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사이드
1935~2003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가 낳은 대표적 지식인.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이집트의 영국계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이수했다. 컬럼비아 대학, 하버드 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문학평론가이자 문명비평가로 활동했다. 1978년에 출간한 대표작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에서 동양과 서양은 역사·지리적 실체가 아니라 ‘상상된 지리’라는 관점에 서서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을 해체했다. 이로써 세계문학과 민족문학, 서양 문화와 동양 문화 등 세계사의 개념 자체를 바꾸어놓았을 뿐 아니라 이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이 일상적 단어가 될 만큼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세 개 이상의 외국어 실력을 갖추지 않은 대학원생에게는 세미나 청강을 허락하지 않은 엄격한 학자로서 트랜스내셔널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영어와 아랍어 외에도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스스로 갖춘 연구자였다. 전문 연주자에 가까운 피아노 실력과 프로급의 테니스 실력을 지녔으며, 정치적 사안에 관해서도 적극적인 발언을 두려워하지 않는 지식인이었다. 팔레스타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대변자’라고 불렸으며, 2000년 7월에는 레바논―이스라엘 접경지대에서 이스라엘군을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이 외신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2003년 9월,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끝내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에드워드 사이드.
당신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고 나니, 무척이나 다양해서 서로 모순되게 얽혀 있는 당신의 많은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 당신은 참 종잡기 힘든 사람이라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이스라엘 점령자들에게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인 인티파다(intifada)가 한창이던 1980년대 말이던가요, 아니면 1990년대 초이던가요? 가자 지구에서 아들 또래보다도 한참 어린 팔레스타인 청소년들과 함께 이스라엘군의 탱크를 향해 돌을 던지던 당신의 사진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한데, 언젠가 〈런던 서평 The London Review of Books〉에서 읽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전기에 대한 당신의 서평은 여전히 놀라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크 음악에 대한 해박한 전문가적 식견과 미학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사유가 기막히게 결합된 그 서평의 필자가 당신인 것을 깨닫고 경악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궁핍과 곤경의 최전선에서 막강한 이스라엘군의 최신 탱크를 향해 절망의 돌팔매질을 하던 당신과 바로크 음악의 악보와 역사를 눈부시게 타고 넘던 당신의 이미지들은 쉽게 겹쳐지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평의회에 참가한 대표적 지식인이면서도 당신은 PLO의 정치적 부패와 비민주적 관행, 원초적 민족주의의 한계에 대해서는 비판을 참지 못했지요. 미국의 중동 정책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비판적이면서도 미 국무성의 중동문제 자문 요청에 대해서는 세상 비판을 다 감수하면서까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꺼이 응했던 당신은 누구인가요? 팔레스타인의 주변부 지식인이니 뉴욕의 중심부 지식인이니 하는 식으로 간단히 구획해버린다면 오히려 문제겠지요.
파리에 있는 미셸 푸코의 아파트에서 열린 장폴 사르트르 등과의 토론을 회고하면서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절박성에는 무심한 듯 점심식사에 세 시간을 소비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속물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비판적 지식인,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제는 도저히 프로 선수들과 테니스를 즐길 수 없을 만큼 프로와 아마추어의 격차가 커졌다고 개탄할 정도로 수준급의 테니스 실력을 갖춘 아마추어 테니스 선수, 어린 시절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사막에서 본 오페라 〈아이다〉 공연을 따듯하게 기억하는 메트로폴리탄 뉴욕의 팔레스타인 지식인… 이 많은 이미지들이 겹치는 당신은 누군가요?
당신한테서 이처럼 다양하고 모순되기까지 한 이미지들이 연상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다양성 덕분에 당신은 실존의 영역이든 사상의 영역이든 경계를 넘는 지식인으로서의 독특한 위치를 구축할 수 있지 않았는지요? 누구나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동양’과 ‘서양’의 역사적·문명적·지리적 구분이 작위적이고 상상된 허구라고 꿰뚫어본 당신의 날카로운 혜안은 어디서 왔나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며 ‘구라파’가 되고자 했던 일본의 개화파 지식인들이나 서양의 일원임을 입증하려고 몸부림치는 동유럽 지식인들에게 신기루를 좇고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세계사적 전망 말입니다. 동양이 없으면 서양이 없고, 서양이 없으면 동양도 없으므로, 동양이 만들어진 거라면 서양도 만들어진 거지요. 이들 서양을 좇는 지식인들에게 당신들이 좇는 서양은 원래부터 없으며, 당신들이 좇기 시작한 순간 서양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큰 용기지요. 19세기 이래 동양과 서양의 모든 지식인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셔왔던 인식론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니까요.
