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여도 괜찮아, 재밌잖아
공상 과학 영화 중 최고를 꼽는다면 당신의 선택은? 여러 영화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이 <스타트렉>을 떠올릴 것이다. 전 세계적인 공상 과학 열풍을 일으켰던 <스타트렉>에는 클링온Klingon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이 등장한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들’이 있다.
클링온 연구에 몰두하는 이들은 괴짜들 사이에서도 하수 취급을 받는다. 가상 세계에 사는 ‘던전 드래곤’ 게이머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아마추어 무선사들, 기계를 인간처럼 만들려는 로봇 공학자들, 가상의 세계를 설계하고 구축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은 클링온 사용자를 무시한다.
심지어 매일 영화 속 의상을 입고 시리즈 각 편의 대사를 모조리 외우며 영화와 관련된 기념품을 광적으로 수집하는 ‘트레키’들조차 클링온 사용자를 한 수 아래로 친다. ‘얼간이들을 위한 뉴스’로 불리는 웹사이트 슬래시닷컴에서는 클링온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미안한 말이지만 이런 사람들 때문에 공상 과학 소설이 오명을 얻고 있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심지어 “클링온 사용자들을 보면 우리 사회에 강제 불임 수술이 왜 필요한지 알 것 같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클링온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수술 없이도 충분히 스스로를 얼간이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내와 두 자녀가 있는 마크 숄슨은 그런 말을 듣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다.
“우스우니까 웃는 것은 이해해요. 클링온이라는 언어 자체가 일반적이진 않으니까. 하지만 가끔 지나치다 싶을 땐 정말 짜증이 나요.”
마크는 나를 클링온의 세계로 이끌어 준 비공식 안내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뉴저지의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다. 나는 인터넷을 둘러보다가, 마크가 ‘클링온 언어 연구소’의 간부이자 『햄릿』을 클링온으로 번역하는 프로젝트의 편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고 그날 바로 마크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는 이렇게 가까운 곳에 클링온 사용자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신이 나서 내 편지를 읽기도 전에 답장을 보내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클링온 사용자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다만 언어학자로서 인공 언어에 관심이 조금 있었고 조사 목적으로 마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었다. 클링온 언어 연구소의 홍보 자료에는 클링온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지만 믿기 어려웠다. 사람들이 클링온을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식일까? 드라마에서 연기를 하는 것? 영화에서 한두 마디 대사를 하는 것? 만약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있다면, 클링온을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빤한 동작을 대사와 함께 보여 주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정말로 그 언어가 사용된다는 것일까?
만약 클링온이 실제로 사용되는 거라면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식적으로 발명된 언어가 생명을 얻은, 들어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발달 과정은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충동을 입증하는 과정
흔히 언어를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고 하지만, 언어는 발명되지 않았다. 프랑스어를 누가 발명했는가? 포르투갈어를 누가 발명했는가? 발명한 사람은 없다. 그저 생겼을 뿐이다. 누군가 무슨 말을 했고, 다른 사람이 그 말을 이해하고, 또 다른 누군가가 아름답게 꾸몄을 것이다.
하나의 경향이 습관이 되고, 그 어딘가에서 하나의 체계가 자리 잡게 된다. 바로 이것이 혼합 언어, 속어, 방언 등이 생기는 과정이다. 영어·러시아어·일본어 등이 태어난 방식이기도 하다. 자연 발생적인 모든 언어는 이렇게 유기적·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진다.
전 세계의 언어들에서 발견되는 형태·양식·색채의 다양성은 인간 능력의 경이로움을 보여 준다. 이러한 다양성은 인간이 가진 풍부한 창조성, 지성과 사회적 능력 등 여러 놀라운 가능성에 대한 증거이다. 비록 일부이지만 말이다. 언어의 이러한 발달 과정은 자연의 경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충동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생물학자나 식물학자들은 자연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자연이 창조한 것들이 어떤 모습을 지니는지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언어학자는 인간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인생과 세계에 대해, 인간 정신의 작용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국 도서관에서 언어학과 문학 분야의 책을 볼 수 있는 곳은 P로 시작되는 서가이다. 보통 언어학자들은 언어학 일반에 관한 책들이 있는 P에서부터 문학이 시작되는 PN 사이 어딘가에서 발견된다.
