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책머리에 l 우키요에의 낯선 매력 속으로
도쿄에 갈 때마다 나는 꼭 간다神田의 고서점 거리와 오타太田 기념 미술관에 간다. 도쿄 하라주쿠原宿에 있는 오타 기념 미술관은 우키요에浮世 소장과 전시로 유명한 곳이다. 2000년 봄, 친구와 함께 처음 일본 구경을 갔을 때 여기서 처음으로 실물 우키요에 판화를 봤다. 그때 전시되었던 우키요에는 19세기 중반 이후에 제작된 것들로, 일본 역사 속의 전투를 묘사한 판화와 서양 미술의 영향을 받은 풍경 판화였다.
사실 그전까지는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나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重 같은 우키요에 대가들의 작품을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같은 책에서 본 것이 거의 전부였다. 모네와 드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되면서 참고도판으로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럽인의 입맛대로 고른 우키요에와 달리 일본 문화의 맥락 안에서 본 우키요에는 현란하다 못해 요사스러웠고, 이러한 매력에 사로잡힌 나는 언젠가 우키요에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리라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것은 화끈한 결심이라기보다는 막연한 희망에 가까웠다. 우키요에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방향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련 자료를 입수하기도 쉽지 않은데다 우키요에의 작품명, 화가의 이름, 지명과 용어는 읽기가 어려웠고 우키요에의 계보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떤 줄기를 잡아야 이 난삽한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까 고민만 하다 딱히 답을 찾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던 중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 이론을 공부하게 되었다. 학위논문의 주제를 결정해야 할 때가 다가오자 나는 덜컥 우키요에를 택했다. 어차피 써야 할 학위논문이라면 지금까지 관심만 지니고 제대로 파헤치지 못했던 주제를 다루어 보자는 심산이었다. 이런 어설픈 생각으로 뛰어들었으니 논문을 쓰는 과정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우키요에를 다룬 논문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우키요에의 세계를 개괄하거나 그 세계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대신, 서구 미술과 주고받은 영향이 부각되는 ‘말기末期 우키요에’를 다루었다. 우키요에의 ‘중심’은 부담스러웠던 터라 외곽에서 접근했던 것인데 이 또한 적확한 판단이 아니었다. 외곽에서 돌아 들어가든 중심으로 파고들든 계보를 피해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나는 한숨으로 대신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숙한 논문을 끝내고 나니 우키요에의 지형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만약 학위논문을 정해야 했을 때 스스로의 역량과 여건에 맞춰 쓰겠다는 ‘적절한’ 판단을 했더라면 지금처럼 우키요에에 대한 책을 쓴다는 건 상상도 못했을 테니, 지난날의 무모함과 미숙함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노릇이다.
서구인이 우키요에에 대해 열광 내지는 친근감을 품어온 것과는 달리 한국인에게 우키요에는 여전히 낯선 영역이다. 그래서인지 그동안 한국에는 우키요에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차에 수년 전부터 우키요에 연구의 권위자가 쓴 입문서를 번역한 책이 나왔고, 우키요에에 일본의 전통 시詩 형식인 하이쿠俳句를 곁들인 책도 나왔다. 그렇다면 이제 이들 저작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우키요에의 풍성하고 입체적인 면모를 소개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키요에를 설명하자면 에도의 도시 문화를 먼저 설명해야 하지만 거꾸로 우키요에가 에도의 도시 문화를 소개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기도 한다. 우키요에가 당시 서민들의 요구에 부응해 에도의 습속과 취향을 풍성하고도 예리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전통 예술의 산물이라면 어느 것이나 그렇겠지만 우키요에를 둘러싼 연구와 담론에는 일본 문화의 고유한 맥락과 관련된 번쇄한 요소가 가득하다. 일본인들에게 우키요에와 에도 문화의 결에 스민 갖가지 뉘앙스들은 소중한 것이겠지만 한국의 독자에게 이는 우키요에를 더욱 낯설게 만드는 요소이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받아들이기 쉬운 형태로 우키요에의 세계를 소개할 수 있을까? 책을 쓰는 내내 이 문제에 골몰했다.
