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이 소설은 아우슈비츠에서 나와 고국으로 돌아오기까지 8개월 동안 난민으로 떠돌았던 나의 슬픈 기억과 마지막 부분의 밀라노 지원센터에서 근무한 내 친구의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쓴 작품이다. 당시 본국으로 소환된 이탈리아인들과 피난민들의 물결 속에 빨치산 부대들도 실제로 밀라노 중앙역에 도착했다. 나치가 그 고통의 뿌리까지 철저히 파괴해버린 유태인 생존자들이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존엄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 글은 실화를 그대로 기록한 게 아니라 유태인 빨치산 부대들이 밟은 고난의 여정을 재구성한 것이다. 장소와 날짜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의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것들이다. 나치에 맞서 목숨 걸고 싸운 것은 유태인 빨치산과 레지스탕스를 비롯해 러시아나 폴란드 정규 빨치산 부대와 비정규 부대들이었다. 간혹 순수 유태인들로만 구성된 부대도 있었고, 벤야민 부대처럼 유태인들을 적대시한 부대들도 있었다. 심지어 여러 모함을 동원해 유태인 빨치산 부대의 무장을 해제하거나 집단처형한 부대도 있었다. 유태인 부대의 병력은 대부분 몇 백에서 몇 천 명 단위였지만, 일부 부대는 무려 1~2만 명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이기도 했다.
그들은 울창한 자작나무 숲속과 노보셀키 수도원 같은 은밀한 요새를 근거지로 삼거나 슈물레크가 은신한 우물 속의 넓은 지하 동굴 같은 곳에 아지트를 트기도 했다. 나치의 철도파괴, 수송열차 폭파, 친위대 요인암살, 낙하산 물자투하 방해 등의 후방교란작전들은 동유럽 빨치산 전투일지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거의가 가상인물들이며, 특히 마틴 폰타쉬 같은 수많은 유태인 음유시인들이 나치에 의해 처형되었다. 게달레 대원들이 불렀던 많은 노래들은 창작이지만, 이 소설의 제목은 로마제국시대에 집대성된 랍비들의 잠언에서 따 온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다양한 시각과 비평으로 나를 도와주었던 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준 친구 에밀리오 핀치가 아니었다면 이 소설은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특별히 뜨거운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내 연구와 소설작업을 열정적으로 도와주고 기록까지 남겨준 조르지오 바카리노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1982년 토리노에서
프리모 레비
숲속의 은신자
“내가 어릴 때 살던 외진 시골 마을에는 시계가 없어 종지기 노인의 종소리로 시간을 알 수 있었네. 교회의 첨탑 위에 시계가 하나 있었지만, 아마 10월 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바늘이 멈춰졌을 거야. 나도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아버지도 보신 적이 없다고 했으니까. 물론 종지기 노인도 시계는 없었지.”
“그런데 정확한 시간을 어떻게 알고 종을 쳤어요?”
“태양과 달의 움직임으로 판단해 시간마다 치지 않고 중요한 시간에만 쳤다고 들었네. 그러다가 내가 다 크고 난 뒤에 그만 종줄이 낡아서 끊어져버렸지. 아마 대조국전쟁이 일어나기 두 해 전쯤 될 텐데, 거의 꼭대기쯤에서 끊어졌어. 그런데 돌로 쌓은 종탑도 위태로웠지만 안쪽의 까마득한 나무계단도 워낙 썩은 상태라 종지기 노인뿐만 아니라 아무도 새 줄을 묶으러 올라갈 엄두를 못 냈지. 그 이후로 노인은 종 대신 엽총으로 하늘에 1발, 2발, 3발… 쏘는 것으로 시간을 알리곤 했어.”
“그럼 낮 12시엔 12번이나 쏘았겠네요?”
“처음엔 그렇게 하다가 곧 오후 1시로 건너뛰어 버렸어. 한 방만 쏘면 되니까.”
“아니, 왜요?”
“대낮에 갑자기 12발을 쏘아대니까 아이들이야 신났지만, 들판에서 일하던 어른들은 전부 전쟁이 또 터진 줄 알고 깜짝깜짝 놀라지 않았겠어. 그래서 어른들이 분기탱천해 12시는 알 필요 없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1시가 중요하니 그때만 쏘라고 만장일치로 결정해버렸지. 내가 보기엔 총알이 아까워서 그랬던 것 같은 데 말이야, 허허.”
“공포탄도 있는데…”
“어쨌든, 나치놈들이 마을을 점령해 노인의 총을 압수해버릴 때까지는 노인의 총소리가 계속 울렸다네. 물론 그 이후부터는 마을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사라져버렸지.”
