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는 진단을 받은 그 주에 미래를 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냥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포춘 쿠키니 점성술이니 타로 카드니 요양원이니 하는 것들에 도통 관심이 가지 않았다. 날마다 한 걸음씩 다가가는 미래였지만 그것을 보려고 서두르지 않았다. 이날 아침에도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마운트 오번 저택 요양원을 구경하러 갈 호기심과 용기가 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곳으로 갔다.
로비엔 겁먹을 만한 게 없었다. 벽엔 바다 풍경을 담은 수채화가 걸려 있고 바닥엔 낡은 동양 카펫이 깔려 있었으며, 짙은 눈 화장을 한 짧고 검은 머리의 여자가 현관문을 향해 놓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호텔 로비로 착각하기 십상이었지만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풍기고 여행 가방과 안내 직원, 여행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은 손님들이 아니라 입소자들이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자가 물었다.
“아, 네. 여기서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돌보나요?”
“네,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공간이 있지요. 한번 둘러보시겠어요?”
“네.”
앨리스는 여자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갔다.
“부모님 때문에 오셨나요?”
“네.”
앨리스는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는 이곳 입소자들을 닮아 낡고 느려터졌다.
“목걸이 참 예쁘네요.”
여자가 말했다.
“고마워요.”
앨리스는 흉골 위로 손을 가져가 어머니가 물려준 아르누보 스타일 나비 목걸이의 파란 보석알들이 박힌 날개 부분을 어루만졌다. 어머니는 기념일이나 결혼식에 갈 때만 그 목걸이를 했었고 앨리스 또한 특별한 날에만 걸고 다녔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달력엔 공식 행사가 없고 그 목걸이도 너무도 좋았기에 어느 날 청바지와 티셔츠에 그걸 걸어보았다. 그랬더니 완벽하게 어울렸다.
게다가 그 목걸이를 보면 나비가 생각나는 것도 좋았다.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마당의 나비들이 불쌍해서 엉엉 운 적이 있었다. 나비들이 겨우 며칠밖에 못 산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그녀를 달래며 나비들 때문에 슬퍼하지 말라고, 수명이 짧다고 해서 비극적인 건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는 정원의 데이지 꽃밭에서 따스한 햇살 아래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보며 말했다.
“봐, 나비들은 아름다운 삶을 누리잖아.”
앨리스는 그 기억을 되살리는 게 좋았다.
그들은 3층에서 내려 카펫 깔린 긴 복도를 걸어 내려가 아무런 표시도 없는 두 짝짜리 문을 지나 멈춰 섰다. 여자가 뒤에서 자동으로 닫히고 있는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츠하이머 특별 보호소는 보안이 철저해서 암호를 모르면 저 문을 나갈 수 없죠.”
앨리스는 문 옆의 벽에 설치된 숫자판을 보았다. 숫자들이 거꾸로 되어 있었고 순서도 거꾸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왜 숫자들이 저렇게 돼 있죠?”
“아, 입소자들이 암호를 외우지 못하게 만든 거죠.”
앨리스에겐 불필요한 예방 조치로 여겨졌다.
암호를 외울 수 있다면 여기 들어와 살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부모님도 그러신지 모르겠지만 밤에 잠을 못 자고 돌아다니는 건 알츠하이머 환자의 아주 흔한 행동이거든요. 저희 보호소에선 입소자들이 아무 때나 돌아다닐 수 있으면서도 안전이 보장되고 길을 잃을 위험도 없어요. 저흰 밤에 입소들에게 진정제를 투여하거나 방에 가둬놓지 않아요. 그들에게 최대한 자유와 독립성을 주려고 노력하죠. 그것이 입소자들과 가족에게 중요하다는 걸 아니까요.”
분홍색과 초록색 꽃무늬가 있는 실내복 차림의 머리가 하얀 작은 노파가 앨리스에게 다가왔다.
“넌 내 딸이 아냐.”
“네, 죄송해요. 아니에요.”
“내 돈 내놔!”
“이블린, 이분은 돈 안 가져갔어요. 돈은 이블린 방에 있어요. 서랍장 맨 위 칸을 보세요. 거기 둔 것 같으니까.”
