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서울, 2003ㅣ아직 고가도로가 군데군데 숨어 있고 양떼를 몰듯이 건물을 쓸어모으고 있는 산들의 자태가 또렷이 보인다.
l 여는 글 l
1
서울에서 살고 있다. 잠시 놀러 가거나 일 때문에 나갈 때 빼고는 계속 살아왔다. 나를 키운 것은 철렁한 바다도 아니고 살찐 언덕도 아니고 휘도는 개울도 아니다. 나는 2원 50전을 내고 전차를 타고 내리며 을지로나 충무로의 골목길을 뒤집으며 자랐다. 그리고 여전히 고향을 지키며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일이 칭찬 받을 일도 아니고 부러움을 살 일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지금은 지하철이 생기며 밀려서 반이 넘게 길이 되어버린 을지로 3가 139번지에서 태어나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곳이 나에게는 지금도 아릿한 고향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사를 했으며 이제는 40년도 훨씬 넘은 옛날이다. 멀지 않은 곳이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부산이나 목포보다 훨씬 멀다. 마치 물에 잠겨버린 수몰지를 고향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같다. 그곳은 내가 기억할 만한 단서를 거의 지워버렸다. 단지 1과 3과 9로 이루어진 숫자로만 남아 있다.
얼마 전 을지로에 하수구 뚜껑을 사러 갔다가 돈을 지불하고 나서 영수증을 받았다. 영수증에는 그 집 가게의 사업자등록번호와 상호 등이 적혀 있었고 세번째 칸에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 주소는 을지로 3가 139번지였다.
집안 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앉은 상자 안에서 잠을 자던 내 고향이, 일련번호로 치환되어 철물점 영수증에서 유령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냄새와 이름은 그대로 남은 조선옥을 끼고 뒤로 들어가 보았다.
● 수선전도, 2009ㅣ서울의 산과 물길을 담은 수선전도를 따라서 그려보았다.
글도 모를 때부터 들락거렸던 만화가게, 뛰어들어가다가 자전거와 부딪쳤던 기억이 생생한 문방구, 잡초 많았던 공터…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골목도 집도 없고 단지 쇠를 깎는 기계가 내는 요란한 굉음만 있었다. 주변에 흩어진 쇳가루들, 기름방울 자국, 기름때에 절은 목장갑이 빈 곳을 알뜰하게 채우고 있었다.
―뚝 떨어지는 느낌.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것이 갑자기 뚝 떨어지는 느낌.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나의 고향에 대한 기대는 봄볕에 고드름 녹아내리듯 너무나 허망하게 떨어져내렸다.
―관계의 몰수.
2
내게 서울이란 아직도 읽히지 않는 지도이다. 초등학교 때 행정구역상 서울로‘입성’했다. 사대문 안 사람들이 문 밖 사람들을 촌 사람들이라 불렀다던가. 문 밖에서도 한참을 나가 한강을 건너간 곳, 서울에서 마지막까지 벼농사를 짓던 동네에 살았다. 동네 이름도 벼골짜기. 다니던 고등학교 운동장은 담도 없이 논으로 이어져, 점심시간에 실내화를 신고 논두렁에 나가 놀곤 했다. 비가 오면 질척해진 운동장 흙탕물을 타고 들어온 개구리들이 학교 현관 앞까지 몰려와 울어옜다.
우리 동네와 맞닿은 이웃 동네들은 서울로 편입되길 기다리는 김포·부천, 이런 곳들이었다. 세월이 지나도 경계선은 넘어가지 않았고, 버스 한 정거장 차이로 서울 사람, 서울 사람 아닌 사람의 이름표가 붙었다. 다만 피곤한 얼굴들로 가득찬 버스가 쉴 새 없이 드나들던 길에 자가용들이 점점 늘어갔고, 공터들은 슬금슬금 붉은 벽돌집과 콘크리트 아파트들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그 회색의 너울이 우리 집 마당까지 차오르기 전, 강을 건넜다.
● 낡은 집, 2003ㅣ지어진 세월에 비해 조로해서, 한 1,000년은 세파에 시달린 것 같은 표정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서글프게 시장 골목 안에 서 있는 용도 미상의 건물.
본격적인 서울의 첫 이미지는 고등학교 참고서를 사러 갔던 교보문고에서 시작되었다. 학교 도서관의 낡은 서가에 비해 반짝이는 조명 아래 으리으리하게 늘어선 끝없는 서가 속에 단정하게 꽃힌 책들은 얼마나 매혹적이던지.
서울에 산 지도 30년이 넘었다. 그러나 고향이라 부르기엔 어쩐지 어색하다. 아직도 길을 잃는다. 복잡한 강북의 골목길을 다니면 이상하게 막다른 골목이 나타나고, 단순하게 정리된 강남의 뻥뻥 뚫린 대로를 다닐 때도 돌아가면 아까 지나온 길이니 막막하기 그지없다. 과거의 길과 현재의 길들이 실타래처럼 뒤엉킨 도시의 속도가 삶의 속도를 앞지르기 때문일까.
노을이 시원하게 물들던 고등학교 앞의 들판엔 100만 평짜리 개발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다. 도로 아래로 몇 겹의 기차가 흘러다닌다. 살던 집들은 단독주택에서 빌라로 뻥튀기 되었고, 나와 친구들은 차곡차곡 아파트로 수납되었다.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것들이 변해 가는 모습에 익숙해진다.
서울은 많이 변했지만, 아쉽다고 쉽게 말하는 일은 조심스럽다. 실은 피맛길의 생선 굽는 냄새보다는 그 길에 담긴 옛 사람들의 애환이 애달프고, 달동네의 골목길이 마냥 아름답다 하기엔 그 속의 절박한 생활을 알기에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여행이라도 갔다가 돌아올 때 반기는 도시의 불빛은 벅차도록 사랑스럽다.