대학원 시절에 나는 이 서가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PA(그리스어와 라틴어)로부터 멀어질수록 언어들이 점점 더 ‘이국적’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저 여러 로맨스어들에서 시작해 게르만어·스칸디나비아어·영어·슬라브어 등의 통로를 지나가게 된다. 슬라브어가 끝나면 알바니아어가 기다리고 있다. 이어 PH가 되면서 핀·우그리아 어족(벱시아어·에스토니아어·보티아크어·헝가리어)과 신비로운 바스크어가 나타난다. PL에 이르면 『솔로몬 제도 서부의 호아바어 문법』이나 『차드어의 남부 바우치어파: 조사 보고서』를 만지작거리면서 유럽에서부터 멀어져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서성였다.
마지막 하위분류 PM은 신세계를 순회하는 것으로, 그린란드와 알래스카의 에스키모어로 시작해, 틀링깃어·키카푸어·나바호어 등을 서서히 지나다가,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어와 마야어에 이르고, 안데스 산맥과 브라질 평원을 지나 아마존 강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마침내 『야마나어·영어 사전: 티에라델푸에고의 회화 사전』을 만나 남아메리카 남쪽 끝 섬들에까지 다다른다.
거기서부터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며 이제 접촉 언어 또는 ‘혼합’ 언어(『에스파냐어와 접촉한 필리핀 제도의 토속어』, 『루이지애나 브로브리지의 크레올어: 형태적 통사론, 글, 어휘 연구』)만 남아 있다.
언어들로 이루어진 이 풍성한 과수원의 맨 끄트머리에는 언어학자들이 잘 찾지 않는 구역이 하나 더 있다. 색 바랜 플라스틱 꽃들, 바로 인공 언어를 다룬 책들이 꽂혀 있는 외로운 서가이다. 『클링온 사전』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 옆에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보아보무Babm, 아우이aUI, 날 비노Nal Bino, 레노기나수Leno-Gi-asu, 튜터니시Tutonish, 에마이 기 차Ehmay Ghee Chah와 같은 언어에 관한 책들이 있었다.
이 언어들은 영어의 변형 형태인 피그라틴처럼 가벼운 언어유희나, 런던 토박이 말인 코크니같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인공 언어는 한 사람이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체계적인 문법과 광범위한 사전도 있다. 이 언어들은 더욱 질서정연하고 합리적인 언어를 만들어, 일관성 없는 것과 불규칙한 것을 줄이려고 했던 의도적이며 정교한 시도의 결과물이다. 사실 그런 것이 수백 개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지금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실패작들이었다.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당연한 결과였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을 심는다고 해서 열매를 맺겠는가? 그래서 나는 클링온이 뿌리를 내렸다는 주장에 회의적이었다. 나는 좀 더 알아볼 생각으로 여름이 끝날 무렵 피닉스에서 개최되는 클링온의 연례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등록 신청을 했다. 그리고 사전 준비를 위해 마크와 만나기로 했던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마크는 국제 음성 기호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나는 이 티셔츠가 자기표현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티셔츠뿐 아니라 마크의 모든 것이 그의 관심사를 보여 주었다. 미니밴에는 클링온 언어 연구소의 번호판 부착대, LNX 스티커(“나는 윈도우가 아닌 리눅스 운용체제를 사용해요”)가 있다. 평상시 즐겨 입는 조끼에는 클링온 증명 핀 3개, 십이진법 협회(“수를 셀 때 사용하는 십진법을 십이진법으로 바꾸자고 주장해요”), 멘사(“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편안하게 느끼는 방법이지요”), 트리플 나인 협회(“멘사의 더욱 극단적인 형태예요”) 등의 회원임을 나타내는 핀과 점자點字로 “당신이 이 글을 읽을 수 있으면 내게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는 셈”이라고 적힌 배지 등이 달려 있었다.
