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는 남아공 국민 중에 단 한 명의 흑인도 남지 않는 것이다.’
코르넬리우스 멀더, 남아공 각료
1964년 케이프타운. 세딕 아이잭스는 시내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신문을 읽으며 태연하게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온화한 인상에 안경을 쓴 이 젊은 고등학교 교사는 자신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큰일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의 1면 기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넬슨 만델라가 구금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스포츠팬은 아니었지만, 만약 신문을 넘겨보았다면 국제축구연맹이 아파르트헤이트에 의해 백인들로만 구성된 남아공 축구대표팀의 국제경기 출전을 금지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딕에겐 기사를 읽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는 거리를 위아래로 살피고, 해안 지역을 오가는 사람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뒤, 곧 약국 안으로 사라졌다.
몇 분 뒤, 그는 갈색 종이로 싼 큰 짐꾸러미를 들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길 건너편에 무장한 경찰 밴이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그는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세딕은 한 건물의 현관 안 어두운 곳에 몸을 숨기고, 경찰관들이 차에서 내려 인도를 지나던 몇 명의 흑인에게 통행권 제시를 요구하는 걸 조심스럽게 지켜봤다.
1950년대에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는 통행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흑인들이 거주하고, 일하고, 통행할 수 있는 지역은 통제되었다. 흑인들은 돔파스dompas라고 알려진 통행권을 항상 소지하고 다녀야 했다. 이로써 흑인들은 자신들의 조국에서 사실상 외국인 이주노동자처럼 살아가게 되었다. 통행권엔 그들의 모든 개인 정보, 사진, 지문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백인 공무원, 경찰관, 정부 관리 등이 요구할 경우 반드시 제시해야 했다. 돔파스가 흑인들의 큰 반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딕은 아시아계였기 때문에 반드시 통행권을 가지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하얗지 않은 얼굴이 도시 내 백인 구역에서는 불가피하게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경찰이 그를 본다면, 그의 몸을 수색하거나 들고 있는 짐꾸러미 안을 조사할 수도 있었다.
그가 방금 약국에서 구입한 것은 완전히 합법적인 것이었지만―누구라도 쉽게 판매대에서 구입할 수 있는 약간의 가정용품과 약품이었다―그걸 함께 섞으면 폭발물의 주성분이 되었다. 화학자였던 세딕은 폭탄을 만들기 위해서 그 재료를 구입한 것이었다.
조용한 말씨의 지식인이었던 세딕은 케이프타운의 보캅 지역에서 성장했다. 그는 그곳에서 남아공에 있는 비백인 학교 중에서는 가장 우수한 트라팔가 고등학교에 다녔었다. 선생님들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실천되고 있는지, 정의와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얼마나 다양한 개혁이 필요한지에 대해 가르쳤다. 이때의 가르침은 아파르트헤이트의 불평등에 의해 분리된 남아공에서 자란 세딕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화학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 그는 다양한 정치 토론 모임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세딕과 그의 친구들은 시위와 무장 투쟁을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한 친구가 그를 랑가 흑인 거주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었고, 그곳에서 그는 야만적인 차별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재단사였던 아버지의 친구는 사업을 위해 흑인 거주지역에 영업사원들을 들여보냈다. 10대의 청소년이었던 세딕은 랑가의 흑인들이 살고 있던 골함석 지붕 가건물이나 바람이나 겨우 막을 수 있는 오두막을 영업사원들과 함께 돌아다니곤 했다.
그곳에서 그는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직접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말하는, 젊고 정치화된 과격론자들을 알게 되었다. 세딕은 처음에는 그들의 분노 어린 현실 참여에 충격을 받았지만, 아파르트헤이트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비참한 일상을 알아가면서 점차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무슬림 청년 행동Muslim Youth Movement’의 회원이 되었고, 좀 더 강렬한 저항운동을 펼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모임의 일부 회원들은 소형 무기를 입수했고, 또 다른 회원들은 정부가 운영하는 건물이나 시설을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딕은 화학자로서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보탬이 되고 있었다. 그는 자금 확보를 위해 금을 감정하여 밀수출하는 걸 도왔으며, 최근에는 폭발물을 제조하는 방법을 연구하여 다른 회원들에게 그 방법을 전수해 왔다.
지금 그는 그늘 속에 몸을 숨기고 경찰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애쓰면서, 예상외의 체포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경찰이 그를 검문하면, 그는 단 하나의 폭탄도 폭발시키지 못한 채 체포될 수 있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려는 세딕의 전투가 시작 단계에서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에게 운이 따랐다. 경찰들은 유효한 통행권을 확인한 뒤 흑인들에게 가도 좋다는 신호를 보냈고, 곧 경찰 밴도 길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세딕은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내쉰 뒤, 폭발물의 재료를 들고 조심스럽게 집으로 가기 시작했다.
