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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종교를 탄생시켰는가?
종교가 그렇듯이 모든 사회에서 무엇인가가 출현할 때는 그것이 “유전자 속에” 내재되어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자연히 제기된다. 종교는 자연선택에 의해 그것을 선호한 유전자들이 증식될 정도로 우리의 먼 선조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선사했던 것일까? 그렇다고 믿는 과학자들이 있으며, 캐나나 일간지에 〈‘신의 유전자’를 찾기 위한 연구는 계속된다Search continues for ‘God gene’〉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릴 정도로 실제로 그렇게 믿는 과학자가 많다.
그런 제목을 다시 만나길 기대해도 좋다. 왜냐하면 그 연구가 성공적인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어떤 ‘단일’ 유전자도 종교처럼 복잡한 개체의 토대가 될 수 없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의 유전자”라는 개념을 정당화하는 설명으로 풀어 보자. 어떤 한 무리의 유전자들이 사람들에게 종교적 형질을 부여했고, 그래서 그 유전자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보존되었다고 말이다. 그래도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결론―종교가 직접적으로 “유전자 속에”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은 사고와 감정에서 유전적 영향을 강조하는 학문으로 알려진 진화심리학에서 등장했다.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이 종교가 자연선택의 직접적 산물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많은 학자들, 어쩌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자연적” 산물이 아니란 뜻은 아니며, 어떤 의미에서는 “유전자 속에” 내재되어 있지 않다는 뜻도 아니다. 사람이 하는 것은 전부 어떤 의미에서든 유전자 속에 내재된 것이다.(유전자를 이용하지 않고 뭔가를 시도해 보라.) 게다가 우리는 종교의 기원을 유전자 속에 명백히 내재된 인간 본성의 일부에서 찾을 수 있다. 단지 그러한 인간 본성의 일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종교를 존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진화를 거듭해 온 것 같다는 것뿐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1902년 발표한 명저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진화를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기본적인 개념을 포착했다. “종교적 두려움, 종교적 사랑, 종교적 경외감, 종교적 환희 등은 존재한다. 그러나 종교적 사랑은 종교적 대상을 향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이다. 종교적 두려움은 영적 교감에 대한 일상적인 두려움, 말하자면 인간의 가슴의 일반적인 떨림일 뿐이다. 신의 응보라는 관념이 그것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관념을 전제로 해서 말이다. 종교적 경외감은 우리가 땅거미가 질 무렵 숲 속이나 산골짜기에 있을 때 느끼는 생리적 전율과 같은 것이다. 단지 그러한 감정이 초자연적 존재와 우리의 관계를 떠올릴 때 다가온다는 것뿐이다.”
제임스의 기본 논리를 진화생물학의 언어로 표현하려면 “적응” 개념만 끌어들이면 된다. 적응은 형질인데, 그것의 토대를 이루는 유전자들은 그러한 형질을 유발하는 덕분에 유전자 풀에서 증식한다. 예를 들면, 사랑은 적응인 것 같다. 자손에 대한 사랑은 그런 자손의 양성을 자극함으로써 유전자가 미래의 세대로 이어지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그 결과 부모의 사랑의 근간을 이루는 유전자는 사랑에 대한 기여 덕분에 증식한 것 같다. 이와 비슷하게 경외감, 환희, 두려움같이 제임스가 지적한 다른 정서들도 원래 적응이었다는 논리를 펼 수 있다.(거대한 공격적 동물 또는 거대한 공격적 인간에 대한 두려움은 무사히 살아남았고, 그 두려움의 바탕이 되는 유전자를 존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종교가 적응이란 의미는 아니다. 종교에는 사랑, 경외감, 환희, 두려움이 수반되며 따라서 그러한 감정을 이루는 유전자가 개입된다고 해도 말이다.