쉽게 말해서 당신은 미국을 동경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서울의 청담동과 아이오와의 옥수수 밭 중에서 어디가 서양이냐고 물은 거지요. 청담동과 함평의 고구마 밭이 가까운 게 아니라, 함평과 아이오와, 할렘과 왕십리, 여의도와 맨해튼, 그리고 청담동과 소호가 맺고 있는 동맹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당신 덕분입니다. 중심의 제국주의와 주변의 민족주의가 맺고 있는 비대칭적 공모관계를 꿰뚫어보는 당신의 혜안은 특정한 영토에 안주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탈영토화된 지식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인 셈이지요. 양파를 끝까지 까본 사람만이 양파는 속이 없고 껍질만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법이지요. 주변부 지식인으로 태어난 당신은 ‘서양적인 것’의 끝까지, 가장 깊숙한 속까지 들어가보았기 때문에 결국 서양은 알맹이가 있는 본질적 개념이 아니라 까도 까도 껍질뿐인, 그래서 다 까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상상된 지리’일 뿐이라는 통찰이 가능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저는 당신의 책 『오리엔탈리즘』이 세상을 얼마나 급격하게 바꾸었는지를 이론적으로 이해한 것 못지않게 몸으로 느낀 사람입니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를 만든 후 지난 몇 년 동안 꽤 많은 국제학술회의를 열었고,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에 명망 있는 중진 연구자들을 적잖이 서울로 초청해서 많은 경험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국제회의를 할 때마다 주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당신이 자꾸 생각났습니다. 제가 초청한 연구자들은 대부분 유럽 현대사를 전공하는 학자들이었고, 이들 대부분은 한국은 물론이고 아시아가 처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주로 대서양을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을 건너다니며 활동하는 바람에 아시아에 올 기회가 거의 없었던 거지요. 이들과 교류하면서 자꾸 당신이 생각난 것은 정작 학술회의장이 아니라 식사자리나 술자리 같은 소소하면서도 일상적인 교류의 장이었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아시아의 첫 방문지로서 서울에 온 이들이 식당에서 결사적으로 젓가락질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국 음식점에서 포크나 나이프를 달라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고, 비교적 생소한 젓가락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는 이들을 보면서 어떤 변화가 읽혔습니다. 한국에 관한 여행 안내서를 읽고 와서는 나오는 밑반찬마다 이게 김치냐고 묻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2차를 데리고 갔던 독일 친구들은 해장국과 소주를 아주 맛있게 먹어 깜짝 놀란 적도 있습니다. 포츠담의 현대사연구소 부소장인 토마스 린덴베르크(Thomas Lindenberg)는 우리가 초청하기에 앞서 대통령 직속의 역사 관련 위원회 초청으로 한국에 온 적이 있는데, 서울의 최고급 호텔의 양식당으로만 데리고 다녀 지루했다고 투덜대더군요. 그러면서 청진동의 해장국처럼 독일에도 선지를 넣은 소시지가 있다면서 끊임없이 소주잔을 기울이더군요. 변경사 학술대회에 참가했던 리투아니아 출신의 한 친구는 출국 전날 청진동과 포장마차에서 과음을 한 탓에 비행기를 놓칠 뻔한 적도 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진짜 맛있게 해장국과 순대, 김치 등을 먹었는지는 본인들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일입니다만…….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세계역사학대회 회장이던 위르겐 코카가 방한했을 때인데, 그의 강연이 끝난 후 방석 위에 앉는 한정식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식당 등 일상생활에서 주로 이렇게 가부좌로 앉느냐고 묻기에 서양 손님이 있을 때만 이런 한정식 집에 와서 가부좌로 앉으며, 사실은 매우 불편하다고 답하고는 같이 낄낄거린 적이 있습니다. ‘한국적인 것’은 ‘서양’ 손님과 같이 배치되는 그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거지요. 그런데 코카 교수 말로는 독일에도 ‘재단사식 앉기(Schneidersitz)’라는 말이 있는데, 19세기까지 독일의 작은 공방에서는 재단사들도 그 한정식 집에서처럼 가부좌로 앉아서 일했다고 하더군요. 서양은 의자, 동양은 방바닥이라는 이분법은 그저 고정관념일 뿐이지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국의 해장국이 가장 맛있는 수프라거나 좌식 문화가 더 우아하고 합리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음식 문화와 같은 소소한 일상의 습관과 관행, 그리고 그에 대한 사유를 지배했던 문화적 차이를 본질화하고, 그 차이를 다시 우월한 문화와 열등한 문화로 나누며, 서양 문화가 우월하고 동양 문화는 열등하다는 문화에 대한 위계질서적 사유방식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97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우리 세대만 해도 서양 사람을 만날 때는 냄새나는 김치를 먹어서는 안 되고, 일본 황실의 공식 만찬 메뉴가 프랑스 요리인 것처럼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양식을 먹는 것이 좀 더 우아한 것이고, 다문화주의에 대한 배려에서가 아니라 서양 사람들한테 쪽팔리지 않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에서 양식 먹는 법을 배웠던 세대입니다. 멀리 추상적 학문체제를 들먹거릴 것도 없이 이처럼 ‘스스로 오리엔탈리즘’과 ‘서구중심주의’는 식탁과 같은 일상에서부터 우리를 지배하는 사유의 체계였습니다.
