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명의 기반은, 체스터턴에게는 실례지만, 석탄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유명 작가였던 G. K. 체스터턴은 당대 문명의 기반이 추상화abstraction라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은 곰곰이 생각해서 깨닫는 것 이상으로 완벽하게 그렇다. 우리를 살게 해주는 기계가, 그 기계를 만드는 기계가 전부 직간접적으로 석탄에 의존하고 있다. 서구 세계의 신진대사에서 석탄 광부보다 중요한 존재는 땅을 일구는 농부밖에 없다. 광부는 검댕 묻지 않은 거의 모든 것을 어깨로 떠받치는 검댕투성이 여인상 기둥과도 같다. 이런 이유에서, 석탄을 캐는 실제 과정은 꼭 지켜볼 만한 일이다. 물론 기회가 있고, 또 기꺼이 수고를 감내할 마음이 있다면 말이다.
탄광에 갈 요량이라면 ‘필러filler(채워 담는 사람이라는 뜻.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막장꾼이 되겠다)’가 작업할 때 막장(채광採鑛이 이루어지는 면. 채벽採壁이라고도 한다.)까지 가보는 게 좋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탄광에 작업이 한창일 때 방문객은 성가신 존재라 환영을 못 받는데, 그렇다고 다른 때 가면 완전히 엉뚱한 인상을 받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를테면 일요일에 가본 탄광은 거의 평화로울 정도다. 그러니 가볼 만한 때는 기계가 요란하게 돌아가고 탄진炭塵 자욱한 공기가 시커멀 때이며, 광부들이 무얼 해야 하는지 실제로 볼 수 있을 때이다. 그럴 때 갱도 안은 지옥 같으며, 아니면 적어도 내 마음에 그려보곤 하는 지옥 같다. 아무튼 거기엔 보통 사람이 지옥에 있으리라 상상할 만한 게 대부분 있다. 더위, 소음, 혼란, 암흑, 탁한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 참을 수 없이 갑갑한 공간이 그것이다. 불 말고는 모든 게 다 있다. 저 아래에는 뿌연 탄진을 잘 뚫지 못하는 램프와 손전등의 미약한 빛은 있되, 활활 타는 지옥불만은 없다.
마침내 거기까지 가서(거기까지 가는 것 자체가 큰일인데 거기에 대해선 잠시 뒤 설명하기로 하자) 갱도 지주가 마지막으로 세워져 있는 곳까지 기어가면, 앞에 1미터 정도 높이의 번들번들한 검은 벽이 보인다. 여기가 바로 막장이다. 머리 위는 석탄을 떼어낸 암반이 드러난 매끈한 천장이고, 밑바닥도 암반이다. 그러니 당신이 들어간 갱도의 높이는 탄맥炭脈 자체의 폭 정도밖에 안 되며, 1미터를 얼마 넘지 못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강력한 첫인상은 석탄을 나르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나는 무시무시한 소음에서 비롯된다. 갱도 안에서는 멀리까지 볼 수가 없다. 램프 불빛은 뿌연 탄진에 막혀 얼마 뻗지도 못한다. 하지만 어느 쪽에서든 반 벌거숭이인 사람들이 무릎으로 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3~4미터 간격을 두고, 떨어지는 석탄을 삽으로 퍼 왼쪽 어깨 뒤로 재빨리 넘겨버린다. 석탄이 담기는 곳은 컨베이어벨트인데, 이는 그들의 1~2미터 뒤에서 갱도 앞뒤로 달리는 폭 60센티미터의 이동식 고무벨트다. 이 벨트 위로 반짝이는 석탄의 강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이다. 큰 탄광에서는 이런 벨트가 분당 몇 톤의 석탄을 나른다. 석탄은 지하의 중앙 통로가 있는 곳으로 실려가 반 톤 분량을 담을 수 있는 광차鑛車에 담기고, 승강기로 옮겨진 다음 지상으로 들려 올라간다.
