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서문 l 수줍음은 어쩌다 병이 되었나?
우리 어머니는 여섯 살 무렵부터 종종 말馬 흉내를 내셨다. 과도하게 수줍음을 탔던 어린 소녀는 두 발로 서서 낯선 이들과 대화를 하느니 차라리 네 발 짐승이 되어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쪽을 택한 것이다.
당시 런던과 영국 남부에는 독일군의 폭격이 자주 있었다. 딸의 안전을 염려한 외조부모는 어머니를 기숙학교에 보내셨지만 오히려 어머니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기숙학교에 들어간 어머니는 몇 시간씩 밖을 쏘다니기 일쑤였고,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연습실에 틀어박혀 묵묵히 피아노 연주에만 몰두했다.
그런 어머니를 특별히 이상하게 보거나 약물을 써서 기벽을 고쳐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외조부모께서도 어머니가 말 흉내 내는 것을 상상력이 풍부한 딸아이의 엉뚱하기는 해도 사랑스러운 행동으로 받아들이셨고, 언젠가 철이 들 거라며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셨다. 그리고 몇 년 뒤 여전히 피아노 연주를 좋아하지만 결코 평범치 않은 어머니는 런던 노르도프 로빈슨 센터의 학습장애아를 위한 음악 치료사로, 강연자로 이름을 떨치셨다.
어머니 세대에는 수줍음이 많은 사람들에 대해 내성적이고 약간 어줍다고는 생각해도 결코 정신병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어른들은 오히려 숫기 없는 태도가 책을 좋아하고, 신중하고, 고독을 열망하는 성격과 연결된다며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 수줍음은 더 이상 수줍음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수줍음은 병이다. 그 병에는 사회불안증Social Anxiety, 회피성 인격장애Avoidant Personality Disorder(APD)를 비롯해 오늘날 (일부 통계에 따르면 5명 중 거의 1명꼴로) 수백만 인구가 앓고 있다고 알려진 갖가지 거창한 이름들이 따라붙는다. 게다가 1990년대 초 미국식품의약국Food and Drug Administration(이하 FDA)에서 강력한 향정신성 의약품들이 그 같은 증상들을 치료하는 적절한 방법이라는 주장에 동의한 뒤부터, 오늘날 전문가들이 질병으로 간주하는 일상적인 감정들을 치료하고자 수많은 미국인과 영국인이 팍실Paxil, 프로작Prozac, 졸로프트Zoloft 및 기타 알약들을 일상적으로 다량 복용하고 있다.
“약품 표지판들” (커티시 이페메라(Courtesy Ephemera Inc.) 사진 제공, 2001년)
미국인은 지구상에서 가장 사교적인 사람들이라고 한다. 따라서 다수의 미국인이 낯선 이와의 대화를 “너무 무서운” 일로 여기고 대중 앞에서 말을 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한다면 이는 뭔가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무엇도 절망적으로 보지 않는 것, 그 어떤 어려움도 결단과 기지를 바탕으로 넘어서고야 마는 것이 바로 미국인의 기질이다”라고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강조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가 만일 저명한 정신의학자들과 눈부신 수익성을 자랑하는 제약회사들의 말을 믿는다면 타인의 판단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그러한 판단을 유발할 위험이 있는 행위를 꺼리는 이들이 인구의 거의 19퍼센트에 달한다. 왕성한 활력과 수줍음, 그 밖에 이와 유사한 수많은 감정을 중요시하던 시대는 갔다. 오늘날 많은 정신의학자와 의사는 충분히 외향적이지 못한 이들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진단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한 가지 원인은 의사와 정신의학자들이 입증해야 할 책임이 크게 낮아졌다는 데 있다. 그들은 사회불안증이 무대공포증을 비롯해 비판과 당혹감에 대한 끔찍한 두려움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고 말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꼽히는 첫 번째 악몽 시나리오는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기이다. 그리고 손을 떨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뒤를 바짝 뒤쫓고, 공공 화장실 기피는 3위를 차지한다.) 자기 말이 어리석은 소리로 들릴 것에 대한 두려움, 대외적인 자리에서 질문을 받았을 때 쩔쩔맬지 모른다는 두려움, 두말할 나위 없이 지상의 거의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두려움들까지 그 증상의 하나로 꼽는 의사들도 있다. 이러한 고무줄 식 기준을 감안하면 그 ‘질환’이 왜 그토록 광범위하게 진단되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많은 이가 그 진단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는 좀 더 어려운 문제다. 하물며 그 같은 정신장애 판정을 받은 사람은 어떻겠는가.
