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프롤로그 l 사랑해, 북촌
나는 올해로써 10년째 북촌에 살고 있다. 북촌은 작은 동네지만 골목에 따라 매일매일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지도를 들고 북촌을 찾아오는 외국인이나, 아이들을 앞세우고 북촌의 박물관을 순례하는 젊은 엄마들, 세련된 옷차림의 젊은이들 모두 서너 시간 둘러보는 것으로 북촌 순례를 마칠 테지만, 나는 종일이라도 북촌의 여러 골목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일례로 나는, 내가 일하는 인사동 사무실에서 지금 살고 있는 북촌 서향집까지 날마다 다른 골목을 택해 걷는다.
그런 내게 어느 날, 오랫동안 알아온 후배가 북촌에 관한 책을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북촌을 나만큼 잘 알고 나만큼 사랑하는 이는 없을 거라 자신했기에 쉽게 그러마 했다. 그러나 원고를 쓰면서 북촌의 속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구나, 나보다 더 북촌을 사랑하는 이가 많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1부에서는 북촌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와 함께 북촌에서 내가 즐겨 찾는 곳들에 대한 이야기와 감상을 삶과 더불어 풀어내고자 했다. 2부는 한마디로 북촌의 길들을 따라가보는 북촌 기행이다. 1750년의 도성도, 1892년의 수전전도 등 옛 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비교해보면 계동길, 삼청동길, 창덕궁길 등이 옛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을 비롯한 북촌의 아홉 개 길에 숨어 있는 명소들을 꼼꼼하게 정리했다. 그중 북촌길은 동에서 서로, 나머지 길들은 율곡로에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소개했다. 안내한 순서대로 따라가면 가지 많은 북촌 골목에서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단, 북촌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가게가 들어서는 곳이라는 점을 감안해주길 바란다. 3부에는 내가 걸어서 다니기를 즐겨 하는 북촌 주변의 몇몇 곳들에 대한 소개를 덧붙였다.
돌아보니 넋두리와 푸념이 많은 것 같아 아쉽기도 하지만, 10년 동안 북촌에 살면서 나만의 눈으로 보고 느낀 것들을 거짓 없이 진심을 담아 소개했다. 그렇다 보니 나만의 굴절된 시각이 들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 책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북촌에 더 오래 살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애정 또한 남다른 많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더 나은 책으로 보완해주었으면 한다.
정보 위주의 글이 있는가 하면, 미주알고주알 감상문도 있다. 과격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는데 이는 북촌의 보존과 개발 문제로 인한 혼란스러움과 그로 인한 애증이 수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학자도 건축가도 행정가도 아닌 내가 왜 이리 열을 내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때가 있지만 이 모두가 결국 북촌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겠는가.
글을 쓰는 내내 변함없던 것은 북촌에 살며 누리는 즐거움과 행복을 모두와 공유했으면 하는 나의 진심 어린 바람이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바로, 북촌을 거닐어보세요, 북촌에 반할 거예요, 북촌에 홀릴 거예요, 북촌에 살고 싶을 거예요, 이다.
책을 쓰는 동안 나는 신나고 행복했다. 북촌의 역사를 비롯한 많은 것을 공부할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지금 북촌에 사는 이들과 대화할 수 있어 좋았다. 북촌으로 나들이 온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은 즐거웠고, 옆에서 격려해주고 도와준 이들도 많아 매번 감격했다. 나의 부탁에 두말 않고 북촌 사진 찍기에 나선 브라이언과 희경이, 식음을 전폐했을 때 김밥을 손수 싸다준 희선 씨, 그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주신 여고 시절 미술 선생님. 선생님 덕분에 이 책을 쓸 수 있었다. 내 선생님께 이 책을 바친다.
