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인간 쓰레기
예일대학교에서 ‘테리 특강’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을 때 나는 유쾌하게 격식을 파괴하는 미국 사회의 특징을 보는 듯했다. 안면을 트자마자 이름을 부르는 미국 문화에 오래전부터 익숙해져 있기는 하지만, 먼 거리를 날아온 초청장에 담긴 그 친밀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카를 융이 연사였을 때는 이 강연을 ‘척 특강’이라 했고, 마거릿 미드의 강연 때는 ‘매기 특강’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여하튼 이런 과분한 친절에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 따라서 나는 여기 예일에 머무는 동안 이글턴 교수가 아니라 이글턴 박사로 불리기를 바란다. 영국인도 긴장을 풀고 느긋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테리 특강이 전통적으로 두 가지 주제, 내가 난처할 정도로 아는 게 거의 없는 과학과 종교를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걸 알고는 다정한 초대장을 받은 즐거움도 곧 식어버렸다. 테리 특강이 주된 관심사로 삼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 나는 경험이 별로 없기도 하지만, 그 적은 경험마저도 어린 시절 언제나 무섭고 밉기만 했던 교장 선생 콜럼바 수사(修士)의 모습으로 시작됐다. 화학자이며 성직자였던 콜럼바 선생의 종교는 과학 법칙만큼이나 몰인정했고, 권위적인 로마 가톨릭 수사답게 그는 인간보다 실험관을 훨씬 더 편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른다고 해서 일을 그냥 포기한 적이 없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1960년대에 아마추어 신학자로 학문의 길을 시작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이후, 에드바르트 스힐레벡스라는 이름의 철자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네덜란드의 네이메헨에 본부를 둔 난삽한 신학 잡지들 중 하나의 편집위원회에 곧바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시절의 얘기다. 이런 점에서,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사람들─이후로는 편의상 두 사람을 ‘디치킨스(Ditchkins)’로 줄여 부르기로 하자.─이 실없는 소리를 해댈 때 뭐가 잘못됐는지 알아차릴 만큼의 신학적 지식은 내게 있다고 생각한다. 히친스와 도킨스를 너무 성급하게 하나로 뭉뚱그리기 전에,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 God Is Not Great』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은 크게 다르다는 점을 먼저 지적해두어야겠다. 히친스의 책은 멋스럽고 재미있으며 몸을 데일 정도로 열정적이고,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잘 쓰였지만, 도킨스의 책에는 그런 수식어가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도킨스의 교조적인 맹렬함이 문체에도 파고든 것이다. 한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저토록 날리기 전에는 내가 속한 극좌파 정치조직에서 동료로 활동했다. 그러나 히친스가 더 높은 곳을 향해 꾸준히 매진하고 그 과정에서 바빌론의 시민으로 귀화■하는 정치적 발전을 이루어낸 데 비해 나는 예전의 낡은 정치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발달장애의 전형적 사례라고나 할까.
또 하나 솔직히 말하면, 내가 그나마 조금이라도 아는 것은 기독교 신학일 뿐 다른 종교의 신학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따라서 주제넘게 얘기의 범위를 넓히지 않고 기독교 교리에 국한하여 좁게라도 제대로 분석해 보려 한다. 과학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과학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대부분의 포스트모더니스트가 과학을 의심쩍게 받아들인다■는 사실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과학이 말하는 거의 모든 것을 열렬히 지지할 준비가 돼 있다. 나는 이 강연에서 과학과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에 대해서도 언급할 생각이다. 그러니 내가 선택한 세 주제 중 두 가지가 영국의 술집에서 예부터 금지돼 온 토론 주제인 셈이다. 정치와 종교 말이다.
나는 개인사를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 강연에서는 그걸 피할 수 없을 듯하다. 나는 영국의 노동자계급 집안에서 전통적인 아일랜드계 로마 가톨릭 신자로 자라면서 어린 시절에 복잡하고 난해한 교리를 주입받았다. 그런 교리들이 인간 실존과 어떤 관계를 지니는 것으로 상정된다는 점을 나중에야 깨닫고 나는 상당히 놀랐다. 다시 말하면, 엄격한 마르크스주의자 부모의 슬하에서 부정의 부정, 양질 전화(量質 轉化)따위의 변증법 공식들을 배우면서도 그 모든 게 인간의 자유와 정의라는 문제와 관계있음을 전혀 모른 채 자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혼자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즈음 나는 그때까지 배운 종교적 교리의 인간 실존 설명 능력이 개구리 울음소리의 그것보다도 나을 바 없다고 여기게 됐기 때문에, 대학에 입학한 뒤 종교를 더 이상 들먹이지 않고 보다 사안에 적절하며 인간적인 시각과 어법을 택한 것은 당연해 보였다.
