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 뛰어내리기 전에
마치 경첩이 삐걱대는 아주 육중한 나무문을 밀고 밝은 곳으로 나가려는 것과 같다. 열리기를 거부하는 문을 온 힘을 다해 밀며, 문턱을 넘어 지금껏 그 안에 서 있던 어둠을 떨치고 빛이 비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빛 대신 벽처럼 턱 하니 앞을 가로막고 서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일 뿐이다. 당혹스럽고 두려운 마음에 주변을 더듬어본다.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여기저기서 만져질 뿐이다. 흐릿하게나마 윤곽이 그려진다. 더듬는 손길도 똑똑해지는 것일까. 이제 우리는 안다. A. 앨버레즈가 그의 아름다운 책 『잔혹한 신The Savage God』(한국어판 제목 『자살의 연구』)에서 “자살이라는 닫힌 세상”이라고 부른 공간에 들어섰다는 것을. 자살? 나는 이 단어가 싫다. 적당한 때 그 이유도 밝히겠다. 차라리 나는 “자유죽음Freitod”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물론 자살이라는 행위가 참을 수 없이 강제된 상황 탓에 빚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죽음의 한 방법으로서 자유죽음은 나사를 끼우듯 고정하려는 강제 안에서도 자유롭다. 그 어떤 종양이 나를 갉아먹지 않으며, 심근경색이 나를 덮치는 것도 아니다. 요독증 때문에 숨이 멎지도 않는다. 손을 내려놓는 사람은 바로 나다. 수면제를 “손으로 입에 가져간” 다음 나는 죽어가며 손을 내려놓는다. 먼저 용어 선택의 원칙부터 밝혀둬야겠다.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쓰는 편안한 말로 이야기를 풀어갈 생각이다. 물론 때때로 ‘자살’이라는 말도 쓸 것이다. 여기서 자살이란 ‘수이 카에데레sui caedere’, 곧 “스스로 자신을 죽임”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비롯된 ‘자살Suizid’을 말한다. 라틴어 형식이 언제나 어떤 일의 현실성을 고스란히 빨아들이고 솎아버리며 뼈대만 앙상하게 추상적으로 남겨놓는 것을 보면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간결하기는 하다. 그래서 내 눈으로 보기에 현실이 충분히 분명하기만 하다면, 이 간결성 때문에라도 종종 ‘자살’이라는 말을 쓸 생각이다. 자살을 택한 사람의 현실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온다면, 자유죽음은 ‘자살’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 경우 스스로 자신을 지워버리려는 시도를 하는 인간은 ‘자살을 기도한 사람’이다. 자유죽음을 결행할 뜻을 품은 사람은 정말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이든, 아니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장난치듯 노는 것이든 간에 ‘자살 후보자’라고 봐야 하리라.
하지만 아직 세밀한 구분을 할 정도로 우리의 이야기가 나아가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제 겨우 힘들게 문을 열었을 뿐이다. 반쯤 열린 문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어둠에 당혹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어둠은 결코 완전히 밝혀지는 일이 없으리라. 왜? 때가 되면 이야기하겠다. 그렇지만 이미 곳곳에서 횃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지 않은가? 우리를 도우려는 심리학도 있고, 나아갈 방향을 잡아주는 사회학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벌써 오래전부터 ‘자살학’이라는 연구 분과가 있어서 적지 않은 과학적 성과도 일궈내지 않았던가? 물론 모르는 바 아니다. 그 대부분을 나는 철저히 파헤쳐보았다. 부지런히 자료들을 모으고 연구하면서 이러저런 것도 배웠다. 어떻게, 어디서, 왜 인간이 자신을 스스로 거둬들이는지, 어떤 연령대가 가장 위험한지, 어떤 나라에서 자유죽음이 빈번하며, 어디서 덜 일어나는지 따위는 숱하게 읽고 보았다. 그런데 그 통계라는 게 종종 서로 충돌한다. 바로 그래서 자살학 연구자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지곤 한다. 이른바 개념이라는 것도 적잖이 접해보았다. 충동적 자살? 제법 그럴싸한 말이다. 또는 나르시시즘의 위기? 이 또한 나쁘지 않다. 심지어 복수 행위라는 개념도 있다. “당신이 날 사랑해주지 않아서 죽을 거요… 죽어서 당신에게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길 거요”(“Je me tue parce que vous ne m'avez pas aimé… Je laisserai sur vous une tache indélébile”). 작가 드리외 라로셸의 표현이다. 그는 결국 자살을 했지만, 완강하게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여인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레지스탕스의 복수가 두려웠을 뿐이다. 어쨌거나 통계와 개념 등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전문서적만 주의 깊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다만, 뭘 알았는지 아리송할 따름이다. 그런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마치 은하계나 소립자 같은 것을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는 물리학자처럼 객관적 사실로만 자살을 바라본다면, 사실과 자료를 더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우리는 자유죽음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그런 부류의 정보와 개념이 과학적으로는 쓸모가 있으며, 심지어 치료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치료라는 게 뭔가? 실증적 자료와 사실로 자유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마음을 돌려세운다? 오히려 ‘닫힌 세상’이라는 불가사의한 쳇바퀴 안에서 계속 속도를 높이며 맴을 돌게 만들다가 튕겨져 나가게 만들어버리고 마는 게 아닐까. 결국 통계와 개념만으로 보면 자유죽음은 광년光年이라는 단위로 헤아려야 할 정도로 먼 거리에 있는 것일 따름이다.