기술적 용어에서 조금 탈피해서 설명해 보자. 우리는 자연선택에 의해 사랑, 경외감, 환희, 두려움을 느끼도록 “설계”되지 않았는가.(단, “설계”의 상징성을 이해해야 한다. 자연선택은 최종 결과물을 구상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실현하는 인간 설계자와 다르다. 그보다는 시행착오의 맹목적인 무언의 과정에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들이 “설계”의 산물이라고 해서 그것들이 종교에 의해 활성화될 때 “설계된” 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연선택에 의해 달릴 수 있게 “설계”됐고, 경쟁의식을 느끼도록 “설계”됐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육상대회에 참가하도록 “설계”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육상과 마찬가지로 종교는 “적응”이 아닌 것 같다. 두 가지 모두 미국의 고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한 “스팬드럴”(spandrel, 건축 용어로서 삼각소간을 뜻한다. 인접한 두 아치 사이에 생긴 삼각형 모양의 공간―옮긴이)인 것 같다. 이것은 어떤 유전자들에 의해 야기되는 현상인데, 그 유전자들은 원래 일으킨 현상 외에 다른 부가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해당 종의 일부가 됐다. 스팬드럴은 유기적 “설계” 과정의 우연한 부산물인 반면, 적응은 직접적인 산물이다. 종교는 스팬드럴인 것 같다.
그러나 종교는 설계의 증표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기능에 도움이 되는 복잡하고 통합적인 시스템이다. 예를 들면, 종교는 결혼이나 장례 같은 일부 핵심적인 “통과의례”를 줄곧 다루고 있으며, 그런 의례화된 운용은 사회에 득이 된다. 설계자, 아니면 최소한 “설계자”에 의존하지 않고서 어떻게 종교의 일관성과 기능성을 설명할 것인가?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는 이 지구상에서 활약하고 있는 유일한 위대한 “설계자”가 아니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믿음, 습관, 의례, 노래, 기술, 이론 같은 “밈”을 선별적으로 전달하는 문화적 진화도 있다. 그리고 문화적 진화를 형성하는 한 가지 기준이 사회적 효용성이다. 집단의 단계에서 원활하게 기능하는 데 기여하는 밈은 대개 그렇지 않은 밈보다 유리하다. 문화적 진화는 우리에게 현대적 기업, 현대적 정부, 현대적 종교를 안겨 주었다.
그러고 보면 문화적 진화는 우리에게 비현대적 종교도 선사했다. “원시적” 종교를 볼 때마다 우리는 오랫동안 문화적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종교를 목격한다. 수렵채집민 종교의 관찰은 농경 발달 이전, 1만 2000년 전의 일반적인 종교의 모습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중 어떤 종교도 언제일지 모르지만 종교적 믿음과 관습이 출현했던 시기의, 문자 그대로 ‘원시적’ 단계의 종교와 유사하지 않다. 오히려 “원시적” 종교라고 불리는 종교는 수만 년, 심지어 수십만 년에 걸쳐 문화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믿음과 관습의 총체다. 인간의 정신은 대대로 어떤 믿음은 수용하고 어떤 믿음은 거부해 왔으며, 그런 과정에서 종교는 형성과 해체를 반복했다.
그렇다면 “원시적” 종교, 또는 그와 관련된 다른 어떤 유형의 종교의 존재를 설명하려면 먼저 인간의 정신이 어떤 종류의 믿음과 관습에 순응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은 자연적으로 어떤 종류의 정보를 걸러내고 어떤 종류의 정보를 투과시킬까? 종교가 출현하고 문화적 진화에 의해 진화를 시작하기 전에, 유전적 진화는 그러한 진화가 발생하는 환경인 인간의 두뇌를 어떻게 형성했을까?
이 질문을 다른 식으로 표현해 보자. 인간의 정신은 자연선택에 의해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간직하도록 “설계됐을까?” 우선, 진실하지 않은 믿음이다.
최소한 진실하지 않은 믿음은 그렇다.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인지와 이해가 인류의 선조들이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데 기여하는 한 당연히 지적 정확성은 자연선택에 의해 선호될 것이다. 그리고 대개 지적 정확성은 물론 유전자의 존속과 번식에 유용하다. 그래서 우리가 깊은 인지력을 발휘할 수 있고, 배경의 잡음 속에서 인간의 목소리를 탐지할 수 있는 탁월한 장치를 지닌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인지와 판단력이 생존과 번식을 저해하는 상황이라면 자연선택은 정확성을 가로막을 수 있다.
