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프롤로그 l 진정 세상을 놀라게 한 것, ‘용서’
2006년 초가을 어느 날, 온 세상 사람들의 눈과 귀는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Lancaster, Pennsylvania에 있는 아미쉬Amish 공동체 마을에 쏠렸다.
그 옛날 니켈 탄광이 있었던 연유로, 평화로운 농촌 마을과는 멀게만 느껴지는, 니켈마인즈Nickel Mines라 이름 붙은 작은 마을에 있는 아미쉬 공동체 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사건이 타전된 직후였다.
수업 중이던 아미쉬 원룸 스쿨에 침입한 범인이 아미쉬 소녀 10명에게 총을 난사하여 다섯 명을 절명케 하고 나머지 다섯 명에게 중상을 입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사건 직전 일주일 사이에 다른 지역에서 이미 두 차례의 학교 내 총기 사건이 보도된 바 있었을 정도로 미국 내에서 흔히 벌어지는 총기 사건의 하나로 본다면 그리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을 경악케 한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폭력과 범죄가 없다는, 이 땅 위에 최후의 안전지대로 인식되어왔던 아미쉬 공동체 마을에서까지 총기 사고가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총을 난사한 범인이 아미쉬가 아니고, 아미쉬 마을 낙농가를 대상으로 우유를 수거해온 공동체 바깥의 트럭 운전사였다는 점과 동기와 목적이 모호한 가운데 아미쉬 소녀들만을 대상으로 치밀한 사전 준비하에 이루어진 계획적인 범죄였다는 사실 앞에 사람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진정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다음에 이어진, 총기 사건으로 어린 피붙이를 잃은 아미쉬 유족과 공동체 사람들이 보인 즉각적인 반응과 의연한 대처였다.
‘용서’ 그 모든 것은 이 한 단어로 집약되었으며, ‘즉각적이고도 조건 없는 용서’가 그들이 내비친 유일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용서가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아픔을 이기는 최선의 치유책이라는 것을 온 세상 사람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사고가 터진 바로 그날 해가 저물기도 전에 아미쉬 유족과 공동체 대표가 내비친 범인에 대한 즉각적이고도 조건 없는 용서.
어린 자녀들의 목숨을 빼앗아간 잔악무도한 범인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명복을 비는 아미쉬 유족과 공동체 사람들의 관용.
답지하는 성금을 가장을 잃은 범인의 유가족에게 먼저 할애해달라는 간청과 범인의 미망인과 어린 세 유자녀를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하며 위로의 시간을 가진 아미쉬 사람들의 자비.
사건 현장에서 밀착 취재를 통하여 이를 지켜본 보도진들마저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하여 가식적인 행동을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고 하니, 타오르는 복수심에 당한 그 이상의 앙갚음을 찾는 데 더 익숙해진 일반인들에게는 경악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한 길이 없었다.
↑ 총기 사고로 희생된 다섯 명의 아미쉬 소녀를 추모하는 퀼트 작품.
← 총기 사고가 나기 직전 여름 방학 기간 중의 니켈 마인즈 아미쉬 원룸 스쿨 전경.
아미쉬 공동체에 관한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미쉬 사람들이 보인 용서와 관용은 ‘믿음은 곧 실천’이라고 하는 행동하는 믿음을 바탕으로, 그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낭송하는 마태복음 6장 9~13절의 내용을 곧바로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로 이어지는, 우리에게 주기도문으로 더욱 익숙한 이 성경 구절을 똑같이 외우며 믿음을 행하는 수많은 다른 교인들이 그러한 상황에 처했다면 과연 그들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뭇 사람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나 자신 또한 예외일 수 없었고, 아미쉬 그들을 이웃하며 살아가면서 아미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돕겠다고 나서, 블로그에 아미쉬에 대한 소개 글을 올려온 내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들을 찾아 나서기가 두려웠다.
그 누가 과연 그들,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 아미쉬, 그들을 일컬어 ‘The Plain People’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쉽지가 않다.