프랑스의 자살학자 피에르 모롱Pierre Moron은 배울 게 많은 그의 책 『자살Le Suicide』에서 동료 학자의 말을 인용한다. “자살을 하겠다는 생각, 즉 구체적 행위를 준비하는 정신 활동은 이론적으로 볼 때 자살 행태에 관한 연구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자살 행태라는 것은 정의에 따르면 구체적인 몸짓이 있어야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을 행위의 잠재적 가능성으로 바라본다면, 생각에서 이미 행위에서와 같은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충동을 찾아내야만 한다. 충동, 즉 자신을 죽음에게 던지려는 의중을 말이다.” 이런 것을 두고 날카로운 생각이라 불러야 하리라. 글을 쓴 사람의 칼날 같은 논리를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제 스물세 살의 청년 오토 바이닝거의 사례를 떠올려보자. 앞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바이닝거의 머리에는 죽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혐오하면서도 품고 싶다는 욕망을 다스릴 길이 없는 “여성”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또 눈앞에서는 “유대인”만 어른거렸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치욕적이며 제일 저급한 유대인.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바이닝거 자신이 유대인이었다. 아마도 그는 사면의 벽들이 점점 좁혀오는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으리라. 머리는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갈수록 부풀어 오름과 동시에 얇아졌다. 가차 없이 좁혀오는 사면의 벽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부딪칠 때마다 격심한 통증과 함께 마치 팀파니를 때리는 것만 같은 소리가 났다. 급기야 바이닝거의 두개골이 사방으로 부딪치며 고통의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마침내 그가. 드디어 그가 폭발하거나 “벽을 통과할 때”까지 아우성은 그치지 않는다. 공간의 바깥에 서서 바이닝거를 관찰하는 사람들은 즐겨 그런 표현을 쓴다. 그러나 바이닝거에게 이 모든 게 무슨 상관일까. 프랑스의 저 노련한 학자께서 들이대는 칼 같은 개념과 논리는 바이닝거에게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에게 ‘자살 행태’라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그런 게 뭔지 전혀 모른다. 그는 그저 보고 듣는다. 물론 내 추측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쥐어짜듯 뒤틀리는 심장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가며 보고 들으리라. 그것도 숨 돌릴 겨를조차 없이. 여성? 유대인? 나? 이 모든 것을 끝장내자. 어떤가? 이런 마음을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막 들어선 개념의 희끄무레함이 오히려 편안한가? 그렇지 않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법의학자가 시체의 조직 일부를 잘라내듯 ‘자살 행태’를 해부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파괴하려는 사람으로부터 멀어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그에게 다가가야 한다. 우연이라는 게 그를 살려주기로 작정했다면, 그는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리라. 물론 기쁜 얼굴은 아니겠지만. 그가 우리에게 고마움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절대적으로 잘못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제 막 죽음의 순간을 모면한 친구 X가 방금 전에 버렸던 자신으로 되돌아와, 부끄럽기는 하겠지만 다시 인생의 논리에 굴복한 것일 따름이다. 조금 전에 깨치고 나아갔던 철갑 안으로 다시 돌아온 것일 뿐이다.
