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제1부 l 좌절과 분노의 현장에서
l 제1장 l 가자로 가는 길
2009년 1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유혈충돌이 일어난 뒤 나는 한국 언론인으로는 처음으로 이집트 라파 지역을 통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로 들어갔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로 들어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에레즈 검문소을 거치는 길, 또 하나는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가자 남쪽 라파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번에는 라파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에레즈 검문소에 갈 때마다 20세 안팎의 이스라엘 병사들로부터 겪은 의도적인 괴롭힘(무작정 몇 시간씩 검문소에서 우두커니 기다리게 만들어 사람 지치게 하는 수법 등)을 다시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일방적이다시피 한 공습과 비무장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 등 2009년 지구촌에서 벌어진 첫 전쟁범죄를 취재하겠다고 기운차게 인천 공항을 떠났다. 밤늦게 이집트 카이로 공항에 내려 다음 날 아침 가자 지구 남쪽 라파 지역으로 향했다. 모래바람 날리는 시나이반도의 사막지대를 달려 라파 국경통과소에 닿았다. 카이로를 떠난 지 거의 여섯 시간 만이었다. 국경검문소임을 알리는 커다란 간판을 보았을 때 ‘아, 이제 드디어 가자 지구로 가겠구나’ 하는 생각에 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로 통하는 문을 나서려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집트 관리는 “여권과 언론사의 취재협조 요청서만으로는 가자 지구에 들어갈 수 없고 두 가지 서류가 더 있어야 라파 국경을 넘을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카이로 한국대사관의 추천서, 그리고 이집트 공보부의 승인서였다. 그렇다면 다시 카이로로 돌아가서, 전혀 급할 것 없는 관리들을 상대로 지루한 서류작업에 매달려야 한다는 말인가. 카이로로 이어지는 사막 한가운데 밤길을 시속 150킬로미터로 내달리는 전세택시 안에서, 이번 중동 취재길이 순탄치 않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집트 관리가 말한 그 두 서류만으로도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라파 국경통과소에 들어서니, 지난 2002년 아프카니스탄 현지 취재 때 얼굴을 익혔던 파키스탄 기자 한 사람이 시무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이집트 관리가 말한 두 가지 서류를 다 갖춰 왔는데도 “하루 종일 대기실에서 통과 허가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집트 군부대의 보안검색에서 통과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토록 가자 지구로 가기가 어렵도록 여기저기 지뢰밭을 만들어놓은 것은 친미 국가인 이집트 정부가 이스라엘 정부의 눈치를 보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스라엘 서남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집트는 이슬람 국가 가운데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가장 먼저 수립한 국가다(1979년). 현재 이슬람 국가 가운데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맺은 국가는 이집트와 요르단(1994년) 두 나라다. 그 덕에 이집트는 미국으로부터 해마다 엄청난 원조를 받고 있다. 미국의 대외 원조 최대 수혜국은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이고, 두 번째 수혜국이 바로 이집트다.
이스라엘 정부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취재를 떠나는 외국 기자들을 어떻게든 괴롭히기로 이미 악명이 높다. 1967년의 6일전쟁 뒤 40년 가까이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불법적으로 점령하여,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그렇기에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취재하려고 들어오는 외국 취재진을 반기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되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억압통치가 얼마나 현지 주민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가를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유엔 관계자들의 입국마저 막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겨냥한 공습을 벌이면서 민간인 피해가 국제문제로 떠오르던 2008년 12월 말, 유엔 인권특사 리처드 포크Richard Falk가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에 내리자, 이스라엘 당국은 그를 공항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게 하고 다음 비행기로 돌려보냈다. 유엔 인권특사를 못 들어오게 막는 형편이니, 팔레스타인 인권운동가가 비행기를 타고 나가 이스라엘의 만행을 알리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스라엘이 외신 기자들의 팔레스타인 취재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도 중동 취재를 갈 때마다 예루살렘 공항에서 이스라엘 보안요원으로부터 “누구를 만나러 가느냐”, “어디에 묵을 거냐” 등등의 질문을 받으며 30분 넘게 시달리곤 했다. “왜 내가 이런 괴롭힘을 당해야 하느냐”고 항의하다가는 심문실에 갇혀 더욱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 그러다가 공항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되돌아간 기자들도 있다. 그런 이스라엘의 행태로 미뤄, 이스라엘 정부가 친미 정부인 이집트 정부에게 라파를 통해 팔레스타인으로 가려는 외국 기자들의 입국을 어떤 형태로든 제한해달라고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저런 사정으로 예정보다 사나흘 늦게 라파 국경을 넘어 가자 지구로 들어섰다.
