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제1부 l 꾀꼬리 울음소리 듣고 참깨 난다
꽃 봐라! 저 꽃 봐라!
매화꽃 피면
그대 오신다고 하기에
매화더러 피지 말라고 했지요
그냥, 지금처럼
피우려고만 하라고요
며칠 전 섬진강 하동 부근에 사는 어떤 여인의 편지를 받고 써본 시 <그리움>입니다. 꽃이 피어버리면 내 님이 오셨다가 쉬이 가버리니, 기다리는 마음으로 봄을 보내게 해달라는 연인의 노랩니다. 그렇습니다. 섬진강의 꽃 소식은 찬바람, 찬 물결 위에 어리는 임의 얼굴같이 서늘한 매화꽃으로부터 옵니다.
섬진강에 매화꽃은 ‘핀다’기보다 ‘흐드러진다’고 해야 맞는 말입니다. 섬진강 하류는 강 건너와 이 건너의 도가 다릅니다. 화개나루를 건너면 전라남도 구례와 광양이고, 화개장터가 있는 곳은 경상남도입니다. 화개장터에서 하동까지의 길을 사람들은 ‘하동포구 칠십 리’라고 합니다. 봄, 봄, 봄이 오면, 강물이 봄을 실어 세상을 적시면, 화개장터 건너 구례에서 광양시 다압까지 수십 리 길, 집집마다 골짜기마다 큰 애기 속살 같은 매화가 화사하게 피어나지요.
강 이쪽과 강 저쪽 산자락의 강 언덕에 꽃, 꽃, 환장하게 매화꽃입니다. 층층이 산을 타고 오르는 작은 다랑이논과 논 사이에 코끼리 몸뚱이보다 크고 검은 바위들을 배경으로 하얗게 피어 있는 매화, 강 언덕 푸른 강물과 흰 모래 깔린 강변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매화꽃, 꽃, 꽃, 이 환장한 봄날의 매화꽃, 바람이라도 불어보라지, 바람에 날리는 흰 꽃 이파리들을 보며 어찌 인생을, 사랑을 노래하지 않고 견디겠습니까. 어찌 환장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홀로 저 꽃들을 다 견디어낸단 말입니까.
섬진강에 어찌 매화뿐인가요. 매화가 질 둥 말 둥 하면 산동 고을에 샛노란 산수유꽃 피고, 산수유꽃 지고 나면 산마다 골짜기마다 연분홍 진달래요, 새하얀 물싸리꽃이요, 허어, 저것 봐라, 저 산에 산벚꽃이요, 골짜기를 타고 오르며 배꽃이요, 사과꽃입니다. 한 꽃이 피었다가 여기서 지면 다른 꽃이 저기서 피고 집니다. 섬진강 꽃들은 그렇게 사람들을 정신 차리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말을 하기 전에도 꽃은 피고, 내가 “꽃이다! 꽃 봐라! 저 꽃 좀 봐라!”라는 말을 하고 나서도 꽃은 핍니다. 생각을 하기도 전에 꽃은 저기서 피고, 생각 속에서도 꽃은 피고, 생각을 하고 나서도 저기 저 강 언덕에 꽃은 핍니다.
저것 봐라! 저 마을 복판에 느닷없이 피어 있는 산수유꽃 보아라! 아! 꽃 사태다. 마을마다 집집이 울 너머 꽃 사태다. 저 환장하게 눈부신 봄날의 저 꽃들도 꽃이지만 섬진강 악양(岳陽) 벌판의 푸른 보리들은 또 어찌할꼬. 몸살 나겠네. 바람나겠네.
그러하니, 어찌 꽃 보고 지금 빨리 꽃피우라고 닦달해서 임을 부르겠습니까. 싱숭생숭 임 기다리는 그 기다림, 그 그리움을 견디는 게 차라리 낫지요.