고도로 단련된 건강한 상식을 갖는 사람, 물론 결코 자기 자신을 벗어나 다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은 당장 이런 반론을 제기하리라. 바이닝거? 왜 하필이면 그 보기 드문 예외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거지? 여기서 지적인 능력을 뽐내는 교만이 불러온 자살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심리학은 아주 많은 종류의 ‘자살 행태’를 이야기해오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여러 가지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에 아주 까다로운 것도 많다. 이를테면 전문가라는 사람은 늘 자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사회적 고립social isolation’, 나르시시즘 노이로제, 간질 발작, 히스테리에 의한 과잉 반응 등을 주워섬긴다. 이런 심리학과 사회학의 도구로 무장한 전문가는 당연히 그런 것들을 언급할 수 있다! 그런데도 왜 초입부터 정신과학 역사의 전설, 자기 자신을 혐오한 유대인 바이닝거를 들먹이며, 그의 행위를 지나치게 단순화해 비유적으로 선보이느냐고? 알고 있다. 과학 앞에 언제나 경의를 표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내가 아니다. 절대 무례하게 구는 일은 없으리라, … 그래, 경의는 표한다. 하지만 약간의 경멸도 숨기지는 않겠다. 더 앞으로 나아가보자. 자유죽음에는 여러 가지 형태와 그 발달사 그리고 그 바탕에 깔린 생각들이 있다. 워낙 다양한 터라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것만 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다름이 아니라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은 곧 ‘자유죽음’을 구하고 있다는 데서 그 공통성을 찾아야 한다.
일단, 구하고 찾은 사람들, 즉 “이미 자살을 한 사람들”부터 살펴보자. 먼저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리라.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게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 곧 이들이 자신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은 없을까? 앞으로 차근차근 알아보자. 일단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얼핏 보기에 인과적인 진행 과정, 말하자면 자살하고자 하는 의도를 넘어서서 원인과 결과로 작용하는 외부의 요인은 분명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게 얽혀 벌어지는 자살 행위는 틀림없이 있다. 물론 그런 외부적 요인들이 그 순서 혹은 서열에 있어 서로 어떤 연관 관계를 갖는지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어렸을 때 보았던 신문기사 하나가 떠오른다. 어떤 처녀 가정부가, 당시 기사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라디오 스타를 향한 불행한 사랑”으로 괴로워한 나머지 창틀에서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행동이 전혀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다른 자살 시도 또는 자살 방법과 어떤 공통점을 가질까? 프로이트의 1세대 제자로 평생 정신분석학에 헌신해온 고령의 P. F.는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총을 쏘아 죽었다. 그 얼마 전에 그는 반려자를 잃었다. 그리고 더 이상 수술을 할 수 없는 전립선암을 앓았다. 이런 그가 권총을 손에 잡았다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심각한 얼굴을 해가지고 나직한 목소리로 인정한다고 이야기할 일은 아니다. 그는 위대한 일을 많이 누린 인생을 살았고, 경험했고, 채웠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육신의 고통과 고독일 뿐이었다. 사람들이 미래라 부르는 것은 그에게 차단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미래 아닌 미래는 살아 죽음 속에 갇혀 지내는 것일 따름이었다. 명확하게 이야기하자. 그는 살아서 죽어 있었다. 또 지그문트 프로이트 자신은 어떤가. 노인의 구강암은 회복 불능의 말기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환자의 입에서 워낙 강력한 악취가 풍기는 바람에 그가 아끼던 애견마저 가까이 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프로이트는 주치의에게 이제 남은 것은 고통뿐이니, 자신을 해방시켜줄 주사를 놓아달라고 요구했다. 오랜 친구는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것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 인정받은 자유죽음의 명확한 사례가 아닐까. 그렇다면 최고조의 명성을 누리며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던 작가 체사레 파베세가 “하잘것없는 사랑 스캔들”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또 “센 강의 익사체L'Inconnu de la Seine” 파울 첼란은 어떤가? 베를린의 한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페터 손디는? 이들은 명예와 존경을 한껏 누리는 삶보다 자신을 삼켜버린 물살이 더 낫다고 본 것일까? 파베세와 첼란과 손디가 택한 죽음이 프로이트와 P. F.보다는 빈의 저 창틀에서 뛰어내린 가정부의 그것과 더 가까울까? 그럼 슈니츨러의 구스틀Gustl 소위는 어떻게 봐야 할까? 비록 지어낸 인물이기는 하지만, 우리 인생의 현실에 아주 충실하게 그려낸 인물이지 않은가? 구스틀 소위는 프라터 공원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어쩔 수 없이 자살을 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한다. 제빵 기능공과 시비를 벌인 끝에 칼을 뽑으려 했으나 체구가 훨씬 큰 제빵 기능공의 힘에 눌려 꼼짝도 못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가 규정한 명예 수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였다. 아마도 구스틀 소위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리지 않았을까. “좋아, 할 수 없지 뭐. 그놈이 나보다 힘이 좋은 것이야 내 잘못이 아니잖아. 그런데 그 자식이 비열한 나머지 이 창피한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닌다면, 격분한 상관들이 나를 군대에서 쫓아내려 할 거야. 아무래도 그런 수모를 당하기 전에 내 손으로 퇴역 신청서를 제출하는 게 낫겠다.” 하지만, 구스틀 소위에게 있어 “황제가 하사한 제복”은 저 가정부가 애타게 사랑한, 녹아내릴 것만 같은 달콤한 목소리의 가수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구스틀 소위는 군복을 벗고는 살아갈 수 없었다. 저 가정부 처녀가 “소녀의 별처럼 아름다운 두 눈이여” 하고 노래 부르는 남자의 사랑이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구스틀 소위가 자신의 머리에 대고 총을 쏘지 않았던 것은, 총을 잡기 전에 우연히 그 힘센 제빵 기능공이 다툼이 있던 그날 밤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 물어보자. 구스틀 소위와 가정부 처녀는 프로이트, P. F., 파베세, 첼란 등과는 다른 인생 법칙을 적용받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사람에 따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법칙이라는 게 과연 법칙인가?
