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비 냄새를 따라가고
가장 어두운 곳을 향해 갔네.
번개를 따라가고
번개가 내리꽂히는 곳 가까이 갔네.
― 나바호 노래
l 프롤로그 l 말발굽 소리
1846년 8월의 어느 날, 해 뜨기 전 서늘한 시간에 뉴멕시코(멕시코 전쟁의 결과 1848년 미국의 영토로 편입, 1912년에 미국의 47번째 주가 되었다―옮긴이) 라스베이거스 사람들은 잠자리에서 불안하게 몸을 뒤척였다. 미국인들이 오고 있었다. 머나먼 워싱턴 D. C.에서 멕시코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라스베이거스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그링고gringo(에스파냐어를 쓰는 중남미 등에서 백인 미국인을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옮긴이) 부대가 서쪽으로 진격해오고 있으며 며칠이면 도착할 것이라고 정찰대가 알려왔다. 마을 사람들은 완전히 겁에 질렸다. 신부님의 말로는 미국 군대가 들이닥치면 가톨릭을 금지할 것이며, 군인들은 여자들을 강간하고 얼굴에 인두로 U.S.라는 낙인을 찍을 것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교회를 마구간이나 막사로 쓰지 못하게 미리 불 질러 태우는 편이 낫지 않은가를 두고 토론까지 벌였다.
라스베이거스(에스파냐어로 ‘초원’이라는 뜻)는 갈리나스 강에서 끌어온 흙탕물투성이의 수로로 물을 대는, 출렁이는 옥수수 밭 사이로 어도비adobe(굽지 않고 햇볕에 말린 점토 벽돌―옮긴이) 벽돌집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었다. 로키 산맥 남쪽 끝 3만 7,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장엄한 산줄기인 샌그리디크리스토(그리스도의 피) 산맥 언저리에 읍내가 있었다. 에스파냐인 정착지에서 동쪽 끝에 있어 마치 문명의 홀씨가 날아와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 정착지의 중심지인 샌타페이에서 말을 타고 가면 사흘은 걸려야 닿는 동네였다. 읍내 외곽을 따라 뻗은 샌타페이 통로Santa Fe Trail가 라스베이거스를 더 큰 세계와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바로 그 길을 따라 군대가 쳐들어올 것이었다. 동쪽으로 뻗은 평원은 끝이 없어 보였다. 텍사스의 스테이크트플레인스와 그 너머 버펄로들이 사는 초원까지 이어져 있고 그리로 계속 가다 보면 미국 디아블로스diablos, 악마들이 사는 땅이 나왔다.
라스베이거스 출신 사냥꾼 시볼레로cibolero(버펄로 사냥꾼을 가리키는 에스파냐어―옮긴이)들은 영양과 버펄로를 찾아 초원을 달렸다. 마을 사람들은 때로 샌타페이까지 가서 생필품을 사거나 그곳에 있는 군대나 가톨릭 지도자들과 협의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좀처럼 마을을 떠나지 않았고 자기 교회에 충성을 다했다. 신앙심 말고는 가진 것 없는 그들은 진정한 개척자였고, 굳은 의지로 자연에 맞섰지만 아무래도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줄도 알았다. 라스베이거스는 겨우 11년 전에 땅을 불하받아 생긴 새로운 정착지였다. 그러나 이곳에 사는 개척자 가족들 가운데는 까마득히 먼 옛날인 1598년에 뉴멕시코로 건너온 에스파냐 이주민의 후손도 있는 등 주로 토박이들이 많았다.
뉴멕시코 사람들, 특히 라스베이거스 같은 시골 변경에 사는 사람들은 고립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더욱 완고하게 가톨릭 습속을 고수하며 방어적이고 중세적인 삶을 살았다. 코요테를 막기 위해 울타리나 흙담 같은 것을 두르고 그 안에서 조상들이 고대의 산기슭에서 그랬듯이 후추, 옥수수, 콩, 호박을 기르고 양떼를 돌보며 살았다.
뉴멕시코에서 8월은 가장 살기 좋은 때였다. 밤은 서늘하고 아침은 상쾌했다. 낮은 덥고 건조했으며 서쪽에서 몰려온 우렁우렁 울리는 뇌우가 나른한 오후를 촉촉이 적시곤 했다. 밭에는 채소가 풍성했다. 양 떼는 우기에 내린 비로 젖은 구릉에 푸르게 돋아난 풀을 뜯었다. 라스베이거스도 겉으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국인들이 오면 세상이 뒤바뀔 것임을 알았다.