‘필러’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들의 강인함에 쓰린 질투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은 보통 인간의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초인적이라 할 만한 엄청나다. 그것은 그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석탄을 퍼담을 뿐만 아니라, 두세 배 힘든 자세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기는 자세를 유지해야만 하는데(무릎을 펴려고 했다간 천장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는 시늉만 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삽질은 서서 할 때 더 쉬운 법이다. 삽을 움직일 때 무릎과 허벅지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릎을 꿇게 되면 그 부담을 팔과 배 근육으로 다 떠안아야 한다. 다른 조건들도 작업을 딱히 더 수월하게 해주는 건 아니다. 덥고(제각각이지만 경우에 따라 숨 막힐 정도다), 탄진은 목구멍과 콧구멍을 틀어막으며 눈썹에 자욱하게 쌓이며, 그 비좁은 공간 안에 있으면 기관총 소리처럼 시끄러운 컨베이어벨트의 소음이 끝없이 들려온다. 그런데도 필러들은 철로 만든 사람처럼 보이고, 또 그렇게 일을 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매끈하게 덮여 있는 탄진을 보면, 그들은 정말 철의 인간 같다(철을 두드려 만든 조각상 말이다). 광부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려면 탄광 밑에서 벗고 일하는 모습을 봐야만 한다. 그들은 대부분 덩치가 작지만(크면 그만큼 작업이 불리해진다) 거의 모두 신체가 대단히 빼어나다. 널찍한 어깨는 점점 가늘어져 미끈하고 유연한 허리로, 그리고 작고 도톰한 엉덩이와 근육질의 허벅지로 이어지며, 단 1온스의 군살도 없다. 더운 탄광에서는 얇은 속바지와 작업화와 무릎보호대 차림으로만 작업하며, 아주 더운 곳에서는 작업화와 무릎보호대 차림뿐이다. 여기서 광부들은 겉모습으로 젊었는지 늙었는지 분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많으면 예순에서 예순다섯까지 될 수도 있으나, 벗은 몸에 시커먼 모습이면 모두 똑같아 보인다. 단, 청년의 신체, 그것도 근위병 수준의 몸이 아니면 누구도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허리에 군살이 몇 파운드만 있어도 계속해서 허리를 굽혔다 펴는 동작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보고 나면 다시는 잊을 수 없는 광경이다. 온몸이 시커메진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놀랍도록 힘차고 빠르게 삽을 휘둘러 석탄을 뜬다. ‘휴식’ 시간이란 게 없으니, 그들은 이론상으론 전혀 쉬지 않고 일곱 시간 반을 일한다. 단, 실제로는 가져온 도시락을 먹느라 교대하는 동안 15분쯤 시간을 죽이긴 한다. 도시락은 대개 비계 바른 빵 한 덩이와 차가운 차 한 병이 전부다. 나는 ‘필러’들이 작업하는 광경을 처음 지켜보다 석탄가루 속에서 몹시 불쾌하게 끈적거리는 무언가를 더듬게 되었다. 그것은 씹다 뱉은 담배였다. 거의 모든 광부들이 씹는담배를 이용하는데, 갈증에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도 탄광 여러 곳에 들어가봐야만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웬만큼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한곳에서는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 다른 것이 눈에 잘 안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탄광 체험은 실망스럽기까지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예상 밖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승강기에 탄다고 해보자. 승강기는 전화박스 정도의 폭에 그 두세 배 정도의 길이인 철제 우리다. 여기에 열 사람을 태우는데, 정어리 통조림처럼 꽉 채우며, 키가 큰 사람은 바로 서 있지도 못한다. 철문이 닫히면 위에서 도르래 장치를 작동하는 누군가가 당신을 허공 속으로 떨어뜨린다. 그러면 뱃속이 불쾌하게 간질간질해지고 귀가 터질 듯 압력이 차는데, 그 정도는 맨 밑에 다가가기 직전의 이상한 느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승강기가 다 내려갈 때쯤이면 갑자기 속도가 느려지면서 분명히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착각이 드는 것이다. 승강기가 한참 떨어지는 동안의 속도는 시속 100킬로미터는 될 것 같고, 더 깊은 탄광에서는 그보다 더 빠르게 느껴진다. 밑바닥에 도착해서 승강기 밖으로 기어나오면 대개 지하 350미터 정도다. 말하자면 당신 위에 어지간한 산이 하나 있는 셈이다. 단단한 바위, 멸종한 동물의 뼈, 하층토, 부싯돌, 자라고 있는 식물의 뿌리, 파릇한 풀, 그리고 그것을 뜯어먹는 소들로 이루어진 수백 미터의 층들이 당신 머리 위에 떠 있으며, 당신 종아리 굵기 정도밖에 안 되는 나무 기둥들이 그것을 지탱하고 있다. 하지만 승강기의 엄청난 속도와 완벽한 암흑 때문에, 피커딜리 광장 밑 지하철보다 깊지 않은 곳에 온 듯한 착각이 든다.
