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생명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음을 표출하는 것이 질병이라면
유행병은 대중의 불안 상태를 나타내는 지표임이 분명하다.
—루돌프 피르호
과학을 공부했거나 과학자와 이야기를 나눠본 사람은
누구나 현재 우리가 끔찍한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마디를 끊어놓는 존재는 인간이다.
—커트 보네거트
대혼란, 사탄과 그 일당의 위대한 수도:
그들이 소환장을 돌려
모든 무리와 적합한 군대 가운데
계급이 높고 공죄가 가장 극악한 자들을 불러 모은다.
—존 밀튼
들어가는 말
2004년 10월 17일 타이의 한 밀수업자가 티베트산 꼬마부채독수리 두 마리를 면포에 둘둘 말았다. 60센티미터짜리 고리버들 통에 맹금을 한 마리씩 넣은 그는 새들이 숨 쉴 수 있을 정도의 여유 공간도 확인했다. 그는 그 통을 모두 수하물 가방에 숨긴 다음 에바 항공 소속 방콕발 빈 경유 브뤼셀행 여객기 BR0061편에 탑승했다. 그 비행기에는 독수리 운반자 외에 128명의 여행객이 타고 있었다.
이 밀수업자는 사업차 출장을 떠난 것이었다. 1만 7,000달러를 제시하며 희귀조를 구해달라고 한 벨기에의 매 사냥꾼에게 약속한 대로 새를 배달하러 안트베르펜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불법 화물이 브뤼셀 자벤템 공항의 무작위 마약 탐지 과정에서 발각되었다. 그해 들어서만 벌써 수백만 마리의 닭과 타이의 동물원에 살던 호랑이 83마리 그리고 32명의 농부와 양계장 노동자들이 조류독감에 걸려 목숨을 잃은 마당이었다. 세관 관리들은 독수리 두 마리를 격리시키고 검사를 실시했다. 두 마리 모두 H5N1(인플루엔자 A의 아형亞型으로 고병원성 조류독감을 일으킴—옮긴이) 양성 결과가 나왔다. 세관은 검역 시설에 있던 700마리의 앵무새와 카나리아를 몽땅 살처분했다. 그런 다음 밀수업자를 추적해서 (병에 걸린 동물을 수입한 것은 범죄가 아니므로 그를 바로 체포하지는 못했다) 안트베르펜대학병원의 격리 병동에 나흘간 입원시켰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독수리를 검사하고 살처분했던 수의사가 이틀 뒤 평범한 독감 증상인 결막염에 걸렸다. 수의사의 가족 모두에게 항바이러스제 처방이 떨어졌다. 브뤼셀에 있는 벨기에공중보건과학연구소에 근무하는 르네 스나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밝혔다. “운이 정말 좋았다. 유럽 대륙을 풍비박산낼 뻔한 사건이었다.”
이 책은 생물학적 시한폭탄에 대한 이야기다. 혹은 세계화가 세계 곳곳의 온갖 미생물 침입자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날개를 달아준 사연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기업가 정신에 불타는 타이인 밀수업자가 나타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유럽 대륙 전체의 먹을거리가 망가질 뻔한 사연,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다녀온 것도 아닌데 미국 와이오밍 주에 사는 카우보이가 웨스트나일열West Nile fever에 걸린 이유, 원래 방글라데시가 고향인 콜레라가 유행병으로 단 일곱 차례 만연한 사이 세계의 물을 거의 대부분 점령해버린 비결이 이 책에 설명되어 있다. 궁극적으로는 65억 인구의 상거래, 여행, 식습관 그리고 여기에 무임승차할 기회만 엿보고 있는 모든 생물학적 히치하이커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이 책은 일촉즉발의 불안정성, 예측 불가능한 미래, 모든 사람들의 문 앞에 매복해 있는 미생물 테러리스트에 대처하는 데 지침이 되는 가이드북이다.