8월 12일 이른 아침 말발굽 소리가 라스베이거스의 불안한 고요를 깨뜨렸다 마을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경계를 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침략자들은 경작지를 가로질러 마을 언저리에 들어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상했던 미국인들이 아니었다. 미국인만큼 두렵지만, 훨씬 익숙한 나바호들의 공격이었다.
나바호들은 전투에 대비해 몸에 색칠을 하고 산에서 물밀 듯 밀려나왔다. 마지막 순간 피를 얼어붙에 하는 공격의 함성을 질러댔는데 마을 사람들이 듣기에는 마치 부엉이 소리 같았다. 아후우우우,, 아후우우우. 나바호 전사들은 안장 없이 말을 타거나 양가죽 안장 위에 앉았고 말총을 엮어 만든 고삐로 말을 몰았다. 곤봉을 휘두르고 사슴 가죽 가운데 가장 두꺼운 엉덩이 가죽 여러 장을 겹쳐 만든 방패를 들었다. 뱀처럼 살금살금 사냥감에 다가가려고 모카신 바닥에는 뱀 그림을 그렸다. 쇠로 된 화살촉에 방울뱀 독과 선인장 줄기 고갱이와 벼락 맞은 나무 숯을 섞은 것을 발랐다. 퓨마 머리 가죽을 벗겨 만든 투구를 쓴 사람도 많았다.
미처 총을 들 사이도 없이 나바호들이 양과 염소를 수백 마리 몰고 가고 말을 여럿 훔치고 어린 양치기 한 명을 죽이고 한 명을 납치해갔다.
약탈자들은 순식간에 나타났듯이 또 순식간에 사라졌다. 희미한 어스름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작은 길을 따라 가축 떼를 몰고 갔으며 이어진 넓은 길을 지나 마침내 가축 떼의 발굽 자국이 선명하게 난 먼지투성이 길로 들어섰다. 서쪽의 나바호 땅으로 굽어지는 길, 훔쳐온 가축을 몰고 가는 말발굽 소리가 그칠 날 없는 길이었다.
1.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정
크리스토퍼 카슨Christopher Carson은 20년 동안 서부를 돌아다니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한 경험을 했다. 겨우 서른여섯 살이었지만 서부 황야에서 안 해본 일이 없고 온갖 데를 다 가보고 온갖 사람을 다 만난 듯했다. 모피 사냥꾼이자 답사가, 탐험가로서 로키 산맥, 그레이트베이슨, 시에라네바다, 윈드리버 산맥, 티턴 산맥, 오리건 해안 지역 등 헤아릴 수 없이 긴 거리를 누볐다. 버펄로 무리를 따라 대평원을 수도 없이 가로질렀다. 태평양도 보았고 멕시코 깊숙이 들어가기도 했으며 영국이 점령한 북서부 지역도 가보았다. 소노란, 치와완, 모하비 사막을 횡단했고 그랜드캐니언을 보았으며 생명의 흔적이 없는 그레이트솔트 호 가장자리에도 서보았다. 동부에 있는 허드슨 강이나 포토맥 강은 비록 보지 못했지만 서부의 중요한 강은 모두 거슬러 봤다. 콜로라도, 플랫, 새크라멘토, 샌와킨, 컬럼비아, 그린, 아칸소, 힐라, 미주리, 파우더, 빅혼, 스네이크, 새먼, 옐로스톤, 리오그란데.
