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지 않는다면,
어찌 확신을 얻을 때의 기쁨이 있으랴?
― 괴테
chapter 1
근대성의 여러 신들
20세기의 동이 터오기 직전, 니체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는 어조로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백 년이 조금 더 지난 오늘날, 그 예언은 결코 그럴싸하게 들리지 않는다. 신이 실제로 있고 없고는 다른 문제다. 그런 문제는 어차피 경험과학으로 답변할 수도 없다. ‘신’이란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오늘날 인간의 실생활에는 오만가지 신들이 우글대며 저마다 인간들의 관심과 충성을 얻으려 든다. 니체는 자신이 무신론의 시대 문턱에 서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보기에 21세기는 다신교의 시대가 될 것 같다. 마치 잊혀져 있던 무수한 신들이 복수하러 되돌아오는 듯하다.
좀 더 급진적인 계몽사상가들(특히 프랑스의 사상가들)은 종교의 종말을 한껏 즐거운 마음으로 기대했다. 그들은 종교를 커다란 환상이라 여겼고, 잡다한 비과학적 미신을, 그리고 그 뿐 아니라 가장 흉악한 잔악 행위를 낳는 원천이라 생각했다. 유럽의 종교개혁 이후 벌어진 종교전쟁은 그런 견해를 뒷받침할 만했다. 그러므로 볼테르가 “악행을 없애라!”고 외쳤을 때, 그는 스스로 만악의 근원이라고 여겼던 가톨릭교회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박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개신교도들 역시 이단을 처형하고 마녀를 불태우는 일에 그들의 적인 가톨릭교도들 못지않게 열심이었던 것이다. 조각난 기독교 세계 밖에서 대안이 될 만한 종교 전통도 눈에 띄지 않았다.
종교를 박멸할 도구, 그것은 물론 이성이었다. 이성의 차가운 빛을 쐬면, 종교라는 환상은 가뭇없이 증발해 버릴 것이었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파리 마들렌 교회에서 ‘이성의 여신’ 즉위식을 치렀던 일이 이런 기대를 극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대혁명 후에도 계몽 사상가들의 이성 신뢰는 끝나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다른 껍질을 쓰고 존재한다. 19세기 사람들은 과학에 전폭적인 신앙을 바쳤다. 이성으로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에 따라 결국 도덕적으로 탁월한 사회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달리 말해 계몽주의 철학은 경험과학으로 탈바꿈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탈바꿈의 사도인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가 내세운 실증주의 이데올로기는 유럽의, 그리고 그 밖의 지역(특히 라틴아메리카. 브라질 국기는 아직도 콩트의 “질서와 진보”라는 슬로건을 나타내고 있다)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새로운 사회학을 창시한 사람이 바로 콩트임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것은 콩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띠어갔다. 그것은 점점 스스로를 철학체계라기보다 경험적 증거에 기초한 학문으로 여기며, 경험적 반증反證에 종속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현대 사회학의 건설자들로는 보통 세 사람을 꼽는다. 칼 마르크스Karl Marx,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 막스 베버Max Weber. 이 세 사람들의 입장 차이는 매우 크다. 하지만 종교라는 주제를 놓고서는, 각기 다른 이유에서일망정, 근대로 들어와 종교가 쇠퇴일로에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계몽주의의 후계자들인 마르크스와 뒤르켐은 이런 변화를 기꺼워했다. 반면 베버는 이를 비관적으로 바라보았다.
20세기에 들어 수립된 종교사회학에서는 근대를 종교 쇠퇴의 시기로 보려는 이런 시각을 ‘세속화 이론’이라고 부른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과학 지식이 널리 보급되고 근대 사회제도가 신앙의 사회적 기반을 허묾에 따라 세속화, 즉 사회와 개인의 의식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비중의 지속적 축소는 필연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시각은 어떤 반종교적인 철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각을 뒷받침하는 여러 경험적 자료에 근거한다(그런 자료는 대부분 유럽에서 찾을 수 있음이 의미심장하다). 그 이론이 “가치중립적”(베버의 용어다)임이 강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그 결론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상관없이 참이다. 따라서 이런 운명적인 세속화를 통탄해 마지않는 20세기 신학자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 또한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라고 교회나 신도 개인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소수의 신학자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길을 찾아냈다(가령 1960년대에 잠시 인기를 끌었던 ‘신 중심 신학의 종말’론자들, 말하자면 “사람이 개를 무는” 식의 접근을 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그런 예다).
