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의 일이다. 아이를 원하던 레즈비언 커플이 기왕이면 자기들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갖기로 작정했다. 이 커플은 자기들이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샤론 더치스노와 캔디 매컬로는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의 하나라고 보았다. “듣지 않고 사는 것도 삶의 방식 중 하나다”라며, “우리는 듣지 못해도 온전하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청각장애인으로 사는 공동체의 소속감과 유대감을 아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우리는 주어진 모습 그대로 삶의 진정한 풍요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들은 청각장애아를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5대째 청각장애인 가족에서 정자 공여자를 찾았다. 마침내 청각장애 아들 고뱅이 태어났다.
<워싱턴포스트 Washington Post>에 실린 기사로 독자들의 엄청난 비난을 샀을 때,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비난의 초점은 어떻게 자식에게 고의로 장애를 유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더치스노와 매컬로는 듣지 못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며, 자신들과 같은 아이를 갖고 싶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더치스노는 “성적으로 정상인 다른 커플들이 아이를 가질 때 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그다지 유별난 일을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일부러 청각장애아를 갖기로 계획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그른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인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계획적으로 청각장애아를 낳았다는 사실 때문에? 편의상 듣지 못하는 것이 장애가 아니라 특별한 정체성이라고 가정해보자. 부모가 아이를 원하는 대로 고른다는 생각에 여전히 잘못된 점이 있다고 보는가? 고금을 막론하고 배우자를 선택할 때는 늘 2세를 생각해왔다. 오늘날 새로 나온 생식 보조 테크놀로지(ART: Assisted Reproductive Technology, 주로 불임클리닉에서 부부의 임신을 도와주는 생식기술을 뜻하며 호르몬 관련한 생식내분비학과 불임치료의 영역에 속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유전학적 강화에서와 같이 불임이 아닌데 유전적인 이유로 활용하는 기술까지 포함하고 있다.―옮긴이)를 활용하면서 부모가 아이를 고르는 게 특별히 나쁜가?
일부러 청각장애아를 갖기로 한 부모가 논란이 되기 직전, 하버드대학교 학보 <하버드 크림슨 Harvard Crimson>과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신문마다 특별한 광고가 실려서 문제가 되었다. 불임 부부가 난자 공여자를 찾는다는 광고였는데, 난자 공여자의 자격 조건이 특별했다. 키 175센티미터 이상, 튼튼하고 몸매가 날씬한 여성으로 가족의 병력상에도 문제가 없어야 하며, 대학수능시험SAT 점수도 1400점이 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광고문에는 이 자격을 갖춘 여성에게 난자를 받는 대가로 5만 달러를 지불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프리미엄 난자를 이 금액으로 사는 부모도 그저 자기들을 닮은 아이를 원했을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자기들보다 키가 크고 지능이 우수한 아이를 원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광고에는 청각장애아를 원하는 부모에게 주어진 만큼 비난이 쏟아지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키나 지능, 탄탄한 근육 등을 아이들에게서 멀리해야 할 장애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런 광고에는 도덕적으로 꺼림칙한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다. 설령 아무 해악이 결부되지 않았다 해도, 특정 유전형질을 겨냥해서 아이를 고르는 부모의 행동에 문제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청각장애아나 SAT 점수를 높게 받을 아이를 낳으려는 시도에 대해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결정적인 측면에서는 자연적인 출산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유사성은 부모들의 시도가 무엇이든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보장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청각장애나 높은 SAT 점수나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사실 그렇다. 유전학적 제비뽑기(우리의 유전형질이 그동안 운의 게임에 맡겨졌다는 의미를 뜻한다. 여기서 쓴 ‘제비뽑기’는 맘에 안 드는 것이 뽑히는 일까지 포함한다.―옮긴이)의 다양한 변이 때문이다. 이런 식의 찬성 입장에도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 때문에 그런 시도를 허용할 수 있는가? 예측 불가능성이 도덕적인 차이를 가져오는 요인인가. 그렇다면 생명공학이 그런 불확정성을 제거해서 아이들의 유전형질을 디자인할 수 있다면, 사태가 또 달라진다는 것인가.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아이가 아니라 애완동물이라면 어떤지 살펴보자. 청각장애아를 가진 부모에 대한 논란 이후 1년 만의 일이다. 텍사스에 사는 줄리Julie는 애지중지하던 고양이 니키가 죽어서 슬퍼하고 있었다. “니키는 참 아름다웠어요. 얼마나 똑똑했는지 그런 고양이는 없을 거예요. 알아듣는 명령도 열한 가지나 되었다니까요.” 고양이 복제를 제안하는 제네틱 세이빙스 앤드 클론(Genetic Savings & Clone, www.savingsandclone.com)사가 캘리포니아 주에 있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다. 이 회사는 2001년에 처음 복제 고양이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이 고양이의 이름은 판박이라는 뜻인 Carbon Copy의 약자를 따서 CC라고 붙여졌다). 줄리가 복제 비용 5만 달러와 니키의 유전자 샘플을 소포로 회사에 보냈다. 몇 달 뒤 유전적으로 똑같은 새끼 고양이 리틀 니키를 받고 줄리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니키와 똑같아요. 다른 데라곤 전혀 없네요!”