2009년 11월
북촌 서향집에서
옥선희
l 001 l 여기 서울 북촌이라는 곳
- 북촌과 한옥 이야기
1. 북촌의유래
북촌北村, North Village은 원래 청계천 혹은 종로의 윗동네인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일대를 이른다. 언제부터 이곳이 북촌으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나마도 1930년대에 창덕궁과 종묘를 관통하는 율곡로가 뚫리면서 허리가 끊겨, 현재는 율곡로를 경계로 한 북쪽 마을로 한정해 부르고 있다.
북촌이 거론된 사료를 보자면, 조선 시대의 인물 황현黃炫은 『매천야록梅川野錄』에 “한성漢城,서울의 종각 이북은 북촌이라 부르며 노론老論이 주로 살고, 종각 이남인 남촌은 소론少論이하 삼색三色이 섞여 산다”고 썼다. 노론이 순조, 헌종, 철종을 거쳐 고종에 이르기까지 150여 년간 집권했으므로, 북촌은 하급 관리와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살던 남촌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높은 경제력과 문화 수준을 자랑하는 ‘조선의 강남’이 될 수밖에 없었다.
풍수지리의 측면에서 서울의 최상지는 경복궁이고, 다음이 창덕궁이니 두 궁궐의 사이 지역인 북촌은 양기풍수陽氣風水상 최길지最吉地인 셈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도성의 중심인 데다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으로 겨울에 따뜻하고 배수가 잘되었다. 남쪽이 넓게 트였고 안산案山인 남산 전망도 좋아, 정침正寢, 제사지내는곳, 일을보는곳이나 사랑斜廊이 남향을 할 수 있기에 왕족과 왕실 고위관료, 권문세가와 팔도에서 온 양반, 육조 관아에 근무하는 관리, 이들에 딸린 하인들이 모여 살았다.
이런 곳이다 보니 전문 목수에 의해 설계 및 시공되고 건물 배치에도 여유가 있으며, 고급 자재로 지어진 커다란 전통 한옥이 많았다. 한편 옛 도성도를 보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남북 방향으로 크게 네 개의 물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악문화재청은 일제가 경복궁 후원인 백악산의 의미를 낮추기 위해 북악산으로 불렀던 것을, 조선 시대의 각종 고지도 및문헌에 근거해서 백악산으로 부르기로 했다과 응봉을 잇는 능선에서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린 물길이다. 삼청동의 중학천은 경복궁 담장을 따라 수송동과 청진동으로, 안국동 물길은 인사동을 지나 탑골공원 옆으로, 가회동 물길은 계동 물길을 모아 운현궁을 지나 종묘 앞으로, 원서동 물길은 창덕궁을 거쳐 와룡동으로 흘렀다. 바로 이 물길과 골짜기를 따라 북촌 동네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구가 늘고 도시가 개발되면서 물길은 메워졌고, 물길을 따라 형성되었던 마을의 경계도 점차 흐릿해졌다.
정치·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던 북촌은 1920년대 후반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관직을 잃은 북촌 주인들은 저택은 물론 식솔들조차 거느리기 어려워 행랑채 하인과 식객을 내보냈고,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내다 팔았다. 우정국郵政局주변에 골동품 매매 상점이 생겨, 인사동의 기원이 된 것도 이때다.
한 개 필지가 2천7백 평이었던 가회동 11번지를 비롯해 가회동 26번지, 계동 135번지는 1930년대에 건양사와 경성목재 등에 의해 50여 평 내외 필지로 쪼개져,‘ㅁ’자형인 도시형 한옥이 들어섰다. 북촌에서도 한옥이 가장 잘 보존된, 서울시 지정 한옥 보존 지구인 가회동 31번지는 1927년까지 한 개 필지가 5천 평이었지만, 1936년에 대창생업주식회사가 개발에 나서면서, 삼거리 교차 골목에 처마가 잇닿고 이웃과 담을 공유한 다닥다닥 한옥촌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후반 강남 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이사를 가는 북촌 주민이 많아졌고, 자연히 경기고등학교나 휘문고등학교 같은 명문 학교들도 강남으로 떠났다. 1980년대에 마지막으로 창덕여자고등학교가 이주했다. 경기고등학교는 정독도서관으로 바뀌었고 나머지 학교 터에는 현대 빌딩, 헌법재판소와 같은 큰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동안 한옥 정책은 불합리하고 일관성 없는 규제와 허용이 오락가락했고, 그에 따라 한옥이 많이 헐리고 4층짜리 연립주택일명빌라과 빌딩이 난립하게 되었다.