수줍음이 질병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비밀리에 진행된 위원회의 심의에서 신중하게 이루어졌다. 소수의 미국 정신의학자들이 6년에 걸쳐 회동하면서 매우 이례적이고 새로운 합의에 도달했다. 즉 수줍음을 비롯해 이와 유사한 여러 특징들은 불안 및 성격 장애이며, 이러한 장애들은 심리적 갈등이나 사회적 긴장이 아니라 뇌의 화학적 불균형 혹은 신경전달물질의 결함에서 비롯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1980년을 기점으로 우렁찬 팡파르와 함께 큰 자신감을 획득한 미국정신의학협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는 대폭적인 확대를 거친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 이하 DSM) 제3판(DSM-III)에 ‘사회공포증Social Phobia’과 ‘회피성 인격장애’ 및 이들과 유사한 몇 가지 장애를 추가했다. 이로써 전 세계 정신의학자들의 바이블로 불리는 이 책에서 내성적인 사람들은 냉담함과 둔감함, “혼자 있으려는” 성향 등의 증상을 보이는 경증 정신질환자로 분류되고 만다.
정신의학자들이 이 매뉴얼을 바이블이라고 부르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매뉴얼의 구절들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현실을 상쇄하지는 못한다. 또한 DSM의 영향력은 정신의학계를 훨씬 넘어 보건기관, 사회복지기관, 의료보험사, 법정, 감옥, 대학 등 광대한 네트워크로 확산된다. 문제의 그 정신의학자들은 겨우 몇 년 동안에 자신들의 매뉴얼을 업데이트해 일상의 감정들을 질병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밝혀지는) 그들의 논의에서는 그 같은 중대한 결정들이 지니게 될 지속적인 영향력에 대한 고민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인구의 절반을 정신질환자로 만들게 되는 결과가 시사하는 바에 대해 깊은 고민을 기대하는 이들이라면 아마도 정신의학자들의 근본 관심사가 프로이트 지지자들을 제외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든가 자기편의 활동을 보상하는 방법, 과연 누가 사전에서 용어를 뽑아내 DSM에 게재하는 영예를 차지하는가 등에만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DSM은 인간의 광범위한 경험을 다루면서도 그 경험들 속에서 복잡성을 빼버린 뒤,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의 일상적 운명을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리는 몇 가지 주장으로 단순화했다.
“당신에게 사람 알레르기가 있다고 생각해보라” (콘앤울프, 1999년)
1994년 수십 가지의 새로운 장애를 추가한 DSM 제4판(DSM-IV)이 400쪽이 넘는 분량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100만 부 이상 팔렸다. 얼마간은 보험사들이 보험금 지불을 승인하기 전에 DSM 진단을 요구하고, 변호사가 의뢰인의 혐의를 설명하거나 경감하고자 할 때 DSM을 복음처럼 인용한 덕분이다. 그래도 1990년까지는 DSM과 경쟁관계를 이루는 진단 시스템이 존재했다. 제네바에 본부를 둔 세계보건기구World Health Organization(이하 WHO)가 출간하는 진단 매뉴얼로, 명쾌하지 못한 서술에 기대기보다 정신분석에 더 호의적인 『국제질병분류』(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이하 ICD)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DSM-IV가 출간된 이후 WHO의 진단 시스템은 상당 부분 명성을 잃었다. 반대로 DSM은 전 세계적 권위를 얻었으며, 그 결과 사회불안증 및 관련 장애들과 관련해 과거 국지적인 면에서만 의미가 있던 주장들의 중요성이 크게 높아졌다. 실제로 DSM은 관리의료제도와 제약 산업의 지원을 받아 이 세상이 정신건강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최근 한 정신분석가는 내게 이렇게 한탄했다. “한때 우리는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옮긴이) 환자들을 이렇게 부르지 않았습니까. ‘사내 녀석들’이라고요.”