마크와 만난 곳은 깔끔한 피자집이었다. 마크는 호리호리한 편이고 모든 율법을 따르는 정통파 유대인이었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내가 겁쟁이가 아니라면’ 무신론자가 되었을 것이라며 농담을 던졌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크는 말을 빨리 하면서 한쪽 다리를 떨기도 했는데 마치 신경과민처럼 보였다)
마크는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기를 바라지만 그 상대가 갑자기 자신을 쥐어박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다정함과 슬픔이 함께 깃든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지만 박사 학위는 따지 못했고, 한 가지 일을 오래 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집중력 부족 때문이라면서 이 말을 덧붙였다.
“이것은 변명이 아니오. 설명이지.”
마크는 의사인 아내가 일하는 동안 자녀를 보살피고, 뉴어크Newark에 있는 유대인 학교에서 파트타임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가르친다. 그처럼 똑똑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시대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원망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크는 그렇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마크는 여러 분야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분야였다. 그는 웨일스어와 고대 사마리아어를 공부한 적도 있고, 또한 저명한 인공 언어 로지반(Lojban) 연구자이기도 했다. 그 밖에도 매듭 만들기, 타이포그래피, 수학적 뜨개질, 역법 등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피닉스로 향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마크는 『비행기 창문으로부터 내다보는 과학』이라는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마크는 자신이 컴퓨터 전공자이면서 여러 언어들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에 신경 쓰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마크는 클링온을 쓰는 사람들 가운데 극단적인 경우에 속하는 사람이다. 클링온이 너무 흥미롭기 때문에 가장 괴짜 같은 사람에게 괴짜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정상적인 사회일수록 더 멋지고 새로운 방법으로 우리 몸을 가리려고 온갖 자원을 낭비하잖아요. 그런데 이 사소한 언어를 즐기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마크의 인생은 ‘소위’ 정상적인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그 사회에 적응하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크가 간절히 고대하던 연례 대회 식전행사가 어느 레스토랑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클링온을 사용하면서 ‘범상한 사람들을 겁주고 있는’ 참가자들(일부는 의상까지 차려 입었다)이 득실거렸다.
나는 이 행사에 큰 기대가 없었다. 마크처럼 용감하지도 않고 어쩌면 내가 겁을 집어먹을 그 범상한 사람이어서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나는 대회가 열릴 호텔에 전화해 참가자를 위한 특별 할인 혜택을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그렇게 하려면 호텔 쪽에 내가 대회 참가자임을 밝혀야 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클링온 대회에 참가차…”
연습을 하고 나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전화기 쪽으로 손을 뻗었지만 결국 신분을 밝히지 않고 방을 예약했다.
나는 1차 언어 검증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클링온어의 동사표와 접사 목록을 공부했다. 클링온의 학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클링온 언어 연구소에서는 연례 대회도 개최하고 클링온 검증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1차 검증 시험에 합격하면 브론즈 핀과 taghwI’(초보자)의 칭호를 받는다. 2차 시험에 합격하면 실버 핀과 ghojwI’(중급자)의 칭호, 3차 시험에 합격하면 골드 핀과 po’wI’(상급자)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나는 마크와 이야기할 때까지만 해도 그 시험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예의상 문법을 눈에 익혀두는 정도로 간단하게 클링온을 공부했다. 하지만 시험을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떤 오기가 발동했다. 아마 교과서에서 틀린 글자 찾는 쾌감을 느끼면서 학교를 다녔던 학생들은 이 느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시험에 합격하기로 마음먹고 클링온 언어 연구소의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제1과를 끝내고 답을 적어 이메일을 보냈더니 답장이 왔다.
“완벽합니다. 모든 문제를 맞힌 사람은 처음입니다. 계속 열심히 공부하세요!”
이 문구를 보는 순간 뜨거운 욕망이 내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그 시험에 합격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누구보다 높은 점수를 얻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시험에서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최고 점수를 얻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회에 참가했던 진짜 이유, 클링온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점들이다.
발명된 언어의 역사는 인간 야망의 역사
클링온 열풍이 시사하는 바를 알기 위해서는(이 점에 대해서는 나를 믿어도 좋다) 우선 발명 언어의 유구하고 기이한 역사를 알아야 한다. 발명된 언어의 역사는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900개 이상의 언어가 만들어졌고, 클링온으로 절정에 이른 인간의 야망, 창의력, 투쟁의 역사를 이해해야 클링온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발명된 900개의 언어 가운데 500개를 부록 1에 정리했다. 관심 있는 분은 책장을 넘겨보시길.