세딕이 어린아이였던 1948년에 백인들만의 선거로 집권에 성공한 인종주의 정당인 ‘국민당National Party’이 채택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모든 면에서 백인의 우위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완전한 인종차별 시스템을 구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남아공의 각 도시에는 수백 개의 새로운 공장과 일터가 생겨나 군수품과 군사장비에서부터 군복, 군화, 군용 텐트까지 모든 것을 생산했다. 이렇게 경제가 급성장함에 따라 더욱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이에 수천 명의 가난한 흑인과 아시아인 노동자가 더 좋은 임금과 직업을 약속받고 여러 도시로 이주했다. 이는 점차적으로 도시의 인구 과잉을 가져왔다. 당국은 이에 대처할 수 없었다. 특히 주택 공급이 절망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요하네스버그, 프리토리아(남아공의 행정수도이자 트란스발 주의 주도), 포트엘리자베스, 그리고 세딕의 고향인 케이프타운 같은 지역에 판자촌과 불법 주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날 때쯤엔 남아공 역사상 처음으로 도시 인구 중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백인보다 높아지게 되었다. 많은 백인들, 특히 ‘아프리카너 권리Afrikaner Right’라는 단체에 동조했던 백인들은 이를 위험한 현상으로 받아들였고, 흑인들이 도시 지역을 지배하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검은 위협’이라고 부르던 이러한 현상에 대처하기 위해 아파르트헤이트―‘분리’를 뜻하는 아프리칸스어(17세기 남아프리카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을 때 들어온 네덜란드어가 현지어의 영향을 받아 독자적으로 발전한 언어로,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공용어다)―를 제안했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실제로 흑인이나 세딕 같은 비백인에게 의미하는 것은 차별이란 불의에 의해 제한된 숨 막힌 삶이었다. 이 체제의 바탕을 이루는 믿음은 모든 백인이 흑인이나 유색인보다 우월하고, 그러므로 국가가 전력을 기울여 그들의 ‘특별함’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1948년 이전에도 남아공에는 많은 인종차별과 인종분리가 있었지만, 그해 이후에는 이런 것들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
세딕이 어렸을 때, 정권은 공식적으로 국민 개개인을 인종―백인, 아시아인, 유색인 그리고 흑인―에 따라 분류했다. 같은 가족이라도 정확하게 똑같은 피부색을 갖고 있지 않으면, 심하게는 머릿결이 같지 않은 경우에도 다른 인종으로 분류될 수 있었다. 각각의 공무원들은 선택적, 자의적으로 이 법안을 집행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 결과 많은 가족들이 강제로 분리되었고, 아이들이 보호시설에 보내졌다. 이러한 법안은 체제를 유지하고, 인종이 서로 섞일 경우 벌어질 수밖에 없는 대참사를 막는 데 꼭 필요하다는 주장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정부는 인종 간의 성관계를 단속하고, 결혼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경찰은 이 법안을 강제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커플의 사진을 증거로 촬영하기 위해 가정집을 급습하고 침실에 난입했던 것이다.
‘백인 전용’을 알리는 새로운 표지판과 게시판이 남아공 전국 곳곳에 세워졌다. 인종분리를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인종에 따라 각각 다른 학교, 대학교, 병원이 설립되었다. 수영장과 해변에서부터 공중화장실과 공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공 편의시설이 백인과 비백인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식당, 영화관, 호텔과 카페도 분리되었다. 백인은 백인 전용 버스에 탔고, ‘백인’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어떤 것이든 가장 좋은 것은 당연히 백인들 차지가 되었다. 특히 직업이나 토지 등의 경제적 이익은 백인들에게 주어졌다. 80퍼센트 이상의 토지가 인구의 12퍼센트를 차지하는 백인들의 몫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값비싼 광물이 많이 산출되는 땅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 뒤 아파르트헤이트 정부는 결과적으로 흑인들을 자신들의 조국에서 외국인으로 살게 만드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에 근거하여 반투스탄(bantustan: 미국과 호주에 있는 원주민 보호구역과 유사한 지역)이 만들어졌다. 반투스탄의 크기는 남아공 영토 전체 면적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새로운 법안은 모든 흑인들을 그 안에 모으려는 계획이었다. 그렇게 전국을 백인과 비백인 구역으로 분할하여, 각 도시가 흑인들에게 지배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완화시켰던 것이다. 정부가 임명한 어용 단체장들이 반투스탄의 행정을 맡았다. 그들에겐 별다른 권력이 없었고, 모든 면에서 지방 정부의 백인 상급자가 내린 지시에 따라야만 했다.
