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프롤로그 l
자동차가 드문 지방도로 아래 배수로에서 한 남자가 죽은 채 발견됐다. 부검을 해봐야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있겠지만, 주검을 지방도로 아래 배수관에 은폐하려 했다는 점에서 살인의 냄새가 짙었다. 여러 차례 타격당한 듯 주검은 외상이 심했다. 자동차에서 떨어져 나온 플라스틱 조각과 사망자가 타고가던 오토바이 조각으로 추정되는 파편들이 도로에 흩어져 있었다. 사망자의 오토바이는 도로 위쪽 숲에서 발견됐다. 무거운 오토바이를 도로 위 숲으로 끌어올린 것으로 볼 때 단독 범행은 아닌 듯했다.
야간 뺑소니 사건으로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단순 뺑소니로 보기에는 수상한 점이 많았다. 우선 시신을 지방도로 아래 푹 파인 배수관에 유기했다는 점, 신분증을 없애 사망자의 신분을 감추려 했다는 점, 그 시간에 주로 가게를 지키던 사망자가 늦은 시각에 오토바이를 타고 나갔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았다. 단순 뺑소니 사고라면 경황이 없어 도망치기 바빴을 텐데 시신과 오토바이를 유기하고, 신분증을 없앤 것으로 보아 작심한 사건 같았다.
사망자의 신원은 금방 파악됐다. 엄시헌. 이 소읍에서 술집 겸 도박장을 삼십 년 가까이 운영해온 예순여덟 살의 남자로, 이 일대 주민은 누구나 알 만한 사람이었다. 술집과 도박장을 운영하다 보니 엄시헌은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려 여러 차례 경찰 조사를 받았고, 몇 차례 고소고발 사건의 중심에 서기도 했지만, 별 혐의 없이 풀려난 것으로 밝혀졌다. 지은 죄가 없었다기보다 그가 경찰과 맺은 인연이 끈끈했다. 이곳 경찰서장을 거쳐 간 사람들 중에 사망한 엄 씨와 친분을 맺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엄시헌은 명절 때 빼놓지 않고 떡값을 돌렸고 말단 순경의 경조사까지 일일이 챙겼다. 그런 인연 덕분에 엄 씨는 여하한 사건에 휘말리고도 잘도 빠져나갔다.
엄시헌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은 많았다. 죽여버리겠다고 악을 썼던 사람도 여럿 있었다. 엄시헌의 술집이자 도박장에서 재산 날리고, 인생 망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범인일 가능성은 낮았다. 최근에는 비교적 도박장이 한산했고, 원한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고향을 떠나고 없었다. 지난해 연말 이곳 김천 경찰서로 전근 온 박 형사는 이 사건이 뺑소니를 위장한 살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사망자는 상식 이상의 사망보험에 가입해 있었다. 뺑소니로 보험금을 타내고, 그 재산까지 모조리 차지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박 형사는 엄시헌의 법정 상속인을 조사했다.
사망자의 법정 상속인으로는 엄종석, 엄종세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엄종석은 여러 가지 질병으로 벌써 이십오 년 가까이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박 형사와 통화한 담당 의사는 엄종석은 자신이 누군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상태라고 했다. 박 형사의 흥미를 자극한 사람은 둘째 아들 엄종세였다. 그는 대기업 부장 출신으로 몇 달 전 퇴사한 것으로 돼 있었다. 내막을 알아보니 자발적 퇴사가 아니라 일종의 해고였고 몇 달째 직업 없이 노는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어쩌면 회사로부터 프로젝트 실패에 따른 거액의 손해배상 피소 위기에 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회사의 경리 담당자는 아직 어떤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손해배상 소송 가능성이 있다고 확인해주었다.
박 형사는 정확한 사인을 파악하기 위해 부검을 요청했다. 더불어 최근 사망자와 다툼을 벌였다고 알려진 몇몇 사람과 둘째 아들 엄종세, 맏아들 엄종석, 또 최근까지 엄시헌과 가깝게 지낸 장기풍의 행방을 추적했다.
l 아들 엄종세 l
아버지의 부음을 받은 것은 이른 아침이었다. 나이로 볼 때, 또 자세히 모르지만 건강상태로 볼 때 아버지의 죽음이 의외이기는 했다. 그러나 꽃은 피고 지고, 사람은 나고 죽는 법이다. 엄종세는 슬프거나 울컥한 기분에 젖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자신이 치워야 할 다 먹은 밥상에 불과했다.