1960년대 초 케임브리지에서 그건 주로 실존주의였다. 실존주의란 쉽게 말해, 우리가 열아홉 살이고 집에서 멀리 떠나 약간의 우울에 젖어 있으며, 유아원에 간 아이처럼 뭐가 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존재론적으로 그럴듯하게 말하는 방식이었다. 이삼십 년 지난 뒤에도 십대 후반 아이들의 조건은 마찬가지였지만, 그걸 대변하는 어법은 후기구조주의라고 불렸다. 그 외에 사회주의도 있었는데, 나는 자라면서 이것을 아일랜드 공화주의■와 더불어 알게 되었다. 냉전과 대량살상무기의 시대이자 반(反)식민주의 혁명의 시대에 사회주의는 림보(카리브 해 지역의 유명한 춤 림보와 혼동하면 안 될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에 관한 가톨릭의 교의,■ 또는 이른바 성인(聖人)이라고 하는 따분하게 관료적인 사람들을 공경하는 방식의 정확한 라틴어 용어들을 기억해 내는 일 따위보다 조금은 더 인류에게 의미 있어 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단순치가 않았다. 케임브리지에 입학한 직후, 다시 말해 웬만큼 민감하며 분별력을 지닌 편인 내가 이전에 학교에서 익힌 교의들을 터무니없다며 퇴짜 놓았을 법한 시점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됐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세상의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요구에 긴급히 부응하는 복음 해석이 제시됐다. 말할 필요도 없이 여기에는 상당한 난관이 따랐다. 공의회에서 시작된 새로운 사고가 일반화되기 위해서는, P. G. 우드하우스의 소설에서 한 등장인물이 ‘돼지’라는 말을 이해 못하는 듯하자 상대방이 내뱉은 말처럼 “지루한 기초작업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잘 알다시피 어떤 신념체계를 가볍게 무시해버리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예컨대 기독교라 하면 아주 이상한 사람들, 그 일부는 수치심 때문에 타인들 앞에 당당히 나서지 못하고 어둠 속에 소심하게 숨어 사는 사람들이나 믿게 되는 종교로 멋대로 규정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일축하는 식이다. 이는 종교에만 적용되는 현상이 아니다. 니체가 푸코의 선구자였다고 제대로 이해하는 것보다 그가 풋내기 나치였다고 믿는 편이 더 쉽다. 마르크스주의를 깊이 파고드는 수고를 피하고 싶다면, 남자건 여자건 모두 정신적으로 똑같이 불쌍하고 물질적으로도 똑같이 가난한 평등의 세계를 꿈꾼다는 이유로 마르크스주의를 내팽개칠 수 있다.
내가 열여덟 살쯤에 몇몇 반체제적인 도미니크회 수도자들과 함께 비터■를 마시면서 우연히 알게 된 이른바 신(新)신학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게 아니었다. 나 같은 애송이 가톨릭 신도에게나 새로웠을 따름이다. 리처드 도킨스류의 19세기식 자유주의적 합리주의자들이 흔히 상상하는 바와는 달리 신신학은 창조주 하느님을 최고의 제작자, 우주의 최고 경영자로 해석하지 않았다. 신학자 허버트 매케이브는 그런 해석을 “하느님을 지극히 크고 막강한 피조물로 생각하는 우상숭배적 견해”라고 비판했다. 도킨스는 기독교가 과학과 대립되는 우주관을 제시한다고 잘못 생각한다. 철학자 대니얼 데닛이 저서 『주문을 깨다 Breaking the Spell』에서 그랬듯이 도킨스도 기독교 신앙이 세상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는 야바위 이론이라고 여긴다. 이런 점에서 도킨스는, 소설을 서툴게 짜깁기한 사회학이라고 생각하는 탓에 소설이라는 형식의 취지를 이해 못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막스 베버의 사회학 책을 읽으면 그만인데 로베르트 무질의 소설과 힘들게 씨름할 이유가 뭐냐는 식이다.