그 회사는 이후 값을 계속 내려서, 지금은 3만 2000달러에 고양이 복제를 한다. 이 비용마저 비싸다고 생각하면 환불 보증도 가능하다. 회사의 웹사이트에는 ‘당신이 고양이를 받고 유전자 공여자와 같지 않다고 느끼신다면, 아무 이의 없이 100퍼센트 환불해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있다. 한편 이 회사에 고용된 과학자들은 복제 개를 생산하는 라인을 개발하고 있다. 개는 고양이보다 복제하기 어려워서 비용을 10만 달러 이상으로 책정할 계획이다.
고양이와 개의 복제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우선, 집 없이 떠도는 애완동물이 수천이나 되는 상황에서, 거금을 들여 애완동물을 복제하는 데에 돈을 쓰는 것이 지나치다는 말이다. 게다가 복제에 성공해서 새끼를 낳았는데 맘에 안 들면 환불해주겠다는 광고를 보면서, 맘에 들지 않아서 버려지는 동물 새끼와 복제에 실패한 동물의 배아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들도 극복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전히 고양이와 개의 복제에 대해 선뜻 옹호하지 못하겠는가? 인간 복제는 어떠한가?
유전공학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까닭
유전학에서 획기적인 발전에는 명암이 공존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다양한 질병들을 치료하고 예방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안겨준다. 반면에 불안한 것은 새로 발견한 유전학적 지식 때문에 인류의 본성을 조작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근육과 기억과 기분을 좋게 하고, 아이의 성별과 키와 다른 유전형질을 선택하고, 신체적?인지적인 능력을 개선하고, 우리의 몸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일들이 가능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유전공학이 가능하게 하는 일부 기술에 대해 불안하게 여긴다. 문제는 불안한 까닭을 분명하게 말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윤리학이나 정치학적인 담론에서 흔히 나오는 자율성, 공정성 같은 용어만으로는 우리의 본성을 공학적으로 강화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파악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복제 문제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1997년 탄생한 복제 양 돌리가 인간 복제의 가능성에 대한 염려를 격발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의학적인 이유가 있다. 과학자들은 대부분 복제가 불안전하고 심각한 기형과 선천적 결함이 있는 자식을 낳게 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돌리는 조산으로 죽었다). 하지만 복제 기술이 자연 임신에 못지않은 수준으로 위험도를 떨어뜨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인간 복제를 허용할 수 없는가. 정확히 무엇이 그른 일인가? 양친 중 한 명과 유전학적으로 쌍둥이인 아이를 만드는 일이 그른가? 비극적으로 사망한 형제와 유전학적 쌍둥이를 만드는 일이 그른가. 아니면 존경 받는 과학자나 스포츠 스타, 유명인의 유전학적 쌍둥이를 만드는 일이 그른가? 이 모든 것이 다 잘못되었는가?
복제의 종류에 따라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일단 접어두자. 복제 자체가 그른 것은 태어날 아이의 자율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라는 학자들이 있다. 아이의 유전학적 구성을 부모가 선택하다 보니 그 아이에게 이전에 살던 누군가의 그림자 인생을 부여하는 셈이고, 결국 아이는 자신에게 열린 미래를 맞이할 권리를 빼앗긴다는 것이 요점이다. 그렇다면 자율성에 근거해서 반대할 수 있는 것은 비단 복제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공학 기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유전학적 특성을 부모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반론에 따르면 유전공학의 본질적인 문제는 ‘디자인된 아이들’은 충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음악적 재능이나 운동 능력을 위한 상태를 더 좋게 해주는 유전학적 강화라 할지라도 인생을 미리 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율성 침해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인생 계획을 수립할 권리를 빼앗는 셈이다.