실직한 그에게 바쁜 일은 없었다. 일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하루하루 지루하고 불편했다. 회사 일로 외국출장 중이거나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었다면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이 난감하고 성가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 일이 없어져버린 지금 그에게 아버지의 장례는 자동차 정기검사 같은 거였다. 잊고 지내지만 시간이 되면 거쳐야 하는 의례적인 절차 같은 것 말이다. 엄종세는 기계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침 일찍 전화를 낸 형사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의심이 배어 있었다. 일상을 범죄와 범법자들 사이에서 보내다 보니 습관적으로 그러는 것인지, 특별히 자신에게 어떤 혐의를 두고 있기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사망한 엄시헌 씨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엄 선생이더군요.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습니까?”
뒤의 엄 선생은 엄종세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아버지와 제가 통화를 하다니요?”
최근에 아버지와 통화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엄종세는, 통화한 기억이 없는데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러나 형사는 어젯밤, 그러니까 엄시헌 씨가 사망하기 두 시간 전에 생애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말했다.
엄종세는 근래에 기억력이 많이 떨어졌음을 종종 느꼈다. 회사를 그만두고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할 일 없이, 그렇고 그런 날들을 지내다 보니 굳이 기억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일까?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매일 똑같은 스물네 시간을 쓰고 있는데도 뭐 하나 기억에 남는 일이 없었다. 어제나 그저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경우도 최근에는 자주 발생했다. 어제 누구를 만났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때도 있었다. 특히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엔 더했다. 머리통은 하루종일 지끈지끈 쑤셔대는데도 전날 밤 누구와 마셨는지 기억나지 않는 날도 있었다. 비록 잠시 동안의 끊김이지만 그런 일은 잦았다. 그렇더라도 아버지와 나눈 전화통화를 기억 못할 리는 없었다. 일 년에 대여섯 번, 그것도 명절 언저리나 아버지의 생신 언저리에 통화하는 게 고작이었다. 아버지와 하는 전화통화는 그만큼 드문 일이었고 통화를 했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래도 미심쩍은 마음에 엄종세는 휴대폰의 통화기록을 살폈다. 아버지의 전화번호는 찍혀 있지 않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경찰서에 나와서 하시죠.”
형사는 비교적 거액의 돈이 아버지의 통장에 들어 있다고 했다. 더불어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바로 엄종세 자신이라고 했다. 엄종세는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해는 풀리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나오는 한숨은 어쩔 수 없었다. 왠지 일이 꼬인다는 느낌, 무엇인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엄종세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물었다. 자는 줄 알았던 아내의 한숨소리가 높았다. 아내는 엄종세가 집 안에서 담배 피우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어쩌다가 엄종세가 담배를 물기라도 하면 신경질 조로 창문을 확확 열어젖히곤 했다. 그는 담배를 문 채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 쌀쌀한 베란다로 나갔다. 찬 기운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새삼 생각해보니 아버지와 함께 한 추억이 별로 없었다. 가끔 아버지와 관련해 떠오르는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우울한 기억이었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 엄종세가 애지중지 키운 돼지를 잡은 사람이 아버지였다. 동네 어른들이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놓고 목에 칼을 쑤셔 넣어 피를 뽑을 때, 아버지는 이웃에서 커다란 솥을 빌려왔다. 돼지를 삶을 솥이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커다란 솥을 돼지 앞에 내려놓던 아버지의 차가운 뒷모습이 떠오르면 우울해지곤 했다. 마땅히 동네 어른들을 몰아내고 돼지를 구해줬어야 할 아버지가 배반의 앞자리에 섰던 것이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고 아파트촌의 여명은 창백했다. 맞은편 아파트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이 아침 서둘러 어디론가 떠나기로 약속된 사람들의 집이었다. 약속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다만 한 시간 뒤의 약속일지라도 약속이 있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나야 할 사람도 해야 할 일도 없는 사람, 그래서 아무런 약속이 없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 엄종세의 가족은 경상남도의 산골마을에 살았다. 남강이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동네였다. 강가의 모래는 고왔다. 들이 넓었고 동네 뒤의 산은 낮고 풍요로웠다. 뒷산 당산나무 아래에 낮부터 모여 노는 동네 조무래기들의 떠드는 소리가 해질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릴 무렵이면 아이들은 풀어놓고 먹이던 소를 찾아 집으로 내려오곤 했다.
