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눈 밝은 독자라면 여기 실린 서평들이 개중 호의적인 평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상을 한결같이 예찬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눈치 챌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런 전투적인 논조는 내가 공부한 케임브리지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물려받은 유산이 아닐까 싶다. F. R. 리비스가 말년에 교편을 잡고 있던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연구한 내게는 신랄함이 친숙한 정서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책에 수록된 글이 리비스의 글보다는 좀 유머러스하게 읽혔으면 싶다. 그리고 비평이라는 데는 더러 앙심이 끼어들기 쉬운데, 나 자신이 정기적으로 앙심 어린 비평의 대상이 되는 만큼 그것을 익히 알고 조심하는지라, 여기 실린 글 몇 편이 논쟁적이고 풍자적일 수는 있어도, 딱히 악의적이거나 불공정하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물론 여러분은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혹시 여러분이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라면, 우리 같은 급진주의자가 여러분을 비판하는 것 자체를 가지고 뭐라 하면 안 된다. 그게 우리 본업인 걸 어쩌랴. 그러니 정적들께서는 우리보다 머릿수가 훨씬 많으니까, 굳이 우리까지 박수를 보내지 않더라도 여러분끼리 서로 박수를 쳐 주면 그만이라는 사실을 꼭 잊지 마시라. 어차피 좌파에서 누구 한 사람이 멋모르고 나서서 시인 W. B. 예이츠는 정말이지 바보 아닌가 싶은 구석이 있다거나 이사야 벌린은 전설적인 천재 자유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가는, 당장 대형 합창단 규모의 논객들이 득달같이 몰려와서 찬양의 할렐루야를 고래고래 외치는 것이 현실이니까.
이런저런 지면에 발표한 이 서평들을 통해, 쉽지 않은 주제에 관해 마음 편히 글을 쓸 수 있는 공적 영역이, 비록 흔적뿐이더라도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영국에서는 특히 재기 넘치는 메리 케이 윌머스가 편집장으로 있는 <런던 리뷰 오브 북스>가 이런 토론의 장을 마련해 주었다. 내 서평을 대부분 처음 실어 주고, 오랜 기간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글을 자주 발표할 수 있게 해 준 이 잡지와 관계자 여러분께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다만 앞으로 서평을 읽으면서 별로 고마운 마음을 느끼지 못할 독자들께는 미리 사과 말씀을 전한다.
2002년 더블린에서 | 테리 이글턴
오스카 와일드 자신도 그랬지만, 영국인들은 와일드가 아일랜드인이었다는 사실을 깜박 잊을 때가 왕왕 있다. 아일랜드가 영국에 가축과 곡물만 바친 게 아니라 위대한 문학작품까지 써 바친 것이 벌써 수세기도 넘었으니까 말이다. 데클랜 키버드Declan Kiberd2는 『와일드 ─ 아일랜드인』에 실린 신선한 평론에서 영어가 아일랜드인의 모국어가 아니라는 사실과 역사적 사건들을 교묘하게 연결시켰다. 와일드도 말했듯이, ‘모국어가 아닌 말로 자신들을 표현해야 하는 운명을 짊어졌기’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은 본토인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활달함과 대담함을 영어에 불어넣을 수 있었다. J. M. 싱3처럼, 아일랜드인들은 특유의 구어를 영어에 각인시켜 매력적인 관용구를 새로이 창조했다. 와일드의 아들은 아버지가 곧잘 아일랜드어로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고 술회했는데, 오스카 와일드가 아일랜드의 저항적 민족주의자 겸 민속 연구자인 어머니와 유명한 아일랜드 골동품 수집가인 아버지를 둔 작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랬을 법하다.