섣불리 아는 체하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곳, 생각날 때마다 찾아가 잠시 머물 수만 있어도 고마운 그곳들이‘나의 서울’이다.
● 난곡, 2009ㅣ지금은 증발된 동네.
3
여기 있는 그림들은 10년 동안 우리가 본 서울에 대한 기억이다. 여기에 있는 이야기들도 그 사이 우리 둘이 나눈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서울 그림책이자 서울 이야기책이다.
언젠가 친구와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남쪽, 너른 들이 있는 마을에서 태어난 그 친구는 넓고 푸른 곳으로 가서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했고, 나는 서울의 한복판, 종로나 을지로에 바늘 하나 세울 만한 공간이라도 찾아내 그곳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무척 상식적인 사람이므로 나의 친구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의 친구도 무척 상식적인 사람이었기에 나를 이해할 수 없어했다.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종의 객기로 치부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나는 그렇다. 태어나 줄곧 보아온 서울이 나에겐 물과 같고 공기와 같다. 모두들 서울의 복잡함이 지긋지긋하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지만 그 복잡함과 시끄러움은 내겐 푸른 들과 맑은 물처럼 나를 키워온‘8할의 바람’인 것이다. 과연 나의 애정은 정당한 것인가? 그래서 나는 틈나는 대로 샅샅이 서울을 그려보기로 했다. 서울을 진지하게 바라보기 위하여.
● 평창동, 2001ㅣ평창동 비탈진 골목길에서 꼿꼿한 북한산을 바라보았다.
l 풍경 1 l
슬픈 경사 ● 북촌
한 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巫女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네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T.S. 엘리엇의 『황무지』(민음사, 1995) 중에서)
그러나 그녀는 죽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병이다. 서울이 아프다고, 아픔을 강요당한다.
“누워 있어!”
누워만 있으면 되살아나는가.
이 움켜잡은 뿌리는 무엇이며,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나오는가? (T.S. 엘리엇의 『황무지』 중에서)
자본의 속도를 누가 막을 수 있을까. 그 속도에 모든 것이 폐기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영리한 자본의 전략. 소모되기 위한 존재들.
가회동 ‘한옥마을 길’로 올라가 내려다본다. 서울이 침을 흘리며 올려다본다. 희뿌연 서울이 턱을 치켜올리고.
“경남빌라에는 이회창 씨와 이종찬 씨가 살고 있죠.(2001년 무렵의 일이다) 제 동생이 경기고등학교를 나왔는데 이회창 씨와는 동창입니다. 집 값이 많이 올랐어요. 저기 보이는 집들이 동아일보 김씨네 가족 집이죠. 저기엔 김활란 씨가 살았었고.”
● 가회동 31번지, 2001ㅣ추운 겨울날 가회동 한옥이 밀집해 있는 언덕에 올라 턱밑까지 차고 올라오고 있는 파도 같은 또다른 서울을 내려다보았다.
계동부동산 아저씨와 이야기 나누고 있던 이상재의 집터는 동사무소가 되었는데, 그 앞을 오토바이가 막고 있었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이빨로 힘차게 깨물어 보았으나 껍질 속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한강을 건너가 버렸어요. 경기고등학교를 따라 휘문고등학교를 따라.”
북촌 부자들은 한강 인도교가 끊어지기 전에 강을 건너갔다.
영혼들이 줄지어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원치 않는 자들뿐.
그 누구도 강요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불편을 강요할 수는 없다.
불편하고 싶은 자 들어오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자 들어오라.
그러나 누가 원하는가.
누가 누구에게 조금 불편해도 손해를 입어도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 가회동 2002ㅣ한옥이 많은 동네를 가득 채우고 있던 전봇줄들은 이제 땅 속으로 들어가고, 그대신 쭉정이들이 땅 위로 솟아올라와 무척 소란스러운 동네로 변하고 있다.
오오 개를 멀리하게,
비록 놈이 인간의 친구이긴 해도
그렇잖으면 놈이 발톱으로 시체를 다시 파헤칠 걸세!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와 같은 자 나의 형제여! (T.S. 엘리엇의 『황무지』 중에서)
더이상 나올 것 없고, 기댈 것 없는 땅으로…
이곳에서 노래하고, 이곳에서 곡하리라. (정약용의 『뜬 세상의 아름다움』(태학사, 2002) 중에서)
발을 땅에 딛고 지금, 여기서.
● 가회동 그늘, 2002
(여는글,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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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임형남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주)간삼건축, (주)삼우설계에서 대형 프로젝트를 다루다가 (주)SF도시건축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한 후 1998년부터 부인 노은주와 함께 설계사무소 ‘스튜디오 가온’을 운영하고 있다. 프로젝트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에서 2002년과 2004년에 전시회를 열었다. 홍익대학교에 출강하면서 2002년에는 『나무처럼 자라는 집』이라는 건축 이야기책을 펴냈고 2006년 부부가 함께 『집주인과 건축가의 행복한 만남』을 펴냈다.
노은주
건축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고, 월간 <플러스>, 공간사에서 건축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 수목건축에서는 건축기획을, 서울포럼에서 웹진기획을 했다. 리빙TV의 <살고 싶은 집>, 교보웹진 <Pencil> 등을 통해 비평 활동을 했으며, 1998년부터 남편 임형남과 함께 설계사무소 ‘스튜디오 가온’을 운영하고 있다. 홍익대학교에 출강하며 2006년 부부가 함께 『집주인과 건축가의 행복한 만남』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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