돌이켜보면 한국적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유신체제의 강력한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은 세대인데도 우리 세대의 구체적 일상을 지배한 것은 오리엔탈리즘과 서구중심주의가 아니었나 합니다. 노무현 정권 아래서 스스로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자처했던 그 역사 관련 위원회의 친구들이 서양 학자들을 최고급 호텔 양식당에서 접대한 일이야말로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에 갇혀 있는 민족주의적 주체의 정신분열증을 잘 드러내주는 게 아닌지요?
하긴 이러한 정신분열증은 비단 한국만의 예는 아닙니다. ‘동양’ 사회는 대개 우월한 ‘서양’의 지식인들에게서 자기 문화의 독창성이나 우수성을 인정받을 때 비로소 자신의 민족적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 거지요. ‘비서양’ 주변부의 역사가 서양의 ‘보편적 역사 발전과정’에 비추어 자신의 역사적 발전단계를 설명하거나, 서양의 박물관이나 미술사의 분류방식을 그대로 빌려와서 자기네 민족예술의 독자성과 특징을 설득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우월한 서양에게서 자신들의 가치를 인정받겠다는 ‘인정투쟁’이지요. 노예 소유주에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자 노력하는 노예의 인정투쟁에 대한 게오르크 헤겔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서늘하게 느껴집니다.
아시아의 다른 어느 나라보다 서양과의 격차를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그 때문에 더 결사적으로 동양에서 벗어나 서양을 따라잡고자 했던, 그러나 끝내는 서양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좌절해야 했던 일본의 근대화론자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어느 면에서는 그런 정신분열증적 인정투쟁의 선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엉뚱한 이야기지만, 이 역설은 영화 〈역도산〉의 한 장면에서 기가 막히게 나타나더군요. 패전 이후 미국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일본 국민에게 미국의 거구들을 가라테로 쓰러뜨리는 프로레슬러 역도산은 가히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있지요. 전통 강장제를 권하는 일본 오야붕에게 역도산으로 분한 설경구가 자신은 서양 비타민만 먹는다며 한마디 툭 던지고 나가버리지요. 미국에 가서 프로레슬링을 배우고 서양의 비타민을 먹기 때문에 덩치 큰 서양 놈들을 이길 수 있었다는 역도산의 아이러니한 생각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의 복잡한 심회를 드러내주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미국에서 표준적인 동아시아사 교과서로 사용된 에드윈 라이샤워(Edwin Reischauer)와 존 페어뱅크(John Fairbank)의 『동아시아: 위대한 전통 East Asia: The Great Tradition』이 일본의 봉건제를 논하면서 ‘중국적 패턴으로부터의 탈피’라고 제목을 붙였을 때, ‘탈아입구’라는 일본의 꿈은 실현된 듯이 보입니다.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유럽식 봉건제를 겪었기 때문에 서양처럼 자본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가정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거지요. 그러나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부인〉이 라이샤워와 페어뱅크의 동아시아 역사 교과서보다 더 대중적인 한, 일본은 여전히 동양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동양사’라는 학문 영역을 새로 만들어 조선과 중국을 동양으로 가두어둠으로써 자신은 서양의 일원이 되고자 했던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은 결국 실패한 셈이지요. 그들에게 유일한 위안은 구식민지였던 한국의 역사학이 여전히 ‘국사’, ‘동양사’, ‘서양사’라는 학문체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정도가 아닐까요? 사실 이러한 학문체계는 아직도 동아시아에서 순수한 ‘서양적인 것’, ‘동양적인 것’, ‘일본적인 것’, ‘한국적인 것’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고 사회적으로 유포하는 주범이지요.
