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1946년 1월 8일 ~ 5월 20일
런던에서
∽
채널제도 건지 섬의 도시 애덤스가 줄리엣에게
From Dawsey Adams, Guernsey, Channel Islands, to Juliet
1월 12일
런던 SW3, 첼시, 오클리 스트리트 81번지
줄리엣 애슈턴 귀하
친애하는 애슈턴 양,
제 이름은 도시 애덤스입니다. 건지 섬 세인트마틴스 교구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지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아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예전에 당신이 갖고 있던 찰스 램의 《엘리아 수필 선집》이 지금 저한테 있습니다. 앞표지 안쪽에 당신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더군요.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전 찰스 램의 열렬한 팬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책 제목이 ‘선집’인 걸로 짐작건대 작가의 다른 글들도 나와 있다는 얘기 같아서요. 다른 작품이 있다면 당연히 읽고 싶은데, 독일군은 건지 섬을 떠났지만 남아 있는 서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부탁드립니다. 런던에 있는 서점 이름과 주소를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찰스 램의 작품을 우편으로 주문하려 합니다. 그리고 혹시 그의 전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있다면 서점에 한 권 구해달라고 얘기해주시겠습니까? 그의 유쾌하고 기지 넘치는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이 인생에서 엄청난 슬픔을 겪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일군 점령하에서도 저는 찰스 램 덕분에 웃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돼지구이에 관한 글이 압권이지요. 우리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도 독일군에게는 비밀로 해야 했던 돼지구이 때문에 탄생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찰스 램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가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찰스 램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실례를 무릅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았습니다. 그의 글을 읽다 보니 찰스 램과 친구가 된 것 같거든요.
폐가 되지 않기를 희망하며, 도시 애덤스
추신. 제 친구 모저리 부인도 한때 당신의 것이던 소책자를 구입했답니다. 제목은 《불타는 떨기나무는 과연 존재했을까? 모세와 십계명을 위한 변론》이죠. 모저리 부인은 당신이 여백에 남긴 메모가 마음에 든다고 합니다. ‘신의 말씀? 아니면 군중통제의 수단?’ 어느 쪽인지 결론이 났습니까?
줄리엣이 도시에게
From Juliet to Dawsey
1월 15일
건지 섬 세인트마틴스 교구, 라부베, 레볼레랑스
도시 애덤스 귀하
친애하는 애덤스 씨,
저는 이제 오클리 스트리트에서 살지 않지만, 다행히 당신의 편지가 절 찾아왔네요. 제 책도 당신을 찾아갔다니 무척 기쁩니다.
《엘리아 수필 선집》과 헤어지는 건 참으로 슬프고 아픈 일이었어요. 물론 같은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었고 책꽂이에 둘 공간도 없었지만, 그 책을 팔 때는 마치 배신자가 된 기분이었죠. 당신의 편지를 받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군요.
제 책이 어쩌다 건지 섬까지 갔을까요? 아마도 책들은 저마다 일종의 은밀한 귀소본능이 있어서 자기한테 어울리는 독자를 찾아가는 모양이에요. 그게 사실이라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서점을 뒤지는 것뿐이라서, 편지를 받자마자 곧장 헤이스팅스 서점으로 갔어요. 몇 년째 단골인 서점이죠. 제가 원하는 책은 물론이고 미처 원하는 줄 몰랐던 책까지 서너 권은 찾을 수 있는 곳이랍니다.
주인인 헤이스팅스 씨한테 당신 얘기를 하면서, 상태 좋고 깨끗한 (그러나 희귀본은 아닌) 《엘리아 수필집 후편》을 한 권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분이 우편으로 책과 청구서를 보낼 거예요. 찰스 램의 열혈 팬이 또 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하셨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E. V. 루커스가 쓴 찰스 램 전기가 최고라더군요.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 책도 구해서 보내주시겠대요.
책이 도착하길 기다리는 동안 제가 드리는 작은 선물을 받아주시겠어요? 《찰스 램 서간집》이에요. 웬만한 전기보다 그에 대해 더 많은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E. V. 루커스는 워낙 고상한 사람이라 찰스 램의 글 중에서 제가 특히 좋아하는 구절은 빼버렸을 것 같아요. 바로 이거예요.