“그런데 밤에도 쏘았어요?”
“그랬다간 밤잠을 설쳤다고 당장 쫓겨났겠지. 그런데 마을에 밤낮 없이 유일하게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 랍비선생 한 분이 계셨네. 마을의 최고랍비 어르신인데 시계도 몰래 감춰놓고 혼자만 볼 만큼 아주 인색한 구두쇠 영감이었지. 섭씨 36도나 되는 폭염 속에서도 검은 중절모를 쓰고 검은 양복정장에 하얀 넥타이를 졸라 맨, 말하자면 전형적인 유태인 골동품 같은 인물이었네. 또 그런 만큼 유태인 명절들도 철저하게 지키기로 유명했는데, 그 행사들이 오죽 많아. 유월절, 맥추절, 속죄일, 장막절, 안식일, 부림절, 또 브릿밀라(할례)까지 말이야. 게다가 학교 선생님이다 보니까 다른 일도 많았겠지. 그렇지만 이 랍비선생님은 종소리나 총소리가 필요 없었어.”
“왜요?”
“비록 태엽을 감기도 바쁜 고물이지만 작은 괘종시계 하나를 갖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어쩌다 노인의 종소리와 자기 시계바늘이 안 맞기라도 하면 종지기한테 부리나케 달려가 이제 노망들어 실성했느냐며 노발대발하곤 했네. 그런데 이상하게 학교로 돌아와서는 괜히 엉뚱한 핑계를 대며 심술을 부렸어. 막대자로 수업 중인 학생들의 손바닥을 찰싹찰싹 때렸거든. 나도 공부하다가 영문도 모르고 자주 맞았지, 허허.”
“랍비 선생님의 시계가 자주 고장 났던 모양이군요.”
“허허, 그렇지. 나중에 선생님한테 얻어맞던 그 아이가 훌쩍 커서 자기 선생님의 고장난 시계까지 고쳐줬다네. 선생님이 몰래 갖고 와 다른 사람한테 얘기하지 말고 고쳐달라며 부탁했거든. 이래 뵈도 그때 난 버젓한 자격증을 가진 시계수리공이었다네. 손재주가 있었는지 어릴 때부터 공작에 빠져 있었는데, 결국 커서도 시계나 라디오, 트랙터, 엽총 같은 것들을 고치게 됐지. 나 때문에 우리집에는 웬만한 장비를 다 갖춘 조그마한 작업실 창고도 하나 있었어. 당시 내가 집단농장에서 맡은 게 트랙터 같은 농기구들을 고치며 새로운 걸 만드는 일이었는데, 그게 너무 좋았지. 고치고 만드는 일이었으니까. 시간이 남으면 항상 혼자 남아 재미삼아 온갖 기계들을 분해하고 조립하며 연습했네. 또 집에 오면 창고에 틀어박혀 엽총을 고쳤어. 그땐 시계는 귀했지만, 동네 집집마다 엽총 한 자루씩은 다 있었으니까 수리할 일도 많았지. 모든 게 만족스러웠어. 뭔가 고치고 만든다는 건 늘 새로운 호기심과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기 때문에 즐거울 수밖에 없지.”
“전 시계 밥도 못 주는데…”
“그때 내가 살던 곳은 기독교인들이 양떼 속의 개처럼 드문드문 박혀 있는 유태인 마을이었네. 워낙 깊고 척박한 오지마을이라 기독교인들과의 사소한 말다툼 외에는 그다지 유태인 박해라는 걸 모르며 살았지. 마을 이름이 스트렐카인데 거의 폐허로 변했으니 한때 스트렐카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해야겠군.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소비에트 붉은 군대로 위장한 나치놈들이 들이닥쳐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으니까.”
“…”
“재빨리 숲속으로 도망친 10분의 1가량 외엔 거의 다 붙잡혀 커다란 구덩이를 스스로 파게 한 다음 총살해 묻어버렸지. 물론 기독교인들도 그동안 유태인을 신고하지 않았다고 같이 매장했고. 평소에 대립하던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무덤 속으로 간 이후에야 아무런 차이가 없어졌네. 죽음으로서 서로 공평해진 거지. 그 당시 난 집단농장에서 농기구 수리공으로 일했는데 아내와 함께 살고 있었네. 자식은 없었고, 쫓기는 지금의 처지로 보면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겠지.”