고향에서 지낸 세월은 짧았다. 엄종세가 국민학교 이 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가족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로 이사 온 후 한동안 아버지는 여러 직장을 다녔다. 철공소에서 용접을 했고, 리어카에 배추와 상추 따위를 싣고 마포 일대의 재래시장을 다니기도 했다. 남대문 시장 난전에서 좌판을 열기도 했다. 좌판에서 팔았던 물건의 종류는 많았다. 배추를 팔았고, 상추를 팔았고, 여자들 장신구도 팔았다. 이런저런 물건을 팔며 다니던 아버지는 점점 집에 들르는 날이 줄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거의 집에 들르지 않았다.
엄종세가 아버지에 관해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겨울바람 냄새였다. 겨울밤, 아버지는 점퍼 속에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을 잔뜩 품고 돌아와 따뜻한 방안에 부려놓았다. 겨울밤 서늘한 기운에 종세가 실눈을 뜨면 수염을 제때 깎지 않아 덥수룩한 아버지의 턱이 보이곤 했다. 늦은 밤에 집에 들른 아버지는 잠든 종세를 무릎에 안은 채 앉아 있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버지는 떠나고 없었다.
종세는 가끔 어머니의 말을 받들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고 장문의 답 편지를 받곤 했다. 종세의 편지는 보고 싶다는 말이 거의 전부였지만, 아버지는 시시콜콜한 내용을 몇 장씩이나 써서 보냈다. 그래서 아버지가 보내오는 편지봉투는 언제나 두툼했다. 편지를 주고받았을 뿐 종세가 아버지를 만날 기회는 드물었다. 자라는 동안 종세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미워하고 서운해하며 잊었다. 그리고 오늘 이른 아침 불쑥 낯선 형사에게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받았다.
서재로 들어온 엄종세는 서랍을 뒤적거렸다.
‘사진이… 어디에 있을까…’
빈소에 놓을 아버지 영정사진이 있어야 했다. 어른이 된 후로 아버지와 사진을 찍은 기억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한두 장쯤은 있을 것이다. 엄종세는 여전히 잠옷 차림으로 오랫동안 열어본 적이 없는 서랍장을 열고, 앨범을 모조리 꺼내놓았다. 여섯 권이나 되는 앨범을 모조리 살폈지만 아버지의 사진은 없었다. 아직 앨범에 정리해 넣지 못한 아이들 사진을 공연히 뒤적거리기도 했다. 거기 아버지 사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때 사진 한 장쯤 찍어놓았어야 했는데…’
몇 해 전 엄종세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낸 적이 있다. 명절도 아니고, 어버이날도 아니고, 아버지의 생신도 아니었다. 그가 특별한 일 없이 아버지에게 먼저 전화를 내는 일은 드물었다. 그날 아버지께 전화를 낸 것은 아이들의 앨범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사진 속에 자신의 모습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놀이공원에서 찍은 사진에도 집에서 찍은 사진에도 자기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가족사진 속에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사진을 찍는 자리에 가족과 함께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휴일이라고 늘 쉴 수 있는 직장이 아니었다. 함께 놀이공원엘 가더라도 사진 찍는 역할을 자신이 맡았기 때문에 함께 사진을 찍을 기회는 더욱 드물었다. 종세는 자신이 부재하는 가족사진을 들여다보다가, 아이들이 자라서 가족사진 속에 아버지가 없는 이유를 생각하려면 몇 살쯤 돼야 할까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새삼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 속에도 아버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국민학교 시절 소풍날 찍은 사진에도, 운동회 때 찍은 사진에도, 서울대공원에서 찍은 사진에도 아버지는 없었다. 엄종세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잊고 살았다.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사진을 찍을 만한 곳에 오지 않았다. 서울대공원에도 올 수 없었고, 국민학교 시절 소풍에도, 운동회에도 올 수 없었다. 그 시간에 아버지는 공사장에서 벽돌을 지거나 함바집에서 요리를 하고 술을 팔았을 것이다. 엄종세는 제 아이들의 사진을 보다가 사진 속에 아버지가 부재하는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그래서 그날 아버지에게 불쑥 전화를 냈던 것이다. 그다지 다감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다감한 목소리… 이 별것도 아닌 것이 평범한 남자에게는, 적어도 엄종세에게는 어색하고 힘든 무엇이었다. 아버지 역시 마음을 다감하게 드러내는 편은 아니었다. 그런 아버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무덤덤하고 재미없는 아버지가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 비슷한 것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말수가 줄어들고, 무뚝뚝한 사람처럼 비치기도 했다.