나는 우키요에와 에도 문화가 지닌 특수성에 침잠하기보다는 일단은 봉건시대의 한 도시가 빚어낸 문화적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했고, 그러면서도 우키요에의 다면적인 성격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결국 우키요에라는 장르 자체가 지닌 성격을 고찰한 장과 우키요에의 하부 장르를 소개하는 장을 혼합하여 글을 엮었다.
이를테면 「우키요에 속 미인」 「우키요에 풍경화」 등은 우키요에를 장르에 따라 구분한 장章이고, 「무서운 이야기, 기괴한 그림」은 수많은 우키요에 성격 중 하나를 다룬 장이다. 또, 「농염한 그림」이라는 장에서는 춘화春畵 장르를 소개하면서 우키요에만의 독특한 조형적 장치를 살펴보기도 했다.
우키요에는 고급 예술이자 값싼 정보매체였다. 또, 우키요에의 형식은 시기에 따라 발전하고 쇠퇴하며 어지러울 정도로 모습을 바꿔왔다. 우키요에는 깔끔하고 단정하면서도 현란하다. 관능적이며 유치하고 저속하면서도 탁월하고 로맨틱하다. 거기에 경쾌함과 기괴함까지 갖춘, 회고적이고 비장한 장르이다. 요컨대 우키요에는 팔색조八色鳥 같다. 이 책 또한 독자 여러분에게 팔색조 같은 책이었으면 좋겠다.
一. 에도를 담은 그림
에도 시대의 시작
우키요에浮世는 ‘에도에江戶’ 즉 ‘에도 그림’이라고 불리곤 했다. 그 별명대로 우키요에는 에도江戶 시대1603~1867에 ‘에도’에서 제작된 풍속화이다. 에도는 일본의 수도였던 옛 도쿄東京를 가리키는 말이면서 동시에 에도가 일본의 수도였던 시대 자체를 가리킨다. 에도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한꺼번에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키요에 또한 에도라는 어휘에 시·공간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우키요에의 연원은 에도 시대 이전의 전통적인 회화, 풍속화 형식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우키요에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아는 모습으로 정착된 것은 에도 시대가 개막한 이후이다. 같은 시기에 교토京都와 오사카大阪 등지에서도 에도의 우키요에와 비슷한 그림과 판화가 제작되었지만 이는 부분적이고 예외적인 현상이다.
우키요에는 에도라는 이름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면서 함께 쇠멸했다. 물론 에도 시대가 막을 내린 지 한참 지난 오늘날에도 전통적인 제작 방식을 계승해서 우키요에를 만드는 공방이 있지만, 오늘날 우키요에의 존재 방식은 에도 시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키요에는 일본의 도시 문명이 낳은 산물이자 에도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형성되고 발전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에도는 계획도시였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수도라는 점에서 미국의 워싱턴과 비슷하다. 처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에도를 거점으로 삼은 건 1590년의 일이다. 당시 일본을 지배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1536~98가 외딴 시골 마을에 불과한 그곳에 자리 잡을 것을 명했던 것이다. 히데요시를 뒤이어 일본을 지배하게 된 이에야스는 ‘쇼군?軍’의 자리에 올라 1603년 에도에 ‘바쿠후幕府’(사무라이 계급으로 구성된 관료 기구)를 설치했는데, 이를 떠받치기 위해 상공업자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은 ‘조닌칼人’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지금의 도쿄와는 달리 당시의 에도는 바다에 면해 있었기에 조닌의 거주지는 바다를 메워 만든 땅 위에 지어졌다. 몇 단계에 걸쳐 진행된 간척의 결과 지금의 긴자金座, 니혼바시日本橋, 시나가와品川 등의 지역이 형성되었다.[1-1]
[1-1] 하세가와 셋탄 그림, 『에도 명소 도회』중「니혼바시」, 서적 삽화, 1834년, 쇼와여자대학 도서관
에도가 일본의 중심 도시가 된 뒤로도 덴노天皇,천황는 교토에 머물렀기에 명목상의 수도는 여전히 교토였고, 갓 태어난 에도는 문화적으로 황무지와 다를 바 없었다. 에도 사람들은 교토에 대해 문화적 열등감을 느끼는 한편 쇼군이 직접 다스리는 땅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품기도 했다. 신흥도시이기 때문에 에도 사람들은 축적된 전통의 무게에 짓눌릴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자유로운 분위기를 향유했다. 또한, 조닌들은 지배계급이었던 사무라이들과는 다른 특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기왕이면 즐겁고 신나게!