“그럼 그때… 사모님은…”
“숲에서 혼자 나무땔감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어. 그런데 아무리 찾고 또 찾아봐도… 끝내 아내는 보이지 않았지…”
“…”
멘델이 고개를 돌린 채 넋 나간 사람처럼 먼 들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레오니드도 죄 지은 사람마냥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한참 뒤에 레오니드가 긴 부츠를 벗고 발목을 감았던 천을 풀어 햇볕에 말렸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군용배낭을 뒤지더니 담배 두 개를 말아 하나를 멘델에게 조용히 건넸다. 주머니에서 꺼낸 성냥이 젖었는지 네 번을 긋고 나서야 겨우 불이 붙었다. 멘델은 고개를 돌려 그런 앳된 젊은이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자기보다 거의 10년 정도는 어려 보였는데, 대충 18~19살쯤 된 것 같았다. 보통 키에 야윈 팔과 다리, 검은 생머리와 검게 그을린 둥근 얼굴, 짧고 곧은 콧날, 그리 지저분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턱수염…
특히 약간 튀어나온 짙은 두 눈동자가 멘델의 시선을 유달리 사로잡았다. 불편하게 응시하다 곧바로 시선을 돌리던 두 눈동자에는 뭔가를 요구하는 듯했다. 마치 빚을 받으러 온 채권자나 빚을 진 채무자의 눈빛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허긴 이런 상황에서 누구인들 그렇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멘델이 앳된 젊은이에게 물었다.
“초면에 미안하게도 내 얘기만 했군. 그래, 이 집은 눈에 잘 띄지 않을 텐데 어떻게 오게 됐지?”
“그냥 숲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헛간을 보고 들어온 겁니다. 물론 아저씨 얼굴이 끌게 했지만…”
“아니, 내 얼굴이 다른 사람과 뭐가 다른가?”
“아뇨, 전혀 다르지 않아요.”
젊은이는 다소 당황한 듯 웃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게 아니라 유독 친근감을 주는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아저씨가 모스크바 시내를 걷고 있으면 낯선 외국인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근처 길을 물어볼 정도로 말예요.”
“허허, 그렇다면 그들은 큰 실수를 하는 거네. 내가 그 동안 내 길을 잘 찾아 살아왔다면 지금 여기 이렇게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야. 그런데 내가 자네의 허기진 배도 채우고 소원 같은 것도 다 이뤄줬으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해 미안하네. 아 참, 내 이름은 멘델이라고 하네. 메나쳄이라는 이름을 줄인 건데,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그런데 아직 난 누구를 위로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네.”
두 남자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묵묵히 담배만 피웠다. 담배를 다 피운 멘델이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더니 바닥의 접시를 집어 들었다. 그는 접시 위에 침을 몇 번 탁 탁 뱉더니 칼을 갈기 시작했다. 이따금 엄지손톱으로 칼날이 잘 섰는지 확인하곤 했다. 칼갈이가 끝나자 마치 톱질하듯 칼날로 긴 손톱들을 자르기 시작했다. 멘델이 손톱을 다 자르고 나자 레오니드는 그에게 다시 담배 하나를 건넸다.
“난 원래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데도 눈앞에 있으니까 자꾸 피우게 되는군.”
“왜 피우시면 안 되죠?”
“폐와 기관지 때문이겠지만 정확히는 몰라. 그런데 이 세상이 망해가는데 담배를 피우든 안 피우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 안 그래? 이 담배를 보니 문득 여기서 조금 떨어진 발루에츠 마을 농부들이 생각나는군. 울창한 자작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그 마을 농부들이 그렇게 소박하고 정이 넘칠 수가 없다네. 헌데 그 사람들에겐 담배도 없고 또 소금도 없어. 소금은 워낙 귀한 물건이라 아마 100그램 정도만으로도 계란 10개나 닭 1마리와 맞바꾸려고 할 거야.”
이때 레오니드가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옆에 있던 배낭을 뒤져 뭔가를 꺼냈다.
“여기요.”
레오니드가 자랑스럽게 말하며 멘델에게 두툼한 봉지 2개를 내밀었다.
“소금인데요, 만약 아저씨 계산대로라면 닭 20마리 정도는 충분히 바꿀 수 있을 겁니다.”
멘델은 봉지를 받아들고 하나씩 무게를 가늠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난 거지?”
“여름이 되니까 군대에서 배급해 준 방한용 복대가 필요 없어져 그걸로 바꾼 겁니다. 물물교환인 셈이죠. 저도 멀리서 왔어요. 지난 6개월 동안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티며 살아왔고, 방향도 모른 채 몰래 숲속을 걸었어요.”
