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제1장 l
메추라기 농부와 과학자
유채와 밀밭으로 둘러싸인 돌로 된 농가는 허름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극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내가 오래된 우정을 되찾기 위해 이 고립된 지역에 들어온 것은 1998년이었다. 어쩌면 나 자신에 대한 무언가를 찾으려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어떤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것은 분명했다. 당시 나는 로버트 윌리엄스(Robert Williams)와의 재회에 한껏 들떠 있었다. 35년 만의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에 같은 생화학 실험실에서 대학원 시절을 보낸 후, 우리 두 사람의 삶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급격한 전환을 맞이했다. 무엇보다 밥[로버트]에게 일어난 변화가 놀라웠다. 왜냐하면 나는 과학자로 남았지만, 밥은 지금 노르망디에서 메추라기를 치는 농부가 되었으니 말이다.
밥 윌리엄스와 나는 1957년 하버드 대학에서 대학원 시절을 시작할 때 처음 만났다. 그는 태어나고 자란 파리에서 멀리 떠나왔다. 그는 그곳에서 미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데 반해, 우리 집은 학교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지지 않았고, 내가 태어난 케임브리지에 있는 마운트 오번 병원은 1마일 거리에 있었다. 밥은 과학에 깊이 몰두했다. 반면 나는 미래에 대해 확신이 부족했고, 정작 필요했던 과학에 대한 영감도 얻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과학이 실생활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내가 화학을 연구하며 지냈던 대학원 생활의 첫 해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밥이 내게 이런 제안을 해왔다. “내 지도교수인 로웰 헤이거와 이야기를 해보게. 내 생각에 자네는 그분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네.”
나는 당장 약속을 잡았다. 며칠 후, 헤이거의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나는 안쪽에서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똑딱 소리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마치 할아버지의 시계에서 나는 불규칙한 음향과도 비슷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잠깐 뜸을 들인 후 문을 두드렸다. 곧 “들어와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 안으로 들어간 후, 나는 그 이상한 소리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로웰은 책상 앞쪽에 문을 향하여 서 있었고, 그의 손에는 탁구채와 공이 들려 있었다. 문제의 소리는 공이 문에 부딪히면서 나던 것이었다. 로웰은 다음 시합을 위해 실력을 연마하고 있었다.
1950년대의 하버드 대학에서 이렇게 소탈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극히 형식적이어서 나를 부를 때에도 “벡위드씨”라고 꼬박꼬박 경어를 사용했으며 결코 존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들의 지위에 걸맞는 위엄 있는 행동이었다. 당시 하버드 대학의 일반적 분위기에 구속되지 않는 로웰의 개성은 참신한 변화였고, 그의 실험실은 긴장을 풀고 연구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내가 과학에 대해 그다지 열성적이지 못했던 데에는 내가 다른 실험실에서 겪었던 연구 환경도 관련이 있었다. 다른 실험실에서 학생들은 밤낮없이 실험에만 몰두해야 했다. 그래야만 교수들이 자신들의 출판 목록에 더 많은 논문을 덧붙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밥의 말이 옳았다. 나는 곧바로 화학에서 생화학으로 분야를 옮겨 로웰의 지도 하에 박사논문을 쓰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그후 수년 동안 밥과 나는 같은 연구실에서 박사 논문으로 쓸 연구를 수행했다. 그의 제안이 없었다면, 나는 더 이상 과학 분야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과학을 업으로 삼을 것인지 확신하지 못했다. 밥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가 과학자로서의 길에 매진하고 있고, 과학 이외의 다른 주제는 화제에 올리지도 않으며,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열성적으로 과학에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정말 과학 그 자체를 즐기면서 장시간 실험실에서 연구에 골몰했다. 로웰은 그에게 어떤 압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실험실 이외에는 다른 생활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과연 나도 그렇게 헌신할 수 있을까? 당시 우리를 알고 있던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나보다는 밥이 미래에 과학자가 될 사람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침내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를 얻은 것은 대학원 때였다.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에 있는 프랑수아 자코브(Francois Jacob)와 자크 모노(Jacques Monod)가 이끄는 프랑스 연구팀의 논문은 유전학적 접근 방식의 탁월성, 실험을 이끈 깔끔한 논리, 그리고 우아한 서술 양식으로 나를 압도했다. 당시 나는 유전학자가 아니었지만, 그 순간부터 유전학자가 되고 싶었다.