문헌으로 남아 있는 것 가운데 최초의 발명 언어는 12세기 독일의 수녀 힐데가르트 폰 빙겐Hildegard von Bingen이 만든 링구아 이그노타Lingua Ignota이다. 링구아 이그노타가 기록된 자료에는 약 1000개 가량의 단어가 라틴어 및 독일어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것을 만든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힐데가르트 수녀가 환영을 보고 그것을 신학적 문헌으로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다.
링구아 이그노타가 환영을 보고 만든 언어인 만큼 체계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기록에 남아 있는 단어들을 보면 의미 단위로 세심하게 나누어져 있고 같은 의미 단위 안에서 단어들이 다른 형태를 나타낼 때는 각각 어미를 달리 사용하고 있다. 이런 점들로 보아 링구아 이그노타가 신학적 문헌으로 기록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발명된 언어 역사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것이 옳다.
힐데가르트가 언어를 만든 목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문헌이 보존되어 언어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런 행운을 잡지 못하고 사라진 언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은 자연 언어를 불평했던 것만큼이나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자연 언어는 의식적인 계획이나 방향 없이 발전되어 왔고, 이 과정에서 생긴 결점을 개선해야겠다는 생각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게 되는 출발점이다.
사실 공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언어는 형편없다. 두 개 이상의 뜻을 가진 단어가 있는가 하면, 뜻이 같은 단어도 여러 개가 있다. 하고 싶은 말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뜻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불규칙 동사, 관용구, 문법의 각종 예외 규정들은 언어를 제대로 배우기 어렵게 하는 요소들이다. 그래서 명쾌하게 말하려고 노력하지만 항상 오해가 생기고 늘 모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어느 정도 감수하고 불편하다고 느끼지 않지만,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이들 머릿속에서는 거듭 놀라운 생각이 싹튼다.
‘더 나은 언어를 만들 수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발명된 언어의 역사는 대체로 실패의 역사이다. 그들 언어의 다수는 여러 해에 걸친 노력과 희생의 소산이었다. 그들은 명성을 얻고 인정을 받고 싶다는 허망한 꿈, 또는 언어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이 될 수 있으리라는 소박한 희망으로 언어를 발명했다. 물론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언어 발명의 계기가 된 것이 더 많았다.
예상했다시피 언어 발명가들이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좀 더 나은 언어를 만들려는 것이 그들만의 특이한 발상도 아니었다.
1858년 모노팡글로스Monopanglosse라는 인공 언어를 만든 프랑스 시인 폴랭 가뉴Paulin Gagne는 기아에 허덕이는 알제리인을 돕기 위해 프랑스인들의 몸(또는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은 사지 가운데 하나만)을 식량으로 기부하자고 제안해 유명세를 탔다.
1839년 80세에 가까운 나이로 인공 언어 코무니카치온스슈프라헤Communicationssprache를 발명한 요제프 시퍼Joseph Schipfer는 독일 니더발루프의 비교적 부유한 지주였으며 한때는 지방 자치 단체에서 일한 공직자였다. 귀족들과도 잘 어울렸고 잘름잘름Salm salm 대공의 보좌관으로도 활동했지만, 1830년 그의 가산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스스로 말했듯 “인류의 총체적인 복리를 위해” 노력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매장해 버리는 사고(19세기에는 흔히 일어난 일 가운데 하나)를 예방 하는 일, 작은 부락에까지 시체 안치소를 설치하는 일, 소방대를 개선하는 일 등을 정부 관리들에게 요청했다. 그러면서 그가 만들어 낸 코무니카치온스슈프라헤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코무니카치온스슈프라헤의 문법책을 인쇄할 비용을 지원해 달라고 정부에 청원했다. 그리고 그 책자의 판매 수익금이 생기면 당시 론 강의 홍수로 고통을 겪고 있는 프랑스인들을 돕는 데 보태 달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이미 인쇄한 비용을 지불할 수 있도록 대출이라도 해 달라고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은 프라하에서 받을 연금이 있으며 이를 받게 되면 바로 대출 금액을 갚겠다고 약속했다. 만약 이 요청도 거부된다면, 가치 있는 유화 두 점이 있으니 관심이 있는 사람은 구입해 달라고 덧붙였다.