오늘날 세속화는 어디까지 왔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의 일을 통해, 이런 세속화 이론은 상당 부분 부정되었다고 보아야 옳다(따라서 종교사회학자들은 소수의 고집쟁이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세속화 이론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오늘날의 세상을 돌아보면, 세속화된 모습보다는 열광적인 종교 운동이 사방에서 꽃피고 있는 모습이 보일 것이다. 물론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이슬람의 부흥이다. 하지만 성전을 부르짖는 무장집단들 때문에 유독 시선을 끌긴 해도, 그것은 더 큰 현상의 작은 부분일 뿐이다(아무래도 근심이야 크게 되지만). 드넓은 이슬람 세계(북아프리카에서 동남아시아까지 뻗쳐 있고, 서방세계에 흩어져 있는 소수 이슬람 사회도 있다)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의미와 지향점을 이슬람교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 현상은 대체로 정치와 무관하다.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보다 더 두드러진 변화는 복음주의 개신교(특히 오순절파 교회)의 전 세계적 확산이다. 1906년, 어느 카리스마적인 흑인 전도사가 개최한 로스엔젤리스 부흥회(‘아주사 거리 부흥회’라 불리는)는 그 전도사의 불꽃같은 설교 덕분에 흑백을 불문하고 수많은 군중을 순식간에 끌어 모았다. 곧 집회 참석자들은 ‘방언’(오순절파의 특징인)을 하기 시작했다. 아주사 집회에서 뜻을 세운 전도사들이 미국과 해외로 나가기 시작하며, 오순절파 교회는 미국의 유력한 종파로 성장해 나갔다. 그러나 전 세계적으로 오순절파가 폭발적인 성장을 보인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인데,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그런 급성장이 진행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4억 명의 오순절파 교회 신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분명 역사상 그 어느 종파보다 빠른 성장이 아닐 수 없다.
오순절교회의 성장에는 ‘오순절교회화Pentecostalization’라고 불리는 다른 요소들도 있다. 영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강한 인상을 주게 되는 ‘방언’, 치유, 그리고 여러 가지 ‘영적인 은사(恩賜)’들인데, 이는 사실 다른 개신교교회나 가톨릭교회에도 있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급성장하는 복음주의 개신교회는 오순절교회만이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복음전도사는 약 1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 미국 출신이지만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한국, 그 밖의 다른 나라 사람들도 있다. 또한 ‘대중적 개신교회’라고 할 종파를 대상으로, 개념을 더 넓히는 것도 생각해볼만 하다. 이는 보통 개신교회의 일파로 여겨지지 않지만, 그 종교적, 사회적 성향을 볼 때 개신교회에 속하는 종파다. 가장 성공적인 예는 모르몬교회인데, 여러 저개발 국가에서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본거지인 유럽에서는 심각한 상태인 가톨릭교회 역시 그 밖의 세계에서는 끄떡없는 모습이다. 종교개혁 당시 수립된 교회들도 마찬가지다. 가령 영국 국교회는 영국에서는 신도를 거의 잃었으나 아프리카에서는 번창하고 있다. 공산주의 체제의 오랜 탄압을 받았던 동방정교회도 부흥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러시아에서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사실 이런 추세는 다른 종교들에게도 해당된다. 유대교는 미국과 이스라엘에서 신도 수를 늘리고 있다. 힌두교 역시 세력을 키우며, 세속화된 인도 정부에 도전하고 있다. 불교의 부흥 역시 두드러지는데, 일부 불교도들은 서방국가에서 활발한 포교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일본에는 급성장 중인 종교가 많은데, 그중에는 불교, 기독교, 신토神道의 ‘습합習合’을 내세우는 종교도 있다. 유교 또한 종교로서나 윤리체계로서나 중국과 화교 사회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이처럼 ‘종교에 열광하는 세계’의 그림에 어긋나는 예는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지리적인 예외로, 서부와 중부 유럽은 세속화 이론이 아직도 신빙성을 갖는 중요한 지역으로 남아 있다. 또 하나는 사회적인 예외인데, 수가 많지는 않으나 영향력은 큰 지식인 집단이다. 이들은 전 세계적인 세속화를 강력히 지지하는 경향을 띤다. 이런 예외가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여기서 자세히 논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무리한 일반화가 되지 않으려면, 두 예외 모두가 상당히 복잡하다는 점을 강조해야 하리라. 서유럽에서 교회(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중심의 종교가 크게 쇠퇴하기는 했지만, 교회 밖에서의 종교 활동은 다양한 뉴에이지 운동에서 영성 운동까지 아직도 활발하다. 또한 초기 중세부터 수백 년 이상 유럽에 발을 디뎌 온 이슬람교가 부흥을 맞이하고 있어서, 흔히 이야기되는 ‘유럽적 가치’라는 것이 과연 유대-기독교 전통에 뿌리박은 것인지의 논쟁이 다시 일고 있다. 세속주의적 지식인들의 경우도, 최근 다시 종교적 열정에 빠지는 일이 늘고 있으며, 특히 비서구권에서 그렇다. 따라서 매우 세속주의적인 지식인의 자녀들이 이런 저런 호전적 종교집단의 활동에 관여하고 있는 예가 종종 발견된다.