그런가 하면 진짜 놀라운 것은, 지하에서 수평으로 이동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거리다. 나는 탄광에 들어가보기 전까지는 광부가 승강기에서 나와 탄맥을 따라 몇 미터만 가서 작업을 하면 되겠거니 하고 막연히 상상했다.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런던 브리지에서 옥스퍼드 서커스까지의 거리는 되는 갱도를 기어야 하는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탄광의 수직 갱도가 탄층炭層 가까운 어디쯤까지 내려갈 것이다. 하지만 그 탄층을 파내고 나면 새로운 탄층을 따라가야 하고, 그럴수록 작업은 수직 갱도 밑바닥에서 점점 멀어진 곳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수직 갱도 밑바닥에서 막장까지의 거리가 1.5킬로미터 정도라면 평균쯤일 것이고, 5킬로미터도 보통에 속하며, 8킬로미터나 되는 탄광도 여럿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거리는 지상에서의 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1.5킬로미터든 5킬로미터든,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주요 통로를 벗어나면 거의 없으며, 주요 통로라 해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수평으로 몇 백 미터를 들어가봐야 알 수 있다. 일단 출발은 램프 빛 흐린 갱도를 따라 살짝 구부리고 가는 정도다. 갱도는 폭은 2~3미터, 높이는 1.5미터쯤 되며, 벽은 더비셔의 돌담처럼 혈암頁巖(얇은 층으로 잘 갈라지는 성질이 있는 무른 퇴적암)으로 만든 석판을 댔다. 1~2미터 간격으로 나무기둥이 있어 들보를 떠받치는데, 어떤 들보는 환상적으로 구부러져 있어 지나갈 때 머리를 잽싸게 잘 숙여야 한다. 바닥은 대개 딛기 좋지 않은데, 혈암 가루나 들쭉날쭉한 돌멩이가 많으며 물이 있는 탄광인 경우 농가의 축사처럼 질퍽질퍽하기 때문이다. 바닥엔 또 광차가 다닐 수 있도록 30~60센티미터 간격으로 침목을 댄 미니 철길이 있으니, 걷기는 이래저래 피곤하다. 더구나 혈암 가루 때문에 모든 게 잿빛이며, 어느 탄광에서나 마찬가지인 듯한 먼지투성이의 탄내가 난다. 그리고 용도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신기한 기계들이 보이고, 연장 꾸러미들이 철사에 매달려 있으며, 때로는 생쥐들이 램프 불빛에 놀라 달아나곤 한다. 그것들은 놀랍게도 흔하며, 말[馬]을 쓰거나 써온 탄광에선 더욱 그렇다. 생쥐들이 어떻게 처음 거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수직 갱도에서 떨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쥐는 체중에 비해 표면적이 아주 넓어서 아무리 높은 데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고들 하니 말이다. 철길을 따라 수직 갱도로 느릿느릿 덜컹거리며 가는 광차들에게 길을 내주려면 벽에 바짝 붙어서 걸어야 한다. 광차는 지상에서 작동하는 끝없이 긴 강철케이블에 의해 끌려간다. 이어서 올 굵은 삼베 커튼과 두꺼운 나무문을 열고 기다시피 지나갈 때면 한바탕 세찬 공기가 밀려온다. 이 문들은 환기 시스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한 수직 갱도의 탁한 공기를 환풍기로 뽑아내면, 다른 수직 갱도로 맑은 공기가 들어온다. 하지만 그대로 두면 공기가 가장 짧은 코스로만 돌아서, 더 깊은 곳에 있는 작업장은 환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칸막이를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구부리고 걷는 것은 장난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장난은 오래가지 않는다. 나는 키가 유달리 커서 불리하지만, 천장이 1미터도 안 될 만큼 낮아지면 난쟁이나 어린애가 아닌 이상 걷는 것이 몹시 힘들어진다. 