밥과 나는 박사논문을 끝내고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나는 파리의 우상들과 함께 연구하겠다는 목표를 계속 추구했고, 박테리아 유전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여러 실험실을 거쳤고, 버클리에서 프린스턴, 뉴저지, 그리고 영국의 런던과 케임브리지에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프랑수아 자코브에게 여러 차례 그의 실험실에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물었다. 마침내 1964년에 합류가 허락되었고, 박사후(post-doc) 연구 과정의 마지막 해에 파스퇴르 연구소에 도착했다. 한편 밥은 퍼듀 대학에서 세이머 벤저와 박테리아 바이러스 유전학을 연구했고, 유명한 생화학자 마리안 그륀베르-마나고와 함께 파리에 있는 물리화학 생물학 연구소(Institut de Biologie Physicochimique)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이 시기에 단 한 차례 밥을 만났다. 당시 나와 아내 바브라는 영국에 살고 있었다. 파스퇴리안(파스퇴르 연구소 연구원)이 되는 것 이외에 당시 내가 품었던 또 하나의 꿈은 구형 프랑스 차를 소유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전륜구동’인 시트로앵이었다. 윤기 있는 흑색의 시트로앵은 장 가뱅이나 리노 벤투라와 같은 40~50년대 프랑스 갱스터 영화 스타들만큼이나 유명했다. 운 좋게도 파리에 있던 밥의 사촌이 자동차 수리소를 운영했고, 그곳에 중고 ‘전륜구동차’가 한 대 있었다. 파리 여행에서 밥은 나와 바브라를 그의 사촌에게 소개해 주었고, 우리는 꿈에 그리던 자동차를 몰고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후 35년 동안이나 나는 밥을 만나지 못했다. 나는 우리가 과학을 한다는 사실 이외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과학의 영역에서조차 우리는 구체적인 관심사가 서로 달랐다. 나는 여전히 인생의 나머지 기간 동안 과학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연구실에서 붙어 지내며 빚어진 우정이 끝나 가고 있었던 셈이다.
1970년대 말엽에 어바나 샴페인에 있는 일리노이 대학으로 옮긴 로웰 헤이거를 찾아갈 때까지 나는 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로웰은 내가 마지막으로 밥을 만난 이후 그의 인생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려주었다. 그가 해준 이야기는 밥에 대해 내가 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인상을 산산조각냈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과학에 빠져 있던 한 남자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뒤흔들었다. 1960년대 말엽 밥은 파리에서 결혼해, 시골로 이주했다. 그 사실은 나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1년 후, 그들의 결혼은 파국을 맞았고, 과학에 대한 밥의 태도 역시 시들해졌다. 그는 실험실 연구원을 그만두고 상당 기간 동안 실업자로 지냈다.
로웰이 들려준 두번째 사건은 훨씬 더 놀랍고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1971년 밥은 결혼에서 얻은 딸 새러와 칠레로 건너갔다. 당시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권 하에 있던 칠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민들의 영양과 보건을 위해 국제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밥은 칠레의 광활한 해안을 적시고 있는 바다에서 새로운 식량원을 찾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와중인 1973년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폭력적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아옌데를 지지했던 칠레 국민들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을 뿐 아니라 아옌데 정부를 지원했던 외국인들 중 일부도 공격 표적이 되었다. 1982년에 발표된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 <미싱>(Missing) 은 이러한 운명에서 고통받았던 미국인의 이야기를 잘 표현하고 있다. 쿠데타가 일어난 후 로웰과 마리안은 밥으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기 때문에 혹시 그가 죽은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최소한 그의 과학자 동료들에게, 밥은 실종자였다. 그는 과학에 모든 것을 바친 것처럼 보였고, 정치 문제는 거의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그토록 변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과학을 버리고 그처럼 깊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나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변화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면, 나는 우리 두 사람의 삶에서 거울상처럼 전개된 상반된 측면뿐 아니라 둘의 공통점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 밥의 인생에 그토록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는지 좀더 일찍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밥이 그의 실험실을 영원히 떠났던 비슷한 시기에, 다시 한번 나는 과학을 계속할 것인지 주저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과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나의 과학 경력은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었고, 하버드 의대 교수이자 연구팀을 이끄는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과학이 오용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우려하고 있었다. 밥과 내가 똑같이 과학 연구를 유보하게 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는 1960년대 말엽이었다. 과학계는 당시 사회 전체를 들끓게 하던 소요사태와 절연되어 있지 않았다.