‘Plain’에 담긴 다양한 의미만큼이나 그들에 대한 정의도 다르고, 사람에 따라 그들을 보는 시각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때로 미개한 농사꾼들의 무리로, 때로는 사교邪敎나 사이비 종교 집단으로 오인받고 있는 데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들에 관하여 올바른 이해를 돕는 데 기여할지 모른다는 판단에서 10여 년 동안 그들 곁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소중히 모아둔 기억과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많은 내용이 필자가 살고 있는 이곳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 지역의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모습과 실상에 기초를 두고 있는 터라, 미 대륙 전역에 분포하여 각기 다른 교리나 규범을 지키며 살아가는 아미쉬 공동체들의 다양한 모습을 수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랭커스터 지역이 미 대륙 내 최초의 아미쉬 정착지이자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아미쉬 집단 거주지이며, 아미쉬 교도들 대부분이 구습을 고수하는 ‘올드 오더 아미쉬Old Order Amish’라는 점과,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아미쉬 관광지라는 점에서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의 전통적 삶에 대한 보편적 고찰에 큰 무리가 없다는 판단에서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우리말로 정리된 아미쉬 관련 문헌을 쉽게 찾지 못해 겪었던 어려움도 이 책을 내는 데 한몫했다. 하지만 학술적 측면의 고찰이나 종교적 차원의 접근은 본인의 역량 밖의 일로, 그러한 의도가 담겨 있지 않음을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본문의 내용에 성경 구절이 많이 인용된 것도 ‘믿음은 곧 실천’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아미쉬 사람들의 관습과 일상생활의 근원이 되고 있는 성경 구절을 통하여 보다 깊은 이해를 돕기 위한 목적에서라는 점도 미리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스스럼없이 가족처럼, 친구처럼 대해준 아미쉬 마을의 스톨츠푸스Stoltzfus 씨와 베일러Beiler 씨 가족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한다. 본인에게 주어진 이 영광을 그들과 어떻게 나눌 수 있을지 오랫동안 고민에 빠질 것만 같다.
2009년 여름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에서
임세근
l 제1부 l 거울을 보지 않는 사람들
종교개혁의 선봉장, 개혁자 중의 개혁자
나는 ‘Covered Bridge’를 우리말로 ‘지붕이 있는 다리’라고 바꿔 부르곤 한다. 오래전 어느 영화 속에서 본 기억이 생생한 이런 다리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들뜨게 했다. 다리 위 양쪽으로 벽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까지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세운 지 100년은 족히 넘었다는데, 그것도 나무로만 만들어진 다리가 요즈음에도 차량들이 통행할 정도로 튼튼하게 보존되어 있음이 신기하기만 했다. 호기심이 유별난, 더욱이 낯선 땅으로 뿌리를 옮긴 이방인으로서 흥미의 대상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주변 환경과 지리도 익힐 겸 30여 개가 남아 있다는 이곳 랭커스터 카운티Lancaster County의 ‘지붕이 있는 다리’를 하나하나 찾아 나섰다. 다리가 모두 개발 지역 안쪽의 한적한 곳에 자리한 작은 개울 위에 놓여 있어 주변의 아름다운 전경을 마주치는 기쁨도 느낄 수 있었다.
초여름 어느 날, 가까운 거리에서 ‘지붕이 있는 다리’두 개를 연달아 살펴보고 돌아 나오는 길이었다.
개울가의 넓은 땅을 부치고 있는 농가 앞을 지날 때 입구에 내놓은 몇 개의 애호박이 눈에 들어왔다.
‘zucchini 10cent’라는 글과 함께 애호박 예닐곱 개가 쌓여 있었다.
애호박 일곱 개가 모두 70센트. 식료품 가게에서 파는 것에 비하면 거저였기에 흠집이 보이는 것까지 챙겨 들었다. 돈을 넣으라고 놓아둔 통이 보였지만 거슬러 갈 동전이 부족해 주인을 찾아 지불 할 수밖에 없었다.