거대한 파괴현장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는 지중해변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고구마처럼 생긴 좁은 회랑이다(길이 40킬로미터, 폭 4∼10킬로미터, 면적 360평방킬로미터). 가자 남쪽 끝인 라파에서 북쪽의 가자시티까지 자동차로 한 시간이면 충분한 좁은 지역에 무려 150만 명의 인구가 산다. 가자 지구의 절반 정도가 사막형 기후로 불모의 땅인 점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1평방킬로미터당 인구밀도는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다. 그럼에도 밖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이동의 자유가 없다. 이스라엘군 경비병의 총격에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몰래 장벽을 넘지 않는 한, 같은 팔레스타인 지역인 서안 지구로도 가기 어렵다. 이웃 나라인 이집트나 요르단으로의 여행도 꿈같은 얘기이기는 마찬가지다. 현지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우리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인해 그런 땅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울분 속에 살아가는 것이다.
■ 2009년 이스라엘군의 가자 침공으로 많은 공공건물과 주택들이 파괴되었고,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또다시 집을 잃었다.
2009년 이스라엘군의 가자 지구 침공에서는 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파괴가 이루어졌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는 거대한 파괴현장 그 자체였다. 곳곳에서 메스꺼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이스라엘군은 전폭기와 탱크와 아파치 헬기, 그리고 불도저를 동원해 많은 집들을 무너뜨렸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콘크리트 잔해가 곳곳에 무덤을 만든 상태였다.
이스라엘의 공격에서 비롯된 학살과 파괴의 흔적은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쉽게 눈에 띄었다. 가자 지구의 남쪽 지역인 라파(인구 13만 명)는 물론 가자 지구 중남부의 칸 유니스(인구 20만 명), 그리고 가자 지구의 중심인 가자시티(인구 40만 명) 곳곳이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신음하고 있었다. 무너져 내린 건물이며 주택, 불탄 채 버려진 자동차들, 탱크와 불도저로 갈아 쓰러져 누운 올리브나무들… 중소기업 규모의 공장들이 모여 있는 가자 지구 동부 지역의 산업단지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공장 직원들은 철골이 불길에 녹은 채 휘어진 공장 천장을 쳐다보며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지 몰라 당혹감에 휩싸여 있었다.
가자 지구의 농부들도 시름이 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부인과 아들 둘이 심하게 다쳤다는 한 농부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병원에 두고 온 가족은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건강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나 몇십 년을 키워온 올리브나무들은 어떡하나. 나무 한 그루를 다시 심어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땀과 시간이 들어가는데…”
무너진 집 앞에서나 이스라엘군 탱크에 황무지로 바뀐 올리브나 레몬 밭에서 서성대던 주민들은 통역자 칼리드와 내가 다가서면 당시 상황을 기꺼이 자세하게 설명하려 들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고 집과 농토를 잃은 그들의 절박한 처지를 헤아려볼 때, 아마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이 아니겠나 싶었다. 제한된 취재일정 탓에 그들의 이야기를 넉넉히 듣지 못하고 구경꾼마냥 잠시 왔다가 떠나는 것이 안타깝고 미안했다.
피해지역 주민들로부터 조금씩 다르면서도 하나같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부 이스라엘 병사들은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부수는 것을 즐겼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슬며시 들었다. 가자 지구 곳곳에서 저질러진 이스라엘군의 파괴 행위가 도를 넘어서 인간성을 포기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현장은 참혹했다.