카슨은 천지창조 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미국 서부의 신새벽을 생생하고도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끝없이 여행하면서 주요 부족이나 많은 중요 인사들을 만나고 교류했다. 서부 역사의 전개를 직접 경험했다는 점에서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키트 카슨의 첫인상은 볼품없었다. 그게 그의 신비한 매력이기도 했다. 암팡진 체구와 겸손하고 투박한 태도는 그가 돌아다니며 본 풍광의 장엄함과 재미난 대조를 이루었다. 키는 163센티미터밖에 안 됐고 가는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스쳤다. 각진 턱, 꿰뚫어 보는 듯한 청회색 눈을 지녔고, 입꼬리가 약간 아래로 처진 앙다문 입은 좀 불쾌하다는 듯 일그러져 보였다. 늘 눈을 가늘게 뜬 탓에 두 눈썹 사이에 골이 깊이 패인 주름이 있었다. 이마는 높고 울퉁불퉁하고 앞 머리카락은 뒤로 넘겼다. 왼쪽 귀에 흉터가 있고 오른쪽 어깨에도 흉터가 있는데 둘 다 총에 맞은 자국이었다. 오랜 세월 안장 위에서 생활해온 탓인지 다리는 둥글게 휘어졌고 보기 흉하게 걸었다. 땅 위에서는 어쩐지 불편해 보이는 그의 모습은 노새 위에 있을 때만 편하고 익숙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독특한 습관과 미신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서 있는 사냥감을 겨눌 때 첫 번째 총알이 빗나가면 절대 다시 쏘지 않았다. ‘나쁜 주술’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할 때 금요일은 반드시 피했다. 잡은 짐승을 손질하고 씻을 때도 아주 까다롭게 굴었다. 징조나 조짐 같은 것을 믿었으며,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안 좋은 기분이 들면 자기 본능을 따랐다. 길 위에서 힘겨운 시간을 보낸 탓에 언제나 조심스러웠고 늘 위험에 대비했다. 카슨과 함께 지내본 한 잡지 기고가는 카슨이 잠자리를 준비할 때마다 빼놓지 않는 의식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안장을 늘 베개로 쓰는데 안장이 머리를 보호하는 방책 역할을 했다. 권총은 공이치기를 반만 잠근 채로 그 위에 두고 장총은 언제라도 쏠 수 있게 해서 몸 옆, 담요 아래에 두었다. 키트는 절대 모닥불빛에 자기 모습이 다 드러나도록 하지 않았다.” 이동할 때 카슨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눈은 “끝없이 주변을 살폈다. 아주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 의 태도였다.”
말에서는 미주리 시골구석의 콧소리 나는 억양이 묻어났다. 서부의 지존至尊 같은 이 사람이 미시시피를 가로지른 개척자들의 발원지, 어머니 주州인 미주리 출신이라는 건 아주 지당한 일 같다.
서부에서 카슨은 에스파냐어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익혔다. 나바호, 유트, 코만치, 샤이엔, 아라파호, 크로, 블랙푸트, 쇼쇼니, 파이우트 등의 원주민 언어도 꽤 주워섬겼다. 인디언 수화도 알았고 서부에서 거의 모든 부족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여러 언어를 꿰차고 있었으나 글은 한 자도 몰랐다.
카슨은 산山사람들 사이에서 폭음과 불경함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실상은 성실한 사람이었다. 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개 이빨처럼 깔끔”했다. 포커를 좋아하고 파이프를 피웠지만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고 여자도 밝히지 않았다. 카슨은 타오스 출신의 히스패닉 아가씨 호세파 하라미요와 결혼했다. 늘씬한 몸매와 연갈색 피부에 카슨보다 열여덟 살 어린 호세파는 “가슴을 찢어놓는 도도한 미모”를 지닌 여자라고 그녀에게 반한 오하이오 출신 작가가 묘사했다. “눈빛만으로도, 남자들이 그녀의 웃음을 보기 위해 목숨을 걸 만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호세파는 열다섯 살에 카슨과 결혼했는데 키가 남편보다 약간 더 컸다. 얼굴빛이 검고 맑은 눈망울을 가졌다. 친척 한 사람은 “체구가 좋고 모든 면에서 우아한” 여자라고 말했다. 호세파는 남편을 크리스토발이라고 불렀다. 카슨은 아내에게 무척 헌신적이었으며 처가 식구 마음에 들려고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했다.