그토록 수많은 행동이 장애로 간주된다면 과연 그중 한두 가지에 걸리지 않고서 정상적인 삶을 사는 일이 가능한가? 이에 대해 허브 커친스Herb Kutchins와 스튜어트 커크Stuart Kirk는 이렇게 설명한다. “친구들의 문제가 그저 평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에게 미국정신의학협회의 진단 바이블 개발자들은 어쩌면 우리가 정신질환자들에 둘러싸여 사는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진짜 불안한 건 바로 나 자신이 그 정신질환자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미친 사람 만들기』(Making Us Crazy)에서 커친스와 커크는 논쟁이 분분한 정신의학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하면서 당시 은밀히 오간 수백 통의 편지에 대해 간과했는데, 이는 분명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 편지들에 접근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제부터 하고자 하는 일이거니와, 그 같은 논의들을 다시 한 번 끄집어내어 비타협적인 눈으로 실상을 파헤쳐 보면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하다.
DSM 특별위원회가 작업을 마치자 우리의 감정에 새로운 꼬리표를 붙이는 일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미국, 캐나다, 영국 각지의 대학들에서 불안장애를 연구하고 치료하는 클리닉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일부 소수 전문가들은 “극단적인 수줍음”만을 치료하겠다고 했지만, 그러한 특징들과 사회불안장애Social Anxiety Disorder(SAD)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모두 통틀어 하나의 모호한 연속선상에 두는 이들도 있었다. 이에 대해 『사회불안장애 입문』(Social Anxiety Disorder: A Guide)의 공동 저자들은 “수줍음과 사회불안장애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누구나 어느 정도의 사회불안증은 겪을 수 있다”며 놀라우리만큼 태연한 어조로 설명한다. 한 세대 전이었다면 아마 “누구나 어느 정도의 수줍음은 겪을 수 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이 같은 혼란을 배경으로 모호한 데이터를 부풀려 선전하고 새로운 장애들에 대한 인지도를 높여줄 홍보회사들이 고용되었다. 마케팅 부서들은 사회공포증과 일상적 수줍음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두 가지 모두 우리의 심신을 무력화하는 질환으로 각인시키는 데 수천만 달러를 썼다.
눈이 휘둥그레진 각종 대중매체의 건강 뉴스들은 제약회사들이 보내오는 주도면밀한 사운드바이트(sound bites; 언론플레이에 능한 유명 인사들이 즐겨 구사하는 짤막하고 자극적인 코멘트―옮긴이)와 ‘비디오 보도자료들’을 성실히 보도했다. 그중 한 신문기사는 제대로 논조를 잡아 독자들에게 “당신은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게 아니다. 당신은 아프다”라고 경고했다. 심지어 《월스트리트저널》(Wall Street Journal)조차 무릎을 꿇었다. 「우울증제가 중증 수줍음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제하의 기사가 나갔는가 하면, 「알약 한 알 삼키는 일만큼 간단히 무대공포증을 없앨 수도 있다」는 제목의 기사도 있었다. 두 기사의 기본 취지는 프로프라놀롤 같은 베타 차단제의 간헐적 복용이 아니라 팍실 같은 항우울제의 장기 복용이었다.