진실과 결과
1974년 샌프란시스코 신문사의 상속녀인 패티 허스트는 공생해방군Symbionese Liberation Army이라고 불리는 과격 단체에 의해 납치됐다. 그들의 목적 중 하나는 “사람들의 삶을 좀먹는 파시즘이라는 벌레를 박멸”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감금 생활을 거친 후 그녀는 새로운 동료 집단에 동화되었다. 얼마 안 되어 그녀는 그들이 자금을 확보하는 일을 열성적으로 거들었으며, 한번은 기관총을 휘두르며 은행을 턴 적도 있다. 더구나 혼자 남겨졌을 때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를 포기했다.
그녀는 그 경험을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거의 2주 동안 그들과 떨어져 있을 때까지 사실상 자유의지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불현듯 서서히 그들이 더는 그곳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나만의 사고를 할 수 있었다.” 허스트는 이데올로기 같은 인질범의 “주관적” 믿음들을 단순히 받아들였던 것이 아니다. 그녀는 물질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그들의 견해를 믿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인질범 중 한 사람은 “구출 따위는 기대조차 하지 말라고 했다. 내 뇌파를 추적하거나 아니면 심령술사를 동원해서 나를 찾아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조차 두려웠다.”
허스트의 강요된 경신輕信의 상황은 1973년 스웨덴에서 발생한 인질극에서 유래된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여기서 “증후군”이라는 용어는 비정상적 현상을 암시하기 때문에 빗나간 표현일지 모른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허스트의 반응은 어쩌면 인간 본성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 사례일 것이다. 우리는 자연선택에 의해 세뇌되도록 “설계된”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짐작을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충격적 모욕으로 여기지만,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진화심리학자가 아니다. 다윈론의 측면에서 인간 종이 적어도 일부 상황에서 맹목적 경신을 조장하는 유전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리가 있다. 만약 당신이 소규모 집단에게 포위되었고 당신의 생존이 그들에게 달렸다면, 그들의 중요한 믿음을 거부하는 것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사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소규모 집단에 의해 감금된 상황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자연선택이 그것을 고려할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것도 자연스러운 인간의 상황이다. 인간은 작은 집단으로 진화했다. 20명, 40명, 60명. 그런 집단에서 일탈은 대개 생존에 적합한 선택이 아니었다. 생존은 음식을 나눠 먹고 전투에서 단결하는 것 같은 사회적 지지에 달려 있었다. 마음에서 우러난 그들의 믿음에 끈질기게 도전함으로써 동료를 배격하는 것은 유전자를 증식할 확률을 떨어뜨렸을 것이다.
스톡홀름 증후군을 조장하기 위해 누군가를 감금할 필요가 없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종교적 숭배 집단은 방황하는 십대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 신참 회원들은 며칠 동안 신자들 속에 파묻혀 지낸다. 그런 후 그들은 대개 그 믿음을 받아들인다. 강력한 권위적 인물을 앞세워 그런 믿음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 한 유명한 사회심리학 실험에서 실험 대상은 명백히 길이가 다른 두 선이 길이가 같다고 응답했다. 그들의 “동료” 중 일부(사실 실험 공모자였던)가 그런 의견을 제시한 직후였다.
인간 본성의 이러한 동조적 성향을 감안할 때, “원시적” 종교 또는 다른 종교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외부 관찰자의 눈에는 대단히 수상쩍어 보이는 정교한 믿음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어떻게 그런 정교한 시스템이 존재하게 됐을까?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의 공식적인 믿음과 의례의 체계에 순응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자.(다른 대안이 제시되지 않는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애초에 어떻게 그런 체계가 생성됐을까? 어떻게 종교가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해 이런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까?
신이 인간을 물다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문화의 진화를 좀 더 세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문화의 개별 단위, 즉 이 경우엔 믿음과 관습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것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알아봐야 한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문화의 개별 단위에 “밈meme”이란 이름을 붙였다. 유전자인 “진gene”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문화 진화와 생물학적 진화의 어떤 유사성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예를 들어 보자. 유전자가 몸에서 몸으로 전달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듯이 밈은 정신에서 정신으로 전달된다. 새롭게 조합된 유전자가 유전자 풀의 한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듯이, 새로 생성된 밈은 전 세계에서 공급되는 인간 두뇌의 한정된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밈과 밈의 이러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어떤 종류의 밈이 “선택적 우위”를 지닐까?