그와 달리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창조주 하느님은 세상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전제가 아니다. 요컨대 아퀴나스의 신학에서 하느님은 우주가 양자 진공 내에서 일어난 불규칙한 요동의 결과물이라는 이론과 경쟁하지 않는다. 사실 아퀴나스는 세상에는 어떤 기원도 없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도킨스는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일종의 범주오류를 범하고 있다. 도킨스는 기독교가 일종의 사이비 과학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증거의 필요성을 몽땅 제거해 버리는 편리한 길을 택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또 증거의 개념에 대해서도 과거의 과학적 기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도킨스는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증명할 수 있는 것과 맹목적인 믿음을 칼로 자르듯이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정말로 흥미로운 사안들 대부분은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도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르면서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망원경과 현미경 덕분에 [종교는] 이제 어떤 중요한 것도 설명하지 못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애초부터 뭔가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다. 따라서 히친스의 말은 전기 토스터가 나왔으니 체호프는 잊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신약성경은 창조주 하느님을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도의 입장에서 과학과 종교가 가장 근접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에서가 아니라 양자에 공통되는 창조적 상상력의 행위에서다. 기독교인은 그런 창조적 상상력의 근원을 성령에서 찾는다. 하이젠베르크나 슈뢰딩거 같은 과학자는 뛰어난 상상력을 지닌 예술가라 할 수 있다. 우주와 관련해서는 추악하고 흉한 것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게 진실에 더 가까우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우주적 진리란 가장 깊은 의미에서 표현 양식의 문제다. 플라톤이나 섀프츠베리 백작, 존 키츠가 의식했듯이 말이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과학은 가치함축적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하느님은 초월적인 제작자가 아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만물을 지탱해 주는 존재이며, 세계에 처음이 없었더라도 이런 역할을 했을 존재다. 창조란 그저 사물이 시작되도록 하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지 않고 뭔가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이며, 모든 실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하지만 하느님 자신은 어떤 종류의 실체도 아니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실체들에 견주어 설명될 수 없다. 나의 질투심과 내 왼발이 하나의 짝을 이룰 수 없는 것과 같은 논리다. 하느님과 우주를 합한다고 둘이 되지는 않는다. 유대교에서는 하느님을 형상화하는 일을 금지한다. 하느님이 비실체일 뿐 아니라 하느님의 유일한 형상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종교를 무산시키기 위해 하느님이 끊임없이 애썼음을 기록한 문헌이 있다. 바로 성경이다. 창조자 하느님은 연구지원금을 주는 기관을 깊이 감명시키기 위해 지극히 합리적인 설계에 따라 일하는 하늘의 공학자가 아니다. 어떤 의도가 담긴 기능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창조하는 일 자체를 좋아하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세상을 만들어낸 예술가이자 탐미주의자다.
이를 좀더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for the hell of it(별다른 이유 없이, 순전히 재미로, 혹은 어찌 되나 보려고)’■이라고나 할까. 따라서 창조된 세상은 선물이고 잉여물이며, 굳이 필요하지 않았던 행위의 산물이다. 불가피해서가 아니라 아무런 이유 없이 만든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신학에서 세상은 전혀 필연적인 게 아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애초에 세상을 만들어야겠다는 감상적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 걸 처절하게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세상을 창조한 이유는 사랑이었지 필요가 아니었다. 하느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천지창조는 최초의 ‘동기 없는 행위,무상(無償)의 행위’였다. 