몸을 반으로 접어야 하며, 동시에 고개는 똑바로 쳐들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처진 들보가 갑자기 나타나면 피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목이 결리기 시작하는데, 무릎과 허벅지가 아픈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1킬로미터쯤 가다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워진다(절대 과장이 아니다). 과연 끝까지 갈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며, 그보다 더한 것은 도대체 돌아갈 때는 어떻게 하나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속도는 점점 느려진다. 이렇게 너무나 낮은 곳을 쪼그린 자세로 나아가기를 수백 미터. 갑자기 천장이 이상스럽게 높은 지점이 나타나(오래된 암반이 무너진 덕분인지 모르겠다) 6미터 정도는 곧추서서 걸을 수가 있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곧바로 다시 100미터 정도 쪼그려 자세로 걸어야 할 구간이 나타나고, 이어서 들보들이 줄줄이 나타나면 납작 엎드려야 한다. 이제는 네 발로 기어야 하는데, 쪼그려 걷기에 질리고 나면 이것도 위안이 된다. 그러다 들보의 연속이 끝나고 다시 일어서려면, 무릎이 일시 파업을 하며 펴지기를 거부한다. 여기서 당신은 (불명예스럽게도) 잠시 멈추라고, 1~2분쯤 쉬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당신의 가이드는(물론 광부다) 동정을 한다. 그는 당신의 근육이 자기 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300~400미터만 더 가면 돼요.” 그는 격려의 뜻으로 한 말이지만, 당신은 300~400미터‘만’이라니 하는 심정이다. 아무튼 결국 당신은 어찌어찌 막장까지 기어간다. 1.5킬로미터를 가기까지 거의 한 시간이 걸렸는데, 광부에게는 보통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여기까지 가면 당신은 기력을 찾기까지 석탄가루 위에 몇 분은 드러누워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작업을 어떻게 하는지 볼 정신이 들 테니까.
돌아오기는 가기보다 더 어렵다. 이미 지친 탓도 있지만 수직 갱도로 돌아오는 길은 약간 오르막이기 때문이다. 이제 낮은 통로는 거북이걸음으로 가야 하고, 무릎이 말을 듣지 않으니 쉬었다 가자고 말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다. 램프를 들고 가기도 벅찰 지경이니, 비틀거리기라도 하면 떨어뜨리기 십상이다. 그럴 경우 데이비램프 같은 안전등은 불이 꺼져버린다. 그렇잖아도 들보를 피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때로는 피해야 한다는 걸 아예 잊어버리던 차다. 광부들 흉내를 낸답시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보려 하면 등뼈가 쿵쿵 찍히기 일쑤다. 광부들도 등뼈를 꽤 자주 찍힌다고 하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반쯤 벌거벗고 다녀야 할 정도로 몹시 더운 탄광에서는 광부들 대부분에게 ‘등에 달린 단추’라는 게 있다. 철길이 내리막이면 광부들은 이따금 바닥 패인 작업화를 레일에 맞춰 앉아 미끄럼을 탄다. ‘여행’이 몹시 힘든 탄광에서는 모든 광부들이 손잡이 바로 밑부분을 적당히 도려낸 70센티미터 길이의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그들은 평이한 구간에서는 지팡이 손잡이를 잡고 다니다가 많이 쪼그려야 하는 구간에서는 손잡이 밑의 도려낸 부분을 잡는다. 이 지팡이도 큰 도움이 되지만, 비교적 최근에 발명된 나무 헬멧은 신의 선물이다. 이 헬멧은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강철 헬멧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나무줄기의 중심부로 만들어져 아주 가벼우면서도 단단하여 머리에 큰 충격이 가해져도 못 느낄 정도다. 