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신성한 밤이면 나는 이 엄숙한 대지, 괴로워하는 대지에 내 가슴을 맡기고, 운명의 무거운 짐을 진 이 대지를 죽을 때까지 충실하게, 두려움 없이 사랑하며 그의 수수께끼를 단 하나도 경멸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노라. 그리하여 나는 죽음의 끈으로 대지의 품에 들었노라.
― 횔덜린,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1
1950년 6월 어느 이른 아침 전쟁이 터졌고 북한 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했을 무렵 우리는 인류문명사 담당 강사로 재직했던 대학을 이미 떠난 뒤였다. 나는 육군에 들어갔지만 박 군은 당당한 해병대 전투복이 자기 기질에 맞다면서 그쪽으로 지원했다. 전쟁 초기, 초급 장교들이 빠르게 전사해갈 때여서 우리는 짧은 기간 훈련을 받고 실전을 경험한 뒤 장교가 되었다. 우리는 살아남았으나 둘 다 부상당했다. 나는 대구 방어전투 때 박격포탄이 스치는 바람에 오른쪽 무릎을 다쳤고 박 군은 인천 상륙작전 후의 서울 탈환전에서 왼쪽 팔을 저격당했다. 우리는 얼마 동안 입원해 있다가 훈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서로 다른 임무를 받고 다시 군에 복귀했다.
당시 중위였던 박 군은 동부 전선의 전투부대로 돌아갔지만 나는 원래 소속했던 대전차(對戰車) 중대로 복귀하지 않았다. 내가 대학 강사였다는 사실이 어떻게 우연히 알려져 육군 특무대로 전속됐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퇴원한 후 나는 곧장 서울로 보내졌고 거기서 육군본부 정치정보국의 한 과를 맡으면서 조직 편제에 따라 대위로 가진급했다.
그해 10월 둘째 주, 유엔군은 북한 수도 평양을 점령했다. 우리는 평양으로 파견대 본부를 옮기고 회색의 우중충한 4층 대리석 석조 건물 하나를 차지했다. 내 사무실은 3층에 있었는데 거기서 밖을 내다보면 장로교 평양 중앙교회의 부서진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우연이었다. 그것은 박 군의 아버지가 근 20년간 목사로 있었던 교회였다.
박 군의 아버지에 대해서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나와는 친한 사이였지만 박은 자기 아버지에 관한 얘기만은 좀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아버지는 박을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고 박 군도 아버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인정받지 못한 아들의 말에 따르면 박 목사는 ‘광신적인 사람’으로서 ‘독선과 과장된 믿음과 신에 대한 집착(그 신도 아버지 못지않게 집착에 찬 신이라고 박은 생각하고 있었다)으로 밤낮없이’ 그를 ‘괴롭혔다’는 것이었다. 동경에서 대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박 군은 무신론자가 되었고 그를 키워온 기독교 신앙을 내던졌다. 그러나 박 목사가 어느 일요일 아침 교회 설교단에 서서 신도들을 향해 자기 아들은 악마의 손에 넘어갔다, 그런 아들과 세속의 모든 연을 끊어버린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었다, 등등의 말만 하지 않았어도 박 군이 아버지를 거부하지는 않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전쟁이 터지기 10년 전쯤의 일이었다.
