해 밝힐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교환의 이익에 대한 책이다.
나는 어떤 색깔이든 정치색을 띤 반동분자들에게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문화적 변화를 싫어하는 푸른색 반동분자들, 경제적 변화를 싫어하는 붉은색 반동분자들, 기술적 변화를 싫어하는 녹색 반동분자들 말이다.
나는 이성적 낙관주의자다. 이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질이나 본능 때문이 아니라 증거를 살펴본 결과 낙관주의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펼치는 페이지들에서 독자들 또한 그렇게 만드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우선, 나는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신시킬 필요가 있다. 모든 점을 감안할 때 인간의 진보는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고통의 신음을 내뱉고 싶은 충동은 항상 있지만, 평균적인 인간에게 지금 세상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살기 좋은 곳이다. 경기가 심각한 침체에 빠져 있는 지금조차도 그렇다. 세계는 더 부유하고 더 건강하고 더 친절해졌다. 상거래 덕분에도 그렇고, 상거래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런 다음 나는 왜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일이 점점 더 잘돼나갈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볼 것이다.
(프롤로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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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매트 리들리 (Matt Ridley)
진화심리, 생명과학, 인류학, 사회학 등 과학기술과 인문사회 전 분야를 두루 섭렵하며 진화와 유전학, 사회를 주제로 도발적인 책들을 써온 세계적인 과학저술가이다. 그의 책들은 27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생생한 지성과 명석함, 균형감과 재치 넘치는 글쓰기는 훌륭한 과학저술의 모범으로, 성의 생태와 진화, 과학의 미래를 공부하는 사람이 꼭 읽어야 할 입문서가 되고 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동물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3년부터 8년 동안 <이코노미스트>의 과학 전문 기자로서 워싱턴 특파원 겸 과학기술분야 편집자로 일했으며 1993년부터는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선데이 텔레그래프>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롱프랑 상 최종 심사에까지 오른 『붉은 여왕 The Red queen』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여 『게놈 Genome』을 통해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했다. 저서로는 미국의 대통령제 정치를 다룬 『있는 그대로 Warts and All』, 성의 진화를 주제로 한 『붉은 여왕 The Red Queen』, 『질병의 미래 The Future of Disease』, 『게놈 Genome』, 『미덕의 기원 The Origin of Virture』(국내에서는 ‘이타적 유전자’로 출간 됨) 등이 있다. 그는 현재 뉴캐슬에 거주하면서 국제생명센터의 의장직을 맡고 있으며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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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조현욱
1985~2009년 <중앙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국제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2009년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를 지냈다. 옮긴 책으로 『메모리 바이블』, 『동시성의 과학, 싱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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