■ 삶의 밑천으로 애써 기르던 올리브나무들을 전쟁으로 모두 잃고 슬퍼하는 팔레스타인 농민. 그의 분노와 슬픔은 누가 달래줄 것인가.
집을 잃은 사람들은 친척 집에 나뉘어 신세를 지거나, 그럴 형편이 안 되면 무너진 집 바로 옆에 국제구호기관들이 보내준 천막을 치고 추운 밤을 지새고 있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면서 벌인 전쟁, 또는 1967년 6일전쟁으로 난민이 된 옛날의 상황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과 눈물이 멈출 날이 언제가 될까 하는 우울한 생각을 하며 가자 지구에서의 첫 밤을 맞았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이스라엘군의 가자 지구 파괴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통역자 칼리드와 함께 아침 일찍 나섰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가자 전역에 걸쳐 이뤄졌지만, 그중에서도 북동부 지역의 피해가 컸다. 가자 지구의 중심인 가자시티의 동남쪽에 자리한 알 제이툰 마을, 가자시티 동부의 알 투파 마을이 특히 그랬다. 이 지역에는 이스라엘군이 거듭 공습을 되풀이했고, 그런 다음 탱크를 앞세우고 들어와 한동안 주둔을 했었다.
이 두 마을은 가자시티 동북쪽의 자발리야 난민촌과 더불어 하마스의 지지기반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주민들은 “우리가 하마스를 지지했다 하더라도 총을 들고 싸운 전투원이 아닌데, 왜 마구잡이로 폭격해 집을 부수고 사람 목숨을 앗아가느냐?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강한 분노를 나타냈다.
알 제이툰 마을의 주민들은 “이스라엘군이 마을 사람들 110명을 한 집에 몰아넣고는 바로 그곳에다 포격을 해댔다. 그래서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데, 전화로 연락을 받은 병원 응급차량이 마을로 들어서는 것조차 이스라엘군이 막았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야말로 고의적인 살인이자, 전쟁범죄가 아니냐”는 얘기였다. 이스라엘군이 이 마을에 포격을 해대던 열흘 동안, 마을 사람들은 물과 음식이 다 떨어졌는데도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피하느라 바깥 출입은커녕 창밖조차 내다볼 수 없었다. 이 마을에서는 이스라엘군이 부모의 주검 옆에서 굶주리고 있는 어린이 4명을 나흘 동안이나 그대로 내버려둔 사실이 나중에 알려져 지구촌 사람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가자 지구 동부 샤아프 마을. 이스라엘과의 경계선을 따라 난 도로를 지나는데 길에 말과 소 여러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말이나 닭 등 집에서 기르던 가축들도 이스라엘 전폭기와 헬리콥터, 탱크에서 쏘아대는 포탄에 희생됐다. 인간들이 일으킨 전쟁의 광풍이 우리와 더불어 사는 동물들의 목숨도 앗아간 것이다.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굳이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말을 이동수단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트랙터나 중고 자동차를 갖고 있더라도 비싼 석유 대신에 말이나 노새가 끄는 수레를 몰고 다닌다. 말하자면 가축은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귀한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가자 시 동북쪽에 자리한 자발리야 난민촌도 이스라엘의 공습에서 비롯된 파괴의 광풍을 비껴가지 못했다. 상주인구 10만 명의 이 난민촌 주민들 대부분은 지난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대대로 살던 옛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다. 이들은 하마스의 강력한 지지기반이다. 6년 동안 이어졌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1차 인티파다가 바로 이곳에서 처음 일어나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번진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무너진 이슬람 사원, 불 탄 유엔 창고
자발리야 난민촌의 중심지인 알 콜라파 이슬람 사원과 그 앞의 널찍한 광장에서는 1차 인티파다 기간 중에는 물론 2차 인티파다가 벌어진 뒤에도 각종 정치 집회가 열려온 곳이다. 2004년 이스라엘군 헬기가 쏜 미사일에 맞아 사망한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도 생전에는 휠체어에 몸을 실은 채 이곳 광장에 나타나 투쟁의지를 고취시키는 연설을 하곤 했다.