1969년, 우리 실험실은 박테리아인 대장균에서 유전자를 정제하는 기법을 개발하고 있었다. 우리는 최초로 생물체의 염색체에서 하나의 유전자를 완전히 분리했다. 정상 상태에서 그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들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는 실험실의 시험관 안에서 유전자를 정제한다면 유전자가 작동하는 방식을 알아 낼 수 있는 수많은 새로운 실험이 가능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우리가 개발한 것과 그 후속 기법들이 박테리아 이외의 다른 생물, 심지어는 사람의 유전자를 분리하는 방법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실험실의 연구자들은 우리가 거둔 업적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간 유전공학은 이제 과학소설(SF)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사람의 유전자 변화가 잠재적으로 건강상의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통제나 차별의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에 대해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는 당시 베트남전쟁과 ‘첨단기술 전투’, 즉 우리가 반대하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레이저와 같은 장치에 과학적 성과를 적용하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 무렵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연구가 오용될 가능성에 대해 점차 우려가 팽배했다.
유전자 분리에 대한 논문이 『네이처』에 실린 주에 우리는 기자회견을 열어서 우리가 했던 연구와 그 과학적 중요성을 설명하는 한편, 우리가 예견하는 위험을 경고했다.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이 기자회견을 계기로 나는 과학에서 내가 수행하는 역할을 고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사건 이후 나는 과학자와 대중 모두에게 새로운 유전학이 줄 수 있는 사회적 영향을 알리는 데 평생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듬해인 1970년에 나는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미국 미생물학회로부터 일라이릴리 상(Eli Lilly Award)을 수상했다. 덕분에 미생물학회 연례회의에서 수상 기념강연을 할 기회를 얻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제약산업의 행태를 비판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일라이릴리 사가 그 대표격이었다. 그런 다음, 나는 상금을 당시 뉴욕에서 체포되었던 13명의 흑표범당 당원들을 위해 흑표범당 무료병원에 기부했다. 당시 이들은 정부의 극심한 탄압의 주된 표적이었다(자세한 내용은 4장을 참조).
그후 나는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의 활동가가 되었다. <민중을 위한 과학>은 과학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파괴적인 목적에 이용되는 것을 폭로하기 위해 노력하는 급진적 과학자 단체였다. 나는 범죄행위에서 유전적 연관성을 찾으려는 시도, 대중들 사이에 퍼져 있는 사회생물학에 대한 인식, 사람의 행동과 사회 제도를 유전자와 진화라는 상(像)으로 설명하려는 과학 등을 둘러싼 대중 논쟁에 스스로가 깊이 연루되었음을 깨달았다. 1980년대에 나는 분자생물학의 발전을 돕기 위해 쿠바를 방문했고, 지금까지도 이러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것은 과학자로서의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밥을 발견한 덕분에 우리 둘은 서로 공통점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를 다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우연 덕분이었다. 1984년에 나는 과학 연구에 몰두해 있었고, 여전히 과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브르타뉴의 콩카르노라는 마을에서 내 관심과 가까운 유전학적 주제의 학술회의가 열렸다. 파리에 있는 친구를 방문한 후, 나는 몇 사람의 동료들과 여러 시간 동안 열차를 타고 콩카르노로 향했다. 우리가 영어로 나누는 대화를 듣고, 한 여성이 우리의 잡담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미국인이 분명했다. 우리가 과학자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자기 동생도 과학자였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가 하버드 대학에 있다는 사실을 알자 자기 동생도 1950년대에 하버드 대학의 생화학 분야 대학원생이었다고 말했다. “동생 이름이 어떻게 되지요?” “밥 윌리엄스!”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는 우연한 만남 자체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충격의 순간이 지나자, 그 다음에는 내가 그의 운명에 대해 알게 될 것이라는 공포스러운 깨달음이 밀려왔다. “밥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모두들 그가 피노체트 쿠데타 당시 살해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는 칠레에서 빠져 나와서 지금 노르망디에서 메추라기를 기르고 있어요.”
