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죽어 가고 있건만 아직도 하고픈 말이 너무도 많다. 내 자신과는 평화롭게 지냈는데. 그저 묵묵히 평화를 누렸건만. 그런데 느닷없이 이 일 저 일 떠올랐다. 그놈의 늙다리 청년 탓이다. 나는 평화로웠단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평화롭지 않다. 몇 가지는 분명히 밝혀 둬야겠다. 그래서 팔꿈치에 몸을 의지하고, 덜덜 떨리기는 해도 고상한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기억을 낱낱이 더듬어 보련다. 내 자신을 정당화해 줄 행동들을 찾아서. 그놈의 늙다리 청년이 내게 일부러 흠집을 내려고 불과 하룻밤 사이에 퍼뜨린 말을 뒤엎을.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평생 그리 말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언행에 책임을 질 도덕적 의무가 있으니까. 심지어 자기 침묵, 그래 그 침묵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 침묵도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게 들리고, 오직 그분만이 침묵을 이해하시고 판단하시니까. 그러니 침묵에도 아주 주의해야 한다. 나는 모든 일에 책임지는 사람이다. 나의 침묵은 티 하나 없다. 다들 분명히 알았으면 한다. 특히 하느님이 분명히 아셨으면 좋겠다. 나머지 사람들이야 무슨 상관이람. 하느님은 상관있으시지만. 내가 지금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가끔씩 팔꿈치에 몸을 의지하고선 깜짝 놀란다니까. 헛소리를 늘어놓다가 잠들고, 내 자신과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가끔 내 이름마저 잊어버리니, 원. 내 이름은 세바스티안 우루티아 라크루아이고 칠레인이다. 부계 조상들의 고향은 요즘에는 에우스카디라고도 부르는 바스크 지방 또는 바스크 국이다. 모계 쪽으로는 달콤한 땅 프랑스의 어느 마을, 스페인어로는 <대지의 인간> 혹은 <걷는 사람>을 뜻하는 마을의 후손이다. 이 마지막 순간에 내 프랑스어는 예전처럼 훌륭하지 않다. 그래도 느닷없이 집 앞에 나타나 황당한 말로 대놓고 욕을 한 그 늙다리 청년에게 대꾸할 힘이나 기억해낼 힘은 아직 남아 있다. 이것만은 분명히 하련다. 나는 싸움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싸움을 건 적도 없고. 나는 평화를 구하고, 언행과 침묵의 책임을 찾을 뿐이다. 나는 이성적인 사람이다. 늘 그랬다. 열세 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교에 들어가려고 했다. 아버지는 반대하셨다. 그리 심한 반대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아직도 족제비나 뱀장어처럼 이 방 저 방 스르륵 다니던 아버지 그림자가 기억난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어린 시절의 내 미소가 생각난다. 어둠 속에서 짓던 바로 그 미소가. 사냥 장면을 짜 넣은 고블랭직(織) 양탄자도 생각난다. 만찬 장면이 적절히 재현된 금속 접시도. 그리고 나의 미소와 떨림도. 1년 후 나는 열네 살의 나이에 신학교에 들어갔고, 세월이 흐른 후 졸업을 했을 때 어머니는 내 손에 입을 맞추며 나를 신부님이라고 불렀다. 내 귀에 그리 들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놀라서 이의를 제기하자(신부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어머니. <당신의 아들>이잖아요. 아니 그냥 <아들>이라고 했던가) 어머니는 울음을 터뜨리셨다. 당시 내 생각이 그랬는지, 아니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든 것인지, 인생이란 우리를 최후의 진실, 유일한 진실로 이끌어 가는 오류의 연속이다. 바로 그 전후해서, 즉 서품을 받기 며칠 전 혹은 며칠 후에 페어웰, 그 유명한 페어웰을 알게 되었다. 어디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그의 집에서였으리라. 나는 그의 집으로 갔다. 그의 신문사 사무실로 내가 순례 길을 떠난 것이었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면 그가 회원으로 있는 클럽에서 처음으로 만난 것도 같다. 그날은 4월 산티아고의 여느 오후와 마찬가지로 우울한 오후였지만, 고전(古典) 속에서처럼 내 영혼에는 새들이 노래하고 꽃이 만발했고, 페어웰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키가 커서 1미터 80센티미터였지만 내게는 2미터는 될 듯싶었으며, 훌륭한 영국제 옷감으로 만든 회색 양복을 빼입고, 수제(手製) 구두, 실크 넥타이, 나의 꿈처럼 티 하나 없이 새하얀 와이셔츠, 순금 커프스단추, 굳이 애쓰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기호가 새겨진 넥타이핀 차림이었다. 