우키요에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으면 ‘부세회’가 된다. 즉 ‘부세’를 그린 그림이다. 애초에는 ‘부세浮世’를 ‘우세憂世’라고 썼는데, 말 그대로 근심스러운 세상이라는 뜻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의 극락정토와 반대되는 슬프고 끔찍스러운 현실을 의미했다. 끊임없는 전란과 격변 속에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던 민초들에게 현실은 하루라도 빨리 떨쳐버려야 좋을 것이었다. 그런데 무로마치室町 시대1338~1573가 저물 무렵 전란이 잦아들고 사회가 안정되자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리고 에도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향락적인 풍조가 확산되었다. 현세가 부질없고 고통스러운 찰나일 뿐이라면, 즐겁고 신나게 사는 게 좋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확산되면서 ‘우세’는 ‘부세’로 바뀌었다. 나이든 이들이 이따금 쓰는 말을 빌려 ‘부세’를 ‘뜬구름 같은 세상’이라고 옮겨 놓으면 본래 의미를 더듬어 볼 수 있겠다. 몇몇 번역자들은 ‘우세’를 ‘슬픈 세상’, ‘부세’를 ‘뜬세상’이라고 옮기기도 한다. 현대 일본어에서는 신이 나서 마음이 들뜬 상태, 설렘, 두근거림 등을 ‘우키우키浮き浮き’라고 한다.
에도 시대의 스타 브로마이드
에도 시대에 ‘우키요’는 ‘지금 이 세상’ ‘현대’라는 의미로 정착되어 별다른 뜻도 없이 온갖 어휘에 덧붙여졌다. 예를 들어 모자는 ‘우키요보시浮世帽子’, 우산은 ‘우키요카사浮世傘’라고 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우키요’의 의미는 자연스레 음란한 향락의 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이를테면 당시의 대중 소설을 ‘우키요조시浮世草子’라고 했는데, 대부분 환락가와 관련된 색정적인 내용이었다. 그래서 우키요조시를 아예 호색본好色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형식을 처음으로 구사한 이는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1642~93라는 문인이었고, 그의 대표작인 『호색일대남好色一代男』1682은 우키요조시라는 장르의 효시인 동시에 ‘우키요에’라는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문헌으로 알려졌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호색으로 일생을 보낸 사내의 이야기이다.
[1-2] 도슈사이 샤라쿠, 「기온의 유녀를 연기하는 3대 사노가와 이치마쓰」, 오오반니시키에, 1794년, 영국박물관, 런던
가부키 배우를 묘사한 우키요에 판화. 남성이 여성을 연기하는 온나가타(女形)의 모습이다. '오오반'은 우키요에 목판화의 크기를 가리키는 단위로 약 39.3X26.3cm이다. '니시키에'는 다색판화를 의미한다.