이런 형편없는 언어들! 더 나은 언어를 만들 수는 없을까?
언어 발명가들은 대부분 부지런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단한 자신감을 갖고 시작한 일의 끝은 언제나 쓰디쓴 좌절감이었다. 1995년 인공 언어 벨라Vela를 만든 오스트레일리아인 벤 프리스트Ben Prist는 자신이 만든 언어가 무시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국가가 자신에게 적대적인 음모를 품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왜 가장 쉬운 언어를 배우지 않는 것일까? 왜 가장 쉬운 언어인 벨라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일까? 이것이 민주주의인가? 이것이 인간적인가? 우리의 인권은 어디에 있는가? 다음에 금지될 것은 무엇일까? 가장 좋은 수프, 가장 좋은 케이크, 가장 멋진 옷, 가장 훌륭한 자동차?”
벤이 생각하기에 그의 작품 벨라는 인정받지 못한 걸작이며, 자신은 그 때문에 처형된 순교자였다.
내가 처음 도서관의 인공 언어 쪽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바로 다음과 같은 터무니없는 문구 때문이었다.
“몬데아Mondea! 새로운 세계어! 비교 불가능! 최고! 1분 만에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새로운 체계!”
“몇 년 만 더 있으면 우리 모두가 사용할 언어, 21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물, 에마이 기 차Ehmay Ghee Chah.”
그러나 내가 인공 언어 서가에 눈길을 주었던 것은 새로운 언어를 발명했던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언어 발명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왜 그 많은 사람들이 이 일에 열정을 바쳤을까? 자신의 성공을 확신한 이유가 무엇일까?
보통 언어 발명가들은 본인이 쓴 책에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만든 언어를 통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나는 도서관의 인공 언어 서가에서 어슬렁거리던 초반, 어떤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이야기는 바로 1962년 당시 77세의 나이로 보아보무Babm의 설명서를 출판한 오카모토 후이시키岡本普意識에 관한 것이었다. 그 책에는 다음과 같은 수식어가 붙어 있다.
“미래의 세계화 사회”를 위한 “인간이 만든 언어”이며 “(아직 영어로 번역되지 않은) 그의 철학 지식으로 미루어 최상의 이론 체계.”
그는 이어 “히말라야 산맥의 토박이”부터 “아프리카 협곡의 내륙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쉽게 사용하도록 만든 것이며, “매우 단순하지만 완벽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했다.
정말 그럴까? 여기에 예를 들어 보자.
V pajio ci htaj, lrid cga coig pegayx pe bamb ak cop pbagt.
이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나는 훌륭한 학자가 아주 흥미롭게 보아보무로 쓴 이 책을 읽고 있다.’
문장 자체보다 번역문에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그의 인간적 면모가 엿보인다. 그는 이 책이 흥미롭게 여겨지기를 바라고, 자신이 훌륭한 학자로 인식되기를 바라며, 그리고 다른 뛰어난 학자들이 언젠가 그가 만든 언어를 사용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는 ‘많은 보아보무 전문가들이 차례로 나타나 풍부하고 뛰어난 문학 작품을 완성할 것’으로 확신했던 것 같다.
물론 아주 틀린 생각이다.
왜? 그 생각은 왜 틀린 것일까?
사람들은 쓰던 도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더 나은 것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수백 년 전 몽상가들은 물속을 여행하거나 달에 갈 수 있는 기구의 도면을 그렸다가 주위의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들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이루어졌다.
이들보다 조금은 더 현실적이고, 간혹 상당한 존경을 받기도 하는 사람이 언어를 만들고자 계획을 세운 것도 수백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그 계획을 세운 이들과 그 후계자들의 이름이 알려진다면 그들은 여전히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어쩌면 그런 비웃음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언어 발명의 역사는 오만과 어리석음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나는 오카모토 씨와 그가 애지중지하는 보아보무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것이 무시하고 넘길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매우 허약한 아이로 태어났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지만, 언어의 규칙을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든 문장들을 통해 그에 관한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V kog cald mtk, lrek deg cjobco ca mnom.