3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집에서 강제로 쫓겨나, 좁고 생필품마저 부족한 지역으로 보내졌다. 요하네스버그의 소피아타운, 케이프타운에서 가까운 디스트릭트 6 등 여러 인종이 함께 모여 살던 역동적이고도 번화했던 지역이 훼손되고 파괴되었다. 소피아타운은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가장 오래된 흑인 구역 중 하나로, 인구가 5만 명이 넘는 곳이었다. 재즈 음악, 번창한 예술과 문화로 남아공 흑인 사회 전역에 걸쳐 유명했던 이 지역은 단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밤사이, 무장한 군인과 경찰을 실은 수십 대의 트럭이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기 위해 들이닥쳤다. 주민들은 자신들의 뜻과는 반대로 도심으로부터 25킬로미터쯤 떨어진 황무지로 보내졌다. 정부는 그 지역에 목초지란 의미의 ‘메도랜즈Meadowlands’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아프리카 흑인들은 남서부 마을들의 타락이란 의미에서 ‘소웨토Soweto’라고 불렀다.
소피아타운 주민들의 강제 이주가 이뤄지고 난 뒤, 마을의 집은 모두 철거되었고 전에 살던 주민들의 흔적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대신 백인 블루컬러 노동자들을 위한 마을이 건설되었다. 정부에서는 새롭게 건설된 교외 지역에 승리를 뜻하는 아프리칸스어인 ‘트리움프Triumf’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형태의 강제 이주는 세딕이 10대를 보내는 동안 남아공 전역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곧 그 대상은 아시아인을 포함한 다른 유색인들에까지 확대되었다. 3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마을과 도시에서 남아공의 빈곤한 시골 지역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흑인, 아시아인, 유색인들이 제공하던 육체노동, 가사노동 없이 백인 거주지역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백인 거주지역들이 워낙 비백인들의 노동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다른 인종이 마을과 도시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허용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이동을 엄격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 결과 흑인들의 통행법이 입안된 것이었다. 정부는 흑인이 아닌 다른 비백인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특히 이미 아파르트헤이트에 비판적인 조직의 회원으로 알려진 세딕과 같은 사람에겐 더욱 그러했다. 세딕은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남아공 비밀경찰의 촉수는 나라 안 모든 일상생활 영역에 두루 미치고 있었다. 절망적으로 가난한 흑인과 비백인들에게 저항적인 성향을 띤 친구와 이웃을 밀고하라는 협박이 가해졌고, 이에 따를 경우 대가도 지급되었다. 비밀요원들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조직 대부분에 잠입하여 점차적으로 엄격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세딕도 자신이 체포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는 긴장한 채로 약국에서 나와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아시아계인 자신의 얼굴 때문에 도시의 백인 구역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후에도 몇 대의 경찰차와 마주쳤지만, 이날 운은 그의 편이었다. 그는 별다른 제지 없이 집에 도착했고, 실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저녁, 세딕은 세 명의 동지들과 함께 새로 만든 폭발물을 실험하기 위해 케이프타운의 스트랜드폰테인 해변 지역으로 향했다. 서해안을 따라 수 킬로미터에 걸쳐 이어져 있는 그 백사장에서 도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후미진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세딕과 그의 동지들은 치안병력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모래 속에서 몇 개의 폭탄을 폭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변전소 주변에서 남아 있는 마지막 폭탄을 터뜨릴지에 대해 고민하느라 차를 멈춰 세웠다. 그러나 세딕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경찰이 이미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세딕은 곧 치안경찰이 지난 몇 주 동안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이유가 자신이 최근 폭탄 제조를 위해 활동했던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같은 동네의 한 백인 소녀와 친하게 지내왔는데, 그건 ‘부도덕법Immorality Laws’을 위반한 것이었고, 백인 남아공 경찰들에게 의심을 사는 일이었다.
경찰은 세딕과 세 명의 동지들에게 총을 겨눈 채 우드스톡 경찰서로 끌고 갔다. 그들은 그곳에서 철야 조사를 받고 난 후, 다음 날 케이프타운에 있는 악명 높은 칼레돈 광장 경찰 본부로 이송되었다.
죄수를 가두는 건물에는 몇 가지 보안상의 이유로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세딕은 일반법을 위반한 범죄자와 한방에 갇혔다. 그는 페인트가 벗겨진 회색 벽을 응시하며,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세딕은 함께 있던 일반범에게 무슨 일로 잡혀왔는지를 물으며 말을 걸었다. 그는 살인, 강간, 살인 미수 등 여러 가지 이유라고 대답했다. 그 남자도 같은 질문을 했고, 세딕은 정치적인 범죄로 구금되었다고 말했다. 세딕보다 키도 크고, 몸무게가 50킬로그램은 더 나가는 그 남자는 그 말을 듣더니 긴 휘파람 소리를 냈다. “우와, 그건 정말 위험한 일이잖아, 이런!” 그는 말했다. 세딕은 곧 자신이 정확히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게 되었다.