인기척을 들은 중년의 아주머니가 집 밖으로 나왔다. 지폐를 건네자 거스름돈이 없는 듯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그럴 수는 없어서 난감해하자 아주머니는 거듭 괜찮다며 애호박을 담을 비닐봉지를 건네주었다. 흔히 볼 수 없는 하얀 모자를 머리에 쓴 아주머니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는 듯한 애잔한 미소… 그때 고만고만한 아이들 서넛이 몰려 나왔다. 똑같은 복장에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아이들은 모두 뽀얀 얼굴에 맨발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아미쉬 미망인 레이첼과 그의 아들 새무얼의 모습이 스쳐갔다. 오래전에 본 영화 <위트니스>(Witness)에 나온 바로 그 청순한 아미쉬 여인과 눈이 똘망똘망한 아미쉬 꼬마를 바로 눈앞에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자주 보지 못한 특이한 모습의 잉글리시English: 아미쉬들은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모두 이렇게 부른다에 호기심이 발동한 표정들이었다. 아미쉬 여인 메리Mary 아주머니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비닐봉지에 담긴 일곱 개의 애호박은 아미쉬 사람들과 맺은 연줄의 첫 매듭이 되었다. 그녀는 정 그렇다면 언제든 이곳을 지나칠 때 동전 통에 넣고 가면 된다고 했지만 나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되기를 자처했다. 며칠 뒤 일부러 집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돈을 건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애호박 말고 다른 채소는 없느냐고 물으며 이야깃거리를 찾았고, 다음에 다시 찾아올 명분을 만들어놓곤 했다. 집에서 직접 굽는 잡곡 빵을 주문했고, 정원 텃밭에 심은 배추를 얻어다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기농 달걀을 원하는 나에게 이웃도 소개해주었다. 그렇게 하여 만난 젊은 아미쉬 친구 다니엘Daniel의 닭장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근처를 지나가다 들러 안부를 물을 정도로 격의 없는 사이가 되어가면서 나는 호기심을 뛰어넘어 궁금증을 풀려고 안달했다.
하지만 욕심처럼 메리 아줌마나 다니엘의 입을 통해 그런 궁금증을 푸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대답 대신 깊은 미소를 지었고, 때로는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며 반문하기 일쑤였다. 질문을 몇 차례 바꾸어가며 반복한 끝에 ‘예’ 또는 ‘아니요’ 정도의 짧은 답이라도 듣는 날이면 큰 수확을 거둔 셈이었다. 그들이 나를 가까이 하기를 꺼리거나 학교 공부가 짧아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 그럴수록 나는 아미쉬가 이루는 세상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다. 강력한 중력으로 모든 물질을 흡수한다는 블랙홀.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블랙홀. 직접 눈으로 볼 수 없는 암흑의 공간이라고 하여 이름 붙였다는 블랙홀. 바로 그러한 신비의 블랙홀이 아미쉬에게 감추어져 있었다.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수백 년을 이어온 그들의 겸허한 삶과 공동체의 신비로움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왜? 어떻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구심을 안은 채 아미쉬 사람들의 블랙홀을 더듬어나갔다.
↑ 재세례파 성직자로 가장 먼저 미대륙으로 이주한 한스 허(Hans Herr) 목사의 집. 1719년에 지은 이 집은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에 그대로 남아 있다.
← 밀짚모자를 쓴 아미쉬 어린아이들.
꼬리를 무는 궁금증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아미쉬의 역사와 종교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박해와 시련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미쉬의 태동의 역사를 더듬기 위해서는 500년 가까운 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맨 처음 그들이 타고 와 신대륙에 닻을 내렸다는 차밍 낸시the Charming Nancy호를 되돌려 대서양 너머 유럽 땅으로 건너가야 한다.
16세기 초까지 유럽은 가톨릭의 로마교황청 교회로 단일화되어 있었고, 종교(교회)와 정치(정부)가 하나였다. ‘영적 구원’이라는 종교적 영역을 넘어선 교회의 권세에 시민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로마교황청 교회는 정치적ㆍ도덕적으로 점점 권위를 잃어갔다. 1517년에 이르러 독일의 가톨릭 수사修士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구원은 개개인의 깊은 신앙심에 대한 은총으로부터 얻는 것이지, 결코 교회의 성례전聖禮典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청 교회의 구조와 교리에 대한 일대변혁, 이름하여 ‘종교개혁’을 주창하고 나섰다. 이에 많은 종교지도자가 동조하며 거세어진 종교개혁의 물결은 독일 제후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때마침 창안된 인쇄술의 실용화에 힘입어 유럽 전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어나갔다.
