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 제1부 l 운산에서 얻은 교훈
l 제1장 l 중공군과의 첫 교전
한국전쟁은 소규모 전쟁이 대규모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에 개의치 않았던 미 극동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사격이었다.
1950년 10월 20일 미군 제1기병사단이 평양에 입성했다. 나중에는 기병사단 5연대와 한국군 제1사단 중 어느 부대가 평양에 먼저 들어갔느냐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대동강을 건너는 교량이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에 기병사단의 진격이 지연되었고 결국 한국군이 미군보다 앞서 폐허가 된 평양에 들어간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승리의 감격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평양 점령은 곧 전쟁이 끝날 날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참전 미군들 역시 도색과 잡목으로 위장한 기병사단의 전차가 먼저 도착하여 평양 시가지를 이미 사단 마크로 물들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제1기병사단이 평양의 기차역 부근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다. ⓒ U.S. Department of Defense.
평양에서는 소박한 자축연이 벌어졌다. 기병사단 제8연대 3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한 제99야전포병대대 관측장교 필 피터슨(Phil Peterson) 중위와 절친한 전우 월트 마요(Walt Mayo)는 둘이서만 오붓하게 승리를 자축했다. 원래부터 막역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한국전쟁에서 둘도 없이 가까운 전우가 되었다. 피터슨은 두 사람의 전우애를 ‘군인이기에 가능한 독특한 우정’이라고 생각했다. 월트 마요는 똑똑하고 유능한 군인으로, 부친이 음악 교수로 재직하던 보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반면에 피터슨은 사관후보생 출신으로 정규 교육은 미네소타 주 모리스에서 9학년을 마친 게 전부였다. 그는 참전하면 일급 5달러를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자원입대했다. 평양에 입성한 마요 중위는 소련 대사관에서 몰래 빼돌린 술을 파는 대형 술집에서 소련제 샴페인을 한 병 샀다. 제대로 숙성되지 않은 가짜 술이라 마시면 속깨나 쓰릴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반합(飯盒)에 부어 전우와 나눠 마셨다.1
제3대대 러브중대의 빌 리처드슨(Bill Richardson) 중사도 평양에서 승리의 물결을 느꼈다. 사실상 대대 분위기는 전쟁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고 기병사단은 한국에서 철수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리처드슨은 이러한 조짐을 간파했다. 소문도 소문이었지만 중대 본부에서 선적 하역 경험이 있는 병사는 상관에게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분명 다시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될 거라는 징조였다. 탄약을 반납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이 역시 치열했던 전쟁이 끝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른 본부에서 흘러나온 소문들도 이런 심증을 뒷받침했다.
리처드슨은 명색이 부대의 최고참이었다. 대다수 소대원들은 신참내기에 불과했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살아온 21년보다 한국에서 보낸 지난 3개월이 더 길게 느껴졌다. 몇몇 소대원은 전사하거나 교전 중 실종되기도 했으며 일부는 부상을 입었다. 처음부터 함께했던 소대원이라고는 짐 월시(Jim Walsh) 하사가 유일했다. 리처드슨은 월쉬를 불러 격려하고 자축했다. “이봐, 우리가 해냈어. 이날이 올 때까지 버텨냈다고.”2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렇게 10월이 끝나갈 무렵 조촐하게 자축연을 벌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다시 실탄을 지급받았으며 북으로 이동하여 살아남은 한국군을 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편 도쿄에서는 승전 축하 기념행사가 벌어질 거라는 소식이 들렸다. 기병사단은 한국전쟁에서 혁혁한 전과(戰果)를 올렸고 맥아더의 각별한 신뢰를 받았기 때문에 시가행진을 선도할 예정이었다. 시가행진에서는 노란색 기병대 스카프를 휘날리고 칙칙한 전쟁터가 아니라 말끔한 연병장에서 행사 준비를 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기병사단은 멋진 제복과 헬멧을 쓰고 군인의 위용을 뽐내며 맥아더의 본부가 있는 다이이치 빌딩 앞을 행진할 작정이었지만 끝내 긴자(銀座) 거리 시가행진은 현실로 이뤄지지 못했다.