“모스크바에서 왔나?”
“예. 학교에서 회계경리 일을 배우는데 갑자기 전쟁이 터지더니 모든 게 뒤죽박죽이 돼버렸어요. 16살 때는 절도죄로 8개월 동안 루비앙카 감옥에 갇힌 적도 있습니다. 시계를 훔쳤는데, 그러고 보니 아저씨와 전 시계동지인 셈이군요, 하하. 전 블라디미르로 끌려가 공수 낙하산 부대에 복무했어요. 몇 달 간의 혹독한 훈련이 끝나자마자 올 1월에 바로 낙하산을 타고 스몰렌스크 근처 나치 점령지역 깊숙이 침투했지요. 그런데 하필 한겨울 강풍이 몰아치는 바람에 독일군 막사 근처로 떨어졌지 뭡니까. 후방교란작전이고 뭐고 겨우 탈출해 지금까지 독일군 몰래 계속 도망다니기만 했어요. 아저씨, 죄송하지만 지금 너무 피곤한데다 발도 다치고 열도 나서 잠깐만 잠 좀 자면 안 될까요? 그런데… 여긴 어디에요?”
“허허, 빨리도 묻는군. 아까도 말했지만 여긴 발루에츠 근처의 아주 깊은 오지네. 남동쪽으로는 멀리 브리얀스크가 있는데 작년부터 나치의 카민스키 민병대가 그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일종의 해방구랄까… 허긴 여기도 지금 나치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턱밑에 있으니 독일의 뒷마당이나 마찬가지겠군. 철길은 30킬로쯤 떨어졌고, 길들은 비가 자주 오니까 아주 엉망진창이지. 그래서 독일군들도 기피하는 곳인데 자기들 고기파티가 있을 때만 찾아와 양과 염소와 닭들을 마구 잡아가지. 자, 이리 와서 목욕 좀 하고 푹 자게나.”
레오니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츠를 집어들자 멘델이 말렸다.
“아니, 강에 가서 씻는 게 아니라서 괜찮네. 게다가 강은 너무 위험하기도 하고 멀기도 해. 저~기 헛간 뒤로 가보세.”
헛간 뒤로 간 멘델이 레오니드에게 작은 시설물을 가리켰다. 널빤지를 덧댄 작은 가건물 지붕 위에 철판으로 만든 물탱크와 겨울철 온수를 덥히기 위한 작은 흙난로가 놓여 있었다. 토마토 캔에 작은 구멍들을 내고 금속 파이프와 물탱크를 연결해 만든 샤워기도 걸려 있었다.
“모두 내가 직접 만든 것들이네. 돈도 한 푼 안 들고 다른 사람의 도움도 전혀 없이 말이야.”
“아저씨가 여기 살고 있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나요?”
“허허, 그랬으면 마을에 있는 나치 협조자들의 밀고로 난 벌써 잡혀갔겠지. 여기에 은거한 뒤로부터 마을엔 거의 내려가지 않았네. 간혹 양식이 떨어졌을 땐 인적이 전혀 없는 낯선 길로 가지. 장돌뱅이 수리공으로 위장해 마을을 돌며 고장 난 기계들을 고쳐주긴 하지만, 대화는 거의 안 하네. 수고비는 빵과 감자와 계란 같은 걸 받아 끼니를 해결하지. 돌아올 때는 거의 한밤중에 오기 때문에 미행은 불가능할 테고. 자, 어서 옷을 벗고 좀 씻게나. 비누가 없으니 재로 대충 알아서 씻고. 재는 강가에서 가져온 모래와 섞어 저기 단지 안에 넣어두었네. 군대 화학비누보다야 몸에 붙은 벼룩을 죽이는데도 훨씬 효과적이지.”
“에이- 전 벼룩 같은 거 없으니 걱정 마세요. 몇 달 동안 혼자 걸어서 옮을 수도 없었구요.”
“어서 옷을 벗어 이리 주게. 건초더미나 헛간에서 잠을 잤을 게 아닌가. 벼룩은 귀신보다도 집념이 더 강해 아주 오래 기다리는 법을 알지.”
멘델은 레오니드가 벗은 웃옷의 솔기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음… 생각보다 말짱하군. 자네가 온 걸 환영하지만, 이거 벼룩이 없으니 더욱 환영해야겠는걸, 하하. 빨리 샤워를 하게. 난 아침에 했네.”
멘델이 레오니드의 야윈 몸을 쭉 훑어보다가 눈이 아랫도리에 머물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고래는 안 잡았군.”