‘동양(東洋, toyo)’과 ‘동아(東亞, toa)’의 용례 차이도 흥미롭습니다. 일본에서도 처음에는 영어와 프랑스어인 ‘orient’의 번역어로 ‘동양’만 사용했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 단어를 사용하다 보니 ‘orient’라는 말에는 당신이 이야기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상징과 부정적 이미지들이 개입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됐다더군요. 인도와 인도차이나를 각각 식민지로 갖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용된 오리엔트라는 말에 식민주의적 시선이 들어 있는 것은 당연했겠지요. 그런데 이들 일본 지식인들은 독일어의 ‘Ostasien’이라는 말 속에는 오리엔탈리즘적인 뜻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독일어 ‘Ostasien’을 ‘동아시아’라고 번역해서 오리엔탈리즘의 느낌이 들어 있는 ‘동양’과 중립적인 느낌의 ‘동아’를 구분한 것도 그런 이유지요. 중국과 조선의 역사를 묶어서 ‘동양사’라고 했지만, 자신들이 건설하고자 했던 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이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합니다.
마르크스주의라고 해서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아니더군요. 대학에 갓 들어가서 채 스무 살도 안 된 앳된 시절, 이영협 선생이 지은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의 경제사인 『일반경제사 요론』을 읽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 책을 읽자 세계사의 흐름과 세상의 이치가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한반도의 문제가 나름대로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보이더라고요. 당시 분단과 유신독재, 그리고 주변부 자본주의적 후진성으로 시달리고 있던 한국 사회의 문제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지요. 정상적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길을 걸었다면 한국은 지금처럼 후진국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누리는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는 회한이 그 밑바닥에 있는 거였지요. 역사학도로서 한국사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문제를 공부해보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때의 일입니다만…
여하튼 그 후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경제사가인 모리스 돕(Maurice Dobb)이나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잡지인 〈월간 평론 Monthly Review〉을 이끈 폴 스위지(Paul M. Sweezy) 등의 글을 읽고, 또 나중에는 『자본론 Das Kapital』을 읽으면서 그러한 확신은 더 굳어졌습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에서 좌파 출판사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운영하는 콜로콜 출판사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번역 출판한 역설을 이해할 것도 같아요. 러시아의 부르주아지들에게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러시아에도 자본주의 발전이 필연적이며, 또 역사의 진보를 위해 피할 수 없다는 메시지로 읽혔던 것이지요.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책이 아니라 옹호하는 책으로 읽혔다는 이야기인데,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마르크스주의 경제사는 이처럼 유럽의 자본주의 발전과정을 인류 역사의 보편적 발전과정과 등치시킴으로써 서구중심주의를 자신의 역사관 안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는 한 서구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입니다. 한반도도 서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자본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논리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서유럽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부르주아지, 시민사회, 자유주의, 근대과학정신, 합리주의 등을 찾아내야만 하는 거지요. 한국사 서술에서 봉건소농의 해체, 광작농민의 등장, 여항문학, 근대학문으로서의 실학 등을 강조한 것도 바로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에 필적할 만한 요소들을 찾아내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진품’과 ‘파생상품’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요. 결사적으로 서구적 자본주의의 발전에 필적할 만한 요소들을 찾아낼수록 서구와의 격차는 더 벌어지는 거지요. 18세기 조선의 중인계급을 서구의 부르주아지, 실학을 계몽사상과 비교하면 할수록 둘 사이의 격차를 더 실감하게 되는 역설에 부딪히는 거지요. 조선의 중인계급이나 실학이 서구의 부르주아지나 계몽사상보다 못하다거나 서양의 부르주아지나 계몽사상이 더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서구의 역사를 비교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한 서구는 완벽하고 조선은 그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서양과 동양을 비교하는데, 서양이 비교의 기준이 되고 동양은 비교의 대상이 되는 거지요. 그러니 인류 발전의 보편적 역사를 대변하는 서양에서 일어난 일들이 우리 역사에서도 일어났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스스로에게, 또 우리를 깔보는 서양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했던 거지요.