“복욕량을 늘려주시면 안 될까요? 아직도 감정이 느껴지는데요.” 《뉴요커》컬렉션(2007년 1월 22일), 알렉스 그레고리(Alex Gregory), www.cartoonbank.com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지원군으로 나선 《심리학 투데이》(Psychology Today)는 공포증을 “1990년대의 장애”라고 불렀다. 공포증을 앓는다고 추정되는 미국인의 비율이 3.7퍼센트에서 순식간에 18.7퍼센트까지 치솟으면서 공포증은 “우울장애와 알코올의존증에 이어 세 번째로 일반적인 정신장애”가 되었다. 이러한 추정치를 발표한 논문의 주 저자이자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수줍음 연구를 공격적으로 제안한 머레이 스타인Murray Stein은 텔레비전과 제약회사 팸플릿의 단골 출연자가 되어 미국인들에게 소심증을 적극 치료하라고 강력 권고했다. 하지만 그처럼 강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그의 논문이 단 하나의 연구, 즉 캐나다 도시생활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무작위 전화 조사결과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제 많은 정신의학자와 보건전문가에게 수줍음은 진짜 질환의 한 양상이 되었다. 미국에서만 연간 약 2억 건의 처방이 내려지는 질환으로 규모 면에서는 거의 우울증에 필적하며, 이미 유행병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스탠포드 동문이자 팔로알토에 위치한 수줍음 연구소Shyness Institute의 공동 디렉터인 린 헨더슨Lynne Henderson과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는 수줍음에 대해 “유행병 수준으로 치닫는 양상을 보이는 공중보건의 위협”이라고 경고한다. DSM 실무팀에 속한 정신의학자들은 “이들이 호소하는 증상이 사회공포증이라는 질환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청중 앞에서 말하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수가 “대중 연설 공포증을 다른 사회공포증들과 별개로 분류해야 할” 정도로 증가한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한편 유명 인사들은 (얄궂게도 텔레비전과 잡지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미숙한 사회성을 한탄하면서 동일한 감정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약물치료를 권한다. 그들은 약의 부작용에 대해 침묵하면서 막대한 수수료를 조용히 챙긴다. 토크쇼들은 ‘사람들이 두려운 사람들’ 같은 주제로 프로그램을 내보내며 “운전이나 쇼핑, 심지어 미용실 방문이 불가능할 만큼 끔찍한 두려움을 상상해보라”고 시청자들을 부추긴다. 서점에는 “당혹감으로 죽을 것 같고” 심지어 “평행 우주에 대각선으로 주차한” 것같이 느끼는 이들을 위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자가 치료법으로 넘쳐난다. 모든 책은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결국 똑같은 치료법을 선전한다. “두려움을 직면하고, 능력을 상상하고, 현실적 목표를 세우되 그 강도를 조금씩 높여가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라.”
미국정신건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Mental Health의 대표는 과도한 수줍음은 “우리 시대에 가장 방치된 장애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견해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심각한 정신질환으로부터의 해방을 지연시킨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다. 과소평가된 유행병에 대한 치료가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고 경고하면서, 훨씬 더 많은 이들이 팍실이나 졸로프트 혹은 같은 계열의 다른 항우울제를 복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겨우 8년 사이(1985∼1993)에 수줍음은 서구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정신 진단 중 한 가지로 부풀려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까? 실제로 정신의학자들이 수백만 명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중대한 질병을 수십 년이나 눈감아왔단 말인가? 아니면 영향력 있는 정신의학자들이 제약회사들과 공조해 (또 많은 경우 그들의 후원 아래) 여전히 각 나라의 극소수 사람들만이 겪는 괴로움을 과대 선전했단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두 그룹은 까다롭기는 해도 지극히 일상적인 수줍음 같은 감정 상태를 반드시 약으로 치료해야 할 뇌 속 화학작용의 장애로 묘사했는가? 또 DSM 실무팀이 2011년 DSM 개정판 출간을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는데 앞으로 그 개정판에는 어떤 감정들과 일상적 두려움들이 주요 질환으로 추가될 것인가?
이 책 『만들어진 우울증: 수줍음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를 통해 나는 위와 같은 시급한 문제들에 답하고자 한다. 제일 먼저 가장 풀기 힘든 수수께끼이자 불완전하게 정의된 불안장애인 사회공포증이 어떻게 우리 시대의 정신사회학적 문제가 되었는지 설명할 것이다. 이를 위해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몇 가지 시각들을 빌려오고자 한다. 즉 그러한 장애들을 만들어낸 DSM 특별위원회의 시각, 영리한 마케팅을 통해 그 장애들을 브랜드화한 제약회사들의 시각, DSM 개발자들과 제약업계의 행위를 풍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불안을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는 소설과 영화적 시각, 특히 장장 1세기에 걸쳐 미국 정신의학계에 이어져온 커다란 입장들과 그들 사이의 싸움들을 전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그러한 오랜 투쟁을 거쳐 오늘날 미국 정신의학계의 초석이 된 장애가 바로 불안증인 것이다.
