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제1장 l
선결적 전제
러시아 문화의 종합적 이해
서론의 성격을 담고 있는 이 장에서는 러시아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기에 앞서 문화 텍스트를 읽는 이론적 틀을 간략하게 제시하며, 이러한 틀을 바탕으로 러시아 문화에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의 기호학적 모델을 설정해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은 이 책의 주제인 러시아 문화와 예술의 구체적 내용을 전개시켜나갈 순서와 방법론의 성격을 제시하는 동시에 러시아 형식주의 문학 연구 이후 체코와 프랑스 구조주의를 거쳐 1960년대 후반부터 형성되는 ‘모스크바-타르투’ 기호학파의 문화 연구 동향 또한 반영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문학 이론’과 ‘문화 기호론’ 그 자체의 내용을 담은 별도의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서론에 이 같은 전제를 제시하는 이유는 러시아 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시야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이 장은 서론이지만 마지막 결론 대신 읽어도 무방하다.
1. 문화를 바라보는 눈─체계와 관점의 종합
문화를 바라보는 눈
물질적 측면이 강조된 문명civilization을 발전시키는 인간의 정신적 활동으로서 ‘경작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문화culture’는 ‘자연nature’과 구별되는 인간의 지식과 정신적 행위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문화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에서 말하는 ‘문화文化’는 좀 더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 ‘문文’이라는 글자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존재와는 달리 ‘색을 교차시켜 얻어낸 어떤 무늬나 모양’을 의미하므로, ‘문화’는 인간이 무늬를 놓는 인위적 행위의 종합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엘리아스가 『문명화 과정』에서 말하는 개인적 행동 양식들도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또한 기능적인 측면에서 볼 때 문화는 ‘인간이 환경(자연)에 적응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며’, 공동체의 구성원들 속에서 ‘살아가는 수단의 집산’으로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환경 적응 체계로서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자연, 지리, 기후 등과 같은 원초적인 요소들은 주로 한 문화권의 ‘의식주’ 체계를 형성한다. 일정하게 구조화되는 개인적 성향, 다시 말해 ‘아비투스habitus’와 같은 마음의 습관mental habit도 여기서 형성된다. 각 개인의 행동 양식을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사회 혹은 문화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 방식과 행동이 여기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의 기층적 요소로서의 ‘의식주’와 같은 환경 적응 체계는 러시아의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Jurij Lotman; 1922~1993)의 기호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영어, 한국어, 러시아어 등등의 ‘자연 언어’와 같은 ‘제1차 모델링 시스템primary modelling system’에 해당한다. 자연 언어란 문화 형성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재료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제1차 모델링 시스템’을 바탕으로 인간은 상호 소통을 하고, 사회나 공동체를 구성하며, 구성원들은 개인과 사회, 개인과 공동체 내부에 추상적 ‘규범’을 만든다. 우리의 삶은 바로 이러한 규범 체계를 하나의 전통으로 계승하며 그 속에서 문화를 만들면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소쉬르의 용어를 빌린다면 실제의 삶인 ‘파롤parole’과 대비되는 ‘랑그langue’의 규칙을 설정하여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이데올로기 혹은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랑그’가 일정한 규칙의 문법 체계라면 ‘파롤’은 그 문법 체계를 바탕으로 언어를 실제로 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처럼 현실의 실제적 삶은 그것을 통제하는 규범으로서의 문화적 ‘랑그’와 서로 교직된다. 소쉬르의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 문화인류학자 말리놉스키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인 가족, 친족, 혼인제도가 한 문화권 내에서 ‘랑그’처럼 형성되며, 더욱 고차원적인 정치, 경제, 교육, 법 제도가 그것의 상부 구조로 체계화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문화권 내의 고유한 ‘사고방식’, 즉 ‘세계관’이 형성되는 것이다. 