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일곱 살 되던 해 8월의 어느 무더운 토요일, 나는 처음으로 장사라는 걸 해보았다. 가게는 체리나무 아래 펼쳐놓은 테이블이었고, 상품은 오븐에서 구운 쿠키 몇 접시와 다디단 레모네이드 한 통이었다. 매직펜으로 직접 쓴 가격표도 잘 보이게 펼쳐놓았다. 얼마 후 내 이름으로 된 통장도 갖게 되었다. 나는 통장 속의 숫자가 계속 늘어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다녔다. 이웃집 마당의 잡초도 뽑고 오래된 인형이나 싫증난 축구카드도 팔았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모님께 용돈을 올려달라고 조르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해가 흐른 뒤 나는 한동안 다우존스 주가지수의 등락을 매일 지켜보았다. 하룻밤 새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벌고 잃는 일이 내게는 무척이나 신기했다.
아직도 나에게 일이란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한 개념이다. 하지만 정해진 법칙을 지켜가며 열심히 일하면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즉 노동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것이 일에 대한 나의 신념이다.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부모님은 사랑과 기대가 담뿍 담긴 눈빛으로 내게 물으시곤 했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에게 베풀고 또 베풀어라.” 교회에서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설교를 들었다. “즐길 수 있
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버는 게 최고다.” 인생 경험이 많은 주위 어른들로부터는 이런 충고를 수도 없이 들었다. “번듯한 직장을 잡기는 정말 어렵다. 일찍부터 준비해야 해.” 나이 차가 몇 살 나지 않는 여러 선배들은 간곡히 당부하곤 했다.
서로 다른 충고 속에 언제나 빠지지 않는 사항이 한 가지 있었다. 인턴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처음엔 그들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대신 부족한 공부와 여행,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몇 번의 여름방학을 보냈다. 그러나 런던 대학 석사 과정에 들어가던 해, 마침내 주변의 압력에 굴복하게 되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스물세 살을 먹도록 텅 비어 있는 이력서가 너무도 불안해졌기 때문이었다.
인턴십(인턴 과정)은 선택적 특권인가 아니면 불가피한 노예 계약인가? 실제 직업인가 아니면 직장 생활을 위한 연습 단계인가? 왜 장학생들은 학교 구내식당이나 도서관에서 일하는데, 부잣집 아이들은 일류 신문사나 대기업, 유명한 비영리 단체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는 걸까? 무엇보다도 내가 해왔던 캠프 카운슬러, 베이비시터, 과외선생 같은 일이 취업 시장에서 경력으로 간주될까? 일단 인턴십에 참여하고 나면 모든 의문이 풀릴 것 같았다.
첫 번째 인턴 자리는 어느 비정부기구였다. 반년 동안 일주일에 이틀씩, 좁은 골목 사이로 허름한 비정부기구 사무실들이 밀집해 있는 런던 북부 이슬링턴으로 출근했다. 보수는 없었고, 다만 점심값과 교통비 명목으로 용돈을 약간 받았다. 웹사이트에 각종 중국어 정보를 영어로 번역해서 올리는 것이 주 업무였다. 번역거리가 없을 때에는 온라인 포럼에 의견을 올리기도 하고 수업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체 회식 자리에서 진행자가 우리 인턴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박수를 청했다. 곧이어 장내에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참석자들이 박수를 보내면서 저마다 목을 빼고 영광의 주인공들을 두리번거리며 찾는 것이었다. 누가 인턴인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얼마 후 인턴들끼리의 조촐한 점심 자리에서 동료 한 사람이 이런 얘기를 건넸다.
“인턴십의 가장 큰 장점은 돌아간다는 거야.”