마침내 지표면으로 다시 올라오면, 땅속에서 세 시간 동안 3킬로미터 정도를 이동한 뒤일 텐데, 지상에서 40킬로미터를 걸어다닌 것보다 더 지칠 것이다. 허벅지가 일주일 동안 꽉 뭉쳐 있어 계단을 내려가는 게 아주 큰일이 될 텐데, 무릎을 굽힐 수 없어 희한하게 기우뚱한 자세로 내려가야만 할 것이다. 광부인 친구들은 당신의 걸음이 우스꽝스러운 것을 보고 농담을 할 것이다(“그래, 막장에 내려가보니 어떻던가, 응?” 하는 식으로). 그런데 광부라도 이를테면 병 때문에 일을 오랫동안 안 하다 탄광으로 돌아오면 처음 며칠은 근육이 뭉쳐 몹시 고생을 한다고 한다.
내가 과장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물론, 구식 갱도에 내려가(영국의 갱도는 대부분 구식이다) 막장까지 가본 사람이라면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런 것이다. 즉, 여기 기어서 한참을 오가야 하는 끔찍한 일이 있고, 그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그 자체로 하루치 일거리다. 그런데 그게 광부에게는 아예 작업의 일부도 아니며, 도시인이 지하철을 타고 날마다 출퇴근을 하듯 부수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부는 그런 식의 출퇴근을 하고, 그 사이에 일곱 시간 반의 무지막지한 노동이 끼여 있다. 나는 막장까지 1.5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흔히 그 거리는 5킬로미터나 되며, 나를 포함해 광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은 결코 그만큼 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을 사람들은 늘 간과하기 쉽다. 우리는 탄광을 생각할 때 깊이와 더위를, 암흑을, 그리고 채벽을 파내는 시커메진 사람을 생각하되, 기어서 몇 킬로미터를 왔다 갔다 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더구나 시간의 문제도 있다. 광부가 일곱 시간 반 단위로 근무 교대를 한다고 하면 별로 긴 것처럼 들리지 않겠지만, 거기다 매일 적어도 한 시간, 보통은 두 시간, 때로는 세 시간에 달하는 ‘여행’ 시간을 더해야 한다. 물론 이 ‘여행’은 법적으로는 작업이 아니며 그래서 광부는 그 대가를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상관없다 해도 그 자체로 노동에 가까운 일이다. 광부들은 그런 것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기 쉽다. 확실히, 그들이 당신이나 내가 느끼는 것하고 똑같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래 왔고, 그만큼 단단한 근육을 갖고 있으며, 너무 놀라워서 섬뜩할 정도로 민첩하게 땅속을 오갈 수 있다. 나는 겨우 비틀비틀 갈 수 있는 곳을 광부는 고개를 숙인 채 크고 활기찬 걸음으로 ‘달리듯’ 간다. 막장에서는 갱도 지주 주변을 개처럼 네 발로 뛰어다니며 일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걸 즐긴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수십 명의 광부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모두 하나같이 ‘여행’이 고역임을 인정했던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자기네끼리 갱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여행’이 언제나 중요한 화젯거리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근무 교대를 하면 일하러 가는 조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조가 항상 이동이 더 빠르다고는 하지만, 광부들은 모두 하루치 고된 노역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각별히 힘들다고 말한다. 