2. 북촌에 대한 여러 논의와 이런저런 생각
가회동 11번지와 31번지, 33번지, 삼청동 35번지, 계동 135번지 등에 남아 있는 한옥은 전통 한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일제 강점기나 한국전쟁 때 지어진 개량 한옥 또는 ‘집장사집’으로 불리는 현재 한옥에는 유리와 함석, 타일 등 새로운 재료가 가미되었고 평면이 단순화, 표준화되었으며, 마당에는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무를 심는 등, 서양식과 일본식이 가미된 변형 한옥이라는 것이다.
한편 전통 한옥의 불편함을 개량하고, 전기와 수돗물을 끌어들인 밀집형 소형 한옥을 근대화로 인한 인구 집중 현상으로 인해 나타난 절충 한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학자도 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없으므로 전통과 민속의 차원이 아닌, 근대 문화의 시각으로 북촌 한옥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리모델링되는 한옥, 즉 시멘트 1층 기단에 유리창을 크게 낸 한옥을 올리는 걸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현재의 리모델링 한옥을 한옥이 아닌 한옥풍 현대 주택으로 보는 건축가도 있고, 한옥의 고유한 특성은 유지하면서 제대로 현대화시킨 한옥으로 보는 이도 있다. 마당의 유무, 자연과의 소통 여부, 영역의 구분과 성격, 외관과 스타일, 목조 건축 여부를 한옥의 조건으로 따져야 한다는 건축가도 있다.
북촌 한옥의 과거와 현재, 보존과 리모델링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안전 문제로 수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우리의 미의식이 한층 성숙할 때까지 휴지기를 가지며 차근차근 공부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북촌을 지켜보노라면 너무나 숨이 가쁘다.
서울시가 시행한‘북촌 가꾸기 사업’은 국내 최초로 유네스코로부터 ‘아시아 태평양 문화유산 보존상’Asia-Pacific Heritage Award 우수상에 선정되었다. 유네스코는“재개발로 멸실 위기에 처해 있던 북촌이 서울시, 북촌 주민, 한옥 전문가의 협력과 재정 지원을 통해, 도심 속 전통 주거지로서 활력을 찾았다. 특히 한옥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와 문화유산 가치를 재조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서울시는 2001년부터 844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북촌 107만6,302제곱미터에서 한옥 보존 사업을 벌였다. 한옥 1,022채 중 300채의 수선을 지원했고,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던 30여 채를 매입해 공방, 게스트하우스 등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이에 힘입어 서울시는 2018년까지 3천7백억 원을 들여 4대문 안팎의 한옥 4천5백 채를 보존한다고 발표했다.
북촌 가꾸기 사업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옥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된 것은 바람직한 일이나, 외지 사람들이 한옥을 사들여 나랏돈으로 내부를 현대식으로 고치고 주말 별장으로 쓰는 바람에, 북촌이 공동화된다는 우려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소개해주신 북촌 터줏대감 복덕방 할아버지는“밤이면 북촌이 더욱 을씨년스럽다”고 하신다. KBS 1TV <다큐멘터리 3일> ‘북촌’ 편을 보니, 북촌에서 오래 사신 할머니들도 “이웃이 자꾸 쫓겨가 친구가 없어진다는 게 가장 힘들다”고 하셨다.