박 군은 자기 아버지가 평양에서 행방불명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걸 알려준 건 나였다. 평양으로 온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박 군에게 그 사실을 알렸는데, 그렇게 한 것은 그때의 내 마음이 워낙 들떠 있었던 탓이었다. 평양 입성의 기분은 좋았다. 처음 몇 주 동안 나는 우리 군이 점령한 적의 수도에 내가 와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그 느낌에서 오는 흥분과 평양 시민들이 보여준 뜨겁고 열렬한 환영 때문에 기분이 상당히 들떠 있었다. 내 동료 장교들 중 상당수가 평양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평양 입성의 기분 좋은 정서적 혼란 속에서 그곳의 가족, 친척, 친구들을 붙들고, 그리고 얼핏 보아 낯익은 듯한 사람이면 아무나 붙잡고 멜로드라마 같은, 그러나 가슴 뭉클한 재회의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평양에 워낙 아는 사람이 없어 내심 동료 장교들이 은근히 부러웠다. 내가 박 군의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것은 그 무렵이었다. 사실 그를 찾아갈 구실은 하나도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박 목사를 만나보러 가기 위한 온갖 방법들을 궁리해보았지만 막상 그의 집 대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서 내가 목사님 아들의 친구요, 하고 나를 소개해야 할 장면을 떠올리면 이상한 두려움에 붙들리곤 했다. 그러고 있던 차에 나는 박 목사가 전쟁 발발 직전 공산당 비밀경찰에 체포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수 미상의 북한 기독교 목사들’이 실종됐으며 ‘빨갱이들에게 납치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육군 정보당국의 공식 발표가 나왔을 때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되레 안심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는 박 목사의 실종 사실을 장문의 편지에 적어 박에게 알렸다. 그러나 그가 보내온 답장에는 자기 부대가 어떻고 부하들이 어떻고 하는 엉뚱한 얘기들만 잔뜩 씌어 있었고 심지어는 자신의 장래 계획에 관한 얘기까지도 적혀 있었지만 자기 아버지에 대해선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다.
길 건너 교회의 종이 뎅그렁 울렸다. 나는 창문을 열었다. 11월의 청백색 하늘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폐허의 비탈을 쓸어내리면서 여기저기 어지러운 눈가루를 뿜어 올려서는 총탄 자국으로 얼룩진 평양의 회색 건물들에게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자기네 집들의 무너져 내린 폐허를 파 헤집고 있던 사람들은 종소리를 듣자 일손을 멈추었다. 그들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비탈 위의 거의 다 망가져 폐허가 된 중앙교회를, 그리고 십자가를 꼭지에 이고 회색의 시체처럼 솟아 있는 종루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종소리가 전해주는 비밀의 메시지를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듯 서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이 든 여자 몇몇은 땅 위에 무릎을 꿇었고, 남자 노인들은 개가죽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였다.
종소리가 그쳤다. 사람들은 매일 그랬던 것처럼 소리 없이, 그리고 누가 뭐래도 신경 쓸 것 없다는 듯이 다시 일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평양에 들어오던 날부터 나는 이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나는 때때로 그들이 폐허 더미에서 부서진 가재도구를 파내는 것도 보았고 때로 시체가 나오면 소리 없이 손수레에 실어 치우러 가는 것도 보았다. 그런 다음 그들은 다시 벽돌과 널빤지와 콘크리트 더미 속을 계속 파 헤집었다.
나는 창문을 닫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방 한쪽 구석의 불룩하고 녹슨 석탄 난로가 꽤 열을 내뿜고 있었지만 나는 의자에 앉으면서 으스스 몸을 떨었다. 어떤 차가운 손길이 뭉클한 붓끝처럼 슬그머니 내 목덜미에 와 닿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 군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 후였다. 나는 그의 죽음을 방금 부대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2
육본 파견대 정치정보국장 장 대령이 그의 4층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그는 허름한 샹들리에 밑의 자기 책상 회전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내가 그의 책상 앞으로 가서 섰을 때까지도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그의 부하들은 그가 이런 식으로 부하를 세워놓고 가끔 5분씩 기다리게 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키가 작달막하고 번들거리는 대머리에다 큼지막한 주먹코가 작은 면상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40대 후반의 사내였다. 그는 회전의자에 앉아 앞뒤로 몸을 흔들면서 안경 너머로 나를 쏘아보았다.