노파는 의심과 혐오를 담은 눈으로 앨리스를 쏘아봤지만 관리자의 충고에 따라 꼬질꼬질한 흰색 테리천 슬리퍼를 끌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이블린은 20달러짜리 지폐가 한 장 있는데 누가 훔쳐갈까 봐 계속 감춰두죠. 그리곤 자기가 돈을 어디 감췄는지 잊어버리고 아무한테나 돈을 훔쳐갔다고 해요. 그 돈을 쓰거나 은행에 저금하라고도 해봤지만 말을 안 들어요. 언젠간 자신이 그 돈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릴 거고 그럼 더 이상 안 그러겠죠.”
이블린의 병적인 의심에서 벗어난 그들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복도 끝의 휴게실로 갔다. 휴게실에선 노인들이 원형 테이블에 앉아 점심을 먹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본 앨리스는 그들 대부분이 여자들임을 깨달았다.
“남자는 셋뿐인가요?”
“사실은 서른두 명의 입소자 중 남자는 둘뿐이랍니다. 해럴드는 입소자가 아닌데 매일 와서 아내와 함께 점심을 먹죠.”
남녀가 따로 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두 남자는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여자들과 떨어져 앉아 있었다. 테이블 사이 공간들에는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리고 많은 여자 환자들이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거의 모두가 숱이 줄어가는 흰머리에 움푹 패인 두 눈은 두꺼운 안경알 때문에 확대되어 보였고 먹는 속도도 아주 느렸다. 그들은 서로 어울리거나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해럴드와 그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먹는 소리 외에 들리는 건 한 여자 입소자가 식사를 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뿐이었는데 레코드 바늘이 튀듯 노래의 주제부인 ‘은은한 달빛 아래’만 되풀이됐다. 그녀의 노래에 대해 아무도 항의하거나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은은한 달빛 아래.
“짐작하셨겠지만 여기가 식당 겸 활동실이에요. 입소자들은 매일 이곳에서 같은 시간에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해요. 예측 가능한 일과가 중요하니까요. 이곳에선 볼링, 콩주머니 던지기, 퀴즈 게임, 춤과 음악, 공예 같은 여러 가지 활동들도 이루어져요. 오늘 아침엔 이 멋진 새집을 만들었죠. 그리고 매일 신문을 읽어줘서 바깥소식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은은한.
“저희는 입소자들에게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많이 제공하고 있지요.”
달빛 아래.
“그리고 가족, 친지도 언제든 방문해서 사랑하는 이와 활동에도 함께 참여하고 식사도 할 수 있죠.”
하지만 해럴드 외엔 사랑하는 이를 찾아온 가족과 친지는 보이지 않았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손자 손녀도, 친구도 없었다.
“또한 입소자들이 지속적인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매우 숙련된 의료진까지 갖추고 있고요.”
은은한 달빛 아래.
“여기 예순 살이 안 된 사람도 있나요?”
“오, 아뇨. 아마 제일 젊은 분이 일흔 살일 거예요. 평균 연령은 여든둘, 여든셋 정도고요. 예순 살 이하의 알츠하이머 환자는 보기 힘들죠.”
지금 당신 앞에 있잖아요.
은은한 달빛 아래.
“여기 들어오면 비용은 얼마나 들죠?”
“나가시는 길에 자료를 다 드리겠지만 1월 기준으로 알츠하이머 특별 보호소는 하루에 285달러씩 받고 있어요.”
앨리스는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해보았다. 1년이면 10만 달러나 되었다. 그렇게 5년, 10년, 20년이면…
“또 질문 있으신가요?”
은은한.
“아뇨, 고마워요.”
앨리스는 안내인을 따라 잠겨진 두 짝짜리 문으로 가서 안내인이 암호를 입력하는 걸 지켜보았다.
0791925.
그녀는 이곳에 들어올 필요가 없었다.
뉴잉글랜드 사람들이 늘 꿈꾸는, 그러나 해마다 실제로 그런 날이 존재하는지 의심하게 되는 신비로운 섭씨 21도의 화창한 봄날이었다. 케임브리지에선 정말이지 여간해선 보기 힘든 날씨였다. 크레용으로 칠한 것 같은 파란 하늘이 펼쳐진, 마침내 외투를 벗어던질 수 있게 된 봄날. 연구실에 틀어박혀 낭비해버리기엔 너무도 소중한 날이었다. 특히 알츠하이머 환자에겐.