사람들아! 이 거친 세상 세월을 살아가는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들아. 매화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날리는 봄날에 섬진강 강가에 서서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는 보았는지. 사람 사는 일이 대관절 그 무엇이기에,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살면 몇 백 년을 산다고 그리 부질없는 몸짓들을 하는지. 인간들의 탐욕으로 죽어가는 사람들과 땅과 하늘, 문명의 탈을 쓴 이 야만의 시대여! 불쌍하고 불쌍하도다. 꽃 피고 지는 일 한낮 봄날의 꿈이라네. 우리 세상사는 피었다가 지는 저 꽃같이 한순간이라네. 그대들이 짊어진 그 무거운 짐들, 저 매화나무 아래에 다 부려라. 꽃잎 뜬 강물에 그대를 띄우고, “매화야! 매화야! 섬진강에 피고 지는 매화야.” 그렇게 한번 속으로 매화를 불러보라.
꽃을 그리려 하지 말고, 꽃을 사진 찍지 말고 마음에 그리고 마음에 담아라. 그러면, 그렇게 하면 그대들 마음 어느 구석에서 화사한 홍매 한 송이 벌어지며 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꽃피고 새가 우는 이 좋은 봄날에 피고 지는 꽃 한 송이 없다면 이 봄이 어찌 봄이고, 내 가슴에 흩날릴 꽃잎 하나 없다면 이생이 어찌 이 생이겠는가.
폐계
강추위가 와도 강물은 얼지 않았다.
강추위가 와도 강물이 얼지 않은 것은 강물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라며
비 쌍피로 비 띠를 때리며 큰집 형님은 이러면 손핸디, 하며 패를 거두어간다.
벌써 7피다.
뒷산 밤나무에는 익지 않은 밤송이들이 떨어지지 않고 웅숭그린 새들처럼 산그늘 속에 매달려 겨울을 지내고 있다.
광을 판 이웃 동네 내 동갑내기는 바지춤을 추키며
이런 니기미 좆도 겁나게 추어부네 니미럴, 어치고 되얏서 시방, 입에다가 욕을 달고
으으으 몸서리를 치며 패 없는 자리에 앉는다.
잔돈이 한쪽으로 몰리고
한쪽이 죽은 열이레 달이 떠오른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그 날 아침 강물이 꽝꽝 얼었었다.
어찌나 추웠던지 얼음장 금가는 소리가
아침까지 산을 울렸고 강기슭이 밤 새워 운 어머니 입술처럼 하얗게 부르텄었다.
제사상을 차리고, 영정 속의 잘 생긴 아버지는 약간 불만스러운 얼굴이지만 여전히 젊다.
형님이 술을 따른다. 술잔을 올려놓고 아버지를 생각한다.
나 죽으면 국수를 제사상에 차려 놓거라. 아버지의 별명은 국수 일곱 그릇이었다.
잔치 집에 가서 국수를 일곱 그릇이나 잡수셨다고 했다.
설이 가까운 아버님의 기일에 동생들은 오지 않는다.
군산 사는 작은누이, 그 아들 둘, 나, 내 아내, 딸, 그리고 큰집 형님만 절을 한다.
달이 밝다. 허물어진 담과 지붕 위에 달빛이 누추하다.
오랫동안 나는 강에 가지 않았다.
큰집에서는 결정적일 때 또 누가 싼 모양이다. 어어! 고함소리가 지붕 위로 솟는다.
강추위가 귀때기를 베어가게 추워도 강물은 얼지 않는다. 아침이 오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돌아눕고 돌아눕는다.
외풍으로 코끝이 차다. 아버님은 헛기침을 하시며
뒷산을 오르시다가, 달빛 아래 우리 집을 한번 돌아다본다.
빈 집터 닭장에서
목이 쇤
폐계(廢鷄)가 운다.