이제 결혼까지 했으니 카슨은 산사람 특유의 허세를 전혀 부리지 않았다. “카슨의 태도에는 과격함이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조심스레 행동했다”고 그를 존경하는 어떤 사람이 말했다. 장교 하나가 카슨과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분이 바로 수많은 인디언들을 달리게 만든 유명한 키트 카슨이군요.” 그 말에 카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거의 나를 잡으려고 달린 거였죠.” 카슨은 말을 줄여서 건조하게 했고 희미하게 웃을 때면 함께 눈에는 언뜻 장난기가 비치곤 했다. 재미난 일이 있으면 “짧고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컹컹 짖듯” 내곤 했다. 조용히, 간결히, 신중하게 말했고,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최소한의 단어를 써 힘 있고 느릿느릿하고 정곡을 찌르는” 언어를 구사했다. 한 친구는 카슨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욕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랬다. 크리스토퍼 카슨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누구나 다 그렇게 말했다. 충실하고 정직하고 친절했다. 여러 중요한 정황에서 용감하고도 매력적으로 행동했다. 보답이나 인정을 바라지 않고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준 일도 많았다. 선한 사마리아인이었으며 심지어 영웅과도 같았다.
그런 한편 타고난 살인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입 모아 말하는 그의 다정한 기질과 폭력적 광분을 연결 짓기란 쉽지 않다. 카슨은 그 시대의 서부 사람치고도 (어찌나 거친지 무법자라는 것이 없었던 시대다. 법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척 잔인한 축에 들었고, 한순간에 포악한 성미를 터뜨리곤 했다. 그의 비위를 건드리면 반드시 응징을 당했다. 복수를 성스러운 무엇인 양 추구했고 부족적이라고 할 만큼 집요하고 끈질기게 복수에 매달렸다. 카슨이 속한 부족은 다름 아닌 원한에 사로잡힌 스코틀랜드-아일랜드인이었다.
그의 위업에 대해 들려달라고 하면, 카슨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고 냉정하고 아무 감정 없이 말했다. 살인청부업자의 미적 감각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그는 자기가 싸웠던 전투를 예쁘다고 표현하길 좋아했다. “내가 본 가장 예쁜 싸움이었다”는 식으로. 적을 쫓아가는 것을 “스포츠”라고 말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 강가에 있는 인디언 마을을 선제공격하는 데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학살이라고 불렀다) 카슨은 그 행위를 두고 “완벽한 살육”이라고 일컬었다.
당대의 오싹한 구분 기준에 따르면 카슨은 ‘인디언 학살자’가 아니라 ‘인디언과 싸우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고상한 직업은 아닐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때에는 존경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카슨은 인디언을 미워하지 않았다. 추상적인 인종주의적 혐오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는 커스터도, 셰리든도, 앤드루 잭슨도 아니었다(이들은 모두 미군 장교로 인디언 학살에 참여했다―옮긴이). 카슨은 아메리칸 인디언을 죽였지만 그들과 친구가 되기도 했고 사랑하기도 했으며 땅에 묻기도 하고 결혼하기도 했다. 카슨은 평생 백인보다는 인디언처럼 살았다. 그의 손에 죽은 인디언도 많지만 카슨 스스로 공정하다고 판단한 싸움에서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싸움에서 카슨 자신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일 만큼 헤아릴 수 없이 여러 차례 아찔한 고비를 넘겼다.
카슨의 말을 직접 기록한 것이 거의 없어 인디언이나 당대의 폭력 따위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1850년대 중반에 구술된 자서전(좋게 표현해 ‘얼간이’ 같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 작가가 자서전이 아니라 전기로 바꾸어놓은 책)은 삶의 궤적을 건조하게 읊어놓은 것이라 그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카슨은 모닥불가에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하지만 이 책에는 그의 식견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거드름을 피우지 않는 태도는 신선하다 할 만했다. 허풍선이의 시대에 살았으니 말이다. 당대의 중요한 문제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았던 것 또한 독특하다 하겠다. 카슨은 그때에나 지금에나 미국 서부의 스핑크스 같은 존재다. 눈으로는 모든 것을 보았고 가슴속에는 비밀을 간직했으나, 입은 굳게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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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휴스턴 카슨은 켄터키 주 메디슨카운티의 한 통나무집에서 180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태어났다. 링컨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태어난 주도 같다. 1년 뒤 카슨 가족은 짐을 싸서 켄터키를 떠나 서쪽 미주리 개척지로 갔다. ‘키트’라고 불리던 어린 크리스토퍼는 말안장 위에 앉은 엄마 품에 포대기에 싸인 채로 안겨 앞을 보고 있었다. 카슨 가족은 미주리 강 가까이에 있는 황무지에 자리 잡고 에스파냐 불하지의 일부인 넓은 지역에서 밭을 일구었다. 대니얼 분(1734~1820, 켄터키 개발의 핵심 인물인 서부 개척자―옮긴이)의 아들들이 루이지애나 매입(1803년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거대한 땅을 사들인 일―옮긴이) 이전에 산 땅이었다. 그곳은 우아하지 못하게 ‘분의 소금못Boone’s Lick’이라고 불렸는데, 야생동물이 모여드는 소금 퇴적층이 있었고 분 가족이 그걸 채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분 집안과 카슨 집안은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같이 일하고 교제하고 혼인 관계를 맺었다.