‘술, 술, 술, 짠, 짠, 짠, 벌컥, 벌컥, 벌컥, 팽, 팽, 팽, 어질, 어질, 어질, 쾅! 난 결국 구제 불능이 되고야 말겠지. 이틀을 내리 술만 들이켜고 있으니. 내 도덕관념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신앙심도 희미해져가.’
《서간집》 244쪽에 있답니다. 제가 처음 읽은 찰스 램의 작품이 이 책이에요.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이 책을 산 건 리 헌트(1784~1859. 당대의 문예 흐름을 주도한 영국 문예지 〈이그재미너〉 창간자이자 평론가 겸 시인)가 황태자를 비판한 죄로 감옥에 있을 때 찰스 램이라는 친구가 면회를 갔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에요.
그곳에서 찰스 램은 리 헌트를 도와 감방 천장에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그려 넣었다고 해요. 그다음에는 벽을 타고 오르는 장미 덩굴을 그렸고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요, 찰스 램은 친구가 감옥에 있는 동안 리 헌트의 가족에게 돈을 주기도 했대요. 정작 자신은 지독하게 가난했으면서 말이죠. 그리고 헌트의 막내딸에게 주기도문을 거꾸로 읊는 법도 가르쳐줬다네요. 그런 사람에 대해서라면 모든 걸 알고 싶어지는 것도 당연해요.
그래서 제가 독서를 좋아하는 거예요. 책 속의 작은 것 하나가 관심을 끌고, 그 작은 것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거기서 발견한 또 하나의 단편으로 다시 새로운 책을 찾는 거죠. 실로 기하급수적인 진행이랄까요. 여기엔 가시적인 한계도 없고, 순수한 즐거움 외에는 다른 목적도 없어요.
책 표지에 피처럼 보이는 붉은 얼룩은 핏자국이 맞아요. 종이칼을 다루다가 그만 방심했어요. 동봉한 엽서의 찰스 램 초상화는 그의 친구인 윌리엄 해즐릿(1778~1830. 영국의 평론가 겸 수필가)이 그린 거예요.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몇 가지 질문에 답해주실 수 있나요? 정확히 세 가지 질문이에요. 돼지구이 만찬은 왜 비밀에 부쳐야 했나요? 돼지구이가 어쩌다 북클럽 창단으로 이어졌죠?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한 건데, 대체 감자껍질파이가 무엇이고 그게 왜 북클럽 이름에 들어갔나요?
현재 저는 런던 첼시의 글리브 플레이스 23번지에 세를 들어 살고 있어요. 전에 살던 오클리 스트리트의 집은 1945년에 폭격으로 무너졌거든요. 아직도 그 집이 그립네요. 오클리 거리 풍경이 정말 근사했거든요. 제 방에 있던 세 칸 창문 너머로 템스 강이 내려다보였답니다.
물론 지금은 런던 어딘가에 지낼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운인 걸 알지만, 저는 제가 받은 은혜를 헤아리기보다는 불평을 늘어놓는 편이 훨씬 맘 편하거든요. 당신이 ‘엘리아’ 수배 작업에 앞서 저를 떠올려주셔서 기뻐요.
당신의 진실한 벗, 줄리엣 애슈턴
도시가 줄리엣에게
From Dawsey to Juliet
1월 31일
친애하는 애슈턴 양,
보내주신 책이 어제 도착했습니다! 참 친절한 분이군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세인트피터포트 항구에서 일합니다. 배에서 짐을 내리는 일이지요. 그래서 휴식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어요. 버터 바른 빵과 진짜 차를 맛볼 수 있고 이제 당신에게 받은 책까지 있으니 이거야말로 축복입니다. 표지가 딱딱하지 않아서 어딜 가든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으니 더 좋습니다. 물론 너무 빨리 읽지 않게 조심할 겁니다. 찰스 램의 초상화도 생겼으니 이 또한 소중한 일입니다. 그는 머리숱이 많았군요, 그렇죠?
물론 당신에게 답장 쓸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럼 질문하신 내용에 최선을 다해 답해보겠습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재주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요. 먼저 돼지구이 파티에 대해 말씀드리죠.