레오니드가 포경수술을 안 한 이유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한번 씨-익 웃더니 되려 질문을 했다.
“그런데 제가 유태인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강을 아무리 헤엄쳐 건너간다고 하더라도 유태인의 말투는 결코 씻겨 내려가지 않는 법이지.”
멘델은 빙긋이 웃는 표정으로 유태인 속담에 빗대서 대답했다.
“어쨌든 잘 왔네. 마침 나도 혼자 지내기가 너무 적적하던 참이었는데… 원한다면 계속 머물러도 좋아. 모스크바 출신이든 아니든, 얼마나 배웠든 안 배웠든, 어디서 어떻게 탈출했든, 또 시계를 훔쳤든 안 훔쳤든 그런 것들은 아무 상관없네. 자네는 이미 내 손님일세. 자네가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나로선 행운이지. 누추하지만 이제 이 집 네 방향으로 문을 달아야겠군. 아브라함처럼 벽마다 문을 다는…”
“왜 문을 네 개씩이나 달아요?”
“그래야 손님들이 입구를 찾는다고 헤매는 일이 없지 않겠나, 하하.”
“어디서 그런 것들을…?”
“유태교 구전인 탈무드나 미드라시 같은 데 나오는 이야기네.”
“어쩐지 많이 배운 분 같더니…”
“어렸을 때 동네 랍비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과 책 좀 읽은 것뿐이지. 이제 그 분도 세상을 떠났고 나도 대부분 잊어버렸네. 그저 속담이나 동화 몇 개를 기억할 뿐이지.”
레오니드가 피곤하고 졸리는지 하품을 하며 마침내 간이샤워장으로 들어갔다.
새벽 4시가 되자 이미 날은 밝았지만, 두 사람은 몇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밤새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비가 내렸다. 세찬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잠에서 깨어난 두 사람은 집밖으로 나와 가랑비가 내리는 숲속 오솔길을 산책했다. 멘델은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는 듯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행적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도 유랑민이나 다를 바 없지만 탈영병은 아니네. 1942년 7월, 그러니까 실종된 1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길을 헤매고 있지. 그저 실종된 수십만 명 가운데 하나랄까. 뭐 실종자들의 숫자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겠지만 말이야. 설령 파악됐다 하더라도 산 자나 죽은 자, 그 둘 중 하나일 테지. 물론 난 실종자니까 산 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니고, 그저 유령 같은 존재에 불과하겠지.
나 역시 군대 들어가 총기나 포 다루는 방법 등 모든 군사훈련을 받았지. 일부 훈련장교들은 정말 소름끼치는 괴물 같았어. 그런데 포병으로 막상 전선에 투입된 후 난 아연실색하고 말았네. 왜냐하면 훈련받을 때 사용한 무기들과는 전혀 다른 무기들뿐이었으니까. 어느 것 하나 일치하는 게 없었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군대가 사용한 것들과 심지어 터키에서 굴러온 것들도 있었네. 포탄이 장전되고 나면 사용법을 모르니까 그때부터 암담해질 수밖에 없지. 비록 내가 유태인 시계수리공이었지만 그래도 분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우왕좌왕 하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쿠르츠크와 카르코프 사이에 있는 한 야산에서 상관이 나한테 멀리 있는 독일탱크를 가리키며 직접 대포를 쏴서 없애라고 명령했네. 치열한 전투로 사방은 이미 연기가 태양을 가렸고, 총성과 포성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지. 그러니 대포를 쏘는 건 차치하고 제 자리를 지키는 것 자체가 어려울 정도였단 말일세. 더구나 누가 조준정보도 주지 않는 상황에서 어떻게 명중시킬 수 있겠는가? 아군의 무전기도 망가졌지, 적군의 포탄도 빗발치지, 온통 땅이 들썩거려 금방 산사태도 일어날 것 같지…”
“…”
“나중에 보니 결국 분대원 여러 명이 도망쳤는데, 어쩌면 그들의 판단이 옳았는지도 모르네. 어쨌든 그때가 그들을 본 마지막이었으니 생사는 알 수가 없지. 난 도망치지 않았어. 전쟁포로가 싫어서가 아니라 병사는 자신의 무기를 적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규정 때문일세. 그래서 자리를 지키며 내 무기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했지. 그냥 간단하게 부숴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 무기를 만들거나 고치는 것보다 파괴하는 게 훨씬 쉬우니까. 물론 모든 무기들의 각 부품에는 그 나름대로의 특성들이 있기 때문에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하려면 꽤나 머리를 써야하겠지만 말이야.