로트만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것은 ‘제1차 모델링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문화의 ‘제2차 모델링 시스템secondary modelling system’화가 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관점을 비유적으로 원용하자면 문화는 ‘날 것’에서 ‘익힌 것’으로 전환되는 것이며 그 익히는 방법의 다양한 차이들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는 기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2차 모델링 시스템’이 문화권 내부에서 더욱 세분되면서 정의·명예·도덕·미·종교·윤리·문학·예술과 같은 문화의 추상적 가치체계들이 등장하게 되고, 이러한 가치체계들은 다양한 장르의 표현 출구를 통해 외화된다. 에른스트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는 이와 같은 문화적 표상 매체들의 다양한 장르는 내면의 무엇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외면화될 때 인간 스스로가 선택하는 ‘상징적 형식’들이고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상징적 동물, 즉 ‘Animal Symbolicum’이라고 말한다. 이제 인간은 이러한 상징적 형식과 상징을 통해 정의되는데, 카시러는 이것이 바로 인간 문화에 대한 철학적 규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로트만이 말하는 ‘제2차 모델링 시스템’이나 카시러의 ‘상징적 형식’은 이러한 의미에서 문화의 정의에 대한 접근 방법과 개념을 표현하는 용어상의 차이만이 있을 뿐 여기서 함축하고 있는 이 둘 사이의 본질적인 의미는 거의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는 인간이 ‘살아가는 정신적 물질적 수단의 집산’으로서 그 역사적 과정의 시간적 변화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체로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문화는 역사성을 지니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 집단의 ‘문화적 유전자’를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 지니고 있다. 과거의 문화적 현상들은 오늘날의 문화적 속성을 특징짓는 동인이며 이것은 동시에 다가올 미래의 문화적 현상의 일부분을 구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의 시간적인 생명성은 유기적 생명체처럼 문화를 구성하는 다른 부분들과 상대적인 ‘관계’를 맺으며 시간의 변화 속에서 창조, 전래, 수용을 거치는 역동적인 ‘동일성과 차이’, ‘동화’와 ‘이화’의 상호 작용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로트만은 이러한 문화의 속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문화를 ‘집단적 기억’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류가 역사를 통해 이루어놓은 생산(물질)과 정신(관념)의 사회적 총체이며 그것이 서로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유기적 총체organic whole’이다. 각각의 문화적 요소들은 전체를 구성하기 위한 부분적 기능을 담당하며, 부분과 전체는 상호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자연히 ‘문화를 보는 눈’은 대상에 대한 분석과 종합을 바탕으로 하나의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문화는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유기체’로서 시간의 변화에 따라 문화 그 자체가 담고 있는 내용의 의미는 변화를 거치게 되지만 동시에 그 내용의 고유한 동일성은 간직하고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문화는 시간의 변화에 따라 그 시대의 문화적 내용이 외부적 영향과 내부적 요인에 의해 변화를 겪지만 러시아 문화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징으로서의 동일성은 항구적 요소가 된다. 문화는 자체로서의 ‘동일성’과 변화로서의 ‘이타성’과 ‘차이’를 공유한다. 달리 말해 문화는 자기 내부에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변증법적 통일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화는 변하지 않는 특성들에 대한 ‘공시적 구조’와 변화를 거치는 역사적 요소들의 ‘통시적 체계’들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수직으로서의 통시와 수평으로서의 공시적 교차점에 문화의 모든 현상들이 위치하는 것이다. 문화는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공시와 통시적 관점의 종합인 ‘체계들의 체계system of systems’라는 그물을 통하여 포착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시대의 문화 구조 혹은 문화적 특성이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면 그러한 체계가 중첩된 역사적 변화는 ‘체계들의 체계’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9~13세기 키예프 루시 시대의 문화 현상들의 공시적 구조는 13~15세기 몽고 타타르족의 지배, 15~18세기 모스크바 시대의 러시아, 18~20세기 페테르부르크 시대의 러시아라는 각각의 문화 구조가 통시적으로 중첩되면서 동일성 속에서 역사적인 변화를 거칠 때, 그것은 체계들의 체계가 되는 것이며 통시적 특성을 이미 자신 속에 내포한 것에 다름 아니게 된다.