앨리스는 하버드 야드에서 남동쪽으로 두 블록을 벗어나 수업을 땡땡이 친 10대 학생의 아찔한 흥분을 느끼며 벤 앤드 제리스로 걸어 들어갔다.
“땅콩버터 3단 아이스크림 주세요. 콘으로요.”
빌어먹을, 난 리피토(콜레스테롤 완화제―옮긴이)를 먹고 있는데.
앨리스는 거대하고 묵직한 아이스크림을 오스카 트로피처럼 받아들고 5달러 지폐를 낸 뒤 거스름돈은 대학 돕기 모금함에 넣고 찰스 강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여러 해 전에 건강을 생각해서 아이스크림 대신 얼린 요구르트를 먹기 시작한 후로 아이스크림 맛이 얼마나 진하고 부드럽고 좋은지 잊고 살아왔다. 앨리스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걸으면서 방금 전에 가본 마운트 오번 저택 요양원에 대해 생각했다. 알츠하이머 환자 특별 보호소에서 이블린과 콩주머니 던지기를 하는 것이 아닌, 그보다 더 나은 계획이 필요했다. 존이 남편도 못 알아보는 딴사람이 되어버린 아내의 생존과 안전을 위해 막대한 거금을 쏟아붓도록 만들 순 없었다. 앨리스는 감정적, 재정적인 부담이 생존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들 때까지 살아 있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실수를 저지르고 그것들을 만회하기 위해 버둥거리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자신의 아이큐가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평균 아이큐를 지닌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물론 목숨을 끊는 이들도 있지만 그건 아이큐가 아닌 다른 문제 때문이다.
기억력 손상이 점점 심해지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뇌는 여전히 무수한 기능들을 수행해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만 해도 아이스크림이 콘이나 손으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돌리면서 핥는 기술을 구사하고 있었는데, 그 기술은 머릿속에서 어렸을 때 익힌 자전거 타는 법이나 신발 끈 묶는 법 근처에 저장되었다가 필요할 때 자동적으로 나오는 듯했다. 그녀는 인도에서 내려서서 차도를 건넜다. 그녀의 운동 피질과 소뇌는 그녀가 넘어지거나 차에 치이지 않고 도로를 건너는 데 필요한 복잡한 수학식들을 성공적으로 풀어냈다. 그녀는 수선화의 달콤한 향기와 코끝을 스치는 길모퉁이 인도 음식점에서 새어나온 카레 냄새도 인식해냈다. 아이스크림을 핥을 때마다 초콜릿과 땅콩버터의 맛도 음미할 수 있었는데, 그건 섹스나 고급 포도주를 즐길 때 작용하는 뇌의 쾌락 경로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이스크림을 먹는 법도, 신발 끈을 묶거나 걷는 법도 잊게 될 것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밀로이드의 축적으로 쾌락 신경이 파괴되어 평소에 좋아하던 것들을 즐길 수 없게 되리라. 어느 시점에 이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리라.
차라리 암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츠하이머를 암으로 바꿀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리라. 앨리스는 그런 생각을 품는 게 부끄럽고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계속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암이라면 적어도 싸울 상대가 있는 것이다. 수술, 방사선 치료, 화학 요법도 있다. 이길 수 있는 확률도 있다. 가족과 하버드 사람들도 용감한 투병에 응원을 보내며 그 과정을 고귀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암과의 싸움에서 패한다고 해도 그들 모두를 알아보며 작별을 고하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알츠하이머는 암과는 전혀 다른 괴물이었다. 그걸 물리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아리셉트와 나멘다를 복용하는 건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대고 시원찮은 물총 두 개를 조준하는 것과 같았다. 존이 임상 실험 중인 약들을 알아보고는 있었지만 신통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약이 나와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 약이 있다면 존이 벌써 닥터 데이비스에게 전화해서 그 약을 쓰겠다고 우겼을 테니까. 현재로선 알츠하이머 환자의 운명은 여든두 살이든 쉰다섯 살이든, 마운트 오번 요양원 입소자든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정교수든 다를 게 없었다. 맹렬한 화염이 모든 걸 태워버릴 것이고 그 화염에서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었다.