저에겐 아버지가 물려주신 농장과 집이 있습니다. 전쟁 전에는 돼지를 치고 채소를 길러서 세인트피터포트 시장에 팔고 런던 코번트가든에 꽃을 팔았죠. 목수 일과 지붕 고치는 일도 가끔 했고요.
지금은 돼지를 치지 않습니다. 독일군이 유럽 대륙에 주둔한 군인들에게 먹이려고 다 가져갔어요. 저에겐 감자를 기르라더군요. 그들이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말아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제가 독일군에 대해 잘 몰랐을 때는 돼지 몇 마리쯤은 혼자 몰래 기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농업 담당 장교한테 들켜서 다 몰수당했지요. 뭐, 꽤 타격을 입긴 했습니다만 저는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자와 순무는 충분했고 그때까지는 밀가루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 마음이 어찌나 음식에 휘둘리던지. 순무를 주식으로 먹고 이따금 별식이랍시고 연골 덩어리를 씹으며 6개월을 보내고 나니 머릿속에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간절해지더군요. 제대로 갖춰진 식사 말입니다.
어느 날 오후, 이웃에 사는 모저리 부인이 저에게 쪽지를 보냈습니다. 빨리 오라고 적혀 있었어요. 그리고 푸줏간 칼을 가져오라고요. 저는 괜한 기대를 품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단숨에 그녀의 장원 저택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괜한 기대가 아니었어요! 모저리 부인에게 남몰래 빼돌려둔 돼지가 있었고, 친구들과 함께할 돼지고기 파티에 절 초대한 겁니다!
어릴 때 저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말을 심하게 더듬었거든요. 게다가 파티 같은 데도 별로 참석한 적이 없었습니다.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를 파티에 초대한 사람은 모저리 부인이 처음이었습니다. 돼지구이를 맛볼 생각에 그 초대에 응했습니다만 실은 고깃덩이를 몇 조각 얻어 집에서 혼자 먹을 작정이었습니다.
그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바로 그 파티가 건지 섬의 감자껍질파이 문학회 첫 모임인 셈이었으니까요. 당시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입니다. 음식도 좀처럼 맛보기 힘든 진미였지만 사람들은 더더욱 훌륭했습니다. 신나게 먹고 이야기하느라 모두 시간 가는 줄 몰랐지요. 그러다 아멜리아(모저리 부인의 이름입니다)가 9시를 알리는 시계 종소리를 들었습니다. 야간 통금 시간에서 두 시간이나 지난 겁니다. 뭐, 배불리 먹고 배짱이 두둑해진 탓일까요, 엘리자베스 매케너가 밤새 아멜리아의 집에 숨어 있을 게 아니라 당당하게 나가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통금을 어기는 건 범죄 행위였어요. 실제로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들 얘기도 들었으니까요. 하물며 돼지를 숨기는 건 더 큰 범죄였기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들판을 살금살금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존 부커 때문에 그만 일이 틀어졌습니다. 파티에서 음식보다 술을 더 마시더니만 우리가 도로에 닿자마자 정신을 놓고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 겁니다! 제가 즉시 그를 붙잡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독일군 순찰 대원 여섯 명이 숲 속에서 튀어나오더니 기관총을 겨누며 고함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통금 시간에 왜 나돌아다녀?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지? 어디로 가는 중이야?
저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도망가면 그들이 저를 쐈을 겁니다. 그 정도는 분명히 알고 있었지요. 입이 분필처럼 바싹 마르고 머릿속은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저 부커를 붙잡은 채 헛된 희망에 기댈 수밖에요.
바로 그때 엘리자베스가 심호흡을 하더니 앞으로 나섰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키가 작아요. 그래서 총구가 그녀의 눈앞에 늘어서 있었는데도 그녀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총을 전혀 보지 못한 듯 행동했습니다. 그녀는 순찰대 대장에게 다가가서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이었지요. 통행금지령을 어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건지 섬 문학회 모임이 있었어요, 오늘은 《엘리자베스와 그녀의 독일식 정원》에 대해 토론했는데 정말 유쾌한 시간을 보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책이죠, 혹시 읽어보셨나요?
