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치마 허리끈을 묶는다. 주황색 셔츠에 검정바지, 검정 양말에 검정 앞치마. 머리는 단정히 반머리로 묶었다. 주황색 셔츠 두 벌과 검정 앞치마는 유니폼으로 지급받았다. 홀에서는 같은 옷을 입은 동료들이 이미 청소를 시작했다. 바쁘게 발걸음을 옮긴다. 오전 9시 50분, 하루가 시작됐다. 지금부터 12시간 동안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 이곳은 서울 강서구의 ‘A갈빗집’, 나의 일터다.
가을 한 달을 ‘식당 아줌마’로 살았다. 식당에서는 누구든 ‘식당 아줌마’인 내게 일을 시킨다. 사장일 수도, 손님일 수도, 동료일 수도 있다. 해서 일하는 내내 일에 쫓긴다. 동료들은 대부분 인생의 가을을 맞은 중년 여성이다. 누군가의 딸이고 아내고 엄마다. 시급은 4000원 안팎이다. 그래도 12시간씩 쌓이니 한 달에 100만 원이 넘는다. 고스란히 생계비다. 식당 아줌마들의 가을은 가난하다.
슈퍼우먼도 울고 갈 무한 노동
식당에서 중년 아줌마들은 ‘슈퍼우먼’ 혹은 ‘엄마’처럼 일해야 한다. ‘엄마’는 시키지 않아도 이것저것 집안일을 다 하곤 한다. 식당일도 집안일처럼 해도 해도 티가 안 난다. 찾을수록 할 일은 많고 대신해줄 사람은 없다. 무한 노동이다.
갈빗집의 아침은 청소와 함께 시작된다. 오전 10시부터 밤 10시까지가 근무시간이다. 오전 9시 40분에 출근하든, 10시 정각에 도착하든 옷만 갈아입으면 바로 업무 시작이다. 이때부터 직원들은 점심시간이 다가오기 전까지 온갖 일을 찾아내 해치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쁜 시간에 허둥대 더 피곤해진다. 청소는 크게 빗자루질과 대걸레질, 손걸레질, 화장실 청소, 이렇게 4가지로 나뉜다. 첫날, 옷을 갈아입기가 무섭게 청소에 투입됐다.
직원들과는 청소를 하면서 첫인사를 나눴다. A갈빗집은 나를 포함해 홀서빙 직원 5명, 주방 직원 4명이 일한다. 사장은 40대 중반의 여성이다. 홀서빙 직원끼리는 나이가 많은 이는 ‘언니’로, 어리면 이름을 부른다. 홀서빙 직원 중에 직책이 ‘팀장’인 이가 있지만 이마저도 편하게 ‘언니’라 부른다. 주방에는 담당 업무에 따라 요리 담당 ‘실장님’, 밑반찬 담당 ‘찬모님’, 설거지 담당 ‘이모님’, 기타 잡무 담당 ‘과장님’이 있다.
가게는 넓다. 홀부터 주방까지 170평이다. 홀에는 29개 테이블이 있다. 안쪽에는 16개 테이블이 있는 방이 있다. 방 안쪽에는 또 하나의 나무 문이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또 작은 방이다. 이곳에서 직원들은 옷을 갈아입는다. 그 안쪽으로 식자재 창고가 있어 작은 방엔 늘 매캐한 냄새가 난다.
싸리빗자루를 잡고 홀부터 쓸기 시작한다. 내 팔뚝 굵기의 빗자루를 잡고 홀 절반을 쓸고 나면 빗자루가 천근만근이다. 빗질이 끝나면 대걸레를 들고 온다. 갈빗집 바닥에는 기름때가 많다. 대걸레질은 두 손에 힘을 줘서 박박 문질러 닦아줘야 한다. 금세 주황색 셔츠가 땀에 젖는다. 한 번 쓴 대걸레는 락스와 주방세제를 풀어 손으로 벅벅 비벼 빨아줘야 한다. 이후 손걸레로 45개 테이블 위를 닦는다. 어린이용 놀이방, 어항, 선반 등도 닦아줘야 한다.