다 쓰러져가는 한옥이 번듯한 한옥으로 거듭나고, 지저분한 연립주택 1층에 근사한 와인 바와 아기자기한 공방이 들어서는 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덕분에 한옥 값이 가파르게 올랐다. 5년 전 4억 원에 사들인 한옥을 보조와 융자를 받아 리모델링한 후, 전통 찻집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이는 지금 집값이 15억 원이라며 자랑이 대단하다.
연립주택에 사는 이들은, 이대로 버티면 북촌 한옥화 계획에 따라 아파트 분양권을 받을 수 있다는‘카더라’통신을 주고받는다. 게다가 북촌에 살고 싶어도 매물이 없고 값도 비싸 발길을 돌리는 이가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니 불평은 복에 겨운 소리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파트 분양권을 받고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싶지는 않다. 북촌의 고즈넉함이 좋아 북촌으로 이사 왔고, 북촌에 산 지 10년밖에 되지 않았으며, 늙어서는 더욱 역사가 깊고 문화 환경이 훌륭한 북촌에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삼청동처럼 주택가까지 상업 시설이 파고들지만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북촌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곳은 원서동 쪽이다. 북촌이라고 다 같은 북촌이 아니어서, 가회동과 계동 쪽은 왕실 후손, 고위 관직을 가진 사대부들이 살았고, 창덕궁 서편 원서동 지역은 궁의 일을 도맡아 하던 하급 관리와 서민들이 주로 살았다. 원서동에서 52년을 살았다는 70대 할머니는 지금도 그렇지만, 시집 온 지 얼마 안 된 옛적에는 더더욱 가회동이나 계동 쪽으로는 걸음도 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이런 지역과 계급 차는 지금도 이어져, 가회로 양옆으로는 번듯한 한옥과 일본식 2층집이 제법 남아 있다. TV 드라마에서도 가회동은 뼈대 있는 집안, 부촌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반듯하게 손질한 한복을 입고 윤기 자르르한 한옥 대청마루에 앉아 거만하게 부채질하던 강부자 씨는, 전화벨이 울리면 두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두 볼을 한껏 부풀리며“네, 가회동입니다” 하지 않던가.
북촌에 산다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북촌이 어디예요?”라거나 “부천이요?”하고 되묻지만, “가회동 살아요”하면 한결같이“아 한옥 많은 부촌이요!”하면서 사뭇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나도 거듭 설명하는 게 귀찮아 북촌 대신 가회동을 끌어다 쓸 때가 많다. 이런 시각에는 물론 북촌에 대한 향수가 가미되어 있다. 북촌을 소개한 몇몇 TV 프로그램을 보면 북촌에는 북촌과 한옥을 사랑하는 천사들만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느 동네와 마찬가지로 북촌에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민과 관광지로 개발해 집값을 올리자고 주장하는 이들이 함께 살고 있다. 나는 물론 주민들의 삶의 질을 최우선으로 하는 조용한 동네로 가꾸어야만 북촌을 좋아하는 이들이 더 많아질 거라고 주장하는 쪽이다.
창덕궁 쪽에서 바라보면, 원서동 언덕배기에 빼곡한 연립주택들이 한옥 마을 이미지와 스카이라인을 망치는 주범으로 보인다. 이쪽에는 번듯한 한옥도 별로 없다. 4층짜리 연립주택들 사이에 비닐로 지붕을 덮고 시멘트를 덕지덕지 바른 작고 허름한 한옥이 기생하듯 애처롭게 버티고 있는 모습을 원서동 골목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높은 공동주택들이 들어설 때 거기에 동참하지 못한, 혹은 그것을 마다했던 이 한옥들의 운명은 앞으로 어찌될런지…
창덕궁 쪽으로 눈을 돌리면 담 안쪽에 2층 양옥 한 채가 보인다. 궐내 적산가옥을 나라에서 사들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던 모양이다. 이 적산가옥에서부터 빨래터까지의 창덕궁길에는, 창덕궁 담을 내 집 담처럼 두르고 있는 2층 가옥이 올망졸망 이어진다. 궁궐 담을 무단 점유하고 있는 이 주택들을 철거해야 한다, 철거할 것이다 등 말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예쁘게 고쳐 쓰기로 결정이 난 것 같다. 한옥, 연립주택 할 것 없이 리모델링하는 경우를 자주 보기 때문이다.