우리 중 누구도 감히 그녀를 거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는데, 순찰대 대장에겐 그 정도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사람입니다. 대장은 우리 이름을 적고는 다음 날 아침 사령부로 출두해달라고 아주 정중하게 요청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에게 목례하며 잘 가라는 인사까지 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최선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우리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겁먹은 토끼가 도망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요. 저는 부커를 질질 끌다시피 하면서도 재빨리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돼지구이 파티 이야기입니다.
저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세인트피터포트 항구에는 물자를 실은 배가 매일 들어오지만 건지 섬에는 아직도 필요한 게 많습니다. 식료품, 옷, 씨앗, 농기구, 동물 사료, 공구, 의약품,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바로 신발입니다. 그나마 이제 음식 걱정은 덜었으니까요. 전쟁이 끝날 즈음 이 섬에는 제대로 맞는 신발이라곤 한 켤레도 남지 않았을 겁니다.
섬으로 들어오는 물품 중에는 오래된 신문지와 잡지 낱장으로 싼 것들이 있습니다. 저와 제 친구 클로비스는 그런 신문지와 잡지를 잘 펴서 집으로 가져와 읽습니다. 다 읽은 다음에는 우리처럼 지난 5년간의 바깥세상 소식을 궁금해하는 이웃들에게 전해줍니다. 뉴스나 사진만이 아닙니다. 소시 부인은 요리법이 나온 부분을 읽고 싶어 합니다. 마담 르펠은 패션 기사를 원하고(재봉사거든요), 브루어드 씨는 부고란을 열심히 살핍니다(어떤 사람의 부고 소식을 기다리는 듯한데, 그게 누구인지는 절대 밝히지 않아요). 클로디아 레이니는 로널드 콜먼(192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후까지 활동한 미국 영화배우)의 사진을 애타게 찾습니다. 투텔 씨는 수영복 입은 미녀들 사진을, 제 친구 이솔라는 결혼식 기사를 좋아합니다.
전쟁 중에도 우리는 알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지만, 영국 본토는 물론이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신문이나 편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1942년에는 독일군이 무선 라디오도 모두 압수했습니다. 물론 몰래 숨겨두고 듣기도 했지만 만에 하나 발각되는 날엔 수용소로 보내질 수도 있었지요. 그래서 요즘 접하는 신문이나 잡지를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저는 전쟁 당시의 만화를 즐겨 보는데, 그중 한 편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1944년에 〈펀치〉에 실린 만화로, 사람들 열 명 정도가 런던 거리를 걷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인공은 서류 가방과 우산을 들고 중산모를 쓴 두 남자인데,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두들버그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니, 웃기는 소리야”라고 말합니다. 몇 초 더 들여다보자니 만화 속 인물들이 하나같이 한쪽 귀는 정상인데 다른 쪽 귀는 굉장히 크게 그려져 있더군요. 당신이라면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겠지요.
진실한 마음을 담아, 도시 애덤스
줄리엣이 도시에게
From Juliet to Dawsey
2월 3일
애덤스 씨,
찰스 램의 서간집과 초상화 사본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초상화의 얼굴은 그의 글을 읽으며 상상한 모습과 일치하더라고요. 당신도 그렇게 느꼈다니 기뻐요.
돼지구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줘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제 질문 중 하나에만 답하신 걸 눈치 채지 못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전 건지 섬의 감자껍질파이 문학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요. 이건 단지 개인적인 호기심을 채우려는 것만은 아니에요. 이제 직업상 꼬치꼬치 캐물어야 할 의무가 생겼답니다.
제가 작가라는 얘기를 했던가요? 전쟁 중에 〈스펙테이터〉에 매주 칼럼을 썼어요. 스티븐스&스타크 출판사가 그 칼럼들을 묶어 《이지 비커스태프, 전장에 가다》라는 책으로 출간했고요. ‘이지’는 잡지사가 저에게 붙여준 필명이에요. 이제는 끔찍한 전쟁도 완전히 끝났고(천만다행이죠) 저는 다시 제 이름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답니다. 이제 다음 책을 쓰고 싶은데, 몇 년간 행복하게 몰두할 만한 주제를 찾는 데 애를 먹고 있어요.