화장실 청소는 혼자 한다. 식당의 관습법상 막내인 내 담당이다. 플라스틱 바가지에 락스와 주방세제를 잔뜩 풀어서 거품을 낸다. 그걸 변기와 세면대에 뿌린다. 가장 고역은 남자 소변기를 닦는 일이다. 남자 소변기 아랫부분의 둥근 뚜껑을 걷어내면 하루 동안 그곳을 다녀간 이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곳을 수세미로 비벼 닦는다. 구역질이 난다. 락스를 너무 많이 쓰면 어느 순간 눈이 시려 뜰 수가 없다. 눈물·콧물 범벅이 돼서 물을 뿌린 뒤 후퇴한다.
허리를 펴고 시계를 본다. 1시간은 지났겠지 싶은데 이제 겨우 40분이 지났다. 12시간은 언제 지난단 말인가! 디저트용 커피와 요구르트를 준비하고 공기에 밥을 퍼넣는다. 1시간 사이에 변기부터 요구르트까지 내 손을 거친다.
오전 11시는 직원들의 아침 식사 시간이다. 주방 앞 테이블에 상을 차린다. 막내가 눈치껏 밥상을 차려야 한다. “얘, 얼른 수저랑 물이랑 밥 놔!” 조금만 늦어도 언니들이 성화다. 수저, 물컵, 공깃밥, 앞접시를 가지런히 놓고 음식을 차린다. 내 입에 밥 넣는 것도 ‘일’이다. 낮 12시가 되면 손님이 물밀듯 들어오기 때문에 얼른 먹고 치워야 한다.
어림도 없는 ‘한 번에 한 가지씩’
A갈빗집의 메뉴는 다양하다. 크게 식사류, 전골류, 고기류로 분류된다. 식사류는 갈비탕, 육회비빔밥, 낙지비빔밥, 된장찌개, 김치찌개, 냉면 등이다. 김치두루치기, 돼지주물럭, 버섯불고기 등 전골류도 인기 메뉴다. 고기류는 돼지왕갈비, 생삼겹, 소갈비, 한우꽃등심, 육회 등이 있다. 여기에 ‘점심 특선’ 메뉴가 있다. 하루에 한 가지 메뉴를 지정해 5000원에 제공한다.
낮 12시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앞뒷문이 열린다. 문에 매달린 종이 쉴 새 없이 울린다. 직원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걷지 말고 뛰어다녀!” ‘팀장님’이 내 옆을 지나며 말했다. 이 식당에서 1년 7개월 간 일했다는 그는 식당일에서 베테랑이다. 한데 곧 그만둔다고 한다. 직원들 처우 문제로 사장과 다퉜다고 한다. 그 때문에 사장과 팀장은 서로 냉랭하다. “손님이 들어온다 싶으면 인사를 크게 해야지!” 어느 틈에 사장이 옆에 와서 잔소리다. 그러고는 시범을 보이듯 큰 목소리로 “어서 오세요!”를 외친다. 나도 따라 인사를 했다.
한 번에 한 가지 일만 해선 ‘고객 만족’이 안 된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밀고 나가는데 또 손님이 들어오고 저쪽 테이블에서는 김치를 더 갖다달라고 한다. 커피를 타달라는 이도 있다. 점심시간에만 홀에 있는 29개 테이블의 손님이 두세 번 바뀐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모든 일을 해내야 한다. 내게는 첫날이지만 손님들에겐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굼뜨게 행동할수록 “아줌마!” “여기요!” 외치는 소리, 테이블벨 울리는 소리는 잦아진다. 손님이 식사를 마치면 최대한 빨리 상을 치워야 다음 손님을 받을 수 있다. 쟁반운반차가 없으면 뚝배기와 도자기 그릇이 가득 든 쟁반을 손으로 날라야 한다. 무게에 팔목이 꺾인다. 그래도 그릇이 깨질까 조심조심 옮긴다.