나는 언젠가 노르망디에 있는 밥을 찾아가려는 생각에 밥의 누이에게 그의 가족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파리 주소를 물었다. 그러나 정작 그를 찾아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아내와 나는 그 후로도 여러 차례 프랑스를 찾았다. 그러나 파리에 들른 다음에는 날씨가 좋으면 늘상 자전거로 남부를 향해 떠나곤 했다. 그 주소는 오랫동안 명함첩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그러다 1997년에 우리는 춥고, 비가 많은 북부 기후에 대한 우리의 나쁜 편견을 버리고, 브르타뉴와 노르망디에서 얼마간 머물면서 밥을 찾을 수 있으면 그를 만나보기로 작정했다. 그 무렵 나는 과거의 가족, 친구, 그리고 장소들과 다시 연결을 맺을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과거를 무시하고 건너뛰었던 것은 아마도 그러는 편이 나 자신에게 더 편안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오래 묵혀 두었던 파리 주소로 겉봉에 “윌리엄스 가족에게”라고 쓴 편지를 보냈다. 밥의 누이에게 1984년에 만났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어떻게 하면 밥을 만날 수 있을지 묻는 편지였다. 여러 달 후, 명함이 한 장 들어 있는 봉투가 배달되었다. 명함 한 면에는 두 마리의 메추라기 그림 바로 옆에 “비쉬니에르 메추라기”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뒷면에는 손으로 쓴 메모가 적혀 있었다. “자네를 만나면 무척 반가울걸세(꽤 오래전 우리가 알던 자네라면). 나는 지금 이 지역 읍장이고, 그 밖에도 지역의 여러 책임을 맡고 있어서 무척 바쁘다네.”
1998년 7월 바브라와 나는 브르타뉴에 있는 친구집에서 북쪽으로 차를 몰아 동프롱과 마옌 사이의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코세(Ceauce)라는 곳으로 향했다. 밥은 이곳의 읍장이었고, 비쉬니에르는 인근 마을에 편입되어 있는 시골의 밀집 가옥들 중 하나였다. 그것은 마치 지역의 대저택에 딸려 있는 과거의 농장들과 같은 모습이었다.
차도를 따라가자 양편에 오래된 석조 건물들이 있고 다른 두 면은 그보다 훨씬 크고 최근에 신축된 콘크리트 건물들로 에워싸인 안뜰 비슷한 곳으로 들어섰다. 새 건물들은 메추라기를 길러서 미식가들이 좋아할 법한 고급 식품들-메추라기 알, 훈제 메추라기 다리, 뼈 없는 살코기 등-을 만드는 곳이었다. 우리가 차를 몰고 들어서자 길가에 전형적인 프랑스 사람의 인상을 풍기는 땅딸막한 남자가 서 있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제대로 찾아온 건가? 나는 차에서 내려 머뭇거리면서 그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말을 시작하자 그가 바로 밥이라는 것을 알았다.
“프랑수아라고 부르게. 지금은 그렇게 부르니까.” 그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40년 전에 들은 프랑수아 로버트 필리페 윌리엄스(Francois Robert Phillipe Williams)라는 그의 정식 이름을 기억해 냈다[이후로는 ‘프랑수아 윌리엄스’로만 부르겠다]. 처음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오랜 세월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날 법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품었던 가정들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해 다시 알아 가면서 이런 거북함은 곧 사라졌다. 프랑수아는 아내 도미니크 그리고 두 아들 마조리와 케뱅을 소개했다(그는 칠레에서 돌아온 후 재혼을 했다).
우리는 돌로 지은 농장으로 들어갔고, 프랑수아는 카시스를 약간 섞은 배즙을 내놓았다. 그것은 동프롱 지방의 특산물이었다. 키르의 대용품인 이 노르망디 음료를 마시면서, 우리는 숱한 변화로 점철된 30년의 틈을 메우기 시작했다. 먼저, 나로서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험으로 가득찬 프랑수아의 가족 배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가 알기로 파리에 있던 미국 교회목사였던 그의 부친은 2차 세계대전 기간과 그 이전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미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목적은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로비였다. 그는 항상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지원하기 위한 물자를 가지고 돌아갔고, 나치 치하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망명자들을 도왔다. 이런 활동은 그에게 협조적이었던 포르투갈 주재 독일인 장교로부터 만약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면 총살형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후 여러 차례 프랑스로 되돌아갔다. 물론 그때마다 변장을 했다. 마침내 그는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피신했다.