그것이 일의 일부고 그들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긴 하되, 그것은 분명 고역이다. 아마도 그건 우리가 하루 일을 하러 가기 전과 마친 후에 어지간한 산을 하나 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갱도를 두세 번쯤 내려가보면 일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감이 잡히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서 탄광 일의 기술적인 면에 대해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는 말을 해두고자 한다. 나는 단지 내가 본 것을 묘사할 뿐이다.) 석탄은 거대한 암반층들 사이에 있는 가느다란 탄층에 있으며, 그래서 그것을 떼어내는 과정은 본질적으로 나폴리아이스크림(초콜릿, 바닐라, 딸기의 세 층으로 이루어진 3색 아이스크림)에서 가운데층을 떠내는 것과 같은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광부들이 곡괭이와 쇠지레로 석탄을 바로 캐내곤 했다. 이는 대단히 더딘 작업이었는데, 본디 상태에 있는 석탄은 거의 암석처럼 단단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동식 석탄 절단기란 것으로 예비 작업을 한다. 이 절단기는 수직이 아니라 수평으로 작동하는 엄청나게 힘 좋은 띠톱으로, 톱니의 길이가 5센티미터가 넘고 두께는 2.5센티미터 또는 5센티미터다. 이 톱은 자체 동력으로 앞뒤로 움직이며, 작동하는 사람이 이리저리 돌려가며 쓴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절단기는 내가 들어본 소리 중에 가장 지독한 소음을 내며 1미터 앞도 볼 수 없고 숨쉬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대단한 탄진을 일으킨다. 작업자는 막장의 채벽을 따라가며 탄층의 밑부분을 절단하되, 수평 방향의 깊이가 1.5미터에서 1.7미터 정도가 되도록 판다. 이 작업이 이루어지면 절단한 깊이까지 석탄을 파내는 일은 비교적 쉬워진다. 그러기 곤란한 데가 있으면 폭약을 써서 탄층을 무르게 만들어줘야 한다. 이 작업은 도로 보수 공사에 쓰이는 드릴보다 좀 작은 전동드릴로 탄층에 일정 간격을 두고 구멍을 뚫고 폭약을 넣고서 점토로 막은 다음, 적당한 모퉁이가 있으면 그 뒤로 피신한 후(20미터는 물러나 있는 게 원칙이다) 전류를 흘려 점화하는 것이다. 이 작업은 석탄을 튀어나오게 하는 게 아니라 무르게 하는 게 목적이다. 물론 폭발이 너무 강한 경우가 종종 있으며, 그럴 때는 석탄이 튀어나올 뿐 아니라 천장이 내려앉기까지 한다.
발파를 마치고 나면 ‘필러’들이 석탄을 굴러뜨려 쪼갠 다음 삽으로 퍼 컨베이어벨트에 담는다. 한번 폭발로 퍼담을 수 있는 석탄은 많게는 20톤 가까이 된다. 컨베이어벨트는 퍼담은 석탄을 광차로 빠르게 실어 나르고, 사람이 광차를 주요 통로로 밀어 계속해서 돌아가는 강철케이블에 연결하면, 케이블이 광차를 승강기로 끌어다준다. 승강기에 실려 지상으로 끌려 올라간 석탄은 체에 한번 걸러지며, 필요하면 씻기기도 한다. 혈암 같은 ‘불순물’은 가능한 한 갱도를 트는 데 쓰인다. 밑에서 쓸 수 없는 것은 전부 지상으로 보내져 처분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삭막한 잿빛 산을 이루는 거대한 ‘탄광 쓰레기 더미’이며, 탄광 지대의 전형적인 풍경이 되는 것이다. 기계로 절단한 깊이까지 석탄을 다 파내고 나면, 막장은 1.5미터 전진한다. 그러면 새로 드러난 천장을 갱도 지주로 받치고, 다음 근무조는 컨베이어벨트를 해체하여 1.5미터 전진시킨 다음 다시 조립을 한다. 되도록이면 절단과 발파와 채탄採炭의 세 작업을 각 근무조가 나누어서 한다. 즉, 절단은 오후 근무조가, 발파는 밤 근무조가(반드시 지켜지는 건 아니지만 다른 작업을 하는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때는 발파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채탄은 아침 근무조가 하는 식이며, 아침 근무는 아침 여섯 시부터 낮 한 시 반까지다.