와일드는 성 정체성 못지않게 언어에서도 양측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붙잡혀 있는 처지였는데, 더구나 영국계 아일랜드인 출신이니 인종적으로도 중간자의 위치였다. 오언 더들리 에드워즈가 해박하고 우아한 에세이에서 일깨워 주듯이, 아마 와일드는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고 모친의 정치적 신념을 이어받았으리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와일드는 상층 중간계급 출신의 프로테스탄트로서, 아동용 동화로 위장한 혁명 전단을 만들기도 했다. 안젤라 부르크는 재미있는 글을 썼는데, 그것은 악마에 씌었다며 박해받은 아일랜드 여성들과, 다른 종류의 요정4에 사로잡힌 와일드 사이의 유사성을 고찰하는 글이다.
와일드는 정치적으로 가톨릭·아나키스트·공화파에 동조했지만 상류 계급의 기생충이었으며, 사회주의자인 동시에 사교계 명사였고,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이었으면서 싸구려 호텔에서 미소년들과 놀아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귀부인들과 환담을 나누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급진주의 무리를 자유롭게 옮겨 다니면서 윌리엄 모리스나 크로폿킨 왕자5 같은 사람들과 친교를 맺었다.
제임스 조이스는 일찍이 식민지 대도시인 더블린의 모순적 처지에 착안해 더블린Dublin의 철자를 ‘Doublin’6이라고 썼는데, 와일드가 조이스와 동포일 뿐 아니라 같은 더블린 출신이라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와일드의 연극은 비밀스러운 자아나 유령 같은 도플갱어, 얼룩진 기원, 분열된 정체성을 빼면 시체다. 『와일드 ─ 아일랜드인』에 실린 도발적인 평론에서 제루샤 매코믹Jerusha MaCormack은 와일드를 전형적인 아일랜드인(길들여지지 않고 무정부적이며, 상상력이 풍부하고 재기발랄한 동시에 정열적이고 자기 파괴적인)과 연출된 영국인(냉정하고 우아하며 남을 얕잡아보고 용의주도한) 양쪽을 패러디하는 인물로 바라본다. 아일랜드인이 하면 게으르다고 할 것을 영국인이 하면 여가를 보낸다고 한다. 이런 경우처럼 매코믹은 와일드가 영국인 노릇을 너무나 세심하고 충실하게 ‘연기’한 나머지 그 연기가 결국 영국인들을 비꼬는 행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하여 모든 사회적 정체성의 구축된 본성을 발가벗기고 암암리에 제국이 덧씌운 식민지의 이미지에 도전한다는 것을 간파한다.
1 ‘walk on the Wilde side’는 ‘일탈하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라는 표현인 ‘walk on the wild side’에서 ‘wild’ 대신 오스카 와일드의 ‘Wilde’를 넣은 말장난이다.
2 1951~. 아일랜드의 교수이자 문학비평가.
3 1871~1909.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
4 요정을 뜻하는 ‘fairy’는 동성애자, 특히 미소년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다른 종류의 요정’이란 바로 미소년을 뜻한다.
5 1842~1921. 러시아 출신의 지리학자이자 혁명가로서, 다윈 진화론이 주장한 적자생존의 법칙을 ‘갈등’이 아니라 ‘협동’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아나키즘의 원리를 이론적으로 정초했다.
6 아일랜드의 수도 ‘Dublin’과 이중을 의미하는 ‘double’의 합성어.
와일드가 명성을 널리 떨치게 해 준 날카로운 재치에 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것이야말로 고도로 교육받은 아일랜드 사나이들의 특성으로, 매코믹이 주장하듯이 제국주의적 제2국어에 맞선 식민지의 복수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불만을 잔뜩 품은 또 다른 아일랜드인, 제임스 조이스가 쓴 『피네건의 경야』에서는 급기야 영어가 녹초가 될 때까지 두들겨 맞아 넝마가 되어 버린다). 디어드르 투미Deirdre Toomey의 설득력 있는 에세이는 와일드의 아포리즘이 와일드의 다른 글들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의 구술 전통에 속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기록된 문자나 활자보다 목소리를 더 선호하는 아일랜드의 전통은 와일드 자신이 고정된 정체성보다 부유하는 정체성에 더 관심을 둔 사실하고도 관련이 있다. 와일드의 경구들은 영어의 클리셰를 전복적으로 해체했다. 관습적 경구의 김빠진 구절들을 가져다 한두 단어를 바꿔 물구나무 세우거나 부조리의 극단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와일드는 역위에 몰두했는데, 여기서는 꼭 선정적 의미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일랜드 혈통인 와일드의 익살에서 드러나는 전형적인 특성은 도착과 폭로인데, 이것은 상대적인 약자로서 강자인 영국인들의 재미없는 성실함에 날리는 일격이다. 대조법이 정교적 사고방식의 특성이라면 아일랜드 식민지의 관습적 문투는 패러독스, 아이러니, 모순 어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이야말로 바로 조이스가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기’라고 일컬은 것이다.