-나의 시 <폐계> 전문
한 가지 기억
학교 회비를 내지 않았다는 방이 교문 앞 게시판에 붙은 지 3일째다. 오늘은 학교에 가자마자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지난주에 집에 갈 차비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걸어서 집에까지 가야 한다. 길은 자갈길 14킬로다. 날은 더웠다. 길을 나서서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바라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 굽이굽이 하얗게 멀리 아득하다. 저 멀고 먼 길을 나는 나 혼자 걸어가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걷자.
하얀 자갈길에 불볕이 이글거리고 길은 팍팍하다. 1킬로도 가지 않아서 이마에 땀이 솟고 속옷을 입지 않아서인지 교복이 땀에 젖어 자꾸 몸에 달라붙는다. 집에 가봐야 돈이 없을 텐데. 주저앉고 싶고 학교로 되돌아가고 싶다. 미루나무에 둘러싸인 학교가 멀리 보인다. 논과 밭에서는 사람들이 보리를 베고 모를 내고 있다. 보리 베고 모내는 철이다. 하얀 찔레꽃 덤불들이 유월의 햇살 아래 더욱 희다. 평지를 두 시간쯤 걸었다. 이제 비탈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날은 훅훅 찌고, 자꾸 숨이 턱에 찬다. 이 비탈길이 갈재다. 갈재 몰랑에 올라서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까마득한 곳에 순창읍이 희미하다. 들판 여기저기서 보릿대 태우는 연기가 솟고 있다. 땀으로 옷이 다 젖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 손에 먼지가 서걱거린다.
남은 길을 본다. 이제 저 산 너머가 우리 마을이다. 신작로로 멀리 돌아가지 않고 전쟁 때 죽은 빨치산들을 묻었다는 ‘공동산’이라는 재를 넘는 지름길로 들어섰다. 공동산 산꼭대기에 올라서자 멀리 우리 동네를 휘돌아가는 물굽이가 보인다. 우리 동네 사람들도 곳곳에서 보리를 베고 있다. 집이 가까워올수록 나의 발길은 무겁고 겁이 난다. 동네에 들어서니,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의 겁먹은 얼굴을 보며 허리를 펴고 서서 나에게 무슨 말들인가를 한다. 공일도 아닌데 왜 집에 오느냐는 말일 것이다. 동네와 강물이 내려다보이는 마을 뒷산에 다다랐다. 회색으로 변한 초가지붕들이 납작하게 엎드려 뜨거운 햇볕을 받고 있다. 강 건너에 있는 우리 밭이 보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리를 베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가 조금 앞서 있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답답했다.
집을 들르지 않고 징검다리를 건넜다. 해는 한낮이 조금 지나 있었다.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우리 밭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밭 가운데에서 보리를 베고 있었다. 나는 밭가에 서서 어머니를 불렀다. 몇 번 불러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보리 베어지는 소리 때문에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베어 눕혀놓은 보리들을 밟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어머니를 다시 불렀다. 그때서야 어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본 어머니가 일손을 뚝 멈추고 일어섰다. 한 손에는 낫이, 한 손에는 보리가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자갈들이 많은 가문 맨땅을 차며 회비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내 말을 못 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다시 허리를 굽혀 보리를 베기 시작했다. 아버지 쪽에서 보리들이 조금씩 움직이고 보리 위로 드러난 아버지의 구멍 난 러닝샤스 사이로 붉게 탄 허릿가 살이 보였다. 타닥타닥 보리 베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머리에 쓴 수건을 벗더니, 땀을 닦고 옷의 먼지를 툴툴 털면서 “가자!” 하며 앞서 밭을 걸어 나갔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어머니 뒤를 따랐다. 징검다리에 이르자 어머니는 징검다리에 서서 강물로 얼굴을 씻었다. 검게 탄 얼굴이 땀 때문에 상기되어 평소보다 하얗게 보였다. 얼굴을 씻었어도 어머니 이마에는 금방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땀방울들이 투명해 보였다.