석탄 캐는 과정을 지켜봤다 해도 잠시 동안만일 터이니, 계산을 좀 해보지 않은 한 ‘필러’가 얼마나 엄청난 과업을 수행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대개 한 사람이 퍼담는 석탄더미의 폭은 4미터쯤 된다. 절단기가 높이 1미터 정도인 탄층을 1.5미터 깊이로 잘라낸다면, 각 사람이 무너뜨리고 쪼개고 실어야 하는 석탄의 양은 5~9세제곱미터쯤 된다. 그렇다면 석탄 1세제곱미터의 무게를 3,500파운드(약 1,600킬로그램) 정도로 잡을 경우, 각 사람이 퍼담는 석탄은 시간당 2톤에 육박한다. 나는 이게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할 만큼 곡괭이질과 삽질을 해본 경험이 있다. 내 정원에서 땅을 팔 때 오후 내내 2톤 분량의 흙을 퍼낸다면, 나는 차 마실 값은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흙은 석탄에 비하면 다루기 쉬운 물질이며, 땅속 300미터 밑 숨 막히는 더위 속에, 숨 쉴 때마다 탄진을 마셔가며, 그것도 무릎으로 기어가며 일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반으로 접고 1.5킬로미터씩 걸을 필요도 없다. 광부의 작업은 나로서는 공중그네를 타거나 그랜드내셔널(지금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국의 유서 깊은 경마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것만큼이나 내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다. 나는 육체노동자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일이 없기를 신께 빈다. 그런가 하면 내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육체노동도 있다. 정 필요하다면 나는 봐줄 만한 거리 청소부가 될 수도 있고, 무능한 정원사가 될 수도 있고, 최악의 농장 인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쓰고 훈련을 받는다 한들, 광부는 될 수가 없다. 그랬다간 몇 주 만에 죽어버리고 말 것이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아마도 우리가 하는 모든 것, 말하자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부터 대서양을 건너는 것까지, 빵을 굽는 것부터 소설을 쓰는 것까지, 모든 게 직간접적으로 석탄을 쓰는 것과 상관이 있다. 평화를 위한 모든 수단에 석탄이 필요하며, 전쟁이 터지면 석탄은 더욱 필요해진다. 혁명기에도 광부는 계속 일하러 가야 한다. 아니면 혁명이 중단될 수밖에 없다. 혁명도 반동도 석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건, 석탄을 파고 퍼담는 작업은 쉬지 않고 계속되어야 한다. 아니면 길어도 몇 주 이상 중지되어서는 안 된다. 히틀러가 거위걸음(흔히 군사 퍼레이드에서 무릎을 쫙쫙 펴고 힘차고 근엄하게 걷는 걸음을 일컬음)으로 행진하기 위해, 교황이 볼셰비키 사상을 지탄하기 위해, 로즈 경기장에 크리켓 관중이 몰리기 위해, 동성애자 시인들이 서로의 등을 긁어주기 위해, 석탄은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그런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석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석탄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좀처럼, 또는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지금 나는 따뜻한 석탄 난로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사월이지만 나에겐 아직도 불이 필요하다. 2주에 한 번 집 문 앞까지 석탄 수레가 오면, 가죽조끼를 입은 남자들이 질긴 자루에 담은 타르 냄새 풍기는 석탄을 실내로 날라와 계단 밑에 있는 석탄 창고에 절거덕 소리를 내며 부려놓는다.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이 석탄과 멀리 있는 탄광에서의 노동을 결부시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그것은 그냥 ‘석탄’, 달리 말해 나에게 있어야 하는 무엇일 뿐이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딱히 어딘지는 모를 어딘가에서 도착하는 검은 물질이며, 지불할 필요가 있다는 것만 빼면 하늘에서 내린 만나(성서 「출애굽기」에서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늘이 내리는 기적의 양)와도 같다. 우리가 영국 북부에서 차를 몰고 가며 도로 밑 수백 미터 지하에서 광부들이 석탄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너무 쉽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당신의 차를 모는 것은 그 광부들인 것이다.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에 있는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탄광의 여건이 지금보다 열악했던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젊을 때 땅속에서 허리에 마구馬具 같은 띠를 차고 두 다리를 사슬로 이은 채, 팔다리로 기고 광차를 끌며 일하던 할머니들이 아직도 더러 살아 있다. 