와일드는 탈구조주의자7의 원형으로서, 그 무엇도(특히나 성 정체성은) 완전히 자신과 동일하지 않으며, 오로지 죽음의 순간에나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와일드는 모친에게서 전투적인 페미니즘을 적잖이 물려받았다. 키버드가 지적하듯이, 『진지함의 중요성』에서 남자들이 부실한 오이 샌드위치나 먹으며 어슬렁거리는 동안 여자들은 무거운 철학책을 읽고 있다. 식민지적 역위는 여기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나 빅토리아 화이트가 유행에 개의치 않는 탁월한 글에서 와일드를 비판하면서 주장했듯이, 와일드의 페미니즘에 배어 있는 여성 혐오증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실제로 이렇게 심오하고 지적인 선집에 관해 사람들이 내놓을 수 있는 비판은, 다루는 주제에 경외감을 품은 나머지 너무 관대한 평을 내리고 있다는 정도가 아닐까.
와일드처럼 버나드 쇼 역시 프로테스탄트 교도이자 더블린 출신으로, 영국인을 조롱하는 또 한 명의 공식 어릿광대였는데, 쇼는 이 세상에서 영국인의 진지함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건 다시없다고 말했다. 점잔 빼는 도덕주의와 형이상학적 깊이에 대한 경멸, 그리고 스타일, 마스크, 표면, 외양을 중시하는 와일드의 댄디즘은 그 자체가 정치학으로서, 전형적으로 아일랜드적인 삼총사, 즉 실패, 주변성, 침탈이라는 명분 아래, 후기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이데올로기적인 엄숙함을 조롱한다. 버나드 오도노 휴가 놀라울 정도의 통찰력을 자랑하는 에세이에서 지적했듯이, 희생양과 순교(이것 또한 현저히 아일랜드적인 모티브다)에 관한 와일드의 강박이 모호한 함축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영국계 아일랜드인 기득권층의 고집스럽도록 불충한 아들인 와일드는 마침내 스스로 자기 발밑을 무너뜨렸다. 연속적인 자기 파괴로 점철된 와일드의 삶은 아일랜드 기득권 계층의 최종적 붕괴와 기묘할 정도로 정확히 조응한다. 매코믹은 와일드와 찰스 스튜어트 파넬8의 근친성을 예리하게 파악한다. 파넬은 영국의 성관습을 어지럽힌 또 다른 아일랜드 명사로, 매코믹의 주장에 따르면 와일드가 그 사건을 두고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것은 파넬의 타락에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탄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와일드의 침묵 자체가 실은 귓가를 쩡쩡 울리는 웅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저 다시 날아오르려고 추락했을 뿐이다. 오늘날 더블린의 메리온 광장에 놓인 돌 위에는 와일드의 화려한 동상이 태연히 앉아 있는데, 이 동상은 (아일랜드 미술사가인 폴라 머피가 에세이에서 밝혔듯이) 지역 주민들에게 ‘퀴어 온 더 스퀘어’, 또는 ‘팩 온 더 크랙’으로 불린다고 한다.9
7 구조주의는 근대 서구 사상의 주류였던 인간 중심주의, 즉 인식의 원리인 동시에 세계 존재의 원리인 ‘주관성’의 철학을 거부하는데, 포스트구조주의는 이런 인식론적 혁명을 근간으로 하되, 구조주의가 대치한 제반 관계에 대한 구조화의 관점이 갖는, 여전히 폐쇄 체계를 구축해 구조를 주체화시키는 경향을 비판하고, 비형이상학적 사고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한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참조).