이때 스위스 취리히Zurich에서는 신교의 목사인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지도자로 떠올라 ‘개혁파 교회the Reformed Church’를 설립하는 등 종교개혁의 선봉에 나섰다. 그런데 모든 면에서 루터보다 더 적극적인 개혁 성향을 보였던 츠빙글리의 개혁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약해지고 있다고 의심받기 시작했다.
그는 “이 땅 위에 신의 왕국은 오로지 정치적 힘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강조하고, 당시 최대의 쟁점이었던 ‘유아 세례’ 또한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시 의회와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면서 개혁의 순수성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추종자들이 나서 종교개혁은 정부의 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개혁의 투명성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가 츠빙글리와 시 의회에 의해 거부되자 그들은 ‘교회와 정부의 완전 분리’, ‘무저항 평화주의’와 ‘성인 세례’를 근본 교리로 내세우며 ‘스위스 형제들Swiss Brethren’이라는 새로운 교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때가 1525년이었다.
정부 관리들은 당시 세금 징수를 위한 신생아 출생의 유일한 근거로 삼던 ‘유아 세례’를 부정하고, 군 징집을 거부함으로써 국가의 존폐와 지역 안보를 위협하는 그들을 범죄자로 몰아세웠다. 그들의 모임을 엄격히 통제하고 ‘유아 세례’를 지속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그들은 신생아는 선과 악을 구별할 능력이 없고, 지은 죄 또한 없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이루어지는 ‘유아 세례’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성인이 된 후 이성적 판단 아래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세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국의 감시를 피해 성인 교도들에 한하여 새로운 세례식을 강행했다.
이처럼 성인 교도에게 세례를 다시 받도록 한 연유에서 그들은 ‘재세례파Anabaptists 또는 재침례파Re-baptizers’로 불리기 시작했다. 재세례파 교도들은 그들이 보인 급진적인 개혁 성향으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의 큰 흐름 속에 ‘개혁자들 중의 개혁자’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정부 관리와 가톨릭은 물론 개혁의 물결에 나선 여타 개신교파의 교도들로부터 법질서와 종교적 일체감을 해치는 반사회적 위험 집단으로 지목되었고, 혹독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정부 관리들은 재세례파의 지도자는 물론 이를 추종하는 일반 교도들까지 색출하여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몇몇 도시에서는 잡아들이는 재세례파 교도들의 숫자에 비례하여 돈을 지급하는 ‘재세례파 사냥꾼’을 고용하여 그들을 추적하게 했다. 이들에게 잡혀온 재세례파 교도들은 감옥에 갇혀 개종을 강요당하고 온갖 고문에 시달렸다. 뜻을 굽히지 않는 교도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나라 밖으로 추방을 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뿐만 아니라, 길가 나무에 매달아 불에 태워지거나 물에 던져져 목숨을 잃고, 심지어는 생매장을 당하고 전신이 토막 나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되었다.
이러한 감시와 혹독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신념을 굽히지 않고, 모라비아Moravia, 알사스Alsace, 팔라티네이트Palatinate 지방과 네덜란드 등으로 넘어가거나 깊은 산속 또는 외딴 지역으로 숨어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교도의 집이나 산속 동굴에서, 때로는 어두운 밤 물 위에 띄운 배 위에서 몰래 예배 모임을 가지며 교리를 확산해나갔다. 이때 자행된 잔혹한 탄압과 박해로 인해 희생된 재세례파 지도자와 교도들의 수는 정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지만 수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들이 겪은 고난과 순교에 관한 구체적 사례는 1660년 네덜란드에서 발간된 책 『순교자의 거울The Martyrs Mirror』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200페이지에 이르는 거대한 분량의 이 책은 오늘날까지 아미쉬는 물론 재세례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러 교파의 사람들에게 성서처럼 읽히고 있다.
피로 얼룩진 거울, 『순교자의 거울』
평소 아미쉬에 대해 물어도 자세히 대답해주지 않던 메리 아주머니가 『순교자의 거울』이야기를 꺼내자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느냐?’