간단히 말해서, 근대는 곧 종교의 쇠퇴라는 말은 더 이상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다. 급진적 계몽주의자들의 마지막 후예들(주변에 간혹 눈에 띄는)은 그런 말의 진실성을 고집한다. 그들은 틀렸다. 그러면 근대성이 반드시 세속화로 이어지지 않을 때(스웨덴 그리고 델리 대학교의 교수들 사이에서는 예외일지 모르나), 근대성이 추구하는 가치와 신념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보기에 해답은 분명하다. 근대성은 다원성plurality으로 이어진다.
다원성의 의미와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갖는 의미
‘다원성’이라는 말은, 서로 다른 인간집단(인종, 종교, 기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를 수 있다)이 사회적으로 평화롭게, 서로 원만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 상태를 가져오는 과정은 ‘다원화pluralization’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의 논제를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근대는 다원화를 가져온다.”
정리는 간단하지만, 그 정의가 나타내는 현실은 매우 복잡하다. 그 점을 다루기 전에,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용어 문제다. 우리가 ‘다원성’이라고 부르는 상황은 보통은 ‘다원주의pluralism’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 용어를 쓰지 않는 까닭은 ‘-주의’라고 할 경우 사회현실을 경험적으로 표현한다기보다(그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어떤 이념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다원주의’라는 말이 처음 선보였을 때도 하나의 이념과 관련되어 있었다. 알려진 대로라면, 이 용어는 1920년대에 미국의 교육자 호레이스 칼렌Horace Kallen이 처음 만들어서 미국 사회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의미로 사용했다. 그러면 대체 다원성과 다원주의는 무엇이 다를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 ‘다원성’이 어떤 사회현실(사람들의 호불호를 떠난 현실)을 지칭한다면, ‘다원주의’는 어떤 태도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태도는 어떤 현실을 환영하는 하나의 철학 안에서 기능할 수 있다. 이렇게 용어를 정리해 놓아야 우리가 앞에서 부정한 논제, 근대가 세속화를 가져온다는 논제를 제대로 대체하는 논제를 세울 수가 있다. 다시 한번, 세속성과 그것을 지향하는 세속화 과정은 통계 조사가 가능하며 (따라서)반증 가능한 사회 현실로서, 다원성과 같이 우리의 호불호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세속주의’라는 적절한 이름을 가진 오랜 계몽주의 전통이 있다. 세속화를 환영하며, 언젠가 세속화가 완성된 미래가 오리라 점치며 즐거워하는 태도다. 이 세속주의는 나중에 좀 더 논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다원성 정의로 돌아가자. 이 정의의 핵심적 사실은 사회를 구성하는 집단들 사이에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의에는 두 가지 요소가 더 필요한데, ‘사회적 평화’와 ‘원만한 관계’가 그것이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사회적 평화 없는 사회적 다양성도 있을 수 있다. 서로 다른 집단들이 서로 으르렁대며, 마침내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탄압하거나, 노예로 삼거나, 심지어 말살해 버리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그럴 때 다원성을 논할 여지는 거의 없으리라. 한편 이질적인 집단들이 서로 관계를 맺지 않고 제각기 살아가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평화적 공존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 소통은 전혀 없는 공존이다. 그럴 때에도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다원성의 동학은 나타나지 않는다. 첫 번째 경우의 예로는 남북전쟁 당시 미국 남부 사회를 들 수 있다. 백인과 흑인은 공존했는데, 노예주와 노예로서 공존했다. 두 번째 경우는 전통적 인도 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카스트 제도에 묶여 다른 집단과의 사회적 교류가 엄격히 금지되었다(밥상의 분리와 혼례식장의 분리, 즉 다른 집단구성원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혼인관계를 맺는 일을 금지하는 일은 매우 효과적인 교류 차단 방법이었다).