8 20세기 초 아일랜드 급진민족주의당인 신페인당의 당수 파넬은 간통 추문에 휩쓸려 실각했다.
9 ‘quare on the square’는 광장에 있는 호모라는 뜻이고 ‘fag on the crag’은 바위에 앉은 호모라는 뜻으로, 각운을 맞춘 조롱조 표현이다. ‘quare’는 ‘queer’의 아일랜드식 표기다.
탈식민주의가 문학 비평에서 각광받고 아일랜드가 전세계에서 알아주는 유행 상품이 된 지금, 이 둘이 하나로 만나는 건 필연이다. 게리 스미스Gerry Smyth의 『탈식민화와 비평』은 아일랜드 문학 비평이 민족 자치라는 과업에 대처하는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다양한 탈식민주의 이론들이 민족주의와 비식민화에 관해 내놓을 수밖에 없는 주장들을 현명하고 풍부하게 고찰한다. 문화 좌파의 껄끄러운 문체로 쓰인 이 책은, 문화와 정치가 아무리 긴밀하게 얽혀 있어도 실은 서로 다른 종류의 활동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또한 이 책은 반식민주의 혁명이, 그것이 반대하는 지배 체제의 통치 논리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두고 지나치게 고민하는 구석이 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지배 체제에 있는 모든 요소가 해방에 적대적이라는 잘못된 가정을 바탕으로 한 재치문답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아일랜드 평론계 역사상 주요한 만남들을 잘 연구한 데서 나온 유용한 고찰을 담고 있을뿐더러 아일랜드의 명시 선집과 정기간행물의 정치학을 대단히 명쾌하게 다루고 있기도 하다. 아일랜드를 주제로 한 당대의 수많은 연구와 달리, 스미스의 연구는 고립된 개별 텍스트보다는 제도적 구성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다른 연구보다 훨씬 유익하다. 다만 이 책이 와일드에게서 참여정신만이 아니라 우아함도 약간만 빌려 왔더라면, 형식을 단순히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 취급하지 않는 아일랜드 문화의 정신을 더 잘 그려 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서문, 오스카 와일드 관련 장 전문)
---------------------------------
필자 소개
테리 이글턴 Terry Eagleton
영국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문학비평가, 문화이론가. 1943년 잉글랜드의 샐퍼드에서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계 노동계급 가정에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학위를 딴 뒤 그곳에서 잠시 가르치다 옥스퍼드 대학교로 옮겨 오랫동안 재직했다. 이후 맨체스터 대학교를 거쳐 아일랜드 국립대학교, 랭커스터 대학교, 미국 노터데임 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글턴은 대학 시절의 스승 레이먼드 윌리엄스(1988년 타계)를 이어 맑스주의 문학?문화이론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왕성한 저술 활동과 사회참여를 병행해왔다. 특히 문학과 미학, 사회이론 따위에 내재한 이데올로기를 파헤친 저서가 많다. 저서로 『문학이론입문』, 『미학사상』,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성스러운 테러』, 『우리 시대의 비극론』,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 『시를 어떻게 읽을까』, 『성자와 학자(소설)』(이상 국내 출간), 『비평과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입문』, 『발터 벤야민』, 『비트겐슈타인(영화 시나리오)』, 『문화의 개념』, 『삶의 의미』, 『악에 대하여』 등 40여 권이 있다.
--------
역자 소개
김지선
영문학을 전공한 후 출판사 편집자로 근무했다.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돼지의 발견』, 『당신의 삶을 바꿀 12가지 음식의 진실』,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만과 편견』 등이 있다.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