세계의 무역량이 나날이 기록을 경신하는 가운데 인터넷과 텔레비전 에서는 눈만 뜨면 새로운 침입자들의 침공 소식이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매년 10억에 달하는 사람들이 세계를 누비면서 이동하고 있으니 미생물의 교통량이 치솟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루는 조류독감이 세상을 뒤집어놓는다. 그다음 날은 항생제내성세균MRSA, methicillin-resistant Staphylococcus aureus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잣나무털녹병white pine blister rust, 크립토스포리디움cryptosporidium, 라임병Lyme disease, 리프트밸리열Rift Valley fever, 에이즈, 적조, 탄저병anthrax, 광우병 등등 한도 끝도 없다. 최근에는 밀 곰팡이까지 등장했다. 온갖 미생물과 그 친인척들이 세계무역망을 타고 총출동하는 것 같다. 세계 최고의 질병 역사학자인 앨프리드 크로스비 주니어는“선진국, 제3세계 할 것 없이 인류 전체가 전염병 세계화의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모두가 균질화되어간다”라고 표현했다.
초기에는 마치 천국의 이방인같이 잠잠하다가 급격히 불어나면서 결국 예상치 못했던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바로 생물학적 침입자들이다. 항만 해역, 야생동물, 병원 침상, 식용 소 등 그들이 점령해서 식민지화하는 대상이 무엇이든 그들의 치명적 활동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생명의 월마트화Wal-Martization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감염원들은 세상을 좀 더 획일화하여 이미 잠입에 성공한 침입자들이 침략의 범위를 넓혀가도록 후원한다. 실제로 현재 세계에 분포하는 1,000만 종의 생물 가운데 50퍼센트가 생물학적 침입으로 멸종 위기를 맞고 있다. 침입자들은 자생 생물종을 싹쓸이한 다음 그 빈자리를 세계 제패의 야욕에 불타는 질풍노도의 외래종으로 메워버린다.
갈색뱀의 기상천외한 증가 사례를 잠시 살펴보자. 제2차 세계대전 직후 괌의 미군 기지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침입종은 천적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 섬 전체를 서서히 점령해버렸다. 1990년대에 조류독감이 중국의 양계장에 파고들어 식민지화하던 때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원래 섬에 살던 자생종 새들이 완전히 사라져버릴 때까지 아무도 이들의 침입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1980년대에 들어 붉은공작비둘기Rufus fantail, 미크로네시아넓적부리Micronesia Broadbill 등 아름다운 자생종 새들이 너무나 급격한 속도로 줄어들자 과학자들은 처음에는 이름 모를 전염병에 새들이 죽어간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숲에 살고 있던 여덟 종의 새(모두 합쳐 약 30만 마리)를 깡그리 먹어치운 이 침입종 뱀은 도마뱀, 뾰족뒤쥐, 장지뱀, 쥐, 닭 심지어 사람의 아기까지 닥치는 대로 잡아먹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서는 이 먹성 좋고 호기심 많은 침입자 때문에 정전 사태가 100여 차례나 발생했다. 오늘날 괌은 1제곱킬로미터당 4,600마리라는 세계 최고의 뱀 서식 밀도를 자랑한다. 대신 새에 의존해 종자를 퍼뜨리던 나무들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세균이든 뱀이든 생물학적 침입자들은 말콤 글래드웰이『티핑 포인트The tipping point』에서 설명한 법칙을 따른다. 글래드웰은 재기발랄한 이 저서에서 사회적 유행의 역동적 원리를 설명하면서 허시파피와 청소년 흡연이 어떻게 그렇게 대단하게 유행할 수 있었는지 보여주었다. 원리는 간단하다. 성공적인 제품이나 아이디어는 전염성이 강하다. 그래서 대단
치 않은 사소한 것이 거대한 매출로 이어지고 번개 같은 속도로 변화가 일어난다. 아이팟부터 오럴 섹스에 이르기까지 성공적인 제품과 유행은 그런 문화적 경로를 통해 자유자재로 영역을 넓혀나간다.