에도에서 ‘우키요’는 구체적인 공간을 가리키기도 했다. 사람을 미혹하는 가부키歌舞伎 극장과 유곽遊廓이 그것이다. 이 공간들과 절대적으로 결부되었던 우키요에는 발생 초기부터 유흥가나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모습을 주된 소재로 삼았다. 우키요에에는 따로 주문을 받아 만드는 초상화는 거의 없었지만 가부키 배우의 모습을 담은 ‘야쿠샤에役者?’는 활발히 제작되었다.[1-2] 또, 주로 유곽의 유녀遊女들을 그린 미인화는 우키요에 전체를 대표할 정도로 많았다.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가부키 배우는 그 시대의 남자 연예인이었고, 유녀들은 여자 연예인이었던 셈이다. 일반인에게 이들을 묘사한 우키요에 판화는 요즘으로 치면 브로마이드와 같았다. 저렴한 판화로 선망하는 연예인의 모습을 간직하며 즐길 수 있다니, 사진도 텔레비전도 없던 당시 서민들에게 우키요에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1-3]
[1-3] 우타가와 구니시다, 「스모 시합」, 1846년, 쇼와여자대학교
생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그림
우키요에는 통치자와 지배계급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후원한 귀족 예술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민간 예술이다. 당시 일본의 사무라이 계급은 가노파狩野派의 그림을 최고로 여겼다. 가노 마사노부狩野正信, 1434~1530를 시조로 하는 가노파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에도 시대 내내 쇼군의 어용화가로 활약했던 유파이다. 가노파의 회화는 중국의 원체화풍* 회화와 일본의 장식적인 회화를 절충한 화풍으로 속세를 벗어난 이상향을 묘사했다.[1-4] 반면, 조닌들이 좋아했던 우키요에는 공식적인 예술이 아니었고, 가노파 회화와는 거리가 먼, 현실 세계의 향락을 담은 것이었다.
[1-4] 가노 에이토쿠, 「회도 병풍」, 종이에 금지와 담채, 모모야마 시대(1574~1600), 도쿄 국립박물관
* 원체화풍ㅣ포괄적으로는 중국 궁정의 화가들이 구사한 회화 양식을 가리킨다. 대체로 사실적이고 정교한 묘사와 전통적인 격법(格法)을 중시해서 화가의 개성과 정신을 표출하는 문인화(文人畵)와 상반되는 개념으로 본다. 실제로 '원체화'라 하면 '남송(南宋)원체화'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고 무로마치 시대 이후의 일본 회화에 영향을 끼친 것도 남송원체화이다.
당시에 우키요에는 고상한 예술품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우키요에 중에서도 유명한 우키요에 화가들이 직접 붓으로 그린 육필화肉筆畵는 다이묘大名*나 부유한 상인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고가품이었지만, 양적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우키요에 판화는 질과 쓰임새가 천차만별이었다. 조닌이 차분하게 감상하려고 구입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때그때의 생활과 유흥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즘의 신문·잡지·그림책·만화책·포스터·브로마이드·전단지 따위처럼 일상 소모품으로 대량생산되었기에 당장의 쓰임새를 충족시키고 나면 휴지 취급을 받았다.
조닌들은 우키요에에서 유곽과 가부키 극장 등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여행에 필요한 정보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중요한 도로변 풍경이나 에도 안팎의 유명한 지역을 담은 우키요에를 보는 것으로 여행을 대신할 수도 있었다.[1-5]
[1-5] 우타가와 히로시게, 『도카이도 53역참』중「아카사카」, 오오반니키시에, 1833~34년
여관에서 씻고 쉬면서 밥상을 받는 여행객들, 손님을 받기 위해 화장하는 유녀 등이 묘사되어 있다.
* 다이묘ㅣ무사 계급 내에서도 넓은 영지와 큰 권력을 지닌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가문으로부터 1만 석 이상의 영지를 부여받은 무사들을 가리켯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까지 매해 11월 말 즈음이 되면 서울 명동의 옛중국대사관 근처 책방과 잡화점에는 다음 해 달력이 잔뜩 걸렸다. 고궁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여성이 부채를 들고 서 있는 달력이 있는가 하면, 세계 여러 나라의 풍경 사진을 담은 달력, 수영복을 입은 여성이 담긴 달력, 길에서 보기에는 민망할 지경으로 죄다 벗은 여성의 사진이 담긴 달력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달력을 사는 진짜 목적은 날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벽에 걸어 놓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품격이나 체면에 대한 고려 없이 대중이 좋아할 것이라면 뭐든지 소재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는 과거 우키요에와 위상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우키요에의 구실은 이런 정도에 머물지는 않았다. 화려하고 예쁘장했기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에도를 방문했다가 돌아갈 때 우키요에를 기념품으로 사 가곤 했다. 오늘날 그림엽서와 흡사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 우키요에 중에서도 당시의 유명한 유녀들을 모델로 삼아 제작된 미인화가 널리 유행했는데, 미인화 속 유녀들의 머리 모양과 복색은 일반 여성 사이에서도 금세 유행했고, 미인화에 등장하는 화장품, 상점 등도 주목 받았다. 요즘으로 따지면 패션 사진이나 광고 사진과 같은 것이다.[1-6]
[1-6] 게이사이 에이센, 「백분을 바르는 게이샤」, 1815~42년경
한편, 은밀한 욕구에 부응하는 우키요에 춘화도 꾸준히 만들어졌다. 우키요에에서 춘화는 서적에 들어가는 삽화의 형태로 제작·유통되었다. 이것은 19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온 한국 남성들이 기억 속에서 떠올리곤 하는 속칭 ‘빨간책’에 해당한다. 하지만 춘화 서적의 기술적·미학적 완성도는 ‘빨간책’을 훌쩍 뛰어넘는다.