잊을 만하면 북촌 개선 주민 설명회와 학자들의 포럼이 열리곤한다. 북촌의 전신주를 지하로 옮기자는 등의 이야기가 오가고, 또 자치단체장이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매번 새해에는 이렇게 저렇게 달라질 거라는 발표가 있다. 하지만 북촌에 10년 사는 동안 북촌을 북촌 답게 만드는 진짜 변화는 없었다. 연립주택과 일본식 주택을 모두 헐어버리고 한옥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돈이 없다는 이유로 거주자를 강제로 내모는 정책은 분명 옳지 않다. 나는 지금 그대로의 북촌을 우리 후손들도 볼 수 있었으면 한다. 도시형 한옥과 일본식 2층집, 그리고 4층짜리 연립주택의 부조화 속 조화를 워낙 오래 보아온 터라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현재의 북촌 또한 우리 역사이며, 이를 인위적으로 없애고 허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윤보선 고택 같은 전통 한옥들만 남아 있는 북촌과 집장사꾼이 지은 도시형 한옥이나 연립주택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가옥이 뒤섞여 있는 북촌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당연히 지금의 복잡한 북촌을 택하겠다. 그래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북촌은 부자들만의 주거지가 아니었다. 아이 서넛 둔 아비와 어미가 문간방에 세 들어 살던 그 옛날처럼 모두가 어울려 살아야 진짜 북촌다울 것이다.
l 002 l 인왕산 너머로 지는 해를 보다
- 북촌 서향집
서향집은 흔히 향이 나쁘다고들 한다. 그러나 서향집에 사는 나는 이보다 더 좋은 방위가 있을까 싶다. 더구나 나의 집은 인왕산과 북촌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 있어, 놀러 오는 이들마다 “스카이 라운지가 따로 없네”라며 부러워한다. 겨울엔 해가 깊숙이 들어 난방비가 적게 들고, 여름엔 앞뒤 베란다 문을 열어두면 원두막처럼 바람이 놀다 간다.
서향집의 가장 큰 장점은 해질 무렵 풍경에 있다. 인왕산 너머로 기우는 해와 노을을 감상하기 위해, 오후 다섯시 이전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오려고 한다. 혼자 보기 아까워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본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노을이 곱지도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있어도 해의 기울기와 구름의 양이 다르니 이를 접하는 마음의 경사도 다를 수밖에. 하긴 노을이 완전히 사그라질 때까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내가 그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리라. 20대에 서향집에 살았다면 이처럼 마음 깊이, 그리고 오래도록 노을을 감탄하며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아 멋지다!” 하고는 이내 창가를 떠났을 것이다. 나이 들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스러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인왕산과 맞닿을 만큼 낮게 드리운 회색 구름, 파란 하늘에 하얀 선을 길게 남기며 사라지는 비행기, 바람에 미친 듯이 나부끼는 학교 교정의 아름드리 버드나무, 인왕산을 하얗게 뒤덮는 눈발,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리는 빗줄기… 서쪽으로 내달린 베란다에 서면 계절과 날씨와 풍경의 변화를 고스란히 안을 수 있다.
나의 북촌 서향집은 절간처럼 조용하다. 차가 드나들기 힘든 북촌 특유의 골목 안에 위치한 집이기 때문이다. 안국선원의 새벽 종소리와 안동교회 저녁 종소리는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고, 먼 데 뻐꾸기 소리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게 하며, 지붕에 내려앉은 까치들 소리는 아침잠을 쉬이 깨운다.