여하튼 당시 나로서는 전선을 탈출한다는 생각은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네. 내가 영웅이어서도 아니고 또 전쟁영웅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아마도 그건 비록 군대지만 러시아인들 틈에서 유태인으로 살아남으려면 그들보다는 몇 배 더 용감해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싶어. 그렇지 않으면 금방 겁쟁이나 배신자라는 조롱에서부터 온갖 야유와 수모를 다 당하지. 만약 내가 내 무기를 지키지 못하고 빼앗겨 나치가 그 무기로 우리를 향해 쏜다면? 유태인은… 바로 죽음이지.”
“…”
“그런데 다행히도 이 같은 갈등과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버린 사태가 벌어졌네. 나치가 던진 수류탄들이 대포 밑으로 또르르 굴러가더니 폭발하고 말았지 뭔가. 그것도 여러 개가 신기하게도 거의 동시에 말이야. 그러니 충격을 받은 대포는 당연히 위로 튕겨 올랐다가 아래로 곤두박질을 칠 수밖에 없지. 그런데 그 육중한 대포를 누가 바로 세워놓을 수 있겠어. 난 다행히 정신도 잃지 않고, 대포가 수류탄 파편들을 막아 머리와 이마에 가벼운 부상만 입었을 뿐이었네. 그래서 재빨리 포연으로 뒤덮인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찾기 시작했지.”
“뭘요?”
레오니드의 질문에 멘델이 이마를 약간 찌푸리며 대답했다.
“뭐라니? 아, 내가 분대장이니까 당연히 내 분대원들을 찾아야 할 게 아닌가 이 사람아. 그런데 거의가 보이지 않았어. 벌써 대부분 도망간 사실을 그때서야 알았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쟁은 혼돈 그 자체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 의식의 거대한 혼돈 말일세. 전쟁 중에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네. 종전이 돼서야 승패가 가려지고, 역사책에 기록될 뿐이지. 어쨌든 나치의 줄기찬 포격 속에 밤은 찾아왔지만, 끝까지 저항하던 우린 결국 진지가 함락돼버렸네. 서로 뿔뿔이 흩어져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었고…”
“안 봐도 지옥이 따로 없었겠군요?”
“그렇지. 난 귀가 멀어 소리를 거의 듣지 못할 지경인데다 수류탄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어. 그렇게 난 패잔병이 되어 독일군을 경계하며 캄캄한 길을 부지런히 걸었네. 최전선에서 벗어나 후방의 아군 진지로 가고 있다고 믿었지. 점차 포성도 사라져갔고 간혹 눈에 띄던 독일 병사들도 전혀 보이지 않았어. 때로 수류탄 터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면 재빨리 땅바닥에 바짝 엎드리거나 풀숲 속과 바위 뒤로 숨곤 했어. 마치 숙달된 조교처럼 말이야. 최전선에서는 무엇이든 빨리 숙달되게 만들지. 빨리 배우지 않으면 죽으니까.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졌고, 포성이 다시 들려왔다 멎었고, 천지가 다시 진동했다 가라앉았고, 그렇게 패잔병의 하루 일과는 반복되었네.”
“…”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어. 마치 약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멀리서부터 천천히 땅이 울리며 뭔가 다가오는 느낌이었지.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스쳐 빨리 피할만한 곳을 찾아봤지만 주위에는 감자밭밖에 없었어. 그래서 이리저리 허둥대는데 이상한 물체가 눈에 띄었지. 바로 철로였네. 길게 평행선을 이룬 그 철로 위로 시커먼 물체 하나가 마치 강 위로 바지선들이 흐르듯 움직이고 있었어. 나치의 군수보급품 수송열차였지.
난 그때서야 내가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네. 지금까지 아군 진지로 가는 줄 알았는데 거꾸로 적군 진지로 가고 있었던 거지… 전선으로 달리는 열차는 마치 거대한 산맥이 굽이치는 것 같았어. 그런데 그때 불현듯 어릴 적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뭔가.
‘넌 강해서 장래에 세상을 충만케 할 사람이 될 게야.’
무슨 뜻인지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쨌든 나치는 무장열차를 만들었고 신은 나치를 창조했지. 그런데 이보게, 신은 왜 나치를 창조했을까?”