세상이 무(無)에서 만들어졌다는 교리는 우리에게 우주의 아찔한 우연성에 유의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모더니스트의 예술작품이 흔히 그러하듯이■ 우주도 자칫 창조되지 않았을 수 있으며, 생각 깊은 사람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우주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의 그림자 속에 언제나 놓여 있다는 얘기다.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하느님이 지독히 영리해서 기본적인 원자재 없이도 뭐든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증거가 아니라, 세상이 어떤 앞선 과정의 필연적 결과, 피할 수 없는 인과(因果) 사슬의 결말이 아니라는 사실의 증거다. 어떤 형태로든 앞선 인과관계가 있었다면 그것은 세상의 일부여야만 할 터이므로, 어떤 인과관계도 세상의 기원으로 여겨질 수 없다. 세상 곧 우주가 필연적인 게 아니기에 우리는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을 선험적인 원칙으로부터 추론해낼 수 없다. 그 대신, 세상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관찰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과학의 역할이다. 따라서 무로부터 창조했다는 교리와 리처드 도킨스의 과학자라는 직업 사이에는 흥미로운 관계가 있다.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킨스도 할 일이 없었으리라는 얘기다. 그러니 도킨스가 자신에게 일거리를 준 이를 의심한다는 건 참으로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러므로 엄격한 인과관계에 대한 비판이자, 디치킨스(도킨스와 히친스)가 개인적으로건 정치적으로건 그토록 소중히 여겨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자유의 증거다. 세상은 어떤 실리적인 목적도 없이 오직 그 자체만을 위하여─예컨대 오스카 와일드가 아주 좋아했을 방식■으로─존재하는 무척 희귀한 부류에 속한다. 이 범주에는 하느님 외에 예술과 악(惡)과 인류가 포함된다. 세상의 이러한 특성은 그것이 하느님 자신의 자유를 함께 누리고 있는 데서 연유한다. 조지 부시와 달리 하느님은 간섭주의적인 지배자가 아니다. 과학이 존재하고 리처드 도킨스라는 인물이 가능해지는 것도 세상이 지닌 이 자율성 덕분이다. 디치킨스는 과학 연구에서 하느님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데, 흥미롭게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며 내가 앞에서 언급한 아퀴나스의 생각 역시 똑같았다. 과학은 원래 무신론적이다. 과학과 신학은 대부분의 경우에 같은 종류의 대상을 다루지 않는다. 치과 교정학과 문학비평의 대상이 다르듯이 말이다. 이는 과학과 신학 간에 어처구니없는 오해들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다.
요컨대 하느님은 디치킨스가 비판하는 것만큼이나 철저하게 요령부득이다.■ 하느님은 이를테면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에 대한 끝없는 비판자이다. 존 레녹스는 저서 『하느님의 장의사: 과학은 신을 묻었는가 God’s Undertaker: Has Science Buried God?』에서, 우주에는 존재 이유가 없으니 그 질문을 제기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과학자와 철학자들을 언급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신학자와 하나가 되는 셈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느님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존재 자체의 즐거움을 위해 존재하기(또는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급진적 낭만주의자들이─이 맥락에선 카를 마르크스까지 포함하여─제기하는 의문은 그 같은 존재 방식을 현실화하려면 어떤 정치적 변혁이 필요하냐는 것이다.
대부분의 책임 있는 미국 시민과 달리 예수는 일을 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먹고 마시는 데만 열중한 사람이라는 비난도 받는다. 예수는 집도 재산도 없으며, 독신이자 방랑자처럼 떠도는 사회적 주변인으로서 일가친척을 무시했고, 직업이 없었으며, 부랑자와 버림받은 자들의 친구이고, 물질적 소유를 싫어하고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으며, 정결에 관한 율법에도 무관심했던 것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전통적인 권위를 비판해서 기성세력에게는 눈엣가시이고 부자와 권력자에게는 골칫덩이인 존재로 제시된다. 예수가 요즘 뜻에서 혁명가는 아니었지만 혁명가와 비슷한 삶을 살았음은 확실하다. 이를테면 히피와 게릴라 전사를 뒤섞어 놓은 듯한 인물로 보인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킨 까닭은 교회를 가는 날이어서가 아니라 안식일이 일시적이나마 노동에서의 탈출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지 종교의 날이 아니다. 사회주의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 되는 최상의 이유 중 하나는 의무화된 노동을 싫어하고 미국 같은 나라들에 팽배한 노동의 맹신(盲信)을 거부한다는 것일 터이다. 진정으로 문명화된 사회라면 해도 뜨기 전에 잘난 사람들이 조찬 모임을 갖는 따위의 일이 벌어지겠는가.