북촌은 시내 한복판에 있어 공기가 나쁠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북촌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창덕궁과 경복궁 사이에 위치한 곳이라 북촌에 들어서면 가슴이 탁 트인다. 특히 내 집은 창덕궁 가까이 있어, 마을버스에서 내리면 비원의 싸한 숲 공기가 밀려드는 걸 느낄 수 있다. 동네 토박이들은 여름에 시원하고, 대신 봄이 조금 늦게 오는 곳이라고들 한다. 이곳으로 이사 온 후 피부가 고와졌다는 이들도 많다. 잘 보존된 고궁 숲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 쓰윽 걸레질만 하면 청소가 끝나니, 이 역시 북촌에 사는 특혜다.
현대 빌딩 주변에 음식점이 많아서 밥 사 먹기 편하다는 것도 북촌의 좋은 점이다. 전통 궁중음식 전문점이나 20만 원짜리 주문 케이크를 파는 제과점 같은 고가의 음식점에서부터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앉아 생맥주를 마실 수 있는 노상 술집까지, 입맛과 주머니 사정에 따라 뭐든 골라 먹을 수 있다.
한편 운현궁, 북촌한옥문화원, 정독도서관, 선재아트센터, 불교박물관, 일본문화원, 서울아트센터, 수운회관, 조계사가 지척이다 보니 강좌, 전시회, 영화제 등이 끊이질 않는다. 북촌에 대해 전문가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북촌 투어가 열리기도 하는데 가끔씩 참가해 어느 거리, 터 하나도 유래가 없는 곳이 없는 북촌을 공부하기도 한다.
북촌 골목을 걷다보면 여염집이든 상점이든 화초를 내어 기르는 곳이 많아 걸음을 자주 멈추게 된다. 너른 마당을 갖고 살기 힘든 서울, 대단지 아파트 조경을 생각할 수 없는 북촌살이기에, 대문 앞에 화분 몇 개 내놓고 들고나며 물을 주는 심정이 애틋하게 와 닿는다. 어느 골목에서나 와인 상자 가득 채송화가 자라고, 하얀 스티로폼 상자엔 고추와 방울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려 있으며, 함지박 가득 토란이 자라고 있고, 집 현관에 매놓은 줄을 타고 나팔꽃이 올라가는 걸 볼 수 있다. 볕 한 뼘 들까 말까 한 땅만 있어도 배추와 상추를 심는 게 바로 북촌 사람들이다.
집앞에 나와 잠깐씩 볕을 쬐곤 하시는 우리 동네 할머니들은, 옥잠화가 필 무렵부터는 아예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태우거나 이야기를 나누다 해가 설핏해져야 집으로 돌아가신다. 옆집 방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공동주택에 사실망정, 나랏님 계신 궁 가까이에서 평생을 사신 할머니들답게, 입성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신다. 한여름에도 빳빳하게 다린 모시 저고리와 치마 차림으로 나와 계신 곱고 단정하게 늙은 할머니들. 북촌 원주민이신 할머니들은 날마다 자식들 자랑, 쑤시는 무릎 타령을 하신다. 내가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 “다 잊어버렸어”하시면서도 두런두런 이야기 보따리를 펼쳐놓으신다.
“저 아래 오금문요금문曜金門을 이르시는 것은 나인들이 병들거나 죽으면 나오던 문이여. 거기서 오금을 펴지 못한다는 말이 생긴 거여. 병든 나인들이 여기 언덕 나무에 목을 맨 것도 많이 보고 그랬지. 그땐 여기 나무가 많고 길도 질었어.”
왜정 때부터 나인들과 친구처럼 어울려 지냈다는 80대 할머니는 조그만 손목시계의 분침도 정확하게 읽으시고, 귀도 밝으신 게, 얼굴에 검버섯 하나 없으시다. 저녁 드셨냐고 여쭈면“저녁 일찍 먹으면 허깨비가 보여. 나는 아들 며느리 들어오는 아홉시에나 식사 허지”라고 하시며 해가 이울 때까지 밖에 그대로 앉아 계신다.