생물학적 침입자들도 사회적 유행병처럼 전염성이 아주 강하거나 대단히 유연하거나 둘 중 하나다. 다시 말해서 먹을 것이 풍부한 환경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거나 어떤 장소에 갖다 놓든지 그 환경에 적응한다. 조류독감은 세계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공장형 양계 시설을 무한대 바이러스 복제 도구로 삼았다. 라임병과 이 병의 매개체인 진드기는 세계 어디서나 그 면적이 늘어나고 있는 대도시 근교에 광활하고 비옥한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광우병은 동물성 단백질 사료의 국제무역에서 최적의 전염 경로를 찾았고 항생제내성세균`MRSA은 환자 과밀, 오물, 환자의 이동성을 십분 활용하여 전 세계의 병원을 제 활동 무대로 정했다.
침입에 성공한 생물종들 사이에는 병리학적 공통점이 있다.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번식하고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다는 점이다(매미나방의 먹이가 되는 식물은 무려 300종에 달하고 MRSA는 인간의 장기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먹어치울 수 있다). 굳은 결의에 찬 기회주의자답게 이들은 인간이 조성해놓은 환경이나 기후변화로 제공되는 다양한 기회와 가능성을 호시탐탐 엿본다. 마치 동네 불량배들이 식료품점을 노리고 탐색하듯 현장을 조사하고 현지인과 어울리면서 때를 기다렸다가 금고를 털어간다.
침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번식을 시작했다 하면 생태계 전체와 먹이사슬, 수계水系는 물론이고 인류 제국의 운명까지 바꿔놓을 수 있다. 한편 그들은 세계를 무대로 새로 조성해놓은 동물원에 다른 침입종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끈덕지게 조력의 손길을 뻗친다. 종의 저글링이 끝나면 몇 안 되는 최후의 승리자가 판가름나고 수많은 패배자가 양산된다. 가장 최근에 세계를 침입해 승리를 거둔 생물종은 호모 사피엔스였다. 그런 승리자들은 종의 다양성을 축소하고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줄이고 자생적 생물학 대신 세계를 호령하는 폭군을 배치하여 삶을 전반적으로 균질화시킨다. 그들 때문에 세상은 전보다 무미건조해지든가 훨씬 위험해진다.
침입자들의 행태를 살펴보면 세계무역이 순수하게 상품과 신기한 기계만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거래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제 행위의 일환으로 시도되는 모든 일에는 그에 상응하는 생물학적 거래가 수반된다. 공장형 양계 시설이 성행하고 중국 남동부 지방의 무역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평범하기 짝이 없었던 바이러스 하나가 세계를 위협하는 살인마로 돌변해 세계를 휘젓고 혼란에 빠뜨릴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런데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가히 극적이라 할 수 있는 2003년을 계기로 닭과 야생 조류의 운명이 조류독감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침입자들은 가는 곳마다 원색적인 사회 비판을 퍼붓는다. 이제는 곰팡이나 박테리아가 세계를 누비면서 눈에 띄게 불안정한 인간의 라이프 스타일을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것이 일상화 되었다. 광우병이 버젓이 세계 시민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은 국제무역과 방만한 권력 덕분이었다. 여행이 용이해지면서(아울러 무엇이든 식재료로 삼는 광둥성의 식습관에 힘입어) 비교적 게으른 바이러스에 속하는 사스SARS까지 해외여행에 나섰고 결국 전염병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각국 병원의 심히 유감스런 현실을 만천하에 드러냈다(병원은 세계에서 침입자들이 가장 많이 상주하는 기관이다). 지난 20년간 (조류독감부터 구제역FMD, foot-and-mouth disease까지) 600종이나 되는 가축 질병이 불안하게 만연한 것으로 보아 가축 혁명과 농업계에 만연한, 규모 지상주의 사고방식이 과연 현명한 것인지 의심하게 된다. 이제는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모든 과학 연구소에서 유전자가 조작된 세균과 무기로 용도가 바뀐 미생물을 공장형 사육 시설처럼 빠른 속도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위대한 생태학자 찰스 엘튼은 50년 전에 이미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수천 종의 유기체들이 한데 뒤섞여 자연에서 무시무시한 전위dislocation가 시작되는 역사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그는 이런 식의 난장판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예기치 못한 비상사태’가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세계무역이 날개를 달아준, 세상의 모든 해충과 잡초와 세균이 무차별적으로 뒤섞이면서 사방팔방에서 주 1회 간격으로 비상사태가 연출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상거래가 배출한 침입자와 어디선가 마주칠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침입자들은 경제 파괴 분자일 수도 있고 세계적인 살인마일 수도 있다. H5N1처럼 야심을 품은 녀석도 있고 사스처럼 막대한 돈(500억 달러)을 잡아먹는 놈도 있다. 구제역처럼 전염성이 강할지도 모르고 MRSA처럼 치명적일지도 모른다. 감자잎마름병처럼 압도적이거나 탄저병처럼 극악무도할 수도 있다. 19세기에 병리학을 창시한 저명한 학자 루돌프 피르호는“환경이 아무리 끔찍해도 습관화되면 참아낼 수 있는 것”이 인류에게 내린 최악의 저주라고 한탄했다.