집으로 들어선 어머니는 어디선가 보리를 한줌 들고 나오더니, 마당과 앞 텃논에서 놀고 있는 우리 집 닭들을 구구구구 불러들였다. 보리들이 마당에 툭툭 떨어지고, 어머니의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닭들이 마당으로 후두두두 날개를 펴고 달려 들어왔다. 어머니는 닭을 천천히 부르며 닭장 안으로 보리를 흩뿌렸다. 벌건 대낮인데도 닭들은 보리알을 따라 닭장 안으로 들어갔다. 닭들이 어느 정도 닭장 안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닭장 문을 닫고 망태를 들고 오더니 다시 닭장 문을 열고 닭들을 한 마리씩 잡아 망태에 담기 시작했다.
“가자.”
어머니가 앞장을 서셨다. 차타는 곳까지 30분을 걸어야 한다. 들길을 지나고 마을을 지났다. 차를 타고 갈담 장으로 갔다. 점심때가 지났어도 장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염소나 닭이나 오리나 강아지를 파는 장 한쪽 구석으로 갔다. 영계들은 금방 팔렸다. 어머니는 회비하고, 내가 순창으로 갈 차비를 주었다. 닭 판 돈은 그 돈이 전부였다.
“어매는 어치고 헐라고?”
나는 그때야 처음으로 말을 했다.
“나는 걸어갈란다.”
나는 가슴이 꽉 매어왔다. 어머니는 빈 망태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고 서 있었다.
“차 간다. 어서 가거라.”
나는 차를 탔다. 내가 차에 오르자 어머니는 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가는 신작로 길로 들어섰다. 나는 돈을 꼭 쥐고 있었다. 한참 후에 차가 움직였다. 차가 차부를 벗어나 조금 가니, 저기 조그마한 어머니가 뙤약볕 속을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내가 탄 차가 지나가자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차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돈을 꼭 쥔 주먹을 흔들었다. 어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먼지 낀 유리창이 더 흐려 보였다. 앞 의자 뒤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먹이며 나는 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리만 베던 아버지 모습이 눈물 속에 어른거렸다.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들어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뽀얀 먼지 속에서 자갈을 잘못 디뎠는지 몸이 비틀거렸다.
아! 어머니. 나는 돈을 꼭 쥐었다.
점심을 굶은 어머니는 뙤약볕이 내려 쬐는 시오리 신작로 길을 또 걸어야 한다.
사람의 얼굴이 그립습니다
세상이 무섭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드러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수많은 일들이 다 생명을 위협하고 앗아가는 일들입니다.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불안한 일들이 너무 생생하고, 또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내게 곧 닥칠 것만 같아,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루하루를 사는 게 아니라 하루하루를 그저 아슬아슬하게 모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불안한 날들이 지속되다 보니, 언젠가부터 먼 훗날을 계획하고 기약하는 삶이 아니라 순간을 모면하려는 순간주의와 찰나주의가 만연되어, 이런저런 사회적 불안을 우리들 스스로 키워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미 어떤 집단이 통치하고 통제하고 조정하는 기능을 상실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는 스스로를 부패시켜 사회의 각종 오염원이 된 지 오래고, 종교인들은 종교 외적인 탐욕이 극에 달해 스스로를 통제하고 해결하는 신의 선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습니다. 절대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무신의 시대에 우린 살고 있습니다. 나라의 모든 교육 방향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하는 대학 교육은 취직장사 학원사업으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총장들의 ‘세일즈’로 교정에는 우람한 건물들이 솟지만 교육의 질도 그러한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지성을 포기한 채 시대착오적인 지식을 파는 지식인들과 대학의 타락은 지금 우리 사회의 치명적인 정신적 불구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세계에 대한 고민 없는 ‘싸늘한 직업인’이 된 교사들을 볼 때마다 나는 무섭습니다. 예술 또한 한 번 쓰면 버리는 잡다하고 혼란스런 지방자치적 값싼 이벤트 사업용으로 전락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인간성과 진지함,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엄이 회복 불가능한 곳까지 와버렸는지도 모릅니다. 겨울 빈 들녘 옥수숫대처럼 우린 지금 쓸쓸하게 서 있습니다. 사랑이 사라진 거리에는 슬픔마저 사라졌습니다.