이밖에도 아이들을 위한 완구[1-7], 갖가지 실용적인 지식이나 신기한 사물을 담은 교재 등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 시각 문화의 중추를 이루었다.
[1-7] 우타가와 도요히사, 「종이접기-소방대」, 1804~18년경, 후쿠오카시 박물관
바다를 건넌 우키요에
이렇듯 우키요에는 고급 예술과 상업매체로서의 성격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에 일본이 개항을 하고 서양의 근대 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우키요에는 실용적인 역할을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판화는 단 한 점만 존재하는 회화에 비해 다량으로 제작할 수 있고 비교적 싼 값에 판매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낮은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원래 일본에서 판화의 입지는 회화에 견주어 결코 낮지 않았고 종종 회화보다 좋은 대접을 받았다. 그런데 개항과 근대화를 맞아 회화를 정점으로 삼은 서구의 미술 제도가 일본에 자리 잡게 되면서 판화는 회화보다 낮은 수준의 장르로 취급받게 되었고, 신속하게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는 서구의 인쇄 매체에 대적할 수 없어서 정보 매체로서의 역할까지 잃게 되었다. 결국 우키요에는 방향타를 잃고 침몰했다.
한편, 우키요에는 에도 시대 말부터 일본 밖으로 대량 유출되었다. 우키요에가 일회용 소모품에 가깝게 여겨졌기 때문에 쉽게 나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일본의 미술품은 유럽의 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자포니슴Japonisme’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키요에는 자포니슴의 중심이었다. 우키요에의 대담하고 파격적인 구도와 강렬한 색채는 유럽, 특히 프랑스의 미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서 인상주의 미술이 성립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 내에서 쇠퇴와 몰락을 맞은 우키요에가 비슷한 시기에 일본 밖에서는 열광의 대상이 되면서 새로운 입지를 구축했으니 실로 아이로니컬한 노릇이다. 이후로 줄곧 우키요에는 일본을 대표하는 미술 장르로 여겨졌고, 일본 미술뿐 아니라 일본 문화 전체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었다.
아시카가 가문이 일본을 지배하던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 후반까지를 무로마치 시대라고 하는데, 이 무로마치 시대의 마지막 1백여 년은 전란과 무력투쟁으로 점철되었던 터라 센고쿠쟁뱉 시대라고 부른다. 오다 노부나가1534~82가 일본의 통일에 거의 다가섰지만 부하에게 배신당해 자결했고,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널리 알려진 대로 조선을 침략했다가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자 그때까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에게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참을 인忍 자 하나로 때를 기다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면에 나섰다. 이에야스는 이시다 미쓰나리1563~1600가 이끄는 세력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격파하고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쒔軍’, 즉 ‘쇼군’이라 불리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1603년 에도에 바쿠후를 설립했다. 보통 이를 에도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머리말,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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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이연식
학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예술전문사 과정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다. 일본 우키요에浮世繪와 양풍화洋風畵에 대한 논문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미술영화 거들떠보고서』, 『위작과 도난의 미술사』가 있고, 『무서운 그림』, 『맛있는 그림』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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