문화의 역학
유기체로서의 문화가 지닌 생명력은 일반적 ‘보편성’과 개별적 ‘특수성’의 융합과 조화를 통해 더욱 역동적이 된다. 역동적이라는 말은 문화가 타자로서의 이질적인 것을 수용하면서 더욱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것이 되며 동시에 자신의 고유성을 보존하는 유기적 힘을 얻게 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보편성이란 타자를 객체로서가 아니라 나와 동등한 또 하나의 주체로 간주하면서 일반적이며 다양한 상대성을 수용하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말한다. 이러한 보편성에 대하여 개별적 특수성은 나와 타자 사이의 질적 차이를 전제로 한 개별자만의 고유한 속성을 의미한다. 문화와 문명의 발전은 이러한 보편과 특수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유지되는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팔레올로그 시대의 비잔티움 문화는 그리스도교 문화라는 당대 서구의 보편적 이데올로기를 지중해적 동방 문화의 특수성과 결합하여 가장 번성한 문화를 생산하였고 러시아 문화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모더니즘 문화는 타자로서의 ‘모더니티’라는 서구 문화의 시대적 보편성을 수용하면서 정교와 슬라브주의, 그리고 인텔리겐치아와 같은 러시아적 특수성을 여기에 조화시키며 러시아 문화를 개화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성과 특수성의 조화가 균형을 잃거나 한쪽으로 경도되었을 경우에 그 문화의 역동성은 쉽게 상실되고 생명력을 더 이상 연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 시대의 보편적 이데올로기에만 함몰되어 자신의 개별적 특수성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도 그 문화는 유기적 총체성을 결여한 타동성의 문화로 전락하게 된다. 특히 이러한 예는 20세기 말의 주요 이념이 되었던 ‘세계화globalization’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자기 고유의 특수성인 개별적인 정체성을 간과하고 시대의 보편적 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와 주체 없는 민주주의만을 수용하는 세계화 정책인 경우, 그 세계화는 특수성과 고유성을 상실한 추상적 성문법成文法에 다름 아니게 된다. 즉 특수한 개성을 상실한 보편성인 까닭에 베르그송적인 창조적 약동으로서의 에너지를 상실한 ‘복제 문화’ 혹은 주체가 없는 텅 빈 ‘인형의 문화’만을 양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순적이지만 보편과 특수의 균형을 위해 문화는 그 스스로 ‘이화異化’와 ‘동화同化’ 작용을, 그리고 ‘원심력과 구심력’을 수행하는 유기적 생명체가 되어야 한다. 주체인 나와 ‘같음’과 나와 ‘다름’을 수용하고 인식하며 그것의 평형 상태와 자기 조직화를 유지할 때 그리고 원심력의 영향과 구심력의 수용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문화는 생명력을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음과 다름’을 넓은 의미에서 ‘주체와 타자’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주체와 타자가 서로를 객체로서가 아니라 상호주관성처럼 동등한 주체로 파악하고 균형을 이룰 때 문화는 자생성을 획득하고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Vladimir Solov’yov; 1853~1900)가 말하는 총체적 ‘전일성all-unity’을 실현하게 된다. 문화의 전일성은 결국 다닐렙스키가 말하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unity in diversity’을 형성하는 정신적이자 물질적인 메커니즘의 하나가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로트만의 개념을 빌리면 문화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이며 미하일 바흐친(Mikhail Bakhtin; 1895~1975)의 말처럼 ‘궁극적인 대화’의 모델이다. 결국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카시러나 말리놉스키가 말하듯 인간과 인간들의 상호성을 이해하는 것이고, 그것의 체계화는 따라서 ‘철학적 인류학’ 또는 ‘문화인류학’의 성격을 반영하게 되는 것이다. 러시아 문화는 유럽의 변방이라는 지역적 특수성과 유럽 대륙의 보편적 문화 사이의 길항 작용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려는 ‘통일성’의 원리를 항상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상정하고자 한다. 그 통일성의 원리가 중세의 모스크바 러시아에서는 성스러운 러시아의 추구로, 근대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에서는 유럽적인 러시아의 추구로, 그리고 소비에트 러시아 시대에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추구로 나타나곤 했다.
(중략)
3. 러시아 문화의 연구 동향