“예? 그걸 제가 어떻게…”
“아, 그게 아니면 신은 왜 사탄으로 하여금 나치가 태어나도록 허락했느냐 이 말일세. 알량한 인간의 원죄 때문인가? 그래서 아무 죄 없는 내 아내가 다른 사람의 원죄 때문에 대신 죽어야 했나? 무고한 양민들을 구덩이 속에 매장해버린 바로 그 나치놈들의 원죄를 대신해서 말이야! 한날한시에 죽은 그 수백 명의 사람들, 그 수백 명의 아이들 목숨을 신은 과연 원죄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아, 이거 내가 너무 흥분해서 미안하네. 하지만 좀 이해해주게. 아내를 잃은 슬픔 못지않게 지난 1년 동안 이런 생각에 쭉 빠져 있었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네. 그리고 사람의 숨결을 느끼며 서로 대화 같은 걸 해본지도 1년이 넘었고…”
물론 멘델도 인간의 원죄의식은 믿지 않는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원래 죄인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를 지어도 기독교처럼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신 피해자를 먼저 찾아가 속죄하고 용서를 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죄인은 반드시 지옥으로 간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웬만큼은 랍비들의 책을 읽어봤지만, 그 어디에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그런 끔찍한 지옥은 보이지 않고 거의가 천당만 그려져 있었다. 유태인들의 인생관과 종교관이 그만큼 낙관적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또 유태어를 보면 더욱 그렇다. 유태어사전 어디에도 타종교의 단골메뉴인 ‘지옥’이나 ‘저주’ 같은 단어들이 없다. 당연히 일상적인 욕설을 표현하는 단어들도 없다. 그래서 각박한 세상에 이리저리 부대끼며 살다보면 한바탕 싸울 일도 많을 텐데, 유태인들은 감정을 폭발시킬 적절한 단어들이 없어 애를 먹기 일쑤다. 멘델도 여러 번 그런 곤욕을 치렀다.
가랑비도 그치고 바람도 잦아들자 숲과 들판에서는 싱그러운 풀냄새들이 피어올랐다.
나뭇잎에 맺힌 빗방울들이 또르르 굴러내리고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기 시작했다. 마치 이 세상에 전쟁 같은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더없이 평화로운 이른 아침이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들판 저쪽 아래서 어린 소녀의 아름다운 노래가 들려왔다. 이윽고 몇 마리의 양이 먼저 보이더니, 가냘픈 맨발의 소녀도 보였다. 한가로이 양떼를 몰며 뒤따르던 양치기소녀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군인코트를 입고 있었다. 물방울 같은 투명한 얼굴 탓인지 목에 두른 붉은 스카프가 유난히 눈부셨다. 예쁜 양치기소녀는 특이하게도 농부처럼 민요를 일부러 비음을 내며 흥얼거렸다. 그러면서 양떼를 따라 아무 생각 없이 두 남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당황한 두 남자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변에는 숨을 곳이 마땅찮았기 때문에 소녀와 마주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마침내 이쪽으로 곧장 걸어오던 소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지더니 노래도 뚝 그쳐졌다. 엉겁결에 멘델과 레오니드가 몸을 곧추 세웠다. 양쪽이 당황한 표정으로 한동안 꼼짝도 않은 채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소녀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황급히 양떼를 몰며 마을 쪽으로 사라졌다. 서로 말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잠깐 가만히 서 있던 멘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바로 그거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그게 바로 사냥꾼에게 쫓기는 늑대의 삶이지. 자네가 도착하자마자 이런 상황에 처해 정말 안타깝군. 이제 우리는 두 명이니 문제가 더 심각하네. 몇 달 동안 이런 일은 없었는데 말이야. 저 양치기소녀와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늑대와 다를 바 없어졌네. 우리가 전혀 위험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소녀는 우릴 보고 엄청 놀랐을 거야. 마을에 가면 분명히 수상한 사람들을 봤다고 소문내겠지.
어쩌면 우리가 자기를 위협해 입을 막으려 했다는 둥 이상한 소리까지 할지도 몰라. 그럼 당연히 나치가 우릴 잡으러 오겠지. 설령 오지 않더라도 마을 농부들이나 도적떼라도 들이닥치겠지. 이보게, 어서 짐을 싸서 여기를 떠나세. 고생해서 만든 보금자리를 놔두고 떠나는 게 너무 아쉽긴 하지만 어쩌겠나. 안전한 데로 옮겨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그래도 여름이라서 천만다행이군.”
도피자는 보안과 기동성이 생명이므로 짐을 꾸리는 것도 간단했다. 식량 등 극히 필요한 것들만 군용배낭에 넣었다. 그런데 짐을 다 꾸린 후 멘델은 마치 갈림길에 선 것처럼 자꾸 망설이는 눈치였다.