처음에 나는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여운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가 옳았다. 인턴십의 세계는 돌고 도는 것이다. 인턴십이 돌아야 하는 까닭은 아무도 모른다. 인턴십은 현재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지만 그 속성이나 팽창하는 양상이 너무도 파행적이라서 어떤 법칙이나 기준으로 규정할 수가 없다. 인턴이라는 단어부터 의미가 모호하고 범위가 포괄적이다. 50~60년 전까지만 해도 인턴은 의료계에서만 주로 쓰는 단어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이 책에서 ‘인턴’을 다루고 있지만 연수생, 임시직, 시간제 아르바이트 등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모든 불안정 직업 형태를 대표하는 단어로서 ‘인턴’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따라서 인턴은 직업 자체라기보다 직업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오늘날 인턴 과정은 고등교육과 직업 세계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미성년자의 노동력 착취를 엄격히 단속하게 된 이후로 선진국들은 젊은이들을 강의실에서 사무실로 인도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해왔다. 그와 동시에 산업계에서는 숙련된 인력을 고등교육 기관에서 양성하고 조달해주기를 기대했다. 결국 정부와 업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업은 인턴십 제도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화이트칼라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인턴이라고 하면 커피 심부름이 연상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제3세계의 난민보호소, 혹은 인간게놈연구소에서도 인턴은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인턴이 곧 시간제로 일하는 대학생이라는 고정관념도 잘못된 것이다. 정식으로 취업하지 못한 졸업생들이나 전직을 마음먹은 중년들도 인턴십의 세계에 뛰어든다. 물론 모두 임시직 일자리와 형편없는 임금, 심지어 무보수까지도 각오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했건 안 했건 인턴 대다수가 30세 이하의 젊은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사실상 기성 사회는 인턴을 너무나 함부로 대하고 있다.
사무실에서 인턴은 한마디로 노예와 같은 취급을 당한다. 인격적 모욕은 당연하고 성희롱 대상이 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게다가 온갖 허드렛일은 죄다 그들 차지이다. 그중에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심부름도 있다. 뉴욕 극장의 어느 인턴은 사장의 소변 샘플을 병원에 가져다준 적이 있다. 매니저의 지시로 질질 새는 쓰레기봉투를 차 트렁크에 싣고 쓰레기통을 찾아 낯선 거리를 한참 동안 헤맨 인턴도 있다. 어느 공공기관의 인턴은 몇 년 동안 사용하지 않은 창고를 혼자 청소해야 했다. 그녀의 평소 업무는 사무실 화초관리와 정직원들의 생필품 장보기, 짐 나르기 등이었다. 현재 그녀는 등에 생긴 만성통증을 치료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기막힌 사건이 벌어진 적도 있다. ‘사회적 인턴십’ 경험을 쌓으라는 학교 과제를 잘못 이해한 십대 소녀 두 명이 홍등가에서 매춘부 생활을 했던 사건이다.
심지어 노동분쟁 소송을 전문으로 하는 로펌들 가운데서도 노동법령을 비웃듯이 교육적인 측면이 거의 없는 무보수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인턴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인턴십은 세계 모든 국가에서 산업계 각 분야로 확산되었다. 덕분에 대학 취업센터들은 정신없이 바빠지고 인턴십 관련 사업체들은 대박이 나고 있다. 인턴십을 판매하는 인턴십 박람회, 인턴십과 연관된 이벤트 행사 개최가 신종 고수익 사업이 된 것이다. 심지어 몇몇 굵직한 ‘인턴 동문회’들이 그동안 축적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수익 사업을 벌이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구겐하임 미술관의 인턴 과정을 거친 사람들의 모임인 ‘페기 구겐하임 인턴 모임’이 대표적이다.
이렇듯 인턴십은 상업적으로까지 적극 활용될 만큼 붐을 이루고 있지만, 아직 규모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자료 하나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실정이다. 물론 인턴십이 확산되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고 인턴십의 존재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구실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요즘 젊은이들은 인턴십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학계 인사들이나 정책 입안자들마저 인턴십 포화 현상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는 현실은 이해하기 어렵다. 지금의 인턴십이 태어난 곳이 학계이고 성장한 곳이 바로 정계이기 때문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인턴십 제도의 혜택을 톡톡히 누려온 비영리 조직들도 꿀 먹은 벙어리이다. 인턴십 제도 덕분에 직접적인 수익을 누려온 사기업들은 한술 더 떠서 불법적이고 편법적인 인턴십 운영 관행을 고착시키려 하고 있다.
현재 미국 사회 각 부문의 중요한 위치는 거의 다 인턴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원의원들이나 정부 고위 각료들은 대부분 워싱턴 인턴으로서 정치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이다. 월스트리트를 장악하고 있는 경제계의 큰손들도 인턴으로 보냈던 몇 번의 여름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다. 문화계의 거목들도 마찬가지다. 인턴 출신의 저명인사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던 인턴십을 옹호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결국 인턴십 붐은 심화될 수밖에 없고 인턴 과정을 거치지 않고 화이트칼라 세계에 진출할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지게 되었다.