이렇게 따지고 들어도 ‘자살학’이 말하는 법칙들이 무력해지는 것은 아니다. 구스틀 소위의 경우 ‘자살학’은 저 명예 수칙이라는 게 갖는 강제력이 너무나 비인간적이라고 지적하고 나설 것이다. 가정부의 경우에는 불행한 사랑이 자살을 야기한 요인이라고 할 게 틀림없다. 그 불행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좀더 깊숙하게 숨어 있던 인생의 불만이 결국 자살이라는 행위로 폭발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하겠지. 첼란과 손디를 두고는 아마도 심인성 우울증이 그 원인이었다고 하리라. ‘자살학’의 진단에 틀린 것은 없다. 다만, 자살을 이미 감행했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은 공허할 뿐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일 따름이다. 너무도 완벽하게 유일해서 다른 것과는 헷갈리려야 헷갈릴 수 없는 자기만의 상황, 이른바 “인생 상황situation vécue”이라는 것은 무어라 말해도 절대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바로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거나, 끊으려는 시도를 할 때마다 누구도 들춰볼 수 없는 장막이 가려지는 것이다. 물론 앞뒤가 딱 맞아떨어지는 아주 보기 드문 경우에는 장막 안으로 너무나 환한 조명이 비춰지기 때문에, 우리의 눈이 스쳐지나가듯 도망가는 장면을 알아보기도 한다. 그런 장면들에 관해서는 앞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보다 먼저 묻고 싶은 것은, 우리의 사례들이 객관적인 사실, 즉 자유죽음을 실행에 옮겼다거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객관적 사실 말고, 어떤 점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답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답을 처음 들을 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리겠지만, 좀더 철저하게 분석해보면 이 답은 인생이라는 불가사의가 품고 있는 저 심연을 밝게 드러내준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동기나 원인 관계, 그러니까 원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혹한 행위가 벌어지는 그런 인과관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근본적으로 모든 사례에서 똑같다. 이미 자살했거나 자살하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은 점점 좁혀오는 벽을 머리로 마구 부딪치다가 마침내 그 얇아지고 깨진 두개골로 벽을 받고 넘어가버린다(자살자와 자살할 뜻을 품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 이미 시작되었는지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련 학문이 “결산 자살”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자유죽음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 또는 참기 힘든 외부 상황의 집요한 압력 끝에 이른바 “충동 자살”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내몰렸을 수도 있다. 자살할 마음을 먹은 사람은 슬픔과 우울함에 젖어 멍한 상태로 있으면서 이미 오래전부터 죽음을 향해 나아가기 마련이다. 또는 그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죽기 몇 시간 전에 아주 기분이 좋아서 웃고 떠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목격자의 증언으로도 확인되고 있는 사실이다. 뛰어내리기 직전의 순간은 다른 모든 일을 심드렁하게 여기는 상식 밖의 무관심을 빚어내는 것이다. 뭐가 어떻게 다르다느니 하는 따위의 시시콜콜 따져야 하는 문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남겨진 가족의 몫이거나 과학의 차지일 따름이다. 저 처녀 가정부의 예를 든다면, 과학은 “하잘것없는 동기”라는 표현을 쓰리라. 그렇지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과학이 아는 게 뭔가? 외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아무것도 없다. 부부싸움으로 충분한 양의 수면제를 먹고 순전히 우연 탓에 ‘목숨을 건진’ 한 남자를 알고 있다. 그는 스물네 시간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었지만, 오늘날 멀쩡히 살아 있다. 평소에 잘 알던 신경과 의사에게 끌려간 남자는 일장훈계를 들어야만 했다. 의사는 근엄한 얼굴로 부부싸움이나 눈물 혹은 화해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보드빌에 지나지 않음을 유념하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의사는, 작지만 결정적인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뭐가 보드빌이며, 무엇이 진짜 비극인지는 작품의 저자, 즉 당사자만이 안다. 대개 아주 잠깐이지만, 아주 고통스러운 시간을 끌기도 하는 ‘뛰어내리기 이전의 상황’은 철저한 무관심으로 신분이라는 차이까지 깨끗이 지워버린다. 저 가정부 처녀는 위대한 작가나 유명한 정신과 의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수십 년 전 창문에서 뛰어내린, 아마도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인물을 좀더 물고늘어져보자. 대체 처녀의 자살은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을까? 아마도 달콤한 목소리가 부르는 “소녀의 별처럼 아름다운 두 눈이여” 하는 노래를 헤드폰을 끼고서 그 좁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으리라. 이런 부드러운 유혹에 저항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다. 