작은 동네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그런 일들로 동네는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우리 동네도 문 씨들과 김 씨들 간의 감정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마을에서 두 문중의 힘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거든요. 김 씨와 문 씨들 간의 개인적인 싸움은 늘 집단적인 패싸움으로 번져 온 동네의 일상이 정지되는 난리를 한바탕씩 치르곤 했습니다. 다르게 생각하면 두 문중의 팽팽한 힘의 균형이 마을을 활기차게 지탱시켜주었는지도 모르지요. 아무리 큰 싸움이 벌어져도, 그래도 최소한 마을공동체를 깨뜨릴 만한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어떤 선을 넘지는 않았습니다. 그 경계를 넘어선 순간 그 마을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몸에 밴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으니까요. 말하자면 ‘막가지’는 않았지요. 다시 말하면 안 보면 그만이라고 안면 몰수하는 요즘 세태와는 전혀 다른 그런 일상이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싸움과 분쟁들이 발생하면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동네에서 제일 나이 많은 어른들이 나서서 옳고 그름을 따져 서로 화해하게 했습니다. 마을 앞 정자나무 바로 밑에는 넓적한 바위가 하나 놓여 있었습니다. 그 바위에는 아무나 앉지 못했지요. 동네의 크고 작은 분란의 가르마를 타시는 어른이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 자리는 동네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같이 먹고 일하고 놀며 한 마을의 공동체를 가꾸는 데 필요한 것은 많은 지식이 아니라 경우였습니다. 반듯한 경우라는 것이 일상적인 일 속에서 나왔습니다. 논을 갈고 고르고 모를 심고 가꾸어 쌀을 얻고 또 논을 쉬게 해서 논의 힘을 길러 다음해에 새로 농사를 짓는 것처럼, 자연의 이치와 순리와 순환을 알고 자연을 따르는 자연친화적인 삶이 아름다운 마을공동체를 가꾸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자연 가까이 다가가려는 삶이, 서로 몸과 마음을 기댄 평화와 공동의 삶을 가꾸게 했지요. 나 혼자 잘 먹고 잘살려고 엄청난 공부를 하지 않아도, 동네는 물이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처럼,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곡식들이 자라 익는 것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잘 돌아와 사람들과 함께 살다가 돌아갔습니다. 작은 마을의 모든 자연은 교육 자료였고 마을 사람들은 모두 교육자였습니다.
나는 무섭습니다. 나라의 모든 학생들을 한 줄로 세우려는, 모두 같은 방향으로 1등을 향해 달리는 이 무지한 질주가 가져올 필경이 무엇일지 나는 무서운 것입니다. 공부는 잘 하는데,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 외에 삶의 내용이 없는 지독한 개인주의와 배타주의와 이기주의와 독선주의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이웃에 대한 ‘온기 없는 무심주의’가 학교에서 길러진다는 것이 나는 무섭습니다. 돈은 많은데 삶이 빈한한 이 풍요로운 빈사 상태의 공허한 삶이 나는 겁납니다. 국가는 이를 말리고 고르고 다듬는 정책을 쓰지 않고 그러한 문제점들을 더욱더 부추기고 경쟁으로 내몰며 격화시키는 정책에 매달려왔습니다. 그리하여 사회의 근간을 흔들 양극화의 간격을 넓혀온 셈이 되었지요. 우리의 교육은 지금 남이야 죽든 말든 혼자만 잘 먹고 잘살라고 다그치고 닦달하며 피를 말리는 경쟁 속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같이 먹고 일하고 같이 놀았던 동네 사람들은 일을 할 때도 가만히 보면 참으로 신기하게도 모두 쓸모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내기할 때, 집을 지으며 지붕에 흙을 얹을 때, 명절날 굿을 칠 때, 동네사람 모두가 쓸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쟁기질을 잘하고, 어떤 사람은 지게를 잘 만들고, 어떤 사람은 삼을 잘 삼고, 어떤 사람은 짚신을 잘 만들고, 모내기철이나 바쁠 때는 주전자 들 힘만 있으면 아이들도 모두 집안일과 동네일에 힘을 보탰습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정자나무 밑에 앉아 물가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켰습니다. 