이렇듯 반이스라엘 저항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해온 알 콜라파 사원은 그동안 새로운 성전을 크게 짓고 있었는데, 이번 공습으로 인해 거의 완공 단계에서 큰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다. 1층이 거의 내려앉아 지하에 거대한 공간이 생겨났다. 바로 그곳에서 만난 한 이슬람 성직자는 “성스러운 사원을 공격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유대인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악한 존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돕는 유엔기구인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관(UNRWA) 창고도 이스라엘의 공습을 비껴가지 못했다. 현장에 가보니 타다 남은 구호물자들이 아직도 연기를 내뿜고 있다. 휴전이 이루어진 직후 가자 지구를 방문했던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격을 강하게 비난했었다. 현장에서 만난 UNRWA 소속의 한 실무자는 “UN 마크가 뚜렷이 달려 있음에도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받아 부서진 차량들을 바라보는 반 총장의 얼굴이 무척 어두웠다”고 전했다. UNRWA 관계자들은 “이스라엘군의 강압조치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UNRWA 대변인은 “난민촌을 파괴하고 점령지역의 민간인들을 강제이동시키는 강압조치들은 제네바협약의 규정을 위반하는 뚜렷한 전쟁범죄 행위”라고 이스라엘 정부를 대놓고 비난했다.
■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파괴된 이슬람 사원들.
그러나 이스라엘군의 생각은 다르다. 예루살렘에서 만난 이스라엘군 대변인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공격적 방어’라고 설명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쪽의 테러공격을 막으려면, 공격적 방어를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 우리 군의 판단이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번갈아가며 일시적 점령, 퇴각을 되풀이하고 있다. 언제든 필요에 따라 팔레스타인 거점들을 다시 점령할 이른바 ‘무료 입장권’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군사적 강공책을 편다 해도 이스라엘이 말하는 이른바 ‘테러의 하부구조’를 완전히 파괴할 수도 없거니와, 이스라엘의 국제적인 이미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번 전쟁이 터지기 전에도 가자 지구 곳곳에서 이스라엘군은 갖가지 만행을 저질러왔다. 탁 트인 시계를 확보한답시고, 그곳 농민들의 생업인 올리브 밭을 불도저로 갈아엎고 난민촌 주택들을 허물어뜨리곤 했다. 가자 지구 남쪽, 이집트와 국경을 맞댄 라파 난민수용소는 잇단 무장충돌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친 참혹한 현장이다. 이스라엘군 탱크가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이 파묻어놓은 지뢰를 건드려 폭파되자, 이스라엘군은 이집트로 통하는 무기 밀수 지하터널을 찾는다는 구실로 많은 집들을 허물었고, 이 일로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2004년 3월 이라크 팔루자에서 미국인 사설 보안업체 경호요원 4명이 죽음을 당하자, 미군이 팔루자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많은 목숨을 앗아간 상황과 똑같다. “이라크 팔루자에서 벌어진 일이 여기선 훨씬 전부터 일어났어요.” 가자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시파 종합병원에서 만난 한 팔레스타인 청년의 말은 가자 지역의 상황을 압축해 보여주는 듯했다.
같은 라파 지역 안에서도 서쪽 텔 술탄 마을의 피해는 특히 컸다. 그곳 알 무가이어 집 안에 가보니, 가족들이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집 옥상에서 빨래를 널던 15세 소녀 아스마와, 바로 곁에서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주던 11세의 동생 아흐메드가 대낮에 이스라엘 저격수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다. 그 저격수는 무슨 까닭에 이들 자매를 죽였을까. 어머니 스리야(43세)는 내내 그런 의문을 지우지 못했다. 어머니 스리야의 눈물을 뒤로 하고 다시 곳곳에 집들이 파괴된 거리로 나섰다. 한 가정집의 옥상에 올라가 보니, 보안장벽 너머 멀리 지중해변을 따라 세워진 유대인 정착촌들이 그림처럼 눈에 들어왔다.