혹 방송국으로 이 가슴을 녹이는 목소리의 주인에게 편지까지 썼으나 아무런 답장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떤 문방구에서 가수의 브로마이드를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기름을 발라 빗어 넘긴 검은 머리에 부드러운 볼로 누구를 향해 웃는 것인지 모를 달콤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 처녀는 사랑을 주었지만, 돌아오는 사랑은 없었다. 속이 상한 나머지 노래조차 들을 수가 없다. 스모킹 재킷을 입은 남자의 팔이 그녀를 안아주지 않는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찬, 미칠 것만 같은 세상이었으리라. 옆집 여자 아이나 푸줏간 총각에게 하소연을 해보지만 누구도 귀담아들어주지 않는다. 처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중얼거린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무어라 중얼거렸던가. 이제 남은 것은 고통뿐이라 하지 않았던가. 이런 게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이다. 여기에 대고 감히 비웃음을 흘리거나 훈계를 해도 좋을까?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강조해둔다. 뛰어내리기 직전의 상황에서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은 ‘자살학’의 여러 자료를 통해서도 잘 증명되어 있다. 여기서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이 어둠 안으로 들어와본 경험을 가진 사람일 뿐이다. 그런 사람은 바깥에서 불빛을 들이대며 뭔가 쓸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도 강제로 이끌어내지 않는다. 깊은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것은 환한 대낮이면 고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그럼에도 어둠 안을 들여다본 사람만이 사건에 어울리는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솔직한, 또 자신을 부정하지 않는, 자살 기도자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물론 가정부나 파베세 혹은 첼란이 구조되어 치료까지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런 상황은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세 사람 모두 입을 모아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간 나머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인정한다면, 이제 모든 게 원상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이제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해주면 그만일까? 구조의 손길과 친절한 타이름에 고맙고 감사해하면 그만일까? 친구들,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운 거야. 그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뭘 증명해주는 것일까? 입증되는 것이라곤 성공적인 치료를 받고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들이 더 낫고, 더욱 품위 있는 인간이 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 자살 행위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며 싸잡아 역사성 운운하는 것은 삼가는 게 좋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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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장 아메리
(Jean Amery, 1912-1978, 본명은 한스 차임 마이어)
1912년 10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붙여준 원래 이름은 한스 차임 마이어이다. 대학에서는 문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1938년 벨기에로 건너가 나치스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 1943년 체포되어 2년 동안 강제수용소 생활을 했다. 1945년 이후 브뤼셀에서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며 방송계 일도 했다. 1970년 독일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1971년에는 바이에른의 ‘아름다운 예술아카데미’가 수여하는 문학상을, 1977년에는 함부르크 시가 수여하는 레싱상을 받았다. 아메리는 1978년 잘츠부르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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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김희상
학부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하였다. 1990년 독일로 유학을 가서 막시밀리안 대학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독일 관념론을 공부했고, 2003년 귀국한 뒤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유레카』, 『사자와 권력』, 『탈』, 『달라이 라마의 공감』, 『한 권으로 읽는 셰익스피어』, 『우리 안의 히틀러』, 『평화: 루이제 린저와 달라이 라마의 대화』, 『알렉산드리아의 족장』, 『슈페사르트 산장』 등 40여 권의 작품을 번역했으며, 2008년에는 어린이 철학책『생각의 힘을 키우는 주니어 철학』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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