페어웰은 나를 바로 옆자리에 앉혔다. 아니 그전에 나를 서재 내지 클럽 도서관으로 데려가 꽂혀 있는 책 제목들을 보면서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나야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아서 모를 일이지만 헛기침을 하면서 나를 흘끔흘끔 바라보았을 수도 있다. 내가 알아듣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무슨 말인가를 그가 했고,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안락의자에, 나는 보통 의자에. 그리고 우리가 막 살펴보고 어루만지던 책들, 신학교를 갓 졸업한 청년의 싱싱한 손가락과 고령의 노인처럼 벌써 마디도 굵고 모양도 다소 괴이한 손가락이 어루만지던 책들에 대해, 또 그 저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페어웰의 목소리는 강과 산과 계곡과 산길 위를 선회하다 먹이를 덮치는 거대한 맹금류처럼 컸고, 장갑을 낀 것처럼 자신의 생각에 찰싹 달라붙는 정확한 표현을 사용했다. 나는 작은 새처럼 천진난만하게 그에게, 문학 비평가가 되고 싶고, 그가 열어 놓은 길을 가고 싶고, 책을 읽은 감상을 큰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것이 이 세상 제일가는 소망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페어웰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에 손을 얹고(손이 너무 무거워서 쇠장갑을 낀 것 같았다) 내 눈을 바라보며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 야만인들의 나라에서 그 길은 장미꽃길이 아닐세, 지주들의 나라인 이 나라에서 문학은 별종이고 독서는 별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내가 수줍어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그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언짢게 하거나 마음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물었다. 자네나 자네 아버지가 지주는 아니겠지? 아닙니다. 나는 지주라네. 치얀 근처에 나쁘지 않은 포도주를 생산하는 작은 포도주 농장을 가지고 있지. 이어서 페어웰은 그다음 주말에 위스망스의 책 제목 중 하나와 같은 이름의 농장으로 나를 초대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 르부르À rebours(거꾸로)>나 <라바Là-bas[피안(彼岸)]> 혹은 <로블라L’oblat(수도자)>였던 것 같다. 내 기억력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라바>가 맞는 것 같다. 포도주도 같은 이름이리라. 페어웰은 나를 초대한 후 잠자코 푸른 눈으로 내 눈을 응시했다. 나 역시 잠자코 있었지만, 꼬치꼬치 캐묻는 듯한 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어서 상처 입은 작은 새처럼 비굴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문학이 진정 장미꽃길이고, 독서가 대단한 일이고, 취향이 현실적인 의무나 필요보다 존중되는 그런 농장을 상상했다. 이윽고 시선을 들자, 내 신학도의 눈이 페어웰의 매 눈과 마주쳤다. 나는 여러 차례 가겠다고 말하고, 칠레 제일의 문학 비평가 농장에서 주말을 보내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했다. 약속한 날이 되었을 때 내 영혼은 혼란과 초조 그 자체여서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도 몰랐다. 사제복을 입어야 할지 세속의 옷을 입어야 할지, 세속의 옷을 입는다면 어떤 것을 골라 입을지, 또 사제복을 입으면 어떤 대접을 받을지 하는 의문이 엄습했다. 어떤 책을 가져가 오가는 열차 안에서 읽을지도 정하지 못했다. 갈 때는 『이탈리아 역사』를, 돌아올 때는 페어웰의 『칠레 시 선집』을 읽을지, 그 반대로 할지. 라바 농장에서 어떤 작가들과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페어웰은 늘 농장에 작가들을 초대했다). 종교적 관심사가 담긴 훌륭한 소네트를 쓰는 시인 우리바레나나 짧은 산문을 멋들어지게 쓰는 스타일리스트 몬토야 에이사기레, 혹은 권위 있고 단호한 역사가인 발도메로 리사멘디 에라수리스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세 사람은 페어웰의 친구니까. 그러나 사실 페어웰은 친구도 적도 부지기수라 예측이 무의미했다. 약속한 날이 되었을 때 나는 회개하는 영혼처럼, 그래서 하느님이 나를 벌하려고 준비하셨을 그 어떤 쓰디쓴 술도 감수할 생각으로 역을 출발했다.