키트는 밝고 푸른 눈을 가진 조용하고 고집 세고 믿을 수 있는 아이였다. 체구는 작았지만 (아마도 두 달 일찍 태어난 탓이리라) 억세고 튼튼했고 손은 크고 날랬다. 키트가 처음으로 가진 장난감은 형이 깎아준 나무총이었다. 키트는 어릴 때부터 명민해서 아버지 린지 카슨은 아들이 법률가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린지 카슨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인 장로교 혈통의 농부로 어린 시절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보냈고 독립전쟁 때 웨이드 햄프턴 장군 밑에서 복무했다. 린지 카슨은 대식구를 거느렸다. 첫 번째 아내가 다섯 아이를 낳았고 키트의 어머니 레베카 로빈슨이 열을 낳았다. 열다섯 명 가운데 키트는 열한 번째였다.
분의 소금못은 개척은 되지 않았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위네바고, 포타와토미, 키카푸 인디언 등이 미주리 강 골짜기 근처에서 여러 세대 전부터 살았고 백인들의 침범에 매우 적대적으로 대응했다. 분의 소금못에 사는 개척민들은 보루 가까이에 오두막을 짓고 모여 살았고 무장한 파수꾼이 밭을 지키고 숲 속 빈터를 계속 순찰했다. 몸이 건장한 남자들은 모두 민병대에 속해 있었다. 오두막마다 총구멍을 만들어놓아 인디언이 공격해올 때 오두막 안에 숨어 방어할 수 있게 해두었다. 키트와 형제들은 늘 언제 납치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학교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갈 때는 늘 붉은 천 조각을 가지고 갔다. 인디언에게 잡히면 그걸 떨어뜨려서 사람들이 우리를 찾으러 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키트의 누이 메리 카슨 루비가 이렇게 회고했다. 루비는 키트가 어릴 때에도 기민한 야경꾼 노릇을 했다고 했다. “밤에 자고 있을 때, 집 밖에서 아주 작은 소리만 들려도 키트의 조그만 갈색 머리가 가장 먼저 달싹였다. 나는 키트가 보초를 서는 날에는 마음을 푹 놓았다.”
키트가 네 살 되던 해 어느 날 린지 카슨은 몇몇 사람들과 같이 땅을 둘러보러 갔다가 매복해 있던 사크와 폭스 인디언에게 공격을 당했다. 그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장총 개머리판이 총에 맞아 부서지고 왼쪽 손가락 두 개도 날아갔다. 같이 갔던 사람 가운데 윌리엄 매클레인은 싸움 중에 쓰러졌는데 인디언들이 그의 심장을 도려내 먹었다고 한다.
이런 사건도 많았지만 미주리에는 이주민과 가깝게 지낸 부족들도 있었다. 협조하고 화평을 유지하는 편이 현실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카슨도 어렸을 때 인디언 아이들과 함께 놀았다. 사크족과 폭스족은 분의 소금못 정착지에 자주 와서 물물교환을 해갔다. 어릴 적부터 카슨은 개척민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몸으로 익혔다. 하나로 뭉뚱그려 말할 수 있는 ‘인디언’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각 부족은 서로 무척이나 달랐고 각 부족을 저마다 다르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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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이나 카슨 가족 같은 이주민이 오기 전에 미주리 강가의 땅은 북아메리카의 여느 곳처럼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경작지를 만들기 위해 개척민들은 나무에 ‘띠’를 두르기도 했다. 나무 밑동을 고리 모양으로 깊게 파서 나무를 말려 죽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울창한 숲을 가장 빨리 없애는 방법은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1818년 어느 날 린지 카슨은 근방에서 숲을 태우다가 불붙은 나무에서 떨어진 커다란 가지에 맞아 죽었다.