그 단서를 찾기에 좋은 곳은 신문이다. 신문사의 편집자들은 사람들이 어떤 정보를 원하는지 간파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요구를 채워 준다. 그들은 노련한 밈 공학자이며, 따라서 인간 본성의 연구자다. 신문에 대해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신문이 대개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편향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주가지수 5퍼센트 상승”과 “주가지수 5퍼센트 하락” 같은 기사 제목은 “주가지수 큰 변동 없어”라는 제목보다 더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다. 종교들, 그리고 확실히 “원시적” 종교들은 신문과 같다. 모든 수렵채집 사회에서 종교는 질병과 회복, 기근과 풍요같이 나쁜 일과 좋은 일이 발생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주로 몰두한다.
악에 대한 선의 비율을 높이는 데도 헌신한다. 한밤중에 휘파람을 부는 것이 악령을 불러오는 반면 노래하는 것은 그 악령을 쫓는다고 확신하는 안다만 제도인은 밤에는 휘파람을 불지 않고 노래를 부른다. 사람들은 자연히 그들의 환경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하려고 하며, 자신들이 그런 통제력을 지녔다고 믿는 것은 당연히 그들을 기분 좋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은 그런 통제력을 약속하는 사상에 개방적이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다가오는 모든 사상을 비판 없이 흡수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 생각들이 그들의 주목을 받는다는 뜻이며, 밈에게 그것은 수용을 향한 첫걸음이다. 폭풍우가 밀랍을 녹인 행위에 대한 신의 처벌이라고 주장하는 안다만 제도의 밈은 그 사회의 종교에서 고정석을 확보하진 못했지만, “폭풍우는 그냥 발생하는 것이며 너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밈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했다.
신문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상하고 진기한 소재가 평범하고 예상된 소재를 제압한다는 점이다. 결핵과 최근에 발견된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West Nile Virus는 모두 불행한 소식이지만, 사망자 수를 고려하면 결핵이 더 나쁜 소식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신종 바이러스의 발병에 전문가들 당황”이라는 제목이 “올해 결핵 사망자는 예년 수준에 머물 것으로 예상돼”라는 제목을 거뜬히 밀어낸다.(이 패턴을 뒤집음으로써 웃음을 유발하는 풍자잡지인 《더 어니언The Onion》에서는 예외일 것이다.) 이런 패턴을 표현한 저널리즘 전문가들의 유명한 말이 있다.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은 기삿거리가 안 되지만,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은 기삿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가 자연스럽게 이상하고 놀라운 사실을 포착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다. 예측 가능한 일들은 그들을 세상으로 인도하는 기대들에 이미 흡수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고 놀라운 소식은 우리의 기대가 일부 수정될 필요가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고 놀라운 주장의 한 가지 속성은 대개 그런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러한 주장들이 우리 두뇌에 우선적으로 접근하고자 할 경우, 거짓이 진실보다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유리함이 덧없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한 지 며칠 후 쌍둥이 빌딩 중 한 곳의 꼭대기에서 한 남자가 파편 속을 뚫고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왔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이메일의 “전송” 버튼을 클릭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정도로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믿기 어려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었다. 진실이 신발 끈을 매는 사이 거짓은 지구 반 바퀴를 돈다는 유명한 격언을 증명하는 사례였다.
물론 장기적으로 진실은 신발을 다 신을 테고, 사람들은 보통 진실의 도착을 환영할 것이다. 실제로 놀라운 소식의 흡인력이 뒤이은 검증을 통과한 주장의 흡인력에 의해 견제를 받지 않았다면 평범한 인간의 선조는 인간의 선조가 될 정도로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20만 년 전 어떤 지역의 현자가 어떤 열매를 먹으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자. 이제 그의 충고를 따른 첫 두 사람이 급사했다고 하자. 충고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을 권고했고, 따라서 반대 증거의 공격을 받은 유전자는 그 종의 일부로 오래 머무르지 못하지만, 두뇌로 하여금 그러한 증거를 고려하도록 인도한 유전자는 가능하다. 증거에 대한 이러한 인간의 자연적인 존중은 누군가에게 1 더하기 1이 3이라거나,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른다는 것을 납득시키기가 힘든 이유다.