전화를 받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놀랐다는 듯 다소 고음이었다. 짧지만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이어진 대화는 높낮이 없이 마른 이야기였다. 엄종세는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하고 약속했지만 자주 연락하지 못했다. 죄송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속에 든 말을 다 꺼내지 않는 것은 아버지의 성품이었고 어느새 엄종세도 그런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아버지의 말투나 삶의 방식을 닮고 싶지 않았는데, 불현듯 아버지와 비슷한 태도를 보이는 자신이 놀랍기도 했다. 아버지는 늘 그랬듯, 애들은 잘 있지? 애 엄마도 잘 있고? 언제나, 무엇이든 조심해라…, 하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마침내 통째로 엎어 내용물을 쏟아냈지만 아버지의 사진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난감했다. 어째서 아버지 사진이 이렇게 없다는 말일까. 서랍과 앨범을 모조리 뒤져 찾아낸 아버지 사진은 엄종세가 중학교 시절 서울 집 화단을 배경으로 찍은 흑백사진이 전부였다. 그것도 아버지 독사진이 아니어서 영정사진으로 쓸 만한 것은 아니었다. 사진은 투명한 비닐봉투 안에 담겨 있었지만 이십오륙 년이 지나는 동안 누렇게 변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와 사진을 함께 찍은 것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사진 속 엄종세는 여름 교복을 입고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가족사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진 속에 형은 없었다. 형은 그때 벌써 병원에 입원해 있는 날이 많았고 집에는 가끔 다녀가는 정도였다. 한 장은 어머니와 엄종세 자신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고, 또 한 장은 아버지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사진이었다. 찍을 때 어머니의 손이 흔들렸는지 사진이 흐릿했다. 당시 카메라는 요즘처럼 손 떨림 보정장치가 없었다. 카메라를 처음 만져본 어머니의 손은 아마 부들부들 떨렸을 것이다. 서울에 자신들의 집을 마련한 후 낮에 엄종세가 아버지를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름 방학이 눈앞이었고 햇볕이 유난히 뜨거웠다. 엄종세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당 한쪽의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던 아버지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일어섰다.
“많이 컸구나.”
“애들은 원래 빨리 크는 법이에요.”
종세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사춘기인 데다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이 배어 있던 때였다. 어머니가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며 나무랐고 아버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의 씁쓸한 미소는 종세의 시큰둥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자식의 모습을 세세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씁쓸해했을 것이다. 종세의 성장과정 중에 아버지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을 많이 찍어두라고. 뭐 유원지 같은 델 갈 필요는 없을 거야. 그냥 집에서 막 찍어둬. 자는 모습이라든가, 공부하는 모습이라든가, 밥 먹는 모습도 좋아. 그냥 뭐든 막 찍으라고. 다른 것을 다 아끼더라도 필름 값을 아끼지는 마.”