암 환자의 대머리와 핑크 리본은 용기와 희망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어눌한 말투와 기억력 감퇴는 정신이 불안정하고 실성이 임박했음을 나타낸다. 암 환자는 주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으나 알츠하이머 환자는 추방자가 된다. 아무리 교육을 잘 받고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라도 정신 질환자에겐 두려움을 느끼며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 앨리스는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피하는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앨리스는 진짜로 알츠하이머에 걸렸고 병을 고칠 가망도 없는 두 가지 약에 의존하고 있으며 알츠하이머를 다른 치유 가능한 병과 바꿀 수도 없는 마당에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시험관 아기 시술이 성공한다면 애나의 아기를 안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리디아가 자랑스러워하는 연극 무대에 선 모습도 보고 싶었다. 톰이 사랑에 빠진 모습도 보고 싶었다. 존과 안식년을 한 번 더 보내고 싶었다. 읽는 능력을 잃기 전에 원 없이 책을 읽고 싶었다.
앨리스는 방금 든 생각들에 놀라며 실소했다. 하고 싶은 일들의 목록에 언어학이나 강의, 하버드와 관련된 건 하나도 없었다. 앨리스는 마지막 한 입 남은 아이스크림콘을 입에 넣었다. 그녀는 앞으로도 이런 따스하고 화창한 봄날과 아이스크림을 더 즐기고 싶었다.
그리고 병의 고통이 아이스크림의 쾌락을 넘어서면 죽고 싶었다. 그 두 곡선이 교차하는 시점에 그걸 인식할 정신이 남아 있을까? 앨리스는 미래의 자신이 이 계획을 기억하고 실행에 옮길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존이나 자식들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가족들에게 그런 멍에까지 씌우고 싶진 않았다.
앨리스는 지금 계획해둔 자살을 미래의 자신이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만들 대책이 필요했다. 날마다 스스로를 시험할 간단한 테스트를 마련해야 했다. 그녀는 닥터 데이비스와 신경심리학자가 했던 질문들을 생각했다. 지난 12월부터 이미 대답할 수 없게 된 질문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들은 지적인 탁월함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그녀는 단기 기억력에 심각한 결함을 안고도 기꺼이 삶을 이어가고 싶었다.
앨리스는 리디아가 생일 선물로 사준 하늘색 애나 윌리엄 가방에서 블랙베리를 꺼냈다. 그녀는 날마다 그 가방을 오른쪽 엉덩이에 닿도록 왼쪽 어깨에 둘러메고 다녔다. 그 가방은 백금 결혼반지와 조깅용 손목시계처럼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장신구가 되었다. 게다가 나비 목걸이와도 잘 어울렸다. 가방 속엔 휴대전화와 블랙베리, 열쇠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잠잘 때만 몸에서 떼어놓았다.
앨리스는 블랙베리 일정표에 이렇게 입력했다.
앨리스, 다음 질문들에 답할 것.
1. 지금은 몇 월인가?
2. 어디에 살고 있는가?
3. 연구실은 어디 있나?
4. 애나의 생일은 언제인가?
5. 자녀가 몇 명인가?
위 질문들 중 하나라도 답할 수 없다면 컴퓨터의 ‘나비’ 파일을 열어 즉각 거기 적힌 지시 사항에 따를 것.
앨리스는 그 메시지가 매일 오전 8시에 진동과 함께 나타나도록 무기한으로 알람을 설정했다. 그녀는 이 방법에는 문제의 소지가 많으며 바보가 되면 실행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실행을 못할 정도로 바보가 되기 전에 ‘나비’ 파일을 열게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앨리스는 분명 지각일 거라고 걱정하며 뛰다시피 강의실로 갔지만 도착해보니 아직 강의 시작 전이었다. 왼쪽 뒤에서 네 번째 줄 복도 자리에 앉았다. 학생 몇 명이 드문드문 뒷문으로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미 와서 앉아 있었다. 앨리스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10시 5분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도 마찬가지였다. 매우 의외의 일이었다. 앨리스는 분주히 움직였다. 그녀는 강의 계획표를 살펴보고 지난 시간에 필기한 내용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오늘 남은 시간에 할 일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실험실
세미나
달리기
기말 시험 공부
10시 10분이 되었다. 앨리스는 <마이 샤로나> 라는 노래에 맞춰 펜을 톡톡 쳤다.