언뜻 보면 이상의 자율성 논변은 인간 복제와 여타 유전공학의 형태에 대해서 문제를 제대로 포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여전히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첫째, 그 논변은 잘못된 논리적 결론을 도출한다. 즉 디자인하는 부모가 없으면 아이들이 자신의 신체적인 특성을 고를 자유가 있다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유전학적 유산을 고르지 않는다. 아이를 복제하거나 유전학적으로 강화하는 것에 대한 대안은 아이의 미래를 일정한 재능으로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학적 제비뽑기에 의해 자연스럽게 정해지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둘째, 자율성 때문에 맞춤형 아이에 대해서 걱정하는 것은 맞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유전학적으로 강화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도덕적으로 주저한다. 게다가 모든 유전학적 개입의 결과가 세대를 걸쳐 내려가지는 않는다. 근육세포나 뇌세포처럼 생식세포가 아닌 세포에 대해서 유전자 치료를 하면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복구하거나 교체할 수 있다. 질병을 치료할 목적으로 유전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 수준 이상으로 ‘건강이나 능력’에 도달할 목적으로 유전자를 교정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꺼림칙한 경우다. 다시 말해 자신의 신체 능력이나 인지능력을 표준 이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이 도덕적인 불편함은 자율성 침해와 상관이 없다. 난자와 정자 혹은 배아를 대상으로 하는 생식세포 계열의 유전학적 개입만이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근육을 유전학적으로 강화한 육상 선수는 늘어난 속도와 체력을 자손에게 물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식에게 재능을 억지로 떠안겨서 직업 육상 선수가 되기를 강요하느냐고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율성 침해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유전학적으로 강화한 육상 선수들이 나올 것을 생각하면 유쾌하지 않다.
유전학적 강화는 미용성형처럼 의학적이지 않은 목적을 위해서 의학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즉 유전학적 강화의 목적은 질병의 치료와 예방, 손상을 복구하거나 건강을 회복하는 것과 관계가 없다. 그러나 유전학적 강화는 미용성형과 달리 피부에 국한한 미용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 체세포 유전학적 강화는 자식과 손자 손녀에게 유전되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제기한다. 처진 턱이나 주름이 파인 이마에 성형수술을 하거나 보톡스 주사를 맞는 것에 대해 옳고 그름을 단정할 수 없다면, 더 강한 신체와 더 좋은 기억력, 더 높은 지능과 더 행복한 기분을 위해서 유전공학을 활용하는 것은 더 골치 아플 것이다. 왜 그런가?
오늘날 과학이 도덕적 이해보다 빠르게 발전하다 보니, 사람들은 저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어떻게든 제대로 파악해보려고 한다. 자유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가 우선 접하는 언어는 자율성이나 공정, 개인의 권리 등이다. 그러나 이런 도덕 언어만으로는 복제와 디자인된 아이들, 유전공학이 유발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들을 거론하고 해결하기에 불충분하다. 게놈 혁명genomic revolution이 도덕적 어지럼증moral vertigo을 유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화의 윤리에 대해 제대로 고심해보려면 현대 세계의 시야에서 사라진 문제들에 직면해야 한다. 이는 본성의 도덕적 지위나 주어진 세계에서 인간의 적절한 지위에 대한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은 신학에 가깝기 때문에 현대의 철학자들과 정치사상가들은 이 문제들이 나오면 몸을 사린다. 그러나 생명공학의 새로운 힘 앞에서 이런 문제들을 직접 대면하는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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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마이클 샌델 Michael J. Sandel
1953년 미네소타에서 출생했다. 브랜다이스대학교를 졸업하고 27세에 최연소 하버드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1982)를 발표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이 책에서 '공동체주의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해,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마이클 월저, 찰스 테일러 교수 등과 함께 공동체주의의 4대 이론가 중 한 명이자 존 롤스 이후 정의 분야의 세계적 학자로 평가된다. 1980년부터 30년간 하버드대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정의(Justice) 수업은 현재까지 20여 년 동안 하버드대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강의로 손꼽힌다. 이러한 명성으로 2002년 앤 티 앤드 로버트 엠 벳 교수, 2008년 미국정치학회가 수여하는 최고의 교수로 선정되었다.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 외의 다른 주요 저서로 『민주주의의 불만』(1996), 『공공철학』(2005), 『완벽함에 대한 반론』(2007), 『정의란 무엇인가』(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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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강명신
학부에서 치의학을 전공한 후 보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보건의료윤리’와 ‘사회정의론’ 수업을 수강한 것이 계기가 되어 철학과 박사과정에서 윤리학을 공부했다.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이후 철학과 강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보건의료법 윤리전공의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지는 의무 ― 계약주의적 도덕개념 분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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