실제로 인턴십이 아닌 일반 산업 현장에서의 경험은 더 이상 이력서에 기재할 수 없는 사항이 되고 말았다. 쉽게 말해서 웨이터나 캠프 카운슬러, 영업사원으로 일하면서 보낸 여름은 최소한 취업 시장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제 대학 졸업장이 기본이 된 취업 시장에서 경쟁의 관건은 인턴십이 되었고 자연히 경쟁의 양상은 하루가 다르게 치열해지고 있다. 미시간 주립대학 대학생취업연구센터 책임자로서 지난 30년 동안 인턴십 포화 현상을 지켜본 필 가드너(Phil Gardner)는 이렇게 단언한다. “인턴 경력 없이는 ‘괜찮은’ 직장을 잡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인턴십은 미국의 노동과 교육의 본질을 변화시키고 있다. 오늘날 인턴십은 화이트칼라 세계로 통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 되었다. 고작 수십 년에 불과한 역사에 비해 눈부신 성장이다. 하지만 성장의 이면에는 엄청난 문제점들이 도사리고 있다. 상당수의 고용주들이 임금과 관련해서 불법 혹은 편법에 해당하는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무보수, 혹은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턴십은 노동법에 저촉되는 명백한 불법 행위이다. 특히 무보수 인턴십은 평등법에도 어긋난다. 보수 없이 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빈곤층이나 중산층 출신 젊은이들은 무보수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이중 삼중의 생활고를 겪어야 한다. 결국 인턴십, 특히 소위 ‘명문 인턴십’(plum internship)은 자금줄과 연줄이 든든한 상류층 젊은이들의 독차지가 된다.
현재 미국 4년제 대학 재학생 수는 9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무려 75퍼센트가 졸업하기 전에 적어도 한 차례 이상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1960년대만 해도 인턴십은 의료계의 실무수습 제도의 성격이 강했다. 1970~80년대에 들어서서도 인턴십 제도는 그다지 활성화되지 않았다. 공공 부문이나 일부 대기업, 특수 분야에서 인재 양성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턴십은 선진국의 대학 재학생들 사이에서는 하나의 필수 과정이 되었다. 이제 인턴십 붐의 초기 단계인데도 이 정도이다. 인턴십 붐 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자료가 없는 까닭에 정확하진 않지만 미국에서 연간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인원은 대략 100만 또는 2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는 물론 그 몇 배가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상당수의 인턴들이 무보수나 최저임금, 연장근로수당 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다. 게다가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기에 의료보험이나 산재보상은커녕 노동소송 당사자로서 법정에 설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턴은 엄연한 노동자이며 따라서 노동관계법령이 규정하는 모든 권리와 혜택을 누릴 자격이 있다. 문제는 사법 당국이나 행정 당국이 인턴에 관한 관계법령의 취지를 구현할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실 대부분의 인턴십 프로그램은 외형적으로는 그다지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나 역시 비정부기구에서 무보수 인턴으로 300시간 이상을 일했지만 장학금이 있었기에 생계유지에 급급하지 않을 수 있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한 동료 인턴들은 가족들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그동안 모아온 돈으로 생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충분한 자격이 있으면서도 밀어줄 배경도 저축한 돈도 없는 수많은 젊은이들은 어쩔 것인가? 무보수 인턴십이 필수 전제인 한 그들은 이슬링턴의 비정부기구 사무실 골목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며 결국 그 부문으로의 취업은 포기해야 할 것이다.
사회복지국가를 자랑스럽게 표방하는 미국 사회는 그동안 학교와 사회, 법정에서 기회 불평등을 몰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왔다. 인턴십은 돈과 연줄이 없는 대다수 젊은이들의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그 모든 노력을 수포로 만들고 있다. 물론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해서 무조건 취업 기회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적인 측면이 없다시피 한 인턴십 프로그램을 통해 반드시 필요한 업무 능력을 익힌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결국 고용주들이다. 국가, 노동조합, 학교, 혹은 그 어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다. 일단 인턴 세계에 뛰어들었으면 그 세계의 규칙에 따라 ‘돌고 도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주어지는 대로 하다가 떠나면 그뿐이다. 사실 근무 현장에서는 인턴십 프로그램 관리담당자와 인턴 사이에 은연중에 담합이 이루어진다. “업무고과표를 멋지게 써줄 테니 커피나 열심히 타라”는 식이다. 청운의 꿈? 인격함양? 실무 경험? 현재와 같은 불법적 인턴십 운영 관행이 지속되는 한 모두 헛소리다. 돈 한 푼 못 받고 허드렛일만 죽도록 하는데 신바람이 난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오늘날 인턴십은 본연의 취지를 상실한 채 이력서를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또 어쩌랴. 꽉 채워진 이력서가 취업 시장에서 통하는 현실을. 결국 젊은이들은 이력서를 만족스럽게 채울 때까지 인턴 세계를 돌고 돌게 되는 것이다.