나는 『순교자의 거울』이 아미쉬의 태동과 고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문헌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 실제로 아미쉬 공동체 집집마다 그 책을 소장하고 있는지, 또는 그 책을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읽는지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메리 아주머니는 책을 한번 볼 수 있느냐는 나의 부탁에 잠시 망설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두꺼운 책을 들고 나와서는 나에게 선뜻 건네주었다. 오래전 우리네 집 책장에서 흔히 보던 묵직한 백과사전처럼 크고 묵직했다.
메리 아주머니는 집에 두 권이 있는데, 오래된 것은 집 안에 있고, 가지고 나온 책은 아이들이 커가면서 여벌이 필요해 얼마 전에 새로 산 것이라고 했다. 커가는 자녀들이 볼 수 있게 여벌로 샀다는 말과 산 지 오래되지 않은 책갈피에 묻은 손때로 보아 메리 아주머니 가족도 이 책을 가까이 하며 자주 읽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미쉬 가정에 소장하고 있는 손때 묻은 『순교자의 거울』의 책장을 직접 넘겨 보면서 산 채로 물속으로 던져지고, 기름을 끼얹은 몸이 불에 타면서도 종교적 신념을 지켜낸 조상들의 애잔한 순교殉敎 사례가 유훈遺訓으로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더불어 아미쉬 사람들은 이 책을 성경 다음으로 소중하게 보관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메리 아주머니에게 기대했던 다른 여러 마디의 말보다도 더 소중한 답변이었다. 메리 아주머니는 고든빌Gordonville에 가면 아미쉬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서점이 있는데, 거기서 똑같은 책을 구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 미국 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순교자의 거울』. 미 대륙으로 이주한 최초의 메노나이트 목사 한스 허의 집(Hans Herr House)에 보관되어 있다.
←아미쉬 공동체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순교자의 거울』.
“에머리흐Emmerich에 사는 게오르그 바그너George Wagner가 바바리아Bavaria의 뮌헨Munich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믿음 때문에 붙잡혔다. 첫째, 목사가 죄악을 용서해줄 수는 없다. 둘째, 사람이 하느님을 하늘에서 데리고 내려올 수는 없다. 셋째, 목사가 성찬대에 올려놓은 빵은 하느님이나 그리스도의 육체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양식일 뿐이다. 넷째, 물을 이용한 세례로는 어떠한 구원도 받을 수 없다.
그는 이러한 신념을 굽히지 않아서 매우 혹독하게 고문을 당했다. 그를 깊게 동정한 제후가 감옥으로 찾아와 평생 친구로 부르겠다고 약속까지 하면서 진심으로 타일렀다. 더하여 제후의 측근이 나서 그런 믿음을 버리라고 권고하면서 많은 것을 약속했다.
급기야는 그의 부인과 자녀들이 감옥에 있는 그의 앞에 불려왔다. 이처럼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의 신념을 바꾸려고 했지만 끝내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많은 목사와 여타 사람들도 역시 그를 찾아와 설득했지만 그는 확고했고 하느님이 그에게 일깨워준 믿음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는 화형을 언도받았다. 사형집행인의 손에 넘겨져 시내 한복판으로 끌려 나가면서 그가 말했다.
“오늘 나는 온 세상 사람 앞에서 나의 하느님께 고해하리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처럼 기쁨을 얻었다.
그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지도 않았고, 두려움 없는 눈으로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불길로 다가갔다. 사형집행인이 사다리에 그를 묶고 목에 화약이 들어 있는 작은 주머니를 매달았다. 그가 말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함께하소서.” 그는 주변에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고별인사를 전하면서 사형집행관에 의해 불길 속으로 밀어 넣어졌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영혼을 바쳤다. 1527년 2월 8일이었다.
사형 집행 장소에서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또 다른 형제들을 붙잡으려고 한, 성姓이 아이젠라이히 폰 란트베르크Eisenreich von Landsberg인 치안행정관이 그날 밤 갑자기 숨을 거두어 이튿날 아침에 그의 침대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신의 저주로 이렇게 목숨을 잃었다.”
이상은 게오르그 바그너의 순교 사례로 『순교자의 거울』413페이지에 실린 내용이다. 이때가 1527년이니 재세례파의 태동인 개혁파 교회 ‘스위스 형제들’이 설립된 지 두 해가 지나 일어났던 일이다. ‘피비린내 나는 현장The Bloody Theater’이라고도 부르는 『순교자의 거울』은 이처럼 15∼17세기에 걸쳐 종교적 신념을 지키다가 희생된 재세례파 교도들의 순교 사례로 채워져 있다.