그러나 그 두 가지보다 더 검증하기 힘든 믿음이 있다. 그리고 검증하기 힘든 믿음은 종교를 탄생시킨 문화 진화의 과정 속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실제로 수렵채집민의 종교적 믿음은 일반적인 종교적 믿음과 마찬가지로 대부분 위조에 내성이 있는 주장들로 구성된다. 북아메리카의 북서 해안가에 거주하는 원주민인 하이다족은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났을 때, 연관된 권력자(범고래의 신)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바다에 신선한 물을 한 컵 쏟아 붓거나 담뱃잎이나 사슴기름을 노의 끝자락에 놓는다.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서 무사히 돌아왔고 이러한 방책이 익사를 막아 주었다고 전했다. 추정컨대 이런 방책을 썼지만 결국 익사했다고 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어떤 종교적 믿음은 더 확실한 검증을 거칠 수 있다. 안다만 제도인이 옳다면, 밀랍을 녹이는 것이 폭풍우를 일으키는 대표적인 원인이라면 그 행위의 일시적 정지는 폭풍우를 줄였어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폭풍우가 발생하기 전에 마을의 누구도 소량의 밀랍이라도 녹이지 않았거나 폭풍을 유발하는 다른 종류의 행각을 벌이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매미가 울 때 큰 소리로 떠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허점은 현대 종교에서도 발견된다. 어떤 사람이 질병에서 회복되기를 기도했는데, 회복되지 않았다면 그 기도는 신뢰를 잃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는 대개 그런 실패를 해명하는 방법을 갖고 있다. 기도자나 병자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고, 그러한 실패가 신의 처벌이다. 아니면 어쩌면 신은 원래 불가사의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밈이 먹고 먹히는 문화 진화 세계의 생존자가 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다. 이상하고 놀라우면서 반직관적이거나, 행운과 불행의 원천을 보여 주거나, 이러한 원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 주거나, 원래부터 명확하게 검증하기 힘든 주장들이다. 이런 측면에서 종교의 탄생은 그렇게 신비로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진기함에 대한 우리의 끌림에도 한계가 있지 않을까? 한 남자가 몇 차례 행운이 따라 준 덕분에 초고층 빌딩을 미끄러져 내려와 목숨을 건졌다고 믿는 것이 그 예다. 1장에 나온 이누이트족처럼 어떤 사냥감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이 바다 밑에 사는 성난 여신의 행각이라고 믿는 것도 그런 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개를 무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지만 “신이 인간을 무는 것”보다는 개연성이 높은 것 같다.
(부록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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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로버트 라이트 (Robert Wright)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국제관계를 공부했고 시사주간지 <뉴리퍼블릭 New Republic>의 객원 편집자이면서 <타임 Time>, <슬레이트 Slate>, <애틀랜틱먼슬리 Atlantic Monthly>, <뉴요커 New Yorker> 등에 역사, 종교, 전쟁, 기술 같은 주제로 대중과 소통하는 칼럼을 써 온 저널리스트다. 진화심리학, 역사, 종교, 게임 이론에도 해박해,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인간의 감정과 도덕관의 변화 과정을 살핀 『도덕적 동물 The Moral Animal』(1994)과 인간이 생물학적, 도덕적, 사회적으로 진화했음을 인류 역사의 대장정을 통해 들여다본 『넌제로 Nonzero』(2000)를 저술하기도 했다. 첫 책 『3인의 과학자와 그들의 신 Three Scientists and Their Gods』(1989)으로 전미 도서 비평가 협회상을 수상하면서 주목받았고, 『도덕적 동물』은 12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진화심리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부상했다.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을,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쳤다. 자신을 ‘급진적 문화진화론자’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 로버트 라이트는 다윈주의의 틀로 인간과 도덕과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는 철저한 과학주의자이자 박식하고 명석한 과학저술가다. 아울러 역사학?인류학?진화생물학을 멋지게 통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새로운 미국 재단 New American Foundation’의 수석 연구원이며 정치, 세계문제, 철학, 과학 등의 주제를 다루는 비디오블로그 ‘블로깅헤즈닷티브이 bloggingheads.tv’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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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허수진
학부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한영번역학을 전공했다.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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