“복욕량을 조절해야 할 것 같아요. 광고 속 사람들처럼 행복하지가 않아요.” 《뉴요커》컬렉선(2001년 8월 6일), 바바라 스몰러(Barbara Smaller), www.cartoonbank.com
이 책 『만들어진 우울증』은 과거 주요 인사들 사이에 오갔지만 발표되지 않은, 따라서 접근이 불가능했던 서신과 문서, 메모 등 미국정신의학협회의 방대한 기록물을 참고해 씌어졌다. 뿐만 아니라 제약회사 임원들 사이에 오고 간 과거 미공개 메모 내용들을 인용하고, 오늘날 가정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약들의 부작용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문서들을 그대로 보여주며, 문제의 주요 정신의학자들과 심도 깊게 인터뷰한 내용들도 싣고 있다.
주요 정신의학자들 중에서 제일 먼저 꼽을 만한 이는 바로 로버트 스피처Robert Spitzer 박사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그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정신의학자로 꼽히며 정신의학계의 총 지형을 재구성한 DSM 특별위원회를 이끌었다.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박사는 내게 동료들이 어떻게 새로운 정신과 문제들을 고안했고, 반대파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이 실제 사용했던 전략들 중 일부를 어떻게 공유했는지 설명했다. 그 밖의 인사들로는 스피처 박사의 라이벌이자 런던의 세계적 공포증 전문가인 아이작 막스Issac Marks가 있다. 그는 ‘사회불안증’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개발했으나 현재는 그와 관련한 많은 논문들을 “광고 책략”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와 의견을 같이하는 데이비드 힐리David Healy 박사는 스미스클라인 비첨SmithKlin Beecham의 팍실 임상 실험과 밀접한 관련을 맺은 주요 약물학자로, 팍실이 때때로 드러내는 파괴적인 부작용들을 알리기 위해 수년간 싸움을 벌여왔다.
스피처 박사와 같은 편을 이루는 정신의학자는 컬럼비아 대학의 정신의학자로 DSM 불안장애소위원회에 소속되어 사회공포증을 “방치된 장애”로 홍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온 마이클 리보위츠Michael Liebowitz, 그리고 리보위츠와 자주 이름을 함께 올리는 공저자이자 템플 대학 성인불안클리닉의 디렉터로서 데이트 불안증에 관한 연구로 알려진 리처드 하임버그Richard Heimberg, 런던 대학 정신과 과장으로 현재 영국 블레어 정부에 사회불안증의 치료법들에 대한 자문을 해주는 데이비드 M. 클라크David M. Clark가 있다.
이들 정보원을 통한 자료와 기록물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작업의 효과는 단순히 제약업계에 대한 또 한 번의 폭로에 머물지 않는다. 물론 공포심을 교묘히 이용하는 제약업계의 구체적인 행태들이 요즘 주요 뉴스거리로 점점 크게 부상하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제약업체가 고용한 워싱턴 로비스트들이 의원들보다도 수가 훨씬 많으며, 2005년 항우울제가 제약업체에 벌어준 돈이 미국 내 매출액만 무려 125억 달러에 이른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이 책 『만들어진 우울증』은 폭로보다는 몇몇 저명한 정신의학자와 그 뒤를 미는 제약업체 스폰서들이 어떻게 가벼운 이상 증상을 주요 질환으로 바꾸어놓았는지 놀라운 내막을 들려준다. 그리고 이제 그 형세가 막 바뀌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많은 저자, 전문가, 회복 중인 환자들은 대중매체에서 홍수처럼 쏟아내는 약 관련 광고에 신물을 느끼고, (‘운전 중 분노’의 완곡어법인 ‘간헐적 폭발장애’ 등) 새롭게 선전하는 신드롬에 곤혹스러워하며, 경멸과 의혹의 시선을 던지고 있다. 〈토요일 밤의 라이브〉(Saturday Night Live)의 코미디 쇼들은 일상적으로 거대 제약회사들의 주장을 조롱한다〔“45세 이상에 게이 남성이라면 당신은 동성애부족증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게이스트로젠(R)이 당신에게 적합할지 주치의에게 물어보시죠”라는 식의 농담이다〕. 이보다 더한 혹평을 쏟아내는 영화와 소설과 환자인권단체의 수도 점점 늘어나며, 특히 약물치료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는 경우 환자인권단체들이 적극 나서고 있다.