러시아 학자들이 러시아 문화를 구체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 자신들의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러시아 이념russian idea’의 문제가 대두되고,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미래가 서구와 슬라브라는 두 개의 가능성 중 어느 것에 달려 있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면서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셸링과 헤겔의 영향을 받은 표트르 차다예프(Petr Chaadaev; 1794~1856), 그리고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아널드 토인비에 비견되는 니콜라이 다닐렙스키(Nikolaj Danilevskij; 1822~1885)를 들 수 있다. 서구주의자이기도 했던 차다예프는 『철학 서한』(1829)에서 ‘러시아가 유럽도 아니고 동양도 아닌 국가이고 전통도 없으며, 러시아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민족’이라고 러시아의 문화적 정체성을 비판했다. 다닐렙스키는 『러시아와 유럽』(1869)에서 문화를 하나의 역사적 유기체로 파악하며 세계의 문화를 10개의 유형으로 분류했는데 이러한 문화 유형 분류는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에 영향을 미쳤다. 다닐렙스키는 문화의 구성원리인 ‘다양성 속의 통일성’에 주목하면서 자신이 분류한 슬라브 문화의 역사적 유형 속에서는 러시아가 모든 슬라브 민족들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슬라브주의적인 관점을 보던 다닐렙스키 이후에 콘스탄틴 레온티예프(Konstantin Leontiev; 1831~1891)와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가 19세기 말, 러시아의 문화적 특성에 대해 구체적인 방법론과 이론적인 틀을 마련하며 분석하였다. ‘러시아의 니체’로도 간주되는 레온티예프는 『러시아와 슬라브주의』(1887)에서 문화를 살아 있는 유기체에 비유하면서 발아기·개화기·쇠퇴기의 3단계로 구분하고 유럽 문화의 개화기는 중세였으며, 근대의 서구 문화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이어서 러시아 문화는 러시아가 아직 문화적 단계에까지 도달하지 못했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독창성을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레온티예프는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러시아는 소멸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러시아 문화 자체의 고유한 특수성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일성vseedinstvo’을 자신의 통합적 세계관의 방법론이자 그 내용으로 삼고 있는 솔로비요프는 『러시아의 이념』(1888)에서 전 세계의 역사 속에서 러시아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천착했고 인류를 ‘사회적 유기체’로 파악하면서 러시아는 이러한 유기체 속에서 ‘신정神政’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솔로비요프가 생각하는 이러한 임무는 동양과 서양의 종교적 도그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만국 공통 교회’를 실현하여 그곳에서 인류는 공동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20세기 초 러시아 종교 철학 사상과 문화 연구에 대해 탁월한 업적과 통찰력 있는 분석을 보여주었던 니콜라이 베르댜예프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원과 의미』(1837)에서 러시아 정신은 부조화와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것은 러시아 문화의 동방적 요소와 서방적 요소 사이의 알력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러시아의 민족정신은 정교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 속에서 만들어졌지만 그 이면에는 러시아의 광대한 대지와 결합되어 있는 ‘자연stikhija’적 요소, 다시 말해 범신론적인 자연관이 이 정교적 금욕주의와 함께 자리 잡고 있다고 베르댜예프는 말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망명하여 1926년 이후에는 파리에 거주하던 베르댜예프는 『러시아 이념』(1946)에서도 러시아가 거대한 동양과 서양이라는 이 두 세계를 자신 속에 통합하고 있지만 이 두 개의 원리는 항상 적대적이고 대립적이며 이로 인해 러시아인은 중용을 모른 채 종종 극단으로 치닫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개의 모순된 원리 중 하나는 디오니소스적인 ‘자연주의적 이교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정교의 ‘금욕주의적 수도원주의’의 신앙심이라고 베르댜예프는 밝히면서 러시아 문화는 근본적으로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이며 허무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베르댜예프와 같이 러시아 망명 학자들인 니콜라이 로스키(Nikolaj Losskij; 1870~1965)는 『러시아 민족의 특성』(1957)에서 러시아 문화를 러시아인들이 지닌 의식 구조 속에서 조명하였으며, 레프 카르사빈(Lev Karsavin; 1882~1952)은 『동양, 서양 그리고 러시아 이념』(1922)에서 러시아의 국가 체제의 성격에 따라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문화적 특성을 언급하였다. 