물론 자본주의 맹아론, 즉 18세기 한반도에서도 서구처럼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우리도 너희 못지않게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민족적 자부심의 발로라고 판단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민족적 자부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구의 역사를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거꾸로 서구중심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이미 파사 채터지(Partha Chatterjee)와 같은 인도의 서발턴(subaltern) 연구자들이 인도의 근대 역사학에 대한 분석에서 잘 입증한 바와 같이, 역사 서술이 민족주의의 성격을 띠면 띨수록 더 서구중심적이 되는 역설이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에서도 잘 나타나는 거지요. 서양을 비교의 기준으로 삼고 동양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는 그 비교의 위계질서를 근원적으로 뒤엎지 않는 한 서구중심주의는 형태를 달리하면서 지속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주변부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이처럼 자기 부정에서 출발하는 거지요.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주변부의 민족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접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선구자는 결코 아니지요. 오히려 식민지 근대화론자에 가까웠습니다. 마르크스는 실제로 영국의 인도 지배가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도, 영국의 식민주의가 인도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정체성을 깨트리고 자본주의적 진보를 가져온다고 확신한 식민지 근대론자였습니다. 심지어는 식민주의 지배의 잔인성에 눈물을 흘리는 영국의 인도주의자들을 ‘얼치기’라며 조소하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인도 지배뿐만 아니라 프랑스 식민주의의 알제리 정복, 멕시코령인 캘리포니아의 미국 합병 등이 모두 문명의 진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알제리의 아브델카데르(El Amir Abdelkader)가 펼쳤던 반프랑스운동이나 인도의 세포이 항쟁,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같은 19세기의 맥락에서 나온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어요. 자본주의적 근대에 거스르는 회귀적 운동이라는 이유에서였지요. 1848년 혁명 당시에는 슬라브 민족운동을 독립국가를 운영할 능력이 없는 ‘역사 없는 민족’의 반혁명운동이라고 규정하기도 했지요. 중앙집권적인 근대국민국가의 형성 과정이나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 식민주의의 지배가 모두 폭력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폭력들이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그래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면 얼마든지 용납될 수 있다는 게 기본입장이 아니었나 합니다.
한국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경제학과에서 정통으로 공부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라는 바탕 위에 경제사 연구를 축적해온 연구자들이라는 것도 이와 관련해 흥미롭습니다. 사학과에서 한국사 훈련을 받고 민중사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에 비해 이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역사 해석이 실은 마르크스의 식민주의론과 훨씬 가까운 거지요. 일본 식민주의의 조선 지배가 낡은 생산양식을 무너뜨리고 자본주의적 진보를 가져왔다는 그 생각은 영국의 인도 지배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과 거의 그대로 일치하지요. 그에 비하면 일본의 식민주의에 대한 도덕적 비판으로 일관하는 수탈론 중심의 민중사 연구 경향은 사실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과는 별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민족주의가 마르크스주의를 전유한 인민주의적 경향이 훨씬 농후하지요.
한국의 주류 역사 연구자들한테는 안된 이야기지만, 당신의 오리엔탈리즘 비판을 마르크스주의와 접목시키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혹시 이스라엘에서 가르치고 있는 슐로모 아비네리(Shlomo Avineri)라는 마르크스 연구자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의 기원 The Origins of Totalitarian Democracy』 등의 책을 쓴 야곱 탤몬(Jacob Leib Talmon)의 제자인데, 마르크스의 사회사상에 대한 그의 책은 한국에 번역된 지도 꽤 오래입니다. 식민주의와 근대화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선집 중 가장 충실한 책은 아비네리가 편집한 거지요. 『식민주의와 근대화에 대한 마르크스 글 모음 Karl Marx on Colonialism and Modernization』이라는 책인데, 모스크바에서 나온 선집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껍고 거의 모든 글을 망라했습니다. 그의 편집자 서문을 보면, 그는 이 책을 6일전쟁에서 전사한 자신의 친구에게 헌정하고 있습니다.