이들 세력이 결합하면 정신의학계와 제약업계에 대항하는 강력한 연합전선을 이룬다. 이 책은 그와 같은 이질적인 관점들을 통합하면서 오늘날의 의미와는 달랐던 과거 수줍음과 불안의 의미에 대한 좀 더 심도 깊은 탐구를 시작한다. 나는 다수의 인간 감정을 질병으로 만드는 일이 초래할 철학적 결과도 생각해볼 것이다. 또한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뿌리 깊은 이해 갈등과 감춰진 연구 결과들, 해당 종사자들의 야망, 치열한 마케팅 캠페인이 모두 결합해 사회공포증과 회피성 인격장애를 부당하게 과장하고, 우리가 용인하고 심지어 기꺼워하는 행위를 의학적 치료가 필요한 병리현상으로 바꾸어놓았음을 확인할 것이다.
결국 그동안 건강한 행위의 폭을 지나치게 좁힘으로써 우리의 기벽과 특이성, 가령 사춘기와 성인기의 정상적인 감정 영역이 두려움과 약물치료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대해 염려하고 때때로 혼자만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시민이 될 수 없게 됐다. 우리의 고뇌는 만성 불안증이거나 성격장애거나 기분장애이며, 고독은 경증 정신병의 표지이고, 반대의사는 적대적 반항장애Oppositional Defiant Disorder(ODD)의 증상, 걱정은 반드시 약물치료가 필요한 화학적 불균형이다.
이러한 결론은 오웬 식 망상증paranoia도 아니요, 지금부터 수세대 후에야 현실화될 최종 결과를 경고하는 『멋진 신세계』 식 시나리오도 아니다. ‘기분 증진mood brightening’ 캠페인은 이미 우리 문화에 깊숙이 침투하여 24시간 ‘활기차고’, ‘접속’하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부추긴다.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약물들은 운동선수, 음악가, 정신노동자, 육체노동자 등 수많은 직업군에서 사용된다. 어떤 의사들은 약물들의 일부 걱정스러운 전력에 우려를 표명하면서 항우울제가 애착도, 집중력, 심지어 깊은 사랑에 빠지는 능력까지 약화하는 광범위한 감정 둔화를 유발할 수 있음을 걱정한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결과는 막대한, 어쩌면 회복이 불가능할지도 모를 감정 영역의 상실, 인간 경험의 빈곤화일 것이다. 그리 오래지 않은 과거에 은둔자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은 큰 고통 후에 무엇이 따르는지에 대해 웅변하듯이 적었다. (“의례적 감정이 오고/신경은 무덤처럼 엄숙히 가라앉는다.”)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은 자신의 과묵함을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시켰으며, 이에 대해 한 비평가는 “수줍음의 철학”이란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도시와 멀리 떨어져 오두막에 살면서 고독을 요구했다. 우편물을 받지 않거나 인두세(개인에게 일률적으로 매기는 세금으로 18∼19세기에 사라짐. 현재 생활필수품에 대한 소비세 따위의 간접세와 비슷함―옮긴이)를 거부하면서 “사색적으로 살기” 위해 사람들을 멀리했다. 요즘이라면 디킨슨은 프로작 처방을 받았을 것이며, 호손은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해 사회공포증 환자로 사는 처지를 한탄했을 테고, 소로는 판사 앞에 소환되어 시민 불복종을 ‘양심에 따르는 권리’라 불렀다는 이유로 DSM 진단을 받았을 것이다. 19세기 소로와 호손과 디킨슨과 그 밖에 수많은 이는 우리에게 깊은 사색에서 비롯된 지혜를 주었다. 오늘날 정신과 의사들은 우리에게 알약을 준다.