그런 와중에 〈타임스〉에서 저더러 문학 특별판에 실을 글을 써달라더군요. 독서의 실용적, 윤리적, 철학적 가치를 논하는 3부작 특집을 차례로 실을 예정이래요. 필자 세 명이 하나씩 맡아서 쓰는 거죠. 제가 맡은 주제는 ‘철학’인데 지금까지 생각해낸 거라곤 ‘독서는 망령이 나는 걸 막아준다’는 것뿐이에요. 보시다시피 저에겐 도움이 필요해요.
당신의 문학회 이야기를 칼럼에 넣으면 문학회 회원들이 싫어할까요? 문학회 설립에 얽힌 이야기는 분명 〈타임스〉 독자들을 매료시킬 거예요. 저는 진심으로 그 모임에 대해 더 알고 싶어요. 하지만 싫다고 해도 괜찮아요. 전혀 마음 쓰지 마세요. 어느 쪽이든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리고 어느 쪽이든, 다시 한 번 당신의 편지를 받을 수 있잖아요.
당신이 말한 〈펀치〉 만화는 아주 생생히 기억해요. 아마 ‘두들버그’라는 단어 때문에 어리둥절하셨을 거예요. ‘두들버그’는 영국 정보부에서 만들어낸 신조어예요. ‘히틀러의 V-1 로켓’이나 ‘무인폭탄’보단 덜 무시무시하게 들리게 한 거죠.
당시엔 누구나 야밤의 폭탄 공습과 그 이후의 광경에 익숙해 있었지만, 두들버그는 이전에 본 폭탄들과는 차원이 달랐어요.
그 폭탄은 낮에 날아왔고 공습경보를 발령하거나 대피할 시간도 없을 만큼 엄청 빨랐어요. 눈으로 볼 수도 있었죠. 날렵하고 새까만, 뾰족하게 깎은 연필처럼 생겼는데 연료가 떨어진 자동차처럼 둔탁하게 털털대는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날아갔어요. 쿨럭쿨럭 털털털 하는 소리가 들리는 한은 안전했죠.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나를 지나쳐서 가버리는군요’ 하고 생각해도 됐답니다.
하지만 그 소음이 멈추면, 30초 후면 그게 떨어진다는 징조였어요. 그러니까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죠. 모터 소리가 멈추는지 계속되는지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어요. 딱 한 번 저도 두들버그가 떨어지는 걸 봤어요. 거리가 꽤 멀어서 대피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재빨리 몸을 날려 인도 경계석에 납작 붙어 있었어요. 높은 빌딩 꼭대기 층에 있던 여자들 몇 명이 구경하려고 창가 쪽으로 몰려들었는데, 결국 폭발의 위력으로 모두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죠.
두들버그를 소재로 만화를 그렸다는 것도, 그런 만화를 보며 저를 포함해 모두가 웃을 수 있었다는 것도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 같아요. 하지만 그때는 엄연한 현실이었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내는 최선의 방법은 유머’라는 옛말이 역시 틀리지 않네요.
루커스가 쓴 찰스 램 전기는 받으셨나요? 헤이스팅스 씨가 구해서 보내셨는지 모르겠네요.
당신의 진실한 벗, 줄리엣 애슈턴
(제1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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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1934년 미국 웨스트 버지니아주 마틴스버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평생 여러곳의 도서관과 서점에서 일했고, 지역신문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그녀의 오랜 꿈은 ‘출판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책’을 쓰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쓰면서 건강이 악화된 메리는 조카 애니 배로스에게 책의 마무리를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 책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2008년 초 세상을 떠났고, 이 매혹적인 데뷔 소설은 유작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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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신선해
학부 때 국어국문학과 심리학을 전공/졸업한 후 3년 동안 편집기획자로 일하면서 책을 만들다가, 활자와 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고자 전문 번역가 일을 시작했다. 현재 다양한 분야의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번역서로는 『이야기로 깨닫는 기쁨』, 『나는 잠자는 예언자』, 『십자가와 칼』,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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