프랑스로 여러 차례 여행을 하면서, 바브라와 나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의 역사, 그리고 유태인과 그들의 탈출을 돕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의 활동에 깊이 매료되었다. 특히 우리는 미국인 배리언 프라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 마르세유에서 활동했던 프라이는 저명한 지식인과 예술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을 나치 치하의 프랑스에서 보트를 이용하거나 피레네 산맥을 가로질러 탈출시켰다. 프랑수아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프라이도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우리 사이에 이어진 숱한 관계의 끈들 중 하나로, 우리는 두 가족 모두 배리언 프라이와 아는 사이라는 점을 발견했다. 프라이는 하버드 대학 시절에 같은 학교를 다닌 내 삼촌의 친구였고, 부모님들은 1930년대에 그들과 자주 카드를 즐겼다. 도피자들을 돕는 일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프라이와 프랑수아의 부친도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우리는 르 샹봉 쉬르 리뇽 마을을 방문했다. 그곳은 프로테스탄트 목사인 앙드레 트로메이가 교구민들을 설득해서 대부분 어린아이들이었던 5천에 가까운 유태인 피난민들을 보호해 준 곳이었다. 우리는 무척이나 엄혹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그처럼 용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위해 열 곳이 넘는 레지스탕스 박물관(Musees de la Resistance)과 레지스탕스 영웅들의 성지를 찾아갔다.
당시 프랑수아는 부친의 경험과 자신이 칠레에서 겪었던 경험을 비교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피노체트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그는 파리에 있는 가족들을 방문 중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칠레의 친구들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살생부에 올랐고, 그가 살던 두 곳이 불타 사라졌다는 전갈을 받았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변장을 하고 여권을 위조한 그는 여전히 새로운 정부에 저항하고 있던 사람들을 돕기 위한 물자를 가지고 칠레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위험이 너무 커서 그는 이 여행을 포기하고 다시 파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칠레에서 이루었던 모든 것이 파괴된 데 환멸을 느낀 그는 파리를 떠나 노르망디에서 농장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새로 결혼한 아내와 함께 가족을 꾸려 이 농장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내게는 왜 그가 과학을 그만두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았다. 프랑수아는 이렇게 답했다. “사실 나는 과학이 사람들에게 이로움보다 몇 곱절이나 많은 해를 끼친다고 확신하게 되었네. 나를 비롯한 소수의 과학자들이 이런 악용을 멈추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찾지 못했어. 내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과학을 그만두는 것밖에 없었네. 그렇게 하면, 최소한, 과학의 해로운 사회적 결과에 기여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그의 답에 무척 놀랐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시기에 프랑수아가 똑같은 생각을 발전시켰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나와 내 실험실 동료들이 1969년에 열었던 기자회견, 일라이릴리 상 수상, 흑표범당 사건, 생물학결정론을 비판했던 일, 그리고 쿠바 방문 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선택을 했지만 정치적 관점뿐 아니라 과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까지 비슷한 생각을 발전시켜 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껏 기분이 고양되었다. 주말을 함께 지내면서, 우리들은 새로 발굴한 공통점과 그것이 주는 또 다른 시사점들을 확인하면서 간간이 흥분감에 들떴다. 어색함은 사라졌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처음에 조심스레 서로에게 접근했던 까닭은 나는 프랑수아에 대해 편협한 과학자의 인상을 가졌고, 프랑수아는 내가 계속 과학에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 그처럼 강도 높은 정치활동을 벌였고, 그런 이유들로 인해 과학에 환멸을 느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입장에서, 그가 아는 한, 본질적으로 위험이 내재된 과학 연구에 기꺼이 종사하고 있는 사람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었을까? 토론을 거친 후, 그는 의문의 요점에 도달했다. “만약 과학을 떠나지 않으면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나는 계속 과학에 남았겠지.”