라파 지역 주민들 대부분은 1948년 이스라엘의 이른바 ‘독립전쟁’ 과정에서 대대로 살던 집과 농토에서 밀려난 난민들이다. 그런 난민들이 다시 한 번 집을 잃은 셈이다. 그들이 임시로 묵고 있는 라파 초등학교 교실에서 만난 한 50대 후반의 여인은 “평생 동안 하도 험한 일들을 여러 번 겪어서 이제는 눈물도 안 나온다”고 했다. 그 여인의 얼굴에서 나는 일제 식민지배 아래서 눈물과 한숨의 세월을 보냈을 우리 어머니들의 얼굴을 보았다. 지난날 일제 식민지 시절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도 35년의 암담한 세월을 보냈지만, 팔레스타인은 훨씬 더 긴 세월을 고민 속에 지내는 중이다.
전쟁의 이미지만 볼 뿐, 고통은 모른다
가자 지구의 파괴현장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문득 이미 고인이 된 미국의 여류 작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을 떠올렸다. 손택은 미국 조지 부시 행정부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던 평화운동가였다. 그녀는 동유럽 발칸반도에서 보스니아 내전이 한창이던 1993년, 죽음의 공포와 절망에 빠진 보스니아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사라예보에서 사뮈엘 베케트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를 연극 무대에 올린 휴머니스트였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전쟁 중에 왠 연극이냐?”고 물으면,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방공호에 숨기만 하고, 식량과 물을 얻으려고 줄을 섰다가 폭격에 죽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극무대에 올렸다. 실제로 나는 몇 발자국 바로 앞에서 폭격이나 총알에 맞아 죽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봤다.”
1969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대체로 ‘희망’ 또는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끝 모르는 전쟁과 적에게 포위된 도시 속에서의 불안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손택이 연출한 그 연극 공연은 잠시나마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한줄기 희망의 빛을 비춰주었을 것이다.
한국에도 소개된 『타인의 고통(Regarding the Pain of Other)』의 저자인 손택은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전쟁의 이미지만 볼 뿐, 전쟁을 직접 겪는 이들의 고통을 잘 모른다”고 말했다. TV나 신문 등 활자매체에서 보는 전쟁의 이미지와 실제 전쟁상황 속에 갇힌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분명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손택은 하나의 예로, 공습현장에서 듣는 폭음 소리는 TV 화면으로 전달되는 폭음보다 1,000배나 강하다고 했다. 그래서 손택은 보도사진이 주는 이미지만으로는 전쟁의 실상이 어떠한지,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지 제대로 상상하기 어렵다고 여겼다.
손택은 많은 사람들이 전쟁 소식을 TV화면이나 보도사진을 통해 보면서도 그것을 나와는 상관 없는 일로 여기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TV나 신문에서 전쟁이란 끔찍한 이미지를 보면, 전쟁을 미워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터져도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경꾼이라 여긴다. 전쟁에 끼어들어 죽지도 않을뿐더러, 남을 죽이지도 않기에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전쟁은 참으로 소름 끼치는 것이니까’ 하며 TV 채널을 다른 데로 돌릴 뿐이다.”
손택의 말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 공습에 그대로 적용시키면 어떨까. 2009년의 첫 전쟁으로서 지구촌 사람들의 눈길을 모았던 가자 지구의 참상은 여러 보도사진과 TV 화면으로 지구촌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졌다. 그렇지만 가자 지구의 끔찍한 현장 상황을 두 눈으로 보고, 그곳 사람들의 가슴 저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야 손택의 말이 새삼 옳다고 느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여러 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지금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고통의 참모습을 보도사진과 TV 화면이 제대로 전달하기는 어렵다. 그저 작은 부분을 비출 뿐이다. 그리고 그런 사진들을 본 대부분의 시청자들이나 독자들도 그저 잠시 안타까움을 느끼다가는 곧 남의 일처럼 잊을 것이다.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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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김재명
국제분쟁지역전문기자. 지구촌 여러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각지의 유혈 분쟁을 취재 보도해왔다. 저서로 『한국현대사의 비극 : 중간파의 이상과 좌절』 , 『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 『석유, 욕망의 샘』 ,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등이 있다. 현재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 기획위원이며, 성공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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