특히 카르사빈은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Nikolaj Trubetskoj; 1890~1938), 게오르기 플로롭스키(Georgij Florovskij; 1893~1979) 등과 같은 망명 학자들과 함께 소비에트 해체 이후 오늘날의 러시아에서도 새롭게 거론되고 있는 ‘유라시아주의evrazijstvo’를 주장하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1920년대 서구 유럽의 망명지에서 결성된 러시아의 유라시아주의자들은 러시아가 서구도 아니고 동양도 아닌 유라시아라는 독창적인 대륙 국가로서, 러시아적인 사회 공동체는 조화로운 개성들의 합일체를 실현할 수 있는데, 여기서 정교가 다른 비그리스도교적 민족 문화와 적대적인 대립 관계를 보일 것이 아니라 그들과 상호 공존할 수 있는 통합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어떤 하나의 종적 문화를 정의하는 고착적인 요소가 아니라 다양한 종교 문화적 원리들을 조화롭게 통일시킬 수 있는 발효소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유라시아주의자들의 관점이 소비에트 해체 이후 오늘날의 러시아에서 다시금 반추되고 있는 것은 러시아의 실추하는 위상을 극복하고 중앙아시아에서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구 소연방국가들과의 결속을 다질 수 있는 이데올로기 체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 문화학자였던, 알렉세이 로세프(Aleksej Losev; 1893~1988)과 드미트리 리하초프(Dmitri Likhachev; 1906~1999)는 특히 러시아 고대 문화와 미학에 관해 많은 연구서를 출판했다. 로세프는 고대 그리스 철학과 미학 사상에서부터 러시아 근대 문화의 신화와 상징적 성격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저작을 남긴 철학자이자 미학자였고, 리하초프는 고대 문학을 연구하던 문학 연구자였으나 블라디미르 베르나츠키(Vladimir Bernadskij; 1863~1945)의 ‘호모스피어Homosphere’와 ‘생물권Biosphere’과 같은 개념의 영향을 받고 러시아의 ‘문화 생태학’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던 문헌학자였다. 이들 가운데 근래에 들어와 러시아 문화 연구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 업적을 남긴 인물로 에스토니아 타르투 대학 교수였던 유리 로트만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형식주의의 ‘체계’라는 개념을 수용하면서 구조주의 시학 분야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던 로트만은 1960년대에 들어와 보리스 우스펜스키, 토포로프, 뱌체슬라프 이바노프 등과 함께 ‘모스크바-타르투 기호학파’를 결성하여 러시아 문화의 유형 분류만이 아니라 러시아 문화의 기호학적 모델을 만들며 체계적으로 러시아 문화의 다양한 현상들을 분석 종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로트만은 소쉬르와 야콥슨, 그리고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아 ‘문화 기호학’의 이론 체계를 세우고 있다. 그에게 문화란 ‘집단적 기억’의 체계이고 이러한 체계는 ‘커뮤니케이션 체계’인 까닭에 야콥슨이 말하는 커뮤니케이션의 ‘코드와 메시지’, 소쉬르가 말하는 ‘랑그’와 ‘파롤’의 개념들을 수용하여 ‘모델링 시스템’ ‘텍스트’ ‘코드’ 등의 개념으로 문화를 분석하고자 한다.
1990년대에 들어와 소비에트가 해체된 뒤 러시아의 현실에 나타난 여러 병적 징후들을 러시아 문화의 포스트모던적 경향으로 간주하며 그러한 경향의 근원을 일리야 카바코프, 에릭 불라토프, 드미트리 프리고프 등의 1970년대 개념주의 예술에서 찾는 미하일 옙슈테인(Mikhail Epshtein; 1950~)과 러시아 아방가르드들의 예술적 프로젝트에서 정치적 성향을 소비에트의 정치적 프로젝트에서 예술적 경향을 추적하는 보리스 그로이스와 같은 인물들은 러시아 외부에 거주하는 러시아 현대문화 연구자들이다. 옙슈테인은 러시아 현대 문화의 포스트모던적 경향의 자생성과 키치적 요소를 ‘유로지비’와 같은 정교의 고행 수도승의 세계관과 비교하기도 하며 그로이스는 불라토프와 카바코프의 탈소비에트적인 예술관에서 데리다의 탈로고스 중심주의적 경향성을 읽어내기도 한다.
1990년대 이후 러시아에서도 러시아 문화만이 아니라 세계화의 추세에 맞추어 일반적인 문화 연구를 다루는 ‘문화론kul’turologija’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고 있으며 문화론의 연구 경향은 앞서 언급한 대로 문화를 유기적 체계로서 파악함과 동시에 그러한 유기체를 효과적으로 분석하며 동시에 총괄적으로 종합할 수 있는 방법적 체계들을 도입하고자 하고 있다. 러시아 문화 연구의 경우 고전에 속하는 P. M. 밀류코프의 『러시아 문화사 개설』(1937)을 필두로 제임스 빌링턴의 『이콘과 도끼』(1970), 슈피들릭의 『러시아의 이데아』(1982), 그리고 I. V. 콘다코프의 『러시아 문화사 서설』(1997)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문화 연구서들은 음악, 미술, 건축, 종교, 문학, 회화 등등의 다양한 장르를 공시와 통시의 유기적 관점 아래에서 러시아의 정체성을 규명할 수 있는 통일된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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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이덕형
성균관대학교 러시아어문학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학원 비교문화 협동과정에서는 종교문화론과 비교문화사상론을 강의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이콘과 아방가르드』, 『빛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천년의 울림 : 러시아 문화 예술』, 『비잔티움, 빛의 모자이크』 등이 있고 러시아-비잔틴 이콘 예술에 관한 소설인 『검은 사각형』을 출판했다. 옮긴 책으로는 『죽음의 집의 기록』,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 민중문화』 등이 있고, 논문으로 「모순의 통일성-바흐친의 경우」, 「환유적 이타성의 서술체계」, 「러시아 문학의 포스트모던과 부정신학」, 「카톨리코스의 문화적 원리와 모자이크적 사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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