“왜 그러세요? 뭐 잊어버리신 거라도 있나요?”
멘델은 자작나무 등걸에 앉아 아무 말 없이 자꾸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는 뭔가 결정한 듯 벌떡 일어나 배낭에서 작고 단단한 물건들을 꺼냈다.
“이것들은 일단 여기 숨겨두고 다음에 가져가야겠어.”
배낭을 비운 멘델이 울창한 숲속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레오니드도 얼른 뒤따랐다. 그러나 멘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걸었다.
“난 자네한테 내 얘기를 많이 했는데 자넨 별로 하지 않는군. 아까 라거에서 도망쳐왔다고 했지? 음… 왜 말하고 싶지 않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군. 나치에겐 자네는 탈출병이자 러시아 유태인이지. 거꾸로 러시아인들에겐 자네는 탈영병이나 스파이로 간주될 수도 있겠지. 진짜 그럴지도 모르고…”
“진짜 그럴지도 모르다니요? 헛 참 나, 별 소릴 다 듣네요.”
“뭐 자네를 보아하니 스파이 같지는 않아서 내 믿고 공개하겠네. 저기 벼락 맞은 자작나무 뿌리 밑을 파보게.”
레오니드는 멘델이 가리키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 야전삽으로 땅을 팠다. 얼마 후 둘둘 말은 군용텐트 천이 나왔다. 단단하게 묶은 끈을 풀어보니 기관단총과 권총이 보였다. 멘델이 능숙하게 기관총을 분해해 배낭에 넣은 다음, 그들은 재빨리 길을 나섰다.
3시간 정도 줄곧 걸은 다음 레오니드가 잠시 쉬려고 멈추었다.
“이보게, 젊은 친구. 벌써 지쳤나?”
“지친 게 아니라 아저씨 걸음을 따라갈 수가 없을 뿐이에요. 훈련 받을 때 죽도록 행군하며 숲속에서 살아남는 방법도 배웠어요. 나침반 대신 나무등걸의 이끼와 북극성을 보며 방향감각을 익혔고 또 참호 파는 방법도 배웠구요. 근데 모조리 이론에 불과했어요. 교관들이 대부분 모스크바 도시 출신이라서 길이 아닌 곳은 익숙치가 않았으니까요.”
“그럼 여기서 배우면 되겠군. 나도 숲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여기서 많은 걸 배우게 되었네. 이스라엘 유태인 역사에 등장하는 숲이라고 해봐야 죄다 지상낙원뿐이었고, 그게 어떻게 변했는지는 자네도 잘 알겠지. 지난 6천 년 동안 끊임없는 전쟁 때문에 모든 게 변하지 않았는가. 물론 우리 자신도 모두 변할 수밖에 없었지. 그게 우리들에게 그다지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아. 여름이 되면 이 숲은 우리의 벗이 되기도 하지. 무성한 나무들은 몸을 숨길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고, 허기를 채울 열매도 주지.”
(제1장 전량)
--------------------------------
작가 소개
프리모 레비 (Primo Levi, 1919-1987)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1941년 토대노대학교 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43년 이탈리아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빨치산 부대에 가담해 투쟁하다가 체포,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 2년 후 아우슈비츠에서 토리노로 돌아와 니스 화학공장에 일했다. 1947년 『이것이 인간인가』를 출간하고 1963년 『휴전』 출간으로 제1회 ‘캄피엘로상’을 받았다. 1965년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처음으로 공식방문했다. 1975년 『주기율표』를 출간하고, 1978년 소설 『멍키스패너』 출간으로 ‘스트레가상’을 받았다. 1982년 아우슈비츠 경험과 동유럽 유태인 빨치산 투쟁을 그린 자전적 장편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를 출간해 ‘캄피엘로상’ 및 ‘비아레조문학상’을 동시에 수상했다. 이 해 레비 홀로 아우슈비츠를 은밀히 방문했다. 1983년 카프카의 『심판』을 번역 출간하고 1986년 『익사한 자 구조된 자』를 출간했다. 1987년 4월 11일 이탈리아 토리노 자택에서 투신자살했다.
--------
역자 소개
김종돈
대학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전공했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마이 프렌치 라이프』, 『여성을 위한 게임의 법칙』, 『성공나침반』, 『어둠 속의 코끼리, 팍스 아메리카나』, 『신자유주의 이후의 라틴아메리카』, 『와인 정치학』, 『낭만주의 경제학자』, 『시대정신』, 『오바마의 속임수』 등이 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