세딕을 심문했던 사람들 대다수가 강경 극우파였다. 심문자들은 흑인과 유색인 정치운동가라면 무조건 경멸했고, 그들에게는 가장 잔인하고 가학적인 심문 기술을 사용했다. 그들의 눈에 세딕은 한낱 테러리스트에 불과했다. 우월한 인종인 백인들이 보다 행복하고, 부유한 남아공을 건설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체제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법을 제멋대로 생각하는 세딕과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국가의 유일한 장애물이었다. 세딕은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었고, 따라서 당연히 벌을 받아야만 했다.
인권과 수감자 처우에 대한 모든 국제조약을 깡그리 무시한 채, 심문 팀은 오전 8시부터 자정까지 교대로 일하면서 세딕에게 정신적, 육체적 학대를 가했다. 처음엔 고문과 동시에 협박을 해왔다. 치안경찰들은 세딕에게 협조를 거부할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해 상세하고 실감 나게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세딕의 동지들이 누구인지, 모임이 준비하는 파괴 계획은 어떤 것인지, 파괴 공작이 언제 어디서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정보를 원했다.
세딕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고, 그들은 오랫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다. 사실 잠을 재우지 않는 건 전 세계 모든 고문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잠을 못 자면 수감자는 정신이 혼미해져, 육체적인 고통에 대한 저항력을 잃었고, 그 결과 쉽게 협상을 하거나 정보를 제공했다. 세딕이 여전히 정보를 제공하지 않자 심문자들은 협박했던 내용을 실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발, 주먹, 개머리판 등을 이용해 닥치는 대로 구타를 자행한 뒤, 뒤이어 세딕의 몸 구석구석에 전극을 붙여 고문을 했다. 고문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특히 심문 시간에 간수들이 술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면서 들어올 때면 세딕은 ‘지옥 같다’라는 말의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고문자들은 술기운에 만용을 부리며 수감자들에게 더욱 야만적인 공격을 가했다. 술에 취해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심문자들은 계속해서 세딕에게 동지들이 모든 걸 다 털어놓았기 때문에 그가 비밀을 지킬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만약 그들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왜 계속 그를 구타하고 전기 충격을 주는 것일까?
세딕을 포함한 많은 수감자들에게 가해지는 고문은 한밤중에도 계속되었다. 다른 구역 경찰 본부의 감방에 있던 수감자들도 밤새 깨어 있어야 했고, 잔인한 육체적인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간수들은 철창 쪽을 향해 사악한 목소리로 오늘 밤 한 사람이 사형당할 거라고 속삭이며 복도를 돌아다녔다.
같은 수감자들도 적이었다. 일반범들은 더 많은 양의 식사 배급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범들을 공격하고 때리고 심지어 성폭행까지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고문자들은 정치범들을 테러리스트로 매도하면서, 불안하게 만들고, 혼미하게 만들고, 위협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러나 세딕의 경우에 고문은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수감생활의 고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수감이 계속되든지 석방되든지 간에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결심을 굳게 만들었다. 물론 그는 계속 수감되어 있어야 했다. 세딕은 남아공 치안당국의 ‘반反테러리스트’ 프로젝트에 따라 구속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가능한 한 많은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저항 투사들을 끌어모아 그들을 죽이거나 가두려는 내용의 계획이었다. 정부는 치안병력의 예산을 늘렸고 그들에게 거의 무제한의 권력을 주었다. 그들은 남아공 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활동가들을 쫓을 수 있었다. 세딕이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후 교도소에서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가 될 여러 사람들이 남아공 치안당국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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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척 코어 (Chuck Korr)
세인트루이스 소재 미주리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이자 드 몬포트 대학교 ‘스포츠 역사 문화 국제 센터’ 방문 연구교수다. 스포츠의 비교 역사에 관한 대학원 세미나를 가르치고 있으며, 국제축구연맹(FIFA) 석사 과정에서도 강의를 하고 있다. 1969년 17세기 영국의 역사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1973년부터 연구의 초점은 사회, 정책, 경제적 이슈로 본 스포츠 역사에 두고 연구를 해 왔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Western Capein 대학 방문교수로 두 차례 있으면서 2004 남아공 올림픽유치위원회와 로벤섬 박물관의 고문을 담당하기도 했다.
마빈 클로스 (Marvin Close)
희곡과 라디오, TV 대본을 쓴다. 대표작으로 희곡 「도로시 파커가 죽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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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박영록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 형태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남아공의 저항 시인 데니스 브루투스의 시에 감명받아 남아공 현대사를 살피기 시작했다. 현재 도서 기획, 편집, 번역 등 책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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