파견대 본부의 하급 장교들은 장 대령을 대단한 존재로 여기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가 성미 까다로운 인물이라는 것만은 모두 인정하고 있었다. 정보부대에서는 대장의 신상기록을 비치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그의 과거는 알 수 없었다. 그를 경멸하는 축은 그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하사관을 지낸 사람이라 했고 그를 싫어하는 축은 그가 중국에서 돈을 긁어모은 악명 높은 군인이었다고 말하는가 하면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는 자들은 그가 일개 직업군인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모두들 그가 별을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가 어떻게 그처럼 젊은 나이에 대령 계급장까지 달게 됐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한참 만에 대령은 앉으라는 손짓을 해 보인 다음 흔들어대던 의자를 멈추고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실종된 목사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해줘야겠네.”
“네에?” 나는 속으로 움찔 놀라며 반문했다.
그의 엷은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목사들이 실종됐다는 얘기는 알고 있지? 우리 방첩대가 빨갱이 몇 놈을 잡았는데 이자들이 목사 실종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그는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서류들을 뒤적이며 말했다. “전쟁 나던 날 모두 총살됐다는군.”
“집단 처형이군요.”
그는 분노가 담긴 시선을 내게 던지더니 목소릴 돋우었다. “집단 살인이라고 해야지.”
“그렇겠군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방첩대 조사가 서로 어긋난단 말야. 살해된 목사들의 숫자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단 말일세.”
“그럼 모두 죽은 건 아니란 말인가요?”
“아냐, 아냐. 그런 얘기가 아닐세. 좌우간 어떤 정보로는 죽은 목사가 열네 명이라 하고, 어떤 정보로는 열두 명이라는 거야. 그런데 재수 없게도 그 두 가지 정보를 더 이상 추적할 수 없게 되었단 말일세. 우리 방첩대가 좀 성질이 급했어.”
“잡은 빨갱이들을 모두 죽여버린 건가요?”
장 대령은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 목사가 열네 명이었는데 모두 총살당했다고 치자. 그런데 이 사실을 확인할 만한 정보 출처를 우리가 찾아내지 못하면 이 사건엔 아무 증인도 없는 것이 되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얘긴 그저 열네 명이 살해됐다는 것뿐이고.”
“그러나 아무 증인도 증거도 없다면 목사들이 살해됐다고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몇 명이 죽었다고도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저 숫자 미상의 목사들이 실종됐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과연 그 점을 지적해주는군, 대위. 난 자네가 바로 그걸 찍어낼 줄 알았어. 그래서 자네한테 이 사건을 맡기려는 거야. 육군본부 정보처장한테서 조금 전에 전화가 왔는데 이건 우리 정치정보국 소관 사항이라는 거야. 나로선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가 없었네.”
“훌륭한 선전 자료가 된다는 얘기군요. 이건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아주 중대한 종교탄압의 경우로서 국제적 중요성, 특히 미국에서 큰 중요성을 가질 만한 사건이다, 그런 뜻이죠? 달리 말하면 기독교 순교사에 들어갈 한국의 장(章)을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게 된다는 거고요.”
“그만하게, 그만해. 난 아직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어.” 장 대령은 짜증 섞인 투로 말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지. 이건 간단한 산수 문제야. 원래 잡혀간 목사들이 14명이라 치고, 그중 12명만 총살당했다는 정보를 일단 고려할 경우 두 명은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지, 안 그런가?”
“물론입니다.”
“지금 생존해 있는 북한 기독교 목사들을 이 시점에 하나하나 점검해볼 순 없는 일이야. 헌데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은 빨갱이들에게 잡혀 투옥됐던 목사 두 명이 지금 평양에 살아 있다는 것일세. 우리가 평양을 점령했을 때까지도 그들은 감방에 갇혀 있었어. 아무리 가정법을 발동한대도 이건 정말 흥미로운 우연이 아니겠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태도로 보아 나는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문제의 두 목사에 관해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말하는 도중에 돌연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 그의 눈초리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그의 벗어진 머리가 한쪽으로 갸우뚱 기우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 그 가능성을 어떻게 생각하나?”