따라서 과학과 신학의 다툼은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혹은 어느 쪽의 ‘설명’이 더 나은지를 놓고 벌어지는 게 아니다. 쟁점은 우주의 기원을 말할 때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느냐다. 그렇다고 연대(年代)에 관한 대립은 아니다. 신학의 입장에서 보면 과학은 충분하게 멀리 올라가지 않는다. 과학이 창조주를 가정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왜 애초에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렇게 생겨난 사물이 우리에게 이해 가능한 것은 어째서인지 같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의문점이 아닐 수도 있다. 사실 일부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캔터베리 대주교인 로원 윌리엄스가 말했듯이, 신학자는 우리가 설명을 원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우주가 설명 가능할 정도로 앞뒤가 들어맞는 것이라고 우리가 가정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따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설명과 규칙성과 가지성(可知性)■의 개념은 어디에서 올까? 합리성과 가지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런 질문 자체가 쓸데없거나 대답하기에 너무 어려운 것은 아닐까? 합리성을 설명하려면 우선 합리성을 전제해야 하므로 합리성의 설명이란 불가능한 걸까? 이런 의문들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세상이 어느 정도 내적인 질서와 일관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바의 과학이 가능하다. 즉, 거칠게 말해 미적(美的)이라 할 이유 때문에 과학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 질서와 일관성에 내재된 법칙들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추적하는 일은 적절한 건가? 과학이 언젠가 그 답을 찾아낼까, 아니면 이런 질문은 과학의 한계를 벗어난 것일까?
우리가 우주의 심층구조에 대해 그토록 많이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게 인간의 생존과 진화에 뚜렷이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님을 감안할 때, 경이로운 일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그저 운 좋게 그리 된 것인가? 아인슈타인이 “우주와 관련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우주가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하면서 세계가 그처럼 고도의 질서를 지녔으리라고는 아무도 선험적으로 예상치 못했으리라고 덧붙였을 때 그는 뭔가 대단한 실마리를 잡아낸 걸까, 아니면 단지 시적인 표현을 구사했을 따름인가? 과학이 거둔 놀라운 업적들로 인해 종교가 무용지물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런 업적도 결국은 우리 정신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원적 요소에 어떤 식으로든 맞추어져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에서 연유하며, 이러한 사실 자체가 형이상학적 사색의 동기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주의 물리적 구조에 대한 이해를 하필이면 수학으로 풀어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과학자들이 이를 물리 법칙의 한결같음과 더불어 종교적 신조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합리적인가? 수학의 무모순성은 입증되지 않는다는 점이 괴델의 제2정리에 의해 드러났는데도 여전히 그 무모순성을 믿는 과학의 태도는 또 합리적인가? 우리가 이성적 추론을 시작조차 하기 전에 세상이 우리 앞에 주어졌다는 원초적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과학은 이유나 설명만을 추구하지 말고, 이러한 주어짐에 개재되었을 그 모든 복잡성에 먼저 매료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근원적 의문들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의혹을 품을 수도 있으며, 설사 타당하다 해도 그 답이 반드시 ‘하느님 때문에’는 아니다. 영미 철학계에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생각이 지나치게 심원해서 무의미할 지경이라고 생각하는 철학자들도 있지만, 여하튼 하이데거는 이런 유의 근원적 질문을 제기했으면서도 종교를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교회를 다녀야만 이 같은 의문들을 품고 고민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그러기 위해 과학자여야 할 필요 또한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공중 곡예사가 이런 유의 의문을 제기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데, 사실 과학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도 신학(혹은 형이상학)과 과학은 추구하는 바가 다른 학문이다.