(『칠레의 밤』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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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로베르토 볼라뇨 (Roberto Bolaño, 1953-2003)
볼라뇨는 1953년 칠레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멕시코로 이주해 청년기를 보냈다. 항상 스스로를 시인으로 여겼던 그는 15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20대 초반에는 〈인프라레알리스모〉라는 반항적 시 문학 운동을 이끌기도 했다. 이어 20대 중반 유럽으로 이주, 30대 이후 본격적으로 소설 쓰기에 투신한다. 볼라뇨는 첫 장편 『아이스링크』(1993)를 필두로 거의 매년 소설을 펴냈다. 특히 1998년 발표한 방대한 소설 『야만스러운 탐정들』로 〈라틴 아메리카의 노벨 문학상〉이라 불리는 로물로 가예고스상을 수상하면서 더 이상 수식이 필요 없는 위대한 문학가로 우뚝 섰다. 그리고 2003년 스페인의 블라네스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매달린 『2666』은 볼라뇨 필생의 역작이자 전례 없는 〈메가 소설〉로서 스페인과 칠레, 미국의 문학상을 휩쓸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범죄, 죽음, 창녀의 삶과 같은 어둠의 세계와 볼라뇨 삶의 본령이었던 문학 또는 문학가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암담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상황에 관한 통렬한 성찰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의 글은 사실과 허구가 절묘하게 중첩되고 혼재하며, 깊은 철학적 사고가 위트 넘치는 풍자와 결합항여 끊임없이 웃음을 자아낸다. 작품으로는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과 『2666』을 비롯해 장편소설 『먼 별』(1996), 『부적』(1999), 『칠레의 밤』(2000), 단편집인 『전화 통화』(1997), 『살인 창녀들』(2001), 『참을 수 없는 가우초』(2003), 시집 『낭만적인 개들』(199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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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Alberto Morales Ajubel)
아후벨은 쿠바의 화가이자 그림책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만화가다. 어린 시절 엄청난 독서광이었으며, 미학을 공부한 뒤 쿠바 일간지의 풍자 만화가로 활동하다 1991년 스페인에 아트 스튜디오를 열었다. 독특한 그림책 작품 『로빈슨 크루소』, 『자유로운 새』 등으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스페인 아동 문학 최고 삽화상(2003), 발렌시아 시립 문화상 최고 삽화 부문(2007), 볼로냐 국제 도서전 최우수상(2009), CJ그림책상(2009) 등 전 세계 유수의 상을 50개 이상 수상했다. 쿠바, 불가리아, 폴란드, 캐나다 등 세계 곳곳에서 100회 이상의 전시를 연 바 있다. 홈페이지 www.ajubel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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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우석균
서어서문학과를 졸업, 페루 가톨릭 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친 뒤, 스페인의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중남미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 집필 중 칠레 대학교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수학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잉카 IN 안데스』, 『바람의 노래 혁명의 노래』, 『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 (공저)가 있고, 옮긴 책으로 『침실로 올라오세요, 창문을 통해』(공역), 『사랑과 다른 악마들』,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를 말하다』(공역),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열기』,『마술적 사실주의』(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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