그때 키트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다. 이후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린지 카슨의 성장한 자식들은 집을 떠났지만 레베카 카슨 슬하에는 아직 열 명이나 남아 있었다. 카슨네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키트는 학교를 그만두고 밭에서 일하고 집안일을 거들고 식량으로 쓸 짐승을 사냥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나중에 카슨이 회고하기를, “나는 장총을 집었고 글쓰기 책을 집어던졌다.”
잠시 동안 키트는 이웃 사람에게 맡겨졌다. 그러다가 1822년 키트의 어머니가 재혼했고 기가 센 아이는 새아버지에게 반항했다. 열네 살 때부터 키트는 미주리 주 프랭클린의 소규모 정착지에서 데이비드 워크맨이라는 이름난 마구 제조자 밑에서 도제로 일했다. 키트는 답답하고 지루한 작업장 일을 싫어했다. 거의 두 해 동안 날마다 작업대에 앉아 마구를 수선하고 가죽 세공 도구로 가죽 조각을 잘랐다. 프랭클린은 새로 닦인 샌타페이 통로의 동쪽 끝에 있었기 때문에 가게를 찾는 사람은 대부분 덫 사냥꾼이나 상인이었고, 그들로부터 극서부 지방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곧잘 들을 수 있었다. 어린 소년은 이 사향 냄새 나는 가죽과 모피 옷을 입은 먼지투성이의 남자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아이의 상상력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다. 가위, 송곳, 주름 잡는 도구를 들고 칙칙한 작업장에 앉아 있던 키트는 거친 사내들의 도전적인 이야기에 완전히 꽂혀버렸고 샌타페이를 꿈꾸기 시작했다. 샌타페이라는 이름은 새로운 삶과 새로운 땅을 무대로 한 광대하고 무한한 가능성의 삶을 뜻했다.
샌타페이 통로가 닦인 지 겨우 두 해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야망이나 방랑벽이 있는 미주리 젊은이들에게 대평원에서 싹트기 시작한 교역은 저항하기 힘든 로망이었다. 서쪽에서 새로이 돈 냄새가 풍겼다. 이전 여러 세대 동안 에스파냐가 미국과 샌타페이 사이의 교역을 금지했고 뉴멕시코에서 미국인 여행객이 잡혔다 하면 스파이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나 1821년 멕시코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했다. 멕시코시티 정부는 미국 물건에 목말라 했고 무역을 통해 거둘 수 있는 관세를 고대했다. 장막이 걷혔다. 느닷없이 미국인들이 환영받게 되었다. 오래된 주도州都와 서쪽 끝 정착지를 잇는 긴 길에 교통량이 많아졌다. 살던 곳을 떠나 샌타페이로 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새로운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미주리의 익숙한 세계를 떠나는 여행자들을 ‘출정’한다고 말했다. 알려지지 않은 곳을 헤치고 간다는 흥분감을 담은 표현이었다.
내내 들어온 이야기에 매료되고 “다른 땅을 보고자 하는 열망에 들떠” 키트는 도제 계약을 파기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고용주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 일은 숨 막힐 것 같았다. “그 일은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고 카슨은 특유의 건조한 표현으로 줄잡아 말했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 카슨은 워크맨 밑에 계속 있다가는 “나한테 맞지 않는 일을 하며 평생을 살아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말 전문,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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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햄튼 사이즈 (Hampton Sides)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 출신으로, 뉴멕시코에서 아내 앤, 세 명의 아들과 함께 산다. 예일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아웃사이드>의 객원 편집자로 활약하며 각종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2002년 <펜 유에스에이> 논픽션 부문에서 상을 받았고, 같은 해 <반스앤노블>에서 주는 디스커버상을 받았다. 잡지 기고문으로 내셔널 매거진상 특집 기사 부문에 두 차례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저서로는 19세기 미국 서부 시대를 그린 대표작 『피와 천둥의 시대』를 비롯해 『유령 군인』, 『아메리카나』, 『짓밟는 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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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홍한별
영문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권력과 테러』, 『자라지 않는 아이』, 『위대한 생존』, 『오카방고 숲속의 학교』, 『나는 그림으로 생각한다』, 『두 살에서 다섯 살까지』, 『나무소녀』, 『네모난 못』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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