‘나는 전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V kij kdopakd aj modk.
‘나는 맛있는 음식보다 건강에 좋은 것을 택한다.’
Sasn muq in ve hejp.
‘내 호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없다.’
Vli cqeo.
‘내게는 내 것이 하나도 없다.’
Ox udek pbot.
‘그는 원래의 임무를 수행하지 않는다.’
Y uhqck V.
‘네가 나를 비난하지 말기 바란다.’
Dedh cjis beg kobp.
‘세월이 흐르면 젊은이도 늙는다.’
그는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다. “내 몸이 아주 허약해져 걷기조차 힘들지만 나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이른 새벽부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보아보무의 이론이나 그것을 사용한 작문에 몰두한다”고 적기도 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조금 부끄러웠다. 나는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게 태어나 게으르게 지내는데, 이 오카모토라는 사람은 아픈 몸으로 맛없는 식사를 하면서 날마다 온종일 보아보무 책을 쓰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약간은 존경 받을 만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언어를 발명한 모두가 그렇지 않았을까? 그들의 노력을 적어도 한 번쯤은 돌아봐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발명된 언어의 역사를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본받고 싶을 만큼 근면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물론 내 존경심은 이들 언어에 관한 엉뚱한 주장 때문에 시련을 겪었다.
“20분 만에 완벽하게 습득할 수 있습니다! 단어 50개만 알면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언어! 명쾌한 사고가 가능해집니다!”
이들 주제에는 쉽다거나 완벽하다거나 하는 등의 다양한 변형이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다 믿지 않았지만, 적어도 직접 시험해 보아야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발명된 언어들의 세계로 들어섰고 책을 보며 그 언어들을 진지하게 배웠다. 예문을 한줄한줄 검토하면서 규칙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피고 부지런히 어휘 목록을 찾으면서 번역을 하기도 했다.
언어를 발명한 사람들의 생애에 관한 자료를 모으면서 그들이 겪은 힘든 투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었던 희망에 마음이 움직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어를 배우는 데만 그치지 않고 에스페란토, 로지반, 클링온 등 사용자들의 집회에까지 참가했고, 그곳에서 나는 발명된 언어가 활기를 띠는 예기치 못한 현상을 목격(그리고 참여하기도)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언어에 관한 이야기들을 엮은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의 언어에 대한 생각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니까 시대가 바뀌고 나서 만들어진 언어를 그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언어와 비교해 보면 그 당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언어의 발명에도 당대의 문화가 지닌 편견이랄까, 시대 구분 같은 것이 반영된다. 그러므로 발명된 언어들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언어에 대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또한 그것은 자연 언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발명된 언어들이 왜 실패하는지(그리고 때때로 왜 성공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우리는 말과 개념의 관계, 히브리어의 부활, 중국어의 표기, 수화의 표현 방식, 언어에서 논리의 역할, 생각에 대한 언어의 효과 등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언어로부터 결점을 끄집어내려고 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보게 될 것이며, 그들 ‘결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언어의 발명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언어에 대한 이야기, 그 언어를 만든 사람에 대한 이야기, 그 주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또 다른 매혹적인 세계에 빠져 있는 당신을 보게 될 것이다.
(프롤로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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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에리카 오크런트 (Arika Okrent)
어릴 때부터 언어에 관심이 많았던 에리카는 대학에 입학해서도 언어학 책이 가득한 도서관 서가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시카고 대학교의 언어학과 및 심리학과의 인식, 인지 신경 과학 협동과정의 공동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인공 언어 서가를 발견하고는 발명된 언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 언어를 발명한 사람들의 근면함과 노력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인공 언어에 대해 연구를 하게 되었고 이 책이 그 결실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발명된 언어는 물론 언어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특유의 재치와 말솜씨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다양한 인공 언어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는 에리카는 클링온 연례 대회, 에스페란토 대회에 참가하며 발명된 언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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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박인용
시각문화사 편집장 업무를 시작으로 안그라픽스, 창작마을 등에서 근무했다, 『마오쩌둥』, 『평양의 이방인』, 『미솔로지카』, 『비발디의 처녀들』, 『막스베버의 오만과 편견』 등 여러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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