학생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트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교과서를 휙휙 넘기다 덮고, 노트북을 켠 뒤 클릭을 하거나 자판을 두드렸다.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기도 했다. 부스럭거리며 초콜릿 바, 칩, 그 밖의 다양한 과자들을 까서 먹기도 했다. 펜 뚜껑이나 손톱을 깨물기도 했다. 상체를 돌리고 뒤를 보거나 다른 줄에 앉은 친구와 얘기하려고 몸을 기울이거나 눈썹을 치켜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속닥거리고 킥킥거리기도 했다.
“객원 강의인가 봐.”
앨리스보다 두 줄 뒤에 앉은 여학생이 말했다.
앨리스는 동기와 감정 강의 계획표를 다시 펼쳤다. ‘5월 4일 화요일`: 스트레스, 무력감, 통제(12~14 단원)’. 객원 강의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강의실의 분위기가 기대감에서 어색한 부조화로 변했다. 학생들은 뜨거운 스토브 위의 옥수수알 같았다. 일단 하나가 터지면 나머지도 그 뒤를 따르겠지만 누가, 그리고 언제 처음으로 터질지 아무도 몰랐다. 하버드 교칙은 학생들이 지각한 교수를 20분까지 기다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강의가 공식적으로 취소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앨리스는 첫 주자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없이 노트를 덮고 펜 뚜껑을 닫고 가방을 챙겼다. 10시 21분. 그 정도면 충분히 기다린 거였다.
앨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서면서 뒷줄에 앉은 여학생 넷을 보았다. 여학생들은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지었는데 용감하게 먼저 일어나 모두를 자유롭게 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는 듯했다. 앨리스는 손목을 들어 반박할 수 없는 증거인 시간을 보였다.
“너희들은 어떤지 몰라도 난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거든.”
앨리스는 계단을 올라가 강의실 뒷문으로 나가며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앨리스는 연구실에 앉아 메모리얼 드라이브를 기어가는 러시아워의 자동차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엉덩이에서 진동이 울렸다. 오전 8시였다. 그녀는 하늘색 가방에서 블랙베리를 꺼냈다.
앨리스, 다음 질문들에 답할 것.
1. 지금은 몇 월인가?
2. 어디에 살고 있는가?
3. 연구실은 어디 있나?
4. 애나의 생일은 언제인가?
5. 자녀가 몇 명인가?
위 질문들 중 하나라도 답할 수 없다면 컴퓨터의 ‘나비’ 파일을 열어 즉각 거기 적힌 지시 사항에 따를 것.
1. 5월
2. 매사추세츠 02138, 케임브리지, 포플러 스트리트 34번지
3. 윌리엄 제임스 홀, 1002호
4. 1976년 9월 14일
5. 셋
(「2004년 5월」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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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리사 제노바 (Lisa Genova)
리사 제노바는 하버드 대학에서 신경학 박사 과정을 밟던 중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알츠하이머를 지켜보는 보호자의 관점이 아닌, 환자의 입장에서 직접 겪는 알츠하이머의 과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자비로 출판한 이 책은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점점 인기를 얻기 시작하여 정식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고 출간 첫 주에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5위를 기록했다. 책의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알츠하이머 환자, 보호자 및 의학 전문가들과 오랜 기간 인터뷰를 거쳐 자료를 모았으며, 이를 계기로 현재 알츠하이머 협회의 온라인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현재 가족과 함께 매사추세츠에서 살며, 차기작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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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민승남
전문 번역가. 역서로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메리언 키스의 『처음 드시는 분들을 위한 초밥』, E. 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잉마르 베리만의 자서전 『마법의 등』, 맥스 애플의 『룸메이트』, 페티 킴의 『아름다운 화해』, 주디스 맥노트의 『내 사랑 휘트니』, 나폴레온 힐의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꿈 나의 인생』,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태양은 가득히』, 『동물 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 『완벽주의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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