이 같은 근본적인 사고의 변화를 좀 더 잘 설명하기 위해 나는 불안을 시험 사례로 삼아 1970년 이래 정신의학과 정신의학적 질병 정의가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를 겪어왔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선 불안과 수줍음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면서 오늘날의 관점과 고대 그리스, 르네상스, 빅토리아 시대의 관점들을 비교할 것이다. 1장과 2장에서는 DSM-III 특별위원회가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7가지 불안증이 포함된 112가지의 새로운 장애를 만들어냈는지 설명한다. 그로 인한 논쟁들에 대해 두 장에 걸쳐 주도면밀하고, 일부 관련자들에게는 아마 몹시 괴로울 정도로 세세하게 살필 것이다. 3장에서는 내향성 인격장애Introverted Personality Disorder(IPD)가 경증 정신병인 분열성 인격장애Schizoid Personality Disorder(SPD)로 발전한 기묘한 운명을 집중 조명할 것이다.
그런 뒤에 이야기의 방향을 바꿔 제약회사들이 그 같은 장애들을 어떤 식으로 홍보했는지, 일상 행위들이 뇌의 화학적 불균형에서 비롯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설득시키고자 수백만 달러를 쏟아부은 제약업계의 홍보전을 그려볼 것이다. 그들이 선전한 약물치료는 매우 심각한 사례를 포함해 수많은 부작용을 낳았는데 5장에서 애초에 의도된 약물들의 효과가 왜 많은 경우 발휘되지 못했는지 그 원인을 명확히 짚어본다. 나는 약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과정에서 많은 환자가 경험한 문제들과 관련해 만성 불안과 일상적 두려움을 구별하는 대안적 치료법들도 거론하고자 한다. 이어 6장에서는 과연 ‘사회불안증’과 ‘회피성 인격장애’가 때때로 외향성을 요구하는 우리 문화에 대한 불순응의 한 형태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논의의 방향을 바꿔 점점 거세지는 신경정신의학과 약물학을 향한 반격을 구성하는 네 가지 풍자, 즉 조너선 프란젠Jonathan Franzen의 수상 소설 『교정』(The Corrections), 잭 브라프Zach Braff의 영화 〈가든 스테이트〉(Garden State), 앨런 라이트맨Alan Lightman의 소설 『진단』(The Diagnosis), 윌 셀프Will Self의 중편소설 『묵티 박사』(Dr. Mukti)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진단과 윤리와 관련해 좀 더 광범위한 이슈들을 다룬다.
요컨대 이 책 『만들어진 우울증: 수줍음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는 하나의 평범한 특징이 정신장애로 변모해가는 포괄적인 그림은 물론이고 오늘날 불안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현재 과도하게 진단받고 과도한 약물치료를 받는다는 주장과 더불어 정신의학자들과 홍보 컨설턴트 업체들, 제약회사들이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수줍음, 자의식, 심지어 자기성찰까지 주요 정신장애로 바꾸어놓았는지 그 전모를 정확하고 세세하게 묘사할 것이다.
(서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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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크리스토퍼 레인 (Christopher Lane)
노스웨스턴 대학의 연구교수. 최근에는 구겐하임 펠로우십을 받아 정신약물학 및 윤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정신분석, 정신의학, 문화 등의 분야를 다룬 다수의 에세이와 저서가 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증오와 문명: 빅토리아시대 영국의 반사회적 삶』(Hatred and Civility: The Antisocial Life in Victorian England)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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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문희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학을 공부하고, 현재 전문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닥터스 씽킹』, 『커피 위즈덤』, 『아웅산 수치의 평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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