인턴십이 일으키고 있는 모든 문제점에 관한 한 고용주, 학부모, 대학 당국, 정부기관, 그리고 인턴들까지, 관계 당사자인 우리 모두가 책임을 느껴야 한다. 노동의 신성함을 평가절하하고 사회적 불평등 구도를 악화시키며 젊은이들에게 취업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인턴십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우리들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모든 파행적인 관행을 근절하고 인턴십 제도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인턴십의 역사를 태동기부터 면밀히 살펴야 한다. 또한 특권인 동시에 속박이기도 한 인턴십의 속성을 명백히 파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인턴들은 물론 인턴십 옹호론자들과 인턴십 거래업자, 인턴십 제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애쓰는 극소수 인사들과 인턴 세계로의 접근을 원천봉쇄당한 대다수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두루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현행 인턴십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일소하고 인간적이고 합법적인 대안들을 새로이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위한 자료 조사를 시작한 것은 2008년이었다. 나의 접근 방법은 경제학자, 사회학자, 고용주, 취업 전문가,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엄청난 숫자의 전직, 현직 인턴들과 진행한 인터뷰였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새롭게 알게 된 인턴십의 흉측한 모습에 좌절과 분노를 느끼곤 했다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이 책 내용 속에 스며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와 동시에 인턴들의 분노 또한 최대한 여과시켰고,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일부 사회학자들의 책상머리 이론들은 과감히 던져버렸다. 아울러 인턴 세계에 입문하는 방법이나 특정인, 또는 특정 기업에 관한 정보는 이 책에서 결코 찾아볼 수 없다는 걸 미리 밝혀둔다.
책을 엮어가는 동안 나와 동료들은 이미 탈선해버린 현재의 인턴십 제도에 대해 시종일관 비판적이고 풍자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전체적으로는 그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사안들을 나름대로 면밀하게 파고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본연의 인턴십 제도가 지닌 특장점들을 재조명하고 개선 방향까지도 감히 어림해보았다.
이번 작업은 인턴십이라는 한 가지 제도에 관한 한 현재로서는 최장의 분석 자료이다. 그와 동시에 실제로 운영되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프로그램들을 망라하여 검토한 최초의 시도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모범적, 불법적, 편법적 인턴십 프로그램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고, 제대로 구성된 프로그램과 주먹구구식 프로그램이 일으키는 상반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며, 몇 주 남짓의 단기 프로그램과 1년 정도의 장기 프로그램의 장단점을 비교할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인턴들의 연령대는 10대부터 50대에 걸쳐 있으며 기업체들의 규모와 내력 또한 다양하다. 독자들의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인턴십’이라는 단어를 명확히 정의하는 과정이 필수적이겠지만, 우선은 인턴십의 문제점을 검토하기 위해 현황부터 살펴보기로 한다(사실 인턴십의 개념은 너무도 모호하고 현실적으로도 마구 혼용되고 있어서 각 경우에 따른 귀납적인 접근 방법이 유리하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디즈니 월드가 운영하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인턴십 프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고, 그다음 장에서는 인턴십 붐이 야기된 경위에 관해 개괄적으로 알아보며, 또한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인턴십 제도의 원조 격인 수습 제도를 분석한다. 이어지는 장에서는 현행 인턴십 제도의 불법적 운영 실태를 추적한다. 그 이후로는 인턴십과 경제, 인턴십의 세계화 추세 등 인턴십에 관한 현안들을 차례로 분석하고, 맨 마지막 장에서는 인턴십의 미래와 개선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불법적 인턴십 프로그램은 불경기를 오히려 호기로 삼아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실업난이 지속되면 인턴십의 악영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정규직의 일자리를 인턴이 차지하고, 적정한 보수가 따르던 인턴십은 무보수 인턴십으로 대치된다. 고용주들이 인턴십 프로그램을 최대한 활용하여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을 펼치기 때문이다. 적법성 여부를 떠나 윤리적으로 손가락질을 받아 마땅한 그런 관행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취업이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갈수록 많은 대졸자가 인턴십 시장으로 몰려들고 있다. 이제 인턴십은 재학 기간뿐 아니라 졸업 후에도 거쳐야 하는 필수 관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행 인턴십 제도의 명백한 결함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많은 대학이 인턴 과정을 졸업을 위한 필수 과정으로 요구하고 있다. 정부 당국은 한술 더 떠서 범국가적 인턴십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정부는 연간 수십만 명의 국제 인턴들을 대기업에 무상으로 공급하면서 제반 경비를 국민의 혈세를 통해 충당하고 있다. 한편 인턴십 열풍은 이제 고등학교에까지 불어 닥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년층이나 심지어 은퇴자들까지도 인턴십 세계에 뛰어들고 있다. 인턴십 붐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고 그에 따라 불법적, 편법적 운영도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직한 노동에 적절한 보수가 따르는 건강한 노동 시장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 것이다.