“말씀하신 대로 아직은 가설의 단계지요.”
그는 내 답변에 만족한 눈치였다. “좋아, 이제부터 자넨 그 살아남은 두 목사를 찾아가서 만나보고 우리 문제를 얘기하게. 신 목사와 한 목사야. 조심조심 다루어야 하네. 내가 기독교인들을 함부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은 주고 싶지 않으니까. 요즘 우리나라에선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이 대단해.”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멈추었다가 망설일 것 없다는 투로 말을 계속했다. “요샌 기독교인 아닌 사람이 없는 것 같아. 기독교도인 체하는 게 대유행이야. 대통령에서부터 장관, 장성, 영관급 장교들, 말단 사병에 이르기까지 말일세. 군대에 기독교 군목이라는 것까지 있잖아? 미군 고문관들을 즐겁게 해주느라고 말야. 자넨 내 어려운 입장을 알겠지?”
“알겠습니다.”
“문제의 목사 두 사람이 집단 살해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다거나 당초의 처형 대상에 올랐던 사람들이란 얘기는 아니야. 또 나로선 그들이 어떻게 해서 운 좋게 살아남았는지 의심해볼 생각도 없어. 객관적 정보 분석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살아남은 이유를 의심해보는 것이 나로선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긴 하겠지만 말야. 그들이 요행으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일단 명심하게, 대위. 그러나 어찌 됐건 지금 공식적으로 나는 귀관이 그들을 찾아가 공손히, 암, 공손히 물어보라는 것만 지시하고 있는 거야. 다시 말할까? 목사 집단 살해사건에 관해 혹시 알고 있는 것이 있느냐, 그때 몇 명이 살해됐는지 그 정확한 숫자만 좀 가르쳐줄 수 있겠느냐―이런 식으로 물어보란 말일세. 알아들었나?”
약간 혼란을 느꼈으나 나는 대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좋았어. 자넨 바로 그 점이 맘에 든단 말야. 민간 출신들은 요렇게 미묘한 문제가 발생했을 땐 감각 한번 날카롭거든.” 그는 웃으며 말했다. “아, 그중의 한 사람, 한 목사라는 친군데 아마 돌아버린 모양이야.”
“상태가―좋지 않단 말씀인가요?”
그는 냉소를 담은 듯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내 말이 좀 상스러웠나 보군, 용서하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의 서류철 하나를 움켜쥐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용무 끝!”
교회의 종이 뎅그렁 울렸다.
장 대령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저놈의 종소리 견딜 수가 있나! 밤낮으로 댕그랑거리니 이거 원!”
“대령님, 저 교회의 목사는…”
그는 내 말을 가로막았다. “죽었어.”
(제1장, 2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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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김은국 (Richard E. Kim, 1932 - 2009)
193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남한으로 내려와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1950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6·25 전쟁이 터지자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들베리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정치학을 공부했고, 존스 홉킨스 대학교와 아이오와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여러 대학에서 영문학과 창작 강의를 하며 소설을 집필했다. 1964년 첫 소설 『순교자』를 발표해 미국 언론과 문단의 호평을 받았고 한국계 최초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이후 『심판자』, 『잃어버린 이름』 등의 소설을 발표했다. 2009년 6월 23일 매사추세츠 자택에서 암 투병중 7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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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도정일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시민운동가. 1983년부터 경희대학교 영문학과에서 이론교육을 담당하여 마르크시즘 문학론, 구조/기호시학, 정신분석시학, 해체론, 문화론 등의 현대비평이론들과 서사이론, 문학사상사, 신화론 등을 강의했다.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 상임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문학, 문화, 사회에 관한 이론적인 글들과 평문, 사회문화 칼럼, 문학평론들을 활발히 발표했다. 저서로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시장전체주의와 문명의 야만』,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만남』,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 등이 있고, 역서로 『동물농장』, 『문화산업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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