이 서문을 읽는 순간 나는 아주 묘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아비네리는 식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글을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주의가 인도의 낡은 생산양식을 일소하고 자본주의적 진보를 가져온 것처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도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는 해석이 가능한 거지요.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는 어설픈 윤리적 평가는 유보할 수 있다는 게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역사학이 추구하는 바이기도 하니까요. 식민지 근대화론이 국제정치의 현실에 바로 대입되면 항상 그런 위험성이 있는 거지요. 이는 비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에서 유럽계 아슈케나지 유대인과 동방의 셰퍼드 유대인 사이의 헤게모니 관계에서도 작동하는 논리가 아닌가 합니다.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이스라엘의 ‘서양’이라면, 셰퍼드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동양’이니까요. 언젠가 독일에서 온 유대계 연구자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 안색이 확 바뀌더군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 생각이 크게 틀린 것 같지는 않아요. 바르샤바에서 힌두 문학을 가르치던 뉴델리 대학의 마르크스주의자와 가까이 지낸 적이 있는데, 그 친구 말로는 인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대중집회를 할 때마다 정치적 반대파들이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진보의 입장에서 영국의 인도 지배를 정당화한 글들을 가져와 반공주의 선전을 하는 바람에 애를 많이 먹는다고 쓴웃음을 짓더군요. 그뿐만 아니지요. 구소련의 오리엔탈리스트들 중에는 중앙아시아에 사회주의 체제를 강제로 이식시킨 모스크바의 헤게모니를 ‘복지식민주의’라는 독특한 용어로 정당화하는 주장을 편 사람들도 있지요.
물론 복지식민주의라는 주장이 마르크스의 논리와 모순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신 말대로 마르크스주의는 ‘붉은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거지요. 그런데도 솔직히 고백하자면,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탐구당, 1990)라는 주제로 박사논문을 쓰면서는 어떡해서든지 마르크스를 ‘서구중심주의’나 ‘붉은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서 구출하려고 애썼습니다. 1867년 이후 아일랜드 민족해방을 지지한 마르크스의 입장 전환이나 러시아에서 반드시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도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쓴 마르크스의 편지 초고 등을 근거로 당신의 평가를 반박하려고 애쓴 거지요.
‘유럽중심주의’라는 말 대신 ‘자본중심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유럽중심주의자 혹은 오리엔탈리스트라는 마르크스의 혐의를 최대한 벗겨내려고도 했습니다. 하긴 비유럽 사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글들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저작을 참조하고 있는데, 마르크스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믿는다면 그게 잘못이지요. 좋게 말하면 미래지향적 해석이었다고도 하겠지만, 실은 견강부회(牽强附會)적 해석이고 학문적으로 정직하지 못했다는 게 더 옳은 분석이겠지요.
비단 마르크스뿐만 아니지요. 유럽 좌파들의 지성사를 초국가주의의 시선으로 읽다 보면 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아시아 마르크스주의의 ‘붉은 오리엔탈리즘’에서 사상적 연쇄가 잘 드러납니다. 폴란드 사회주의에 대한 독일 사민당의 문명적 우월감은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의 사회주의를 내려다보는 폴란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오만한 시선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그것은 다시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편달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볼셰비키들의 시선에서 재현됩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상처받은 자존심이 반둥 회의를 주도한 한 원인이었는지도 모르지요. 미국도 소련도 아닌 제3세계를 주창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 발원한 근대 지성사에서 서양과 동양의 경계는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넘어서는 더 근원적인 틀이었다고요. 당신의 『오리엔탈리즘』은 개화기에 겪은 근대학문으로의 패러다임적 전환 이래 1세기가 지나 다시 인간과 세계, 그리고 역사를 이해하는 탈근대적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사 편지』의 첫 수신인은 마땅히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당신이 ‘상상의 지리’를 드러내고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을 해체함으로써 ‘세계사’라는 개념 자체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실 요즈음은 수업에 들어가기가 무섭습니다. ‘서양사 개설’, ‘유럽사 특강’ 등의 교과목을 가르칠 때, 무엇보다도 먼저 왜 이런 교과목명이 잘못되었는가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양’이라는 개념을 부정함으로써 서양사 교수로 먹고사는 자신의 학문적/실존적 근거를 무너뜨린 후에야 강의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사 편지』에서 말하는 주체는 더 이상 서양사학자 임지현이 아니라 그냥 역사학자 임지현이어야겠다는 결심이 더 굳어집니다. 『세계사 편지』가 끝났을 때, 역사학자 임지현이라는 발신인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으로 이 편지를 시작합니다.