침입자들이 주변 환경을 불안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우리는 그런 난장판에 익숙해질 것이다. 우리 모두 이미 대혼란 속에서 살아가는 거대 무역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닭이 없으면 진수성찬도 없다.”
—중국 속담
닭장, 악의 소굴로 전락하다
H5N1은 성질머리 고약한 노익장 가금류 바이러스치고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제일 먼저 텔레비전 전파를 탄 것은 유령 같은 살상 복장을 한 사람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조류를 대학살하는 장면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농부들이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사망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그러자 정치인들이 나서서 야생 조류가 바이러스를 옮겨 장사를 망치고 있다면서 습지마다 물을 죄다 빼라고 명령했다. 제네바 세계보건기구의 의료 전문가들이 (100여 명에 달하는 불운한) 사망자 수를 집계한 뒤에야 비로소 바이러스학자들은 또 하나의 심각한 유행성 독감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이미 1918년에 5,000만의 인명을 앗아간 바이러스 폭풍을 경험한 바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오늘날 중국인들의 가장 탁월한 특기를 발휘했다. 돌림병의 진원지가 광둥성이 아니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부인한 것이다.
얼마 후에는 세계 곳곳의 인터넷 블로그, 공중보건 관계자, 조류 애호가들 사이에서 히치콕의 영화처럼 오싹한 마魔의 주문이 번져나갔다. H5N1이 출몰하는 곳마다 난장판이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겁먹은 농부들이 주요 단백질 공급원인 닭을 바이러스 감염 여부와 상관없이 몽땅 도살해 나일 강 속에 던져버렸다. 이라크 북부 지방에서는 하늘에서 죽은 새들이 떨어져 내리자 신과 마주친 사람들처럼 모두 줄행랑쳤다. 매사에 조심성 있는 독일 정부는 토네이도 정찰기를 띄워, 발틱 해 연안에 인플루엔자로 죽어 널브러진 백조 수백 마리를 모두 수거했다. 결벽증이 심한 네덜란드인들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자국 내 가금들을 모두 실내
에 가둬버렸다. 수탉을 여전히 자랑스러운 국가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프랑스인들은 심각한 정체성 고민에 빠졌다. 조류를 끔찍이 사랑하는 홍콩 시민들에게는 깃털 달린 애완동물에게 입을 맞추지 말라는 관계 당국의 강력한 권고가 떨어졌다. 각국 정부는 수십 가지에 이르는 유행병 대비책을 앞다퉈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류독감 때문에 지구촌 전체가 미증유의 닭 열기로 끓어오르기 한참 전, 닭으로 우글거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공장형 양계 시설에 침입자가 잠입하자 그 정체를 파악하고 맞붙어 싸운 마크 데키치라는 인물이 있었다. 때는 1998년, 석유 왕국의 양계장에서 침입자를 물리친 데키치의 혁혁한 무공이 별로 주목거리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오히려 데키치 자신은 범법 행위를 해서라도 자신의 업적을 쉬쉬하며 덮으려고 애썼다. 세계의 양계업 종사자들은 보통 양계장에서 발생한 전염병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데키치의 특별한 사연을 들어보면 평범한 조류 바이러스가 어쩌다가 세상을 공포 속에 몰아넣은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고 결국 인간의 집단 히스테리라는 광풍까지 불러 일으켰는지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8년 전만 해도 데키치는 석유 부국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최대 규모를 갖춘 양계 회사인 파키에양계농장의 어엿한 직원이었다. 