평양에 입성한 미군은 낙관적인 기대감과 함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곧 배를 타고 귀국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이 팽배했다. 보충병으로 참전한 신참병들은 부산방어선에서 평양까지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은 지나갔다며 안도했다. 평양에서 기병사단에 배치된 오클라호마 주 클레어모어 출신 벤 보이드(Ben Boyd) 중위는 제1대대 베이커중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4년 전에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최근 전황이 염려스러운 나머지 내심 인사 명령에 착오가 있었기를 바랐다. “중위, 현재 소대에서 귀관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고 있나?” 한 선임 장교가 이렇게 묻자 보이드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너무 으스대지 말게나. 한국전쟁 참전 이래 귀관이 이 소대의 열세 번째 소대장일세.”3 보이드 중위는 갑자기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평양 주둔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열린 밥 호프(Bob Hope)의 위문 공연 역시 긍정적인 징후로 해석되었다. 이제 정말로 상황이 좋아질 것 같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위문공연을 다녔던 유명한 코미디언 밥 호프가 지금은 북한의 수도에 와서 농담을 건네며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그날 저녁 기병사단의 많은 장병들이 호프를 보려고 모여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실탄을 재장전하고 포화 세례를 받고 있는 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운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자신들의 임무는 한국군이 늘 봉착하는 사소한 혼전 상황을 해결하는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출발 당시 장병들의 준비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탄약 지급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군복이 문제였다. 두툼한 동복 대신 도쿄 시가행진에서 뽐내려 했던 제복을 입었던 것일까? 백 년 만에 가장 춥다는 겨울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지만 군인들의 복장은 맵시에 더 신경을 쓴 듯했다. 장병들의 분위기도 문제였다. 북한과 만주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 접경지대의 전장으로 향하고 있는데, 부대원들뿐 아니라 장교들까지도 위험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대다수 장병들은 불과 2주일 전 웨이크 섬에서 열린 해리 트루먼과 더글러스 맥아더의 중요한 회담 소식을 알지 못했다. 풍문에 의하면 맥아더가 한국전쟁 참전 미군을 귀국시킨 다음 다시 유럽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고 했다.
맥아더는 제1기병사단이 평양에 입성하자마자 비행기에서 첫발을 내딛으며 물었다. “나를 맞이하러 나온 유명인사는 누가 있나? 김일성의 뻐드렁니를 볼 수 있으려나?”4 패전을 목전에 둔 김일성을 두고 농담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참전했던 기병사단 장병은 누구냐고 물었다. 집합한 200여 명 가운데 4명이 앞으로 나왔는데 모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맥아더는 전용기를 타고 바로 도쿄로 돌아갔다. 한국에는 하루도 머물지 않은 셈이다. 실제로 전쟁을 지휘하는 동안에도 맥아더는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
맥아더가 도쿄로 돌아가자 워싱턴 일각에서는 미군을 계속 북진시킬 거라고 확신했다. 당시 맥아더는 중국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고 격전을 벌이던 인민군의 전력도 점차 약해져 저항이 미미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북진을 명령했던 것이다. 맥아더가 중국 국경인 압록강까지 진격할 태세였기에 워싱턴에서는 중국 개입을 우려하며 단계적인 제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조치 없이 머뭇거렸다. 합동참모들이 미군을 중국 접경 지역으로 보내지 말라고 뒤늦게 지시했지만 맥아더의 북진을 막진 못했다. 맥아더가 상부의 지시를 거스른 것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항상 자기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압록강 너머에 있는 중공군의 규모가 트루먼 행정부 고위 관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작다고 확신했다. 웨이크 섬에서는 대통령에게 중국이 참전할 리 없으며, 혹 참전한다면 역사상 최대의 참사를 겪게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맥아더와 참모들은 기온과 지형이 알래스카와 비슷하여 황량하기 그지없는 한반도에서 궁지에 몰린 전세를 뒤집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고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북진의 발판을 마련한 위대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워싱턴의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룩한 것이라 역사적으로도 더 뜻 깊은 승리였다. 워싱턴 행정부와 군 수뇌부는 중국과 소련의 의도가 무언지 확신할 수 없는 데다 유엔군의 취약점도 염려스러웠기 때문에 맥아더의 북진을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맥아더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를 존중하는 만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전세가 유엔군 쪽으로 기울었지만 6월 말 인민군이 38선을 넘었던 초기에는 분명 공산주의자들이 유리했다. 