프랑수아는 우리를 안내해서 코세를 한 바퀴 돌았다. 그는 칠레에서의 경험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지역 차원의 활동으로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업들이 떠나고 마을 주민과 농부들이 큰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퇴락해 가는 마을의 읍장직을 자신이 왜 고려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코세로 중소기업을 유치하고, 마을 시설을 개선하면서(노인정, 체육 시설, 야영장, 오솔길과 낚시할 수 있는 연못이 있는 공원을 조성하는 등), 그는 쇠락으로 치닫던 마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가 거둔 성공 덕분에 그는 동프롱 지역 읍장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비쉬니에르 농장으로 돌아와서, 프랑수아는 우리를 두 동의 농장 건물로 데려가서 자신이 어떻게 메추라기를 기르는지 보여 주었다. 그가 처음 노르망디에 도착했을 때, 다른 메추라기 농부들은 자신들의 비결을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프랑수아는 과학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받았던 과학 훈련이 훗날 대단한 성공을 가져다 준 기법들을 고안해 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머문 마지막 날, 우리는 메추라기 만찬을 대접받았다.
프랑수아를 만난 후, 나는 스스로에게 숱한 정치적·개인적 물음을 던졌다. 3년 동안이나 바로 곁에 붙어서 지냈음에도 프랑수아의 가족 배경에 대해 어떻게 그처럼 모를 수 있었을까? 나 같은 사람이 계속 과학을 하면서 과학과 사회의 쟁점들에 대해 발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과를 과장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더 나은 선택을 한 것인가, 아니면 둘 다 바람직한 선택을 했는가?
내가 이 책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비쉬니에르 농장에서의 만남, 그리고 그 후 당시를 회상하며 되살려 낸 열정 덕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과학에 매료되었는지, 그리고 그 매료와 함께 과학의 결과에 대한 우려가 함께 자라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사회 행동이 거의 과학의 규범이었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내가 사회와 개인에 대해 품었던 가정이 변화하게 된 이야기이다. 그것은, 내 생각에, 유전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생각할 때 맞닥뜨려야 할 주제들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과학자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과학계 이외의 세상과 맺는 관계에 대한 것이다.
(제1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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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존 벡위드 (John Beckwith)
1961년 생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65년에 하버드 의대의 미생물학 교수가 되어 현재까지 재직하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박테리아 유전학으로 유전자 발현, 단백질 분비 기제, 막 단백질의 구조와 기능, 단백질과 세포 분열에서의 이황화결합 형성 등을 주제로 3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1969년부터는 과학에서의 사회운동에도 정력적으로 참여해 1960~70년대 미국 급진 과학운동의 산실이었던 〈민중을 위한 과학〉 그룹에서 활동했고, 특히 사회생물학이나 IQ논쟁, XYY논쟁 등에서 드러난 생물학적 결정론에 맞서 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유전자 스크리닝 연구그룹〉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유전자 남용과 악용이 가져올 수 있는 ‘유전자 차별’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 왔다.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1990년대에 들어와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사회적ㆍ법적ㆍ윤리적 함의(ELSI)를 다루는 실무그룹 위원으로서 유전자 검사가 초래할 수 있는 차별이나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 등을 제기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도 했다. 과학 연구논문 외에 지금까지 ‘과학과 사회’를 주제로 한 90여 편의 글을 발표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홈페이지 http://beck2.med.harvard.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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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이영희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과학기술과 사회, 과학기술과 시민 참여, 과학기술의 민주화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과학기술의 사회학: 과학기술과 현대사회에 대한 성찰』(2000), 『과학기술ㆍ환경ㆍ시민참여』(2002, 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과학학의 이해』(2004, 공역) 등이 있다.
김동광
과학 저술가. 고려대 과학기술학연구소 연구교수. 과학기술과 사회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번역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과학기술의 민주화를 지향하는 시민단체인 〈시민과학센터〉 운영위원이기도 하다. 지은 책으로는 『생명공학과 인간의 미래』(2007, 공저), 옮긴 책으로는 『인간에 대한 오해』(2003), 『DNA 독트린』(2001),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2008) 등이 있다.
김명진
미국 기술사를 전공. 서울시립대와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원래 전공인 과학기술사 외에 과학 논쟁, 과학 언론, 대중의 과학 이해, 과학 연구윤리 등에 관심이 많다. 지은 책으로 『대중과 과학기술』(2001, 편저), 『야누스의 과학』(2008)이 있으며, 옮긴 책으로 『인체 시장』(2006, 공역), 『디지털 졸업장 공장』(2006), 『닥터 골렘』(2009, 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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