조지아 주 출신의 조류 전문 수의사였던 그는 파키에양계농장의 닭에게 대규모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사료에 약물을 조제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바쁜 일이 없으면 심포지엄에 참석해 공장형 양계 시설의 닭에게 흔히 발생하는 질병에 대해 강연을 했다. 심지어 미국 농무부의 요청을 받아 중요한 가축 문제에 대해 증언을 한 적도 있었다. 가금류 전문가로서 경험이 많았던 데키치는 소위‘가금 전염병’에 두 가지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나는 닭의 허파를 막아 불구로 만드는 저병원성 질병이고 다른 하나는 닭이 폐사해버리는‘고병원성 조류독감’이었다. 하지만 저병원성 질병이라도 얼마든지 치명적인 살인마로 돌변할 수 있다. 그럴 경우의 치사율은 100퍼센트로, 4만 마리의 닭을 키우는 공장형 양계 시설쯤은 단 몇 시간 만에 초토화된다.
고병원성 변종 전염병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그 정교함이 가히 악마적이다. 브로일러(broiler, 보통 통닭구이용으로 소비되는 어린 닭—옮긴이)들이 그런 병에 걸려 전멸하는 것은 아프리카인들이 에볼라Ebola열에 녹아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 병은 일단 새의 몸에 침입했다 하면 볏 끝에서부터 암모니아 냄새에 찌든 발톱 끝까지 모든 장기와 조직을
제멋대로 점령해버린다. 브로일러의 눈, 부리, 항문에서 피가 흐른다. 모이를 쪼는가 했던 닭이 갑자기 죽어 널브러진다. 마지막에 가서는 한마디로 ‘녹아’없어진다. 닭 모양의 고무 인형 같은 형상밖에 남지 않는다. 병이 한번 발생하면 사업 이윤은 고사하고 흉측한 동물의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일 뿐만 아니라 보통 몇 주 동안은 양계장 문을 닫아야 한다.
세계의 양계업 종사자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데키치도 바이러스의 요란스런 등장과 집약적 사육 시스템인 홍콩의 공장형 양계 시설 그리고 시장에서 1997년 봄부터 가을까지 수십만 마리의 조류가 불타 죽는 장면 등을 초조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갑작스럽게 출현한 이 전염병은 오리, 닭, 메추라기 등을 마주치는 족족 감염시킨 뒤 그중 70~100퍼센트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다음으로 탁아소에서 병아리와 논 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이상한 독감에 걸렸다. 이 병으로 소년은 폐, 신장, 간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혼수상태에 빠진 지 엿새 만에 사망했다. 새로운 바이러스를 확인하고 H5N1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만 해도 바이러스학자들은 깜깜절벽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이 계열의 바이러스가 인간의 면역 체계를 공격하거나 인간 면역력을 능가한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H5N1은 조류만 공격하는 안정적인 조류 바이러스일 뿐 대인 공격을 감행할 만큼 용의주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몇 주 동안 우기가 이어지더니 죽음의 바이러스가 다시 출몰했다. 나타나기가 무섭게 신나게 닭 사냥을 즐긴 바이러스는 어린이와 성인 다섯 명까지 추가 공격했고 그들은 면역 체계가 완전히 망가진 채 사망했다. 홍콩 공중보건 당국의 가혹한 조치가 시작되었다. 