어째서 근대성이 다원화를 가져오는지의 이유는 이해하기 쉽다. 유사 이래 대부분의 사람은 고도의 인지적?규범적 동질성을 띤 공동체에 모여 살았다. 다시 말해 한 공동체의 주민은 거의 모두가 똑같은 세계관과 윤리관을 갖고 있었다. 물론 예외는 언제나 있으며, 당연시되는 관행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 가령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였다. 말하자면 이질적인 집단 구성원끼리 어쩌다 마주쳤을 때, 서로 말을 섞을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었다. 사회적 분리의 벽은 높고도 높았다.
근대성은 그 벽에다 점점 더 빨리, 더 크게 구멍을 뚫고 있다. 그 결과 어느 때보다 많은 인구가 도시에 살게 되었고, 그들 대부분은 각양각색의 집단 출신자들이 서로 어깨를 부대끼며 활동하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전 세계적인 도시화는 ‘도시성urbanity’의 확산을 가져왔다. 그것은 다원성에 따라 길러진 도시적인, 또는 도시풍의 문화를 의미한다. 높아진 도시성이 다시 다원성을 증대시켰다. 뿐만 아니라 드넓은 지역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이 이루어지기에, 다양한 집단 출신자끼리 서로 만나고 교류할 기회가 늘어났다. 교육이 일반 대중에게 행해지는데, 그것은 갈수록 많은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 가치관, 생활방식을 접하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지만 결코 중요성이 덜하지는 않은 요소가 있다. 바로 현대의 대중매체들,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전화, 그리고 컴퓨터 혁명에 따른 정보의 폭발이다. 이는 사람이 현실을 다르게 바라보는 능력을 놀랄 만큼 크게 향상시켰다. 이런 과정(모두가 근대적인)의 결과, 다원성은 역사상 전대미문의 수준까지 도달했다.
물론 과거에도 다원성이 높았던 때는 있었다. 수백 년 동안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도시들은 나무랄 데 없는 다원성을 맛보았다. 특히 다양한 종교(기독교, 마니교, 조로아스터교, 불교, 유교 등)가 교류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다원성이 고조되었던 때가(그보다 좀 더 길거나 짧은 동안), 무굴제국의 인도, 호엔슈타우펜 왕조 지배하의 시칠리아, 이슬람 지배 시대의 안달루시아에 있었다. 특히 안달루시아에서는 초기 다원주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공존(콘비비엔치아)’ 이념이 발생했다. 서구 문명사에서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초기 시대의 말엽에 최고의 다원성 고조기가 있었는데, 적어도 종교적 다원성 면에서는 그랬다. 이 특별한 시대에 기독교가 세계종교로 발전할 기반을 닦았음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전근대적 다원성의 시대는 그 범위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헬레니즘기의 알렉산드리아를 보자. 이 도시에서 지내보면 오늘날 대도시의 생활과 별로 다르지 않을 만큼 다원성이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컴퓨터와 휴대폰이 없음에도). 하지만 나일 강에 배를 띄우고 조금만 올라가 봐도, 이집트 역사만큼 오래 전부터 획일적인 문화를 고수하고 있는 마을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들 중에는 자신들이 로마제국의 일부라는 사실도 모르고, 심지어 알렉산드리아를 처음 들어 보는 사람조차 있으리라. 오늘날 가장 열심히 일하는 생태관광 기획자라도 상대적으로 문화적 동질성이 높은 지역을 찾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고, 아마도 문화적 고립지역은 결코 찾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말할 것도 없이, 그런 곳을 찾아냈다고 해도 그런 관광 자체가 그곳의 때 묻지 않은 순수성을 해치고, 곧 그런 특별한 고장의 매력을 없애고 말리라).