추신
며칠 전 우연히 2002년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마르크스주의, 모더니티, 포스트콜로니얼 연구 Marxism, Modernity and Postcolonial Studies』를 읽었습니다. 이 책에서 아직도 몇몇 연구자들은 아일랜드 민족운동이나 러시아 문제 등에 대한 마르크스의 글을 인용해서 마르크스가 서구중심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펼치더군요.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글을 꼼꼼하게 정독한 결과라기보다는 먼저 붉은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마르크스를 구한다는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 목표에 끼워 맞추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컨대 아일랜드 민족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도 페니언 민족주의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마르크스의 편지, 러시아가 프랑스혁명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방파제 역할을 한 폴란드 민족운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도구주의적 시각 등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피하더군요. 더 기본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자본중심주의적 시선 자체가 유럽중심주의를 내장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합니다.
최근 케네스 포머란츠(Kenneth Pomerantz)나 빈 웡(Bin Wong) 등 캘리포니아 학파를 중심으로 18세기 후반 중국 양쯔 강 유역이나 일본과 인도의 산업이나 경제발전 수준이 잉글랜드의 맨체스터보다 못하지 않았다는 ‘실증적’ 연구나 안드레 프랑크(Andre Gunder Frank) 등의 『리오리엔트 Reorient』가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듯하면서도 결국에는 서구의 자본주의 발전을 역사적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다시 서구중심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일련의 비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지구사’의 흐름에 속하는 이 연구들은 비유럽 세계의 역사 발전에 대한 서구중심주의를 탈피하는 듯 서술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그 자본중심적 시선 때문에 다시 서구중심주의로 회귀하는 예가 아닌가 합니다. 잉글랜드 대신에 중국이나 일본, 인도의 발전된 지역이 ‘서구’가 되는 거지요. 중심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중심을 바꾸는 거예요. 변형된 서구중심주의로서의 중국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요구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이런 연구들을 읽었다면, 당신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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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임지현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이며, 학문과 국경의 경계와 틀을 넘어선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자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폴란드의 바르샤바 대학과 크라쿠프 사범대학을 오가며 연구·강의를 했다. 포츠머스 대학 소속 연구모임 ‘유럽의 민족주의와 민족적 정체성’의 특별연구원, 하버드 옌칭 연구소 초청연구원, 글러모건 대학교 외래교수,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초청교수를 지냈다. <역사학보>, <서양사론>, <역사비평>, <역사와 문화>, <전체주의 운동과 정치 종교 Totalitarian Movements and Political Religions> 등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한국 사회의 본질주의적 역사인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만들어진 역사로서의 민족주의와 국사의 해체를 주장해왔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를 만든 이후 ‘국사(National History)’의 대안으로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을 모색 중인데, ‘대중독재’ 프로젝트가 그 대표적 산물이다. 교과서적 ‘통념’과 ‘공식’ 역사의 틀을 해체하고, 역사가 묻고 답해야 할 시대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새로운 세대를 위한 역사학자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지은 책으로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 폴란드 민족해방운동사』, 『이념의 속살』, 『오만과 편견』,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공저), 『적대적 공범자들』, 『대중독재와 여성』(공저) 등이 있다. 영국, 미국, 폴란드, 독일, 일본, 오스트리아, 노르웨이의 여러 저널과 논문집에 활발하게 논문을 발표해왔으며, 영국 Palgrave 출판사에서 ‘대중독재 총서(Mass Dictatorship Series)’의 책임편집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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