아미쉬 사람들은 거울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용모를 가꾸고 치장을 하는 일을 금하고 있기에 외모를 뽐내기 위한 목적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만의 거울이 있다. 그게 바로 조상들이 흘린 피로 얼룩진 ‘순교자의 거울’이요, 일상을 통하여 마음과 정신을 비추고 가다듬는 일깨움의 거울이다.
↑ 온갖 박해와 고초 속에서도 종교적 신념을 지켜낸 재세례파 교도들. 그림출처 『순교자의 거울』, Thielman J. van Braght, Herald Press
아미쉬 사람들은 그러한 거울을 들여다보며 온갖 박해와 고초 속에서도 종교적 신념을 지켜낸 조상들의 값진 희생을 배우고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새롭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온갖 고통과 수난을 당하며 숨을 거두는 절박한 상황 앞에서도 폭력으로 대항하거나 무력에 의존하지 않는 무저항 평화주의의 가르침도 배우고 있다.
그러한 일깨움을 유훈으로 삼아 그에 합당한 삶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는 그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값진 유산, ‘피로 얼룩진 거울’앞에서 함박웃음을 웃거나 실의에 젖어 눈물을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조상들의 숭고한 희생을 욕되게 하는 일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미쉬 사람들이 항상 조신하며 감정의 기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경망스러운 행동을 보이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음이 분명했다. 메리 아주머니의 애잔한 미소 뒤에 감추어진 그 무엇도 바로 그 거울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세례파 사람들에게는 자신들과 종교적 신념을 달리하는 사람들 모두가 ‘악마’였다. 자신들의 종교적 믿음을 위협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사람들, 잡아 가두고 온갖 고문을 일삼고 피로 물든 육신으로부터는 목숨마저 빼앗아가는 잔인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바깥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런 악한들이었다.
그들이 종교적 신념을 지키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악마’들을 경계하고 멀리해야만 했다. ‘비폭력 평화주의’를 핵심적 교리의 하나로 택한 그들이 ‘악마’에 맞서 총칼을 들 리도 없었다. 사악한 무리들을 피해 멀리 도망쳐 숨어 사는 것만이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종교적 신념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치고 그 속에서 강건한 믿음 하나로 뭉쳐 악마들의 괴롭힘을 이겨내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신앙을 바탕으로 한 그들만의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그들은 공동체 바깥세상을 ‘world’라 부르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오늘날 아미쉬 사람들이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바깥세상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연유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신대륙으로 이주한 그들에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조상들이 당한 육신의 고통과 생명의 위협은 사라졌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 살인과 폭력 그리고 마약, 가정 파괴, 낙태와 동성애, 퇴폐 행락 등의 비도덕적 행각이 범람하는 바깥세상은 여전히 그들의 종교적 순수함을 해치는 사악한 사람들의 세상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공동체 밖 이교도들을 경계하며 바깥세상을 향해 둘러친 울타리를 더욱 높이고 튼튼히 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메리 아주머니나 다니엘의 집을 찾아갈 때나, 아미쉬 사람들을 가까이서 만날 때 다시 한번 몸가짐을 살피고 조심성 있게 행동한다.
‘Mirror’는 ‘거울’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본보기, 귀감龜鑑’을 뜻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미쉬 사람들에게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순교자의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 그들을 이해하려 드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프롤로그 전문, 제1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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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임세근
1998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아미쉬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펜실베이니아 주 랭커스터에 살고 있다. 처음에는 단지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아미쉬. 좀더 다가갔을 때 그 겸허함과 소박함에 감동받았고, 아미쉬 역사와 전통을 연구하면서 남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미쉬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아미쉬를 전하는 국내 최초의 블로거이자, 번역서가 아닌 우리말로 아미쉬를 전하는 최초의 작가가 되었다. 저서로 『이민 아빠의 아메리칸 다이어리』, 『아는 단어 안 되는 해석』이 있으며, 아미쉬에 대한 소소한 일상과 더 많은 화보를 접할 수 있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http://blog.naver.com/amishstory http://blog.daum.net/am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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