아버지는 카메라 한 대와 검은 봉지에 담은 필름 여러 통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겉이 검은 가죽 케이스로 씌워진 소니 카메라였다. 필름이 든 검은 비닐봉지는 종세가 받아 들었다. 어머니는 처음 만져본 카메라가 신기한 듯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카메라 사용법을 설명했다. 그리고 종세와 어머니를 화단 앞에 나란히 서게 하고 사용법을 설명하며 사진을 찍었다. 자신이 그 카메라를 살 때 들은 내용을 그대로 전하는 것 같았다. 충분히 숙지하고, 유연하게 설명한다기보다 기계적인 설명에 가까웠다. 만약 어머니나 종세가 카메라 사용법에 대해 어떤 질문을 했더라면 아버지는 아마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며칠 안에 그 답을 알아 전해주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새것은 아니야. 그래도 새것이나 다름없어. 좋은 거야. 소니라고 적혀 있지? 이게 일제라는 말이야. 카메라는 일본제가 제일 좋다고 하더라.”
아버지는 먼저 어머니와 종세의 사진을 찍은 후 카메라를 어머니에게 건넸다. 어머니에게 사용법을 가르친다는 차원에서, 또 종세와 둘이 함께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종세는 필름이 든 검은 봉지를 든 채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고, 아버지는 팔로 종세의 어깨를 감쌌다.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사진을 다 찍었으면 이걸 눌러. 그러면 필름이 다시 감겨. 사진관에 필름을 맡기기만 하면 알아서 사진을 뽑아준다. 사진이 나오면 나한테도 빠짐없이 보내라.”
아버지는 필름을 아끼지 말고, 될 수 있는 한 많이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진을 한 장도 빼놓지 말고 보내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무시로 사진을 찍으라고 했지만 엄종세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 시절 사진은 일상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일을 기념하는 이벤트였다.
학창시절 엄종세가 일상에서 혼자 사진을 찍을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어쩌다가 친구들과 어울려 삐딱한 표정을 지으며 찍은 사진을 아버지에게 보낼 수도 없었다. 카메라 앞에 서서 셔터를 눌러대고, 필름을 맡기고 찾는 일은 별일이 아니었지만, 종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사진을 자주 많이 찍어 보내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엄종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몇 해 전 아버지께 전화를 냈을 때 마땅히 “아버지, 옛날에 사진을 많이 찍어 보내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어야 했지만, 말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으면서도 그는 아버지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을 기회는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하루,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가 오고 갔다. 그리고 지금 엄종세에게는 영정으로 쓸 아버지의 사진조차 없었다.
엄종세는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서둘러 경북 김천으로 출발했다. 없는 사진을 찾는다고 나올 리 없었다. 어쩌면 아버지 쪽에 쓸 만한 사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도 난감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자동차 안에서 엄종세는 아침 일찍 전화를 걸어온 형사의 말을 되새겼다. 최근 두 달간 아버지와 일곱 번이나 통화했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근래에 아버지와 통화한 기억은 없었다. 지난 설 때 자신이 걸었던 전화를 뺀다면 가장 최근에 아버지와 나눈 통화는 지난해 가을이었다. 베트남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난 후였다. 아버지는 먼저 전화를 내놓고도 마치 실수로 전화를 낸 사람처럼 머뭇거렸다.
“별일 없지?”
“네, 별일 없어요. 아버지는 어떠세요?”
“나야, 늘 잘 있지. 애들은 어디 아픈 데는 없고?”
“그럼요.”
“그래, 그러면 됐다. 늘 조심해라.”
아버지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돌아가셨다니… 게다가 난데없는 통화라니… 빈소에 놓을 영정사진 한 장 없다는 사실과 난데없는 아버지와의 통화 이야기가 김천으로 가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프롤로그, 제1장 전문)
-------------------------
저자 소개
조두진
정유재란 당시 순천 인근 산성에 주둔한 일본군 하급 지휘관 도모유키의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본 장편소설 『도모유키』로 2005년 제10회 한겨레문학상을, 단편소설 「게임」으로 2001년 근로자문학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98년 경북 안동의 무덤에서 남자의 시신과 함께 발굴된 '원이 엄마의 편지'를 모티브로 4백 년 전 조선 남녀의 안타까운 운명과 사랑을 재구성한 『능소화』, 임진왜란 말기 전쟁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의 비참한 삶을 통해 국가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역사를 담아낸 『유이화』, 소소한 일상의 사건을 통해 현대인들의 삶의 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 단편들을 수록한 『마라토너의 흡연』을 펴냈다.
-----------------------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