참된 다원성이 존재하는 조건은 지식사회학에서 ‘인지 오염cognitive contamination’이라고 부르는 용어로 풀이된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인간 행태에 바탕을 둔다.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이 뒤섞이다 보면, 서로의 생각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렇게 ‘오염’이 일어나면, 남들의 신념과 가치를 이상하다, 기묘하다, 사악하다 등으로 규정짓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차차, 하지만 확실히, 다른 사람들도 존중할 만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 그것은 앞서 당연시했던 현실 인식이 흔들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상호 오염이 개인 사이에 발생하는 예는 사회심리학에서 무수히 찾아냈는데, 가령 쿠르트 레빈Kurt Lewin이나 밀턴 로키치Milton Rokeach 같은 심리학자들이 시작한 실험적 환경에서도 그런 예가 확인되었다. 그래서 레빈은 “집단 규범group norm”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는데, 모든 유형의 “집단 동학group dynamics”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행위자들 사이의 공통 행동지침이 그것이다. 그리고 로키치는 그의 고전적 연구서인 『입실랜티의 세 그리스도 The Three Christs of Ypsilanti』에서(여기서 입실랜티란 바이런이 숨을 거둔 그리스의 도시가 아니라, 미시간 주에 있는 정신병원을 가리킨다) 한 가지 의문스러운 사례를 소개했다. 입실랜티 병원에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환자가 세 사람 있었다. 그중 하나는 다른 둘에게 영향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정신 병리적 고립에 빠졌다. 그러나 로키치는 다른 두 사람의 행동을 흥미진진하게 하나하나 묘사하고 있는데, 그들은 다소 병세가 약화되며 상대방 역시 그리스도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하고자 일종의 ‘보편교회신학’(에큐메니컬ecumenical 신학이라고도 한다. 교파의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기독교 교파를 하나로 묶으려는 보편교회 운동의 신학이다-옮긴이주)을 창시한 셈이었다.
개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상호 오염은 집단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종교사에서는 이런 집단 인지 오염 과정이 “교설혼합syncretism”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형적인 예로는 제우스가 주피터가 되고, 아프로디테가 비너스가 된 것처럼 고대 그리스의 신들이 로마의 신들로 수용된 예다. 종교적 관념도 다른 인지적, 규범적 관념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세계관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번역’된다. 분명 이런 번역 과정에서 달라지는 게 없지는 않다.
지난 몇 백 년 동안의 근대화는 인지 오염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도록 도화선에 불을 붙였을 뿐 아니라, 과학과 기술이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인간 사회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치는 대전환이었으며, 그 과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묘사되거나 분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목적에 비추어, 우리는 그 대전환의 한 가지 측면에만 집중해 보기로 하자. 바로 ‘운명에서 선택으로’의 거대한 이행에.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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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피터 버거 Peter L. Berger
세계적으로 알려진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루터파 신학자. 현대인의 ‘믿음과 의심’을 종교학적?사회학적으로 고찰한 그는 1929년 3월 23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유럽 지성들의 지적 망명지였던 뉴욕의 사회조사 뉴 스쿨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러트거스대학교, 사회조사 뉴스쿨, 보스턴 칼리지의 교수를 거쳐 1981년부터 보스턴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1985년부터는 동 대학교의 문화, 종교 및 국제사안 연구소 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최고의 사회학 입문서로 군림해온 『사회학에의 초대』, ‘전후 100대 문제작’으로 꼽힌 『자본주의 혁명』, 지식사회학의 고전이자 국제사회학회가 ‘20세기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회학서 10권’ 중 하나로 뽑은 『실재의 사회적 구성』등이 있다.
안톤 지더벨트 Anton C. Zijderveld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사회학자이자 철학자로, 캐나다와 미국 등지에서도 강연했으며 1985년부터 2002년까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동 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문화?예술과 연계된 사회학 연구에 초점을 두고 네덜란드 주요 일간지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 글을 기고하며 저술 활동을 해왔다. 저서로는 근대사회의 추상화 경향을 날카롭게 분석한 명저 『추상적 사회』 외에 『클리셰에 대하여』, 『거울 속의 실재』, 『복지국가의 가을』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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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함규진
학부에서 행정학을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양 및 한국 정치사상에 중점을 두고 연구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국가경영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왕의 투쟁』, 『다시 쓰는 간신열전』, 『역사법정』, 『세상을 움직인 명문 vs 명문』, 『왕이 못 된 세자들』, 『고종, 죽기로 결심하다』 등이 있고, 논문으로 「유교문화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 「정약용 정치사상의 재조명」 등이 있다. 『죽음의 밥상』,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유동하는 공포』, 『히틀러는 왜 세계정복에 실패했는가』, 『록펠러가의 사람들』, 『마키아벨리』, 『팔레스타인』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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