하느님을 현실적인 목적이나 이유가 철저히 결여된 존재로 보고, 도덕적인 삶도 그와 마찬가지로 생각한다고 해서 도구적 이성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도구적 이성이 없다면 예컨대 제도적 불평등과 억압에 저항하는 ‘해방의 정치’도 없고 과학이나 기술도 없지 않겠는가. 미학자가 사물의 아름다움과 감각적인 개성에 사로잡힌다면, 신학자는 사물의 존재가 아찔하리만큼 우연적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인다. 반면에 과학자와 기술자는 그런 사물들의 속성을 파악하여 인류를 위해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사물 자체에 대해 즐거움을 느끼거나 감탄하는 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제시한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방금 말했듯이 도덕성은 우주 자체만큼이나 목적도 이유도 없다.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주어진 힘과 역량을 순전히 그 자체로 음미하면서 값지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외의 어떠한 목적도 기능도 없는 자족적 기쁨의 에너지는 역사라든가 의무, 세계정신, 생산, 효용성, 혹은 목적론 따위의 엄혹한 법정에 서서 스스로를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
윤리에 관한 이런 관점은 칸트의 시각과 뚜렷이 대조된다. 즐거움을 주는 행위는 고결한 행위가 아니기 쉽다고 그는 말하지 않는가(눈치챘을지 모르지만, 나는 여기서 『순수이성비판』을 살짝 단순화하고 있다). 여하튼 예수가 가르치는 도덕은 무모하고 비현실적이며 장래에 대비하지 않는,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따라서 보험설계사의 적이며 부동산 중개사의 장애물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라, 겉옷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벗어 주라 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까지 내주어라, 너를 욕하는 사람을 사랑하라, 네 몫 이상으로 노력하고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는가.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이런 창조적 무모함에 대해 소시민적인 혐오감을 보인다. 마치 분노한 은행 지점장처럼 “인간을 백합꽃에 비유한 부분은 다른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절약, 혁신, 가정생활 따위가 순전히 시간 낭비라는 암시를 담고 있다.”라고 소리 높인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가족이 대체로 시간 낭비로 여겨진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 점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히친스는 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담긴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우리의 선행을 세상 사람들에게 으스대며 떠벌리지 말라는 교훈이다. 히친스가 근년에 쓴 글들에서 자기자랑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 같은 맹점은 조금도 놀랍지 않다. 히친스와 도킨스에게서 겸양의 미덕을 찾기는 힘들다. 히친스는 성경에서 이르는 ‘팔복(八福)’■을 “온유한 자와 평화의 중재자들에 관한 비현실적인 소망”이라고 일축한다. 미국 국방성에 있는 히친스의 친구들이 평화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이 음흉한 선전 책자를 금서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할 지경이다. 여하튼 불쌍하게도 신약성경에서 예수는 오성장군처럼 발언하지 못한다.
예수는 세상의 종말이 곧 닥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식의 윤리를 가르쳤겠지만, 그 예상은 심각한 오판으로 드러났다. 예수의 역사 감각이 약간 빗나갔던 듯하다. 사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바의 세속적 역사 감각이라는 것이 예수에게는 전혀 없었을 터이다. 그러나 예수의 윤리는 공인회계사나 석유회사 경영진에게 기대할 수 있는 윤리가 아니다. 하느님은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우리는 순전히 재미삼아 만들어졌을 뿐 하느님에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기에, 하느님은 우리를 기필코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 하느님에게 우리가 지니는 의미는 우리에게 문신이나 애완용 몽구스가 지니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하느님은 우리를 그냥 방치해 둘 수 있다.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가 바로 자유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우리가 이처럼 자유로울 때 하느님에게 가장 깊이 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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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테리 이글턴 Terry Eagleton
영국의 대표적인 맑스주의 문학비평가, 문화이론가. 1943년 잉글랜드의 샐퍼드에서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계 노동계급 가정에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학위를 딴 뒤 그곳에서 잠시 가르치다 옥스퍼드 대학교로 옮겨 오랫동안 재직했다. 이후 맨체스터 대학교를 거쳐 아일랜드 국립대학교, 랭커스터 대학교, 미국 노터데임 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 이글턴은 대학 시절의 스승 레이먼드 윌리엄스(1988년 타계)를 이어 맑스주의 문학?문화이론 분야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왕성한 저술 활동과 사회참여를 병행해왔다. 특히 문학과 미학, 사회이론 따위에 내재한 이데올로기를 파헤친 저서가 많다. 저서로 『문학이론입문』, 『미학사상』,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 『성스러운 테러』, 『우리 시대의 비극론』, 『셰익스피어 다시 읽기』, 『시를 어떻게 읽을까』, 『성자와 학자(소설)』(이상 국내 출간), 『비평과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 입문』, 『발터 벤야민』, 『비트겐슈타인(영화 시나리오)』, 『문화의 개념』, 『삶의 의미』, 『악에 대하여』 등 4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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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강주헌
학부, 대학원에서 불어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브장송 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건국대학교 등에서 불어와 언어학을 가르쳤으며, 펀헙 에이전시 대표로 2003년 ‘올해의 출판인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수년간 번역 강의를 해왔고, 현재 영어와 불어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는 『문명의 붕괴』,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지배인의 책무』, 『그들에게 국민은 없다』, 『일상, 그 매혹적인 예술』, 『촘스키와 아슈카르, 중동을 이야기하다』 등 다수가 있고, 『기획에는 국경도 없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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