정말 마을은 완전고용이 저절로 이루어진 사회였던 것입니다. 오죽하면 ‘바쁠 때는 작대기도 한 몫 한다’고 했을까요. 농촌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우리를 지탱시켜주었던 정신도 무너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난을 외면하고 멸시하는 천박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할 때 노는 사람이 없는 세상, 굿치고 놀 때 엄마 등 뒤에 업혀서 둥개둥개 춤을 추는 아기까지 한 장단으로 각기 다른 몸짓으로 춤추며 노는 세상, 콩 한쪽도 나누어 먹던 세상,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그런 세상이 있었습니다. 공동의 생명체가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삶의 모습이 작은 마을에 있었던 것입니다.
백성의 마음이 하늘의 뜻이라는 간단한 진리를 포기한 독선적인 지도자들과 영혼이 없는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백성들이 열 받는 세상, 학연, 지연, 혈연, 패거리문화가 암암리에 조직화, 제도화되어 거대한 권력화, 상식화, 일상화가 되어버린 조직폭력적 수준의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도 희망도 없이 어떻게든 잘만 살면 그만이라는 경제제일주의가 살벌한 경쟁의 우리 속으로 우리들을 몰아넣고 있습니다. 서로 물어뜯어야지요. 서로 싸워 누르고 딛고 올라서야지요. 우리들은 지금 꼭대기로, 맨 꼭대기로 올라가려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처절한 싸움판 속에서 삽니다. 인간으로서 품격과 품위를 내팽개친 발가벗은 몸들이 진흙탕 속에서 사생결단하고 있습니다. 짐승보다 못한 야만이지요.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결혼한 젊은이들이 아기를 갖지 않으려는 참으로 기막힌 현상입니다. 아기를 갖지 않겠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가치를 전면 부정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세상’에서 자기 아기를 기르기 싫다는 것이지요.
가난하고 조촐했으나 자연과 인간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그 정답던 마을, 뭉게구름이 하얗게 솟아오르던 파란 하늘 아래 초록의 들판 길을 걸어가는, 땀 밴 농부들의 해맑은 얼굴들이 그립습니다.
(제1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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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김용택
대한민국의 시인으로 모더니즘이나 민중문학 등의 문학적 흐름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로 독자들을 감동시키며 대상일 뿐인 자연을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한 그는 김소월과 백석을 잇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시인은 스물한 살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교직기간동안 자신의 모교이기도 한 임실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썼다. 섬진강 연작으로 유명하여 '섬진강 시인'이라는 별칭이 있다. 2008년 8월 31일자로 교직을 정년 퇴임하였다. 이름이 알려진 후에도 김용택이 고향 마을을 떠나지 않은 까닭은 어찌보면 너무 당연하다. 김용택는 출근길의 꽃내음과 학교 뒷산 솔숲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자신의 시와 삶을 길어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김용택은 시적 상상력은 그래서 '촌'스럽다. 시집으로 『섬진강』, 『맑은 날』, 『강 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 『그래서 당신』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섬진강 이야기』, 『인생』 등이 있다. 이밖에도 성장소설 『정님이』,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내 똥 내 밥』, 동시엮음집 『학교야, 공 차자』, 시엮음집 『시가 내게로 왔다』 등 많은 저작물이 있다. 1986년 김수영문학상을, 1997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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