자주자주 연립주택 앞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물끄러미 화단을 바라보고 계신 할머니께 인사라도 할라치면 반색을 하며 이것저것 물으신다. 심지어 딸이 보낸 편지를 읽어달라거나, 수도 요금 계산을 해달라고도 하신다. 나는 되도록이면, 특히 홀로 계신 할머니께는 반드시 인사를 하고 말벗도 해드리려 한다.
노을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트럭에 수채화 그림을 내건 멋쟁이 야채장수 아저씨가 나타나“야채 1천 원”을 외친다. 평상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들은 트럭 안을 기웃거리다 옥수수 한 덩이를 사들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신다. 등 굽은 할머니가 가파른 계단을 느릿느릿 오르는 뒷모습이야말로 가장 북촌스러운 풍경이지 않나 한다.
통치마 저고리 차려 입은 할머니들이 화장 곱게 하고, 양산 하나씩 쓰고서 나들이 가시는 모습을 나는 아주 좋아한다. 친구랑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할머니들을 볼 때면, 슈퍼에 우유 하나 사러 가더라도 할머니들처럼 입성을 반듯하게 해야지, 라고 다짐한다. 집에서 10분 거리인 정독도서관에 요가를 하러 갈 때도 슬리퍼를 신지 않는다.
왕족처럼 우아하게 차려 입은 일본 관광객을 만났을 때, 내 입성이 초라하면 북촌을 어찌 생각하겠나 싶어서다. 내가 치마를 즐겨 입게 된 것도 북촌에 살면서부터다. 나는 우리 동네 꽃 같은 할머니들과 함께 북촌 서향집에서 우아하게 늙어갈 것이다.
(프롤로그, 1장, 2장 전문)
--------
저자 소개
옥선희
불교미술을 전공했다. 20년 넘게 영화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많을 때는 한 달에 20여 개 매체에 원고를 썼지만, 단 한 번도 원고 마감일을 어겨본 적이 없다. 아침 여섯시 기상, 밤 열시 취침을 어기면 정신이 몽롱하고 몸도 가눌 수 없어 술자리를 꺼린다. 어릴 때 겁 많은 모범생으로, 시험을 못 보거나 야단맞을 짓을 하면 미리 편두통을 앓았다.
종합적인 판단력과 현실 감각이 부족한 대신 하루 종일 영화를 봐도 전혀 질리지 않는 유난한 인내력, 배우의 얼굴과 이름을 기가 막히게 외우는 뛰어난 암기력, 그리고 북촌에서의 10년 삶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이 나라 역사와 다양한 문화가 농축되어 있는 북촌에서의 삶은 영화, 여행, 연애밖에 모르는 철없는 나에게는 축복이었다.
북촌에 사는 동안 장국영, 말론 브란도, 잉마르 헤르히만, 베나지르 부토, 히스 레저,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은 물론 오다기리 조의 결혼 소식도 들어야 했다. 긴긴 외로움과 이별의 고통에 짓눌릴 때면 혼자서 북촌을 걷고 또 걸었다. 과거를 살았던 이들의 흔적과 기록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거리를 거닐며, 한 시대를 호령했으나 이제는 다음 세상으로 떠나버린 이들의 삶을 반추하다보면 어느새 고통은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잘생기고 고매하고 완벽한 르네상스형 인간을 매우 사랑하며,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것 외에도 ‘서울 YMCA’와 ‘미디어세상 열린사람들’에서 방송 비평 일을 하고 ‘한국 영상자료원 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KBS 시청자위원’을 지낸 바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비디오 베스트 렌트 500』, 『꼭 보고 싶은 여성영화 50선』, 『내게 행복을 준 여성영화 53선』과 에세이집 『나 왜 이렇게 행복하지?』 등이 있다.
-------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