상을 치우고 식당이 좀 조용해졌다 싶어 허리를 폈다. 시계를 보니 오후 1시 30분이다. 개수대 옆엔 우리가 닦아야 할 물컵, 맥주컵, 가위, 국자, 집게 등이 쌓였고 그 옆 얼음제조기 위에는 식수가 담겼던 물통이 쌓여 있다. 물통에 얼음과 물을 채워놓고 설거지를 한다. 아침에 해놓은 밥도 다 팔렸다. 새로 밥을 해 공기에 퍼담는다. 다시 허리를 펴면 오후 2시30분. ‘언니’들이 내게 직원들 점심상을 차리라고 한다.
첫날의 ‘점심 특선’은 카레였다. 우리의 점심상도 카레였다. 이때부터 세 끼 연속 카레를 먹었다. 생각보다 ‘점심 특선’을 찾는 손님이 적어 카레가 많이 남은 까닭이다.
점심을 먹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팀장 언니가 “가서 1시간 쉬라”고 한다. 무슨 소린가 싶었는데 경희(가명) 언니가 옷 갈아입는 방으로 슥 들어간다. 경희 언니는 마흔 살, 재중동포다. 피부가 희고 얼굴이 예쁘다. 화장도 열심히 한다. 그를 따라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에 얇은 전기요가 깔려 있다. 언니는 그 위에 누웠다. 방석을 베개 삼고 발밑의 얇은 담요를 배까지 끌어올렸다. 나도 따라 누웠다.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뜨거운 전기요에 노곤한 몸이 달라붙는 듯했다. 언니가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놀라 깼다. 1시간 쉬는 것도 2인1조로 2교대다. 잠을 자라고 시키니 잠을 자고 일어난다. 그러고는 잠시 동안 코드를 꽂아 충전한 기계처럼 밖으로 나간다. 이제 저녁 장사를 준비할 때다. 경희 언니는 다시 화장을 고친다.
“진짜 하루 하루 버티기 힘드네.”
자고 일어나 불판을 닦았다. 주방에 들어가니 까맣게 타버린 불판 수십 개가 큰 고무 대야에 담겨 있다. 앉은뱅이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철수세미로 불판을 문지른다. ‘찬모님’과 ‘이모님’이 자기들 음식하는 데 거치적거린다며 소리를 지른다. 몸집이 큰 50대 찬모님과 깡마른 60대 이모님은 둘 다 욕을 잘 한다. 어쩔 수 없이 구석으로 옮겨 마저 닦는다. 한참을 문지르다 보면 불판을 이렇게 태워먹은 손님이 원망스럽다. 도대체 누가 왜 고기를 불판에 구워먹을 생각을 해냈을까. 수십 개를 닦고 나면 무릎도 어깨도 뒤틀린다.
오후 6시께부터 저녁 손님이 든다. 골프연습장에서 운동을 마치고 혼자 온 손님부터 회식 단체 손님까지 밀려와 꾸준히 바쁘다. 고기 손님이 많아지면서 손님 시중을 드는 일도 더 많아진다. 시곗바늘은 꾸물거렸다. 배가 고팠다. 회식 손님의 삼겹살을 구워주다가 한 개 집어먹을 뻔했다. 너무도 맛있어 보였다.
식당일을 시작하면 서러운 순간이 많다. 미자 언니는 내가 실수할 때면 등짝을 짝짝 때렸다. 마흔세 살 미혼인 미자 언니는 늘 심통이 난 듯 입을 앙 다물고 있다. 예전에 우울증이 있었고 지금도 감정의 기복이 크다. 그는 늘 내게 “나 때는 울면서 일 배웠다”고 했다. 자기나 되니까 이렇게 일을 가르쳐주지, 자신이 처음 일을 시작할 때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단다. 맞으면서도 영광인 줄 알아야 했다.