이 야만적인 현실 속에서 모두가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게 되는 그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겨보고자 우리는 세상에 이 책을 내민다.
01
디즈니랜드, 인턴의 왕국
디즈니랜드는 공상의 세계를 추구한다.
우리로 하여금 미국의 나머지 지역은 따분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 장 보드리야르
디즈니 월드가 개장한다. 눈길 닿는 곳마다 인턴이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예쁜 검표원, 시속 64킬로미터로 모노레일을 모는 기관사, 늘어선 대열을 정리하느라 분주한 놀이기구 직원, 미키마우스 귀 모자와 솜사탕을 파는 행상, 햄버거와 핫도그를 굽고 있는 스낵바 점원, 플로리다의 뙤약볕 아래 디즈니 만화 주인공 가면을 쓰고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배우까지 모두가 인턴이다.
최근에 매직 킹덤을 다시 찾았을 때, 나는 ‘출연진’(디즈니랜드에서는 놀이동산은 무대, 직원들은 출연진이라고 부른다)의 물결 속에서 파랑과 하양이 반씩 섞인 앞가슴의 명찰들을 훑으며 그들이 다니는 대학을 어림해보았다. 오하이오의 켄트 주립대학, 펜실베이니아의 록 헤이븐 대학, 브롱크스의 리먼 대학, 마이애미-데이드 대학, 뉴저지의 킨대학, 네브래스카 대학 등….
공립과 사립을 망라하고 세계 굴지의 연구소를 자랑하는 명문대에서부터 지역 사람이 아니면 이름을 들어본 적조차 없는 지방 대학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 지역의 대학생들이 모여 있다. 미국 대학생들만이 아니다. 최소한 19개국 출신의 젊은이들도 같은 색깔의 명찰을 달고 있다.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 됐다는 상하이 출신의 대학 2학년생 인턴은 생기 넘치는 눈빛으로 디즈니 월드 중심가의 상점 앞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수백 명에 이르는 중국인 인턴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밝힌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 대학을 마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매직 킹덤에서 만나는 인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매직 킹덤 말고도 세 군데의 놀이동산과 두 곳의 워터파크, 스물네 개의 호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식당과 상점, 각종 공연 등에 종사하는 인턴이 있다. 40제곱마일에 걸쳐 펼쳐진 디즈니 왕국의 국민은 대부분이 인턴이다. ‘무대 밖’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인턴의 숫자까지 생각해보면 누구든 내 주장에 수긍할 것이다. 창고나 주방에서 일하는 숫자만도 어마어마하지만, 총면적 9에이커에 달하는 지하 본부에서 퍼레이드를 비롯한 각종 공연을 기획하고 불꽃놀이의 타이밍을 조절하며 광대한 네트워크 시스템을 관리하는 인력 대부분도 인턴이기 때문이다. 열악한 보수를 받고 있는 이 국민은 왕국의 명령에 따라 네 군데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디즈니의 인턴십 프로그램은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연간 7,000~8,000명에 이르는 대학생들 혹은 갓 졸업한 학생들이 디즈니 왕국에서 최저 시간급을 받으며 온갖 잡다한 업무에 종사하고 있다. 일반적인 근무 기간은 4~5개월 정도지만 소위 ‘특별 혜택 프로그램’에 따라 7개월까지 근무할 수 있다. 자연히 정규 학기와 겹칠 수밖에 없다. 디즈니의 인턴십 프로그램은 방학 기간을 이용한 전통적 인턴십이라기보다 실제 회사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인턴들은 학교를 휴학하든지, 아니면 일하면서 학교에서 요구하는 필수 학점을 따야 한다. 디즈니의 인턴은 엄격한 규율에 따라 회사에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휴가나 병가는 달콤한 꿈이고 애로사항에 관한 소원 수리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성희롱이나 부당 대우에 관한 적절한 보상 대책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근무는 대개 12시간 교대제이지만, 실제로는 오전 6시에 시작하고 자정을 넘겨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계약서에 사인할 때 인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나 보수에 관해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한다. 물론 보수가 최저임금 수준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지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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