그들은 임신한 상태로도 그런 일을 하곤 했다.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 없이 살기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하는 것이다. 아마도 광부는 다른 누구보다 육체노동자의 전형일 것이다. 그것은 광부의 일이 더없이 끔찍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너무나 필요함에도 우리의 경험과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로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가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잊듯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는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도 자괴감을 느낄 만하다. 그럴 때 우리는 잠시나마 ‘지식인’으로서의, 전반적으로 우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지위를 의심하게 된다. 적어도 지켜보는 동안에는, 우월한 인간이 계속 우월하기 위해서는 광부들이 피땀을 흘려야만 한다는 자각을 똑똑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도 나도 <타임스 문예 부록Times Literary Supplement>(<타임스>의 부록으로 출발했으나 일찌감치(1914) 분리되었다)의 편집인도, 동성애자 시인도 캔터베리 대주교도 아무개 동지도, 『유아를 위한 맑시즘Marxism for Infants』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실로’ 땅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 눈까지 시커메지고 목구멍에 석탄가루가 꽉 찬 상태에서 강철 같은 팔과 복근으로 삽질을 해대는 그들 말이다.
(제2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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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조지 오웰 (Geroge Orwell, 1903 ~ 1950)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er Blair)다. 1903년 6월 25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태어났다. 책에서 말하듯 “하급 상류 중산층”에 속한 그는 영국 사립 최고 명문인 이튼 학교를 마치고는 명문 대학이 아닌 버마로 향한다. 식민 통치기구인 ‘인도 제국 경찰’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 식민지 경찰 활동에 대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영국으로 돌아와 런던과 파리에서 자발적인 부랑자 생활을 하고, 이 체험을 바탕으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을 펴내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나선다.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도 이때부터 쓰기 시작한다. 작가로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오웰은 1936년 1월, 한 진보단체로부터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재하여 책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고, 두 달에 걸쳐 위건, 리버풀, 셰필드, 반즐리 등 랭커셔와 요크셔 지방 일대의 탄광 지대에서 광부의 집이나 노동자들이 묵는 싸구려 하숙집에 머물며 면밀한 조사활동을 한다. 바로 이 취재의 결과물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이다. 같은 해 일어난 스페인 내전을 예의 주시하던 그는 이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주자마자 “파시즘에 맞서 싸우러” 스페인으로 떠났고, 이후 이 전쟁 체험을 『카탈로니아 찬가』(1938)를 통해 전한다. 영국 북부 탄광 지대와 스페인 내전에서의 경험은 조지 오웰의 지향점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이후 『동물농장』(1945)과 『1984』(1949)를 구상하는 밑거름이 된다. 『1984』의 집필 중 폐결핵 판정을 받은 그는 1950년 1월 21일, 마흔여섯 나이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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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한중
전문번역가. 지속가능한 삶에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자연과 생태, 환경과 관련한 책을 주로 번역했다. 옮긴 책으로 『울지 않는 늑대』, 『인간 없는 세상』, 『핸드메이드 라이프』, 『너무 더운 지구』, 『지렁이』, 『지구의 미래로 떠난 여행』, 『강이, 나무가, 꽃이 돼 보라』, 『나무와 숲의 연대기』, 『글쓰기 생각쓰기』, 『안 뜨려는 배』, 『작은 경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