사장도 기선을 제압하려고 꾸준히 구박을 한다. 내게도 그랬다. 5분 지각했다가 하루 종일 ‘주의’를 들었다. 10초나 됐을까, 음식준비대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야단을 맞기도 했다. 결정타는 화장실에서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다가 걸린 사건이다. 일을 시작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청소를 하다가 잠시 휴대전화를 받았는데 그 모습을 사장이 목격했다. “너 지금 다른 사람 일하는데 혼자 노는 거야? 일할 생각이 있는 거야 뭐야? 일 안 할 거면 그만둬!” “죄송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나의 말을 사장은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전화를 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었다. 나는 “일을 계속 할지 어쩔지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사장은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날 저녁,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사장은 “인생에 고비를 넘기느냐 못 넘기느냐가 중요하다”며 설교를 늘어놨다. 그러더니 사람을 구할 때까지는 있으라고 했다. 돌아서며 나는 조금 우울해졌다. 과연 생계가 절박한 상황이었어도 내가 이렇게 의연히 그만두겠다고 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다.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퇴근 시간이다. 시곗바늘이 드디어 밤 10시를 가리킨다. 사장의 눈치를 본다. “들어가서 옷 갈아입어.” 사장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니들과 우르르 몰려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축축해진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언니들은 유니폼을 집에 가져가 빨아오기도 하고 퇴근 직전 개수대에서 빨아 가게에 널어놓기도 한다. “아이고, 하루가 또 이렇게 갔구만.” 바지를 벗던 이모님이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너무 힘들다.” 팀장 언니가 거든다. 무뚝뚝한 찬모님까지 말을 보탠다. “진짜 하루하루 버티기가 힘드네.”
식당 아줌마들이 거리로 나왔을 때는 이미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12시간 만에 마시는 바깥 공기다. 허벅지, 종아리, 발목, 발바닥이 모두 아파 걷기가 괴로웠다. 그래도 “스트레스나 풀 겸 소주나 한잔하자”는 아줌마는 아무도 없다. 각자의 집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집에 가서도 할 일이 많다. 팀장 언니는 가족과 늦은 저녁을 먹어야 한다. 이모님도 찬모님도 집에 가면 집안일이 기다린다. 나 역시 집에 오니 빨래와 설거지 거리가 쌓여 있다. 외면하고 잠이 들었다.
(제1장 부분)
--------
저자 소개
안수찬
1997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하여 정치부, 문화부, 사회부 등을 거쳐 현재 <한겨레21> 사회팀장을 맡고 있다. 청년 노동 문제를 체험하기 위해 서울 강북의 한 대형마트에서 한 달간 양념육을 팔았다. 그들의 처지에 보탬이 될까 하여 기사를 썼지만, 노동자로서 자각을 얻어 오히려 도움을 받은 꼴이 되었다. 사실보다 진실에 관심이 많고, 기사보다 사람에 관심이 많다. 사람의 진실에 대한 기사를 많이 쓰는 게 꿈이다.
전종휘
생태친화적인 자유 영혼이고 싶어하나 사실은 아스팔트 위에서 질척거리며 산다. 한겨레 밥 먹은 지 11년째다. 정치부, 사회부, 편집부, 스포츠부, 여론매체부 등을 거쳤지만 아직 전공을 찾지 못했다. 취재는 늘 배움이다. 마석가구공단이라는 ‘노동의 섬’에서 자기의 의식도 한 뼘 자랐다. 지금은 신문 사회부에서 노동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임인택
2003년 한겨레신문사 입사. 실명을 감춰야 하는 합숙 전형 때 대용했던 ‘별명’은 119였다. 입 없는 자의 분노를 위무하고 소방하겠다는 포부보다 나의 취직이 급하다는 강한 메시지가 전달되어 입사에 성공, 문화부, 사회부, 어젠다팀, 경제부 등을 거쳐 2009년부터 <한겨레21> 사회팀에서 일하고 있다. 2009년 여름, 안산 반월공단 A 공장에서 근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슬픈 마법의 세계 복판에서 다시, 그러나 비로소 새겼던 단어, ‘119’다.
임지선
2006년 <한겨레21>의 식구가 되었다. ‘노동 OTL’ 기획 당시 사회팀 막내이자 유일한 여성 기자였다. 딸만 셋인 집안에 둘째로 태어나, 식당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다 쓰러져 잠이 드는 어머니를 보며 자랐다. 한 달간 식당 노동에 뛰어들어 수많은 ‘어머니’를 목격했다. 여성 빈곤 노동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