홍콩 내 공장형 양계 시설과 웨트 마켓wet markets이라고 부르는 재래 조류 시장에 4인 1조 팀이 파견되었다. 잡다한 물건을 파는 매대가 북새통을 이루는 웨트 마켓에서는 살아 있는 새와 생선을 파는 상인들이 양동이에 든 물을 동물들에게 뿌려가면서 거리를 청소한다. 160만 마리의 가금을 살처분할 목적으로 파견된 조류 암살단은 새들의 멱을 따거나 목을 부러뜨리거나 비닐봉지에 넣어 가스로 질식사시켰다. 이 암살자들은 밤에 집에 돌아가서는 아내에게 키스를 하거나 아이들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홍콩 시민들이 이렇듯 전염병과 맞서 싸우는 동안 데키치는 <가금학Poultry Science>이라는 전문지에 선견지명이 빛나는 논문을 한 편 실었다. 그는 지난 30년간“몸집이 크고 가격이 저렴하면서 성장이 빠른 닭”을 길러온 고수익 브로일러산업이 이제 건강을 위협하는 여러 문제에 직면해 있으며 그중에는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백신과“ 날로 증가하는 계사鷄舍밀도”의 문제도 포함된다고 썼다. 닭 한 마리당 A4 용지 한 장보다 좁은 공간밖에 할당하지 못하다 보니“엄청난 숫자의 비처치 조류들 사이에 풍토병이 만연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비처치 조류란 질병 저항력을 전혀 타고 나지 못한 면역력 결핍 동물을 가리킨다.
이러한 경고의 글을 쓴 데키치는 얼마 뒤 파키에양계농장에서 자신이 돌보던 브로일러 몇 마리가 저병원성 조류독감에 걸렸음을 발견했다. H5N1이 아니라 그 사촌뻘 되는 전염병으로 증상은 훨씬 경미하지만 빠른 속도로 번져나가고 있던 H9N2라는 것이었다. H9N2는 1990년대에 아시아, 유럽, 중동의 공장형 양계 시설에 퍼지기 시작했다. H9N2(『조류독감: 전염병의 사회적 생산The Monster at Our Door』의 저자인 마이크 데이비스의 별난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조류 바이러스에는 ‘발생론적 번호판’이 붙어 있다)에 걸린 공장형 양계 시설의 닭은 폐 질환을 앓게 된다. 그런데 이미 다른 병에 감염되어 있는 닭이라면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당시의 바이러스학자들은 H9N2를 세계에서 가장 흔한 조류 바이러스라고 생각해서 대인간 ‘전염 확률이 가장 높은’ 바이러스라는 위상을 부여했다. 홍콩에서는 H5N1을 둘러싸고 히스테리 상태가 점점 확대되고 있었다. 데키치는 병명에 상관없이 발병 사실을 공개했다가는 심각한 조사를 받고 무역 규제를 당해 수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이란에서는 똑같은 침입자가 닭들을 덮쳐 이미 난리굿을 벌인 뒤였던 것이다.
(들어가는 말 전문, 제1장 부분)
---------------------------------
필자 소개
앤드류 니키포룩 (Andrew Nikiforuk)
지금까지 세 권의 저서를 펴냈으며 특히 『새보터Saboteurs』는 캐나다 <Governor General's Award> 논픽션 부문을 수상하였다. 처녀작인 『제4의 기사, 전염병, 페스트, 기아, 재앙, 신생 바이러스의 역사Fourth Horseman: A Short History of Plagues, Scourges, and Emerging Viruses』는 캐나다, 미국, 영국에서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다. 유능한 기자이기도 한 그는 <맥클린Maclean’s>, <새터데이 나이트Saturday Night>, <캐나디안 비즈니스Canadian Business>등에서 활동하였다. 현재 가족과 함께 앨버타 주 캘거리에 살고 있다.
--------
역자 소개
이희수
프랑스 파리 제7대학 언어학과 석사과정을 수학한 후 번역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 전문 잡지, 가트너 보고서 등의 다양한 자료와 『뇌의 마술』, 『발달에 따른 아이교육』, 『생명탄생의 비밀』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