인민군은 취약하고 허술했던 주한 미군과 한국군을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며 연승 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전력이 우세한 미군의 참전이 이어지고 맥아더가 인민군 후방인 인천에 상륙작전을 펼쳐 성공적으로 적을 교착 상태에 빠뜨렸다. 격전을 치른 끝에 서울을 수복하면서 인민군의 저항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워싱턴의 고위 관리들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을 기뻐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기세등등해진 맥아더가 부담스러웠다. 중공군이 참전할 거라고 아무리 경고해도 승승장구하는 맥아더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맥아더는 신적인 존재가 되었고 아시아에 관한 한 자신이 전문가라고 으스대며 중국이 참전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도 일본의 의도와 저력을 오판한 적이 있었다. 워싱턴의 고위 관리들은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한 후 운산으로 진격하려는 것을 보고 그때가 중국과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북진을 이끌던 일부 장교와 사병들에게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전투 경험이 있는 장교들은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지형은 점점 험악해지는 상황에서 진군을 감행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후에 (미군들이 가장 훌륭한 한국군 지휘관이라 여겼던) 한국군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너무나 고요한 적진으로 진군할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불안감을 “혼자 외떨어져 있는 것 같은 고립된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오랜 전투 경험이 있는 베테랑 장군이었지만 당시에는 그 불안감의 원인을 알지 못했다. 전에는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 행렬로 늘 인파가 넘쳤는데 이번에는 인적이 전혀 없는 극도의 적막감이 부대를 엄습했다. 도로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던 것처럼 텅 비어 있었으며 기온은 매일 조금씩 더 떨어졌다.
■ 여주 지역의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일 때 제19보병연대 소속 병사가 에는
바람과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판초를 두르고 있다. 1951년.
ⓒ Cpl. E. Watson / U.S. Department of Defense.
주요 정보장교들도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다양한 통로를 통해 이미 10월 말에 북한 지역에 중공군이 대거 입성했다는 정보를 수집한 상태였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 우수한 정보장교로 손꼽히며 기병사단을 지휘·통제하던 제1군단 정보참모 퍼시 톰슨(Percy Thompson) 대령 역시 전황에 대해 비관적이었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을 확신했고 이 때문에 지휘관을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도쿄에서 흘러나온 안일한 상황 인식이 기병사단 지휘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톰슨은 제1기병사단 8연대장 홀 에드슨(Hal Edson) 대령에게 위협적인 규모의 중공군이 북한 지역에 들어와 있는 게 틀림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에드슨과 여타 지휘관들은 그의 경고에 대해 ‘의구심과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 당시 톰슨의 딸 바바라 톰슨 아이젠하워(Barbara Thompson Eisenhower: 미국 34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아들 존과 결혼함)는 한국에서 날아온 아버지의 편지가 마치 작별 편지를 쓴 것 마냥 논조가 급작스럽게 변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는 부대가 전멸해 당신도 죽게 될 거라고 확신하고 계셨다.”5
당시 상황은 톰슨이 그렇게 우려할 만했고 그의 초기 정보 판독도 정확했다. 중공군은 이미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한의 산악 지대에서 한국군과 유엔군 부대가 북쪽으로 더 깊숙이 진격하여 이미 무리하게 늘어진 보급선이 더 길어지기를 기다렸다. 개전 초에 미군을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북진에 어려움을 겪을수록 공격하기가 수월하다고 생각했기에 미군이 북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압록강이다.”6 10월 말 압록강에 도달한 백선엽 장군의 부대원들이 소리쳤다. “드디어 압록강이다.” 그런데 10월 25일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했다. 백선엽 장군은 갑자기 콘크리트 벽에 쾅 부딪히는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 처음에 한국군 지휘관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대로 판단하지도 못했다. 좌측에 있던 제20연대가 타격을 받은 후 백선엽이 이끄는 제15연대는 퍼붓는 박격포화에 위축되어 완전히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어서 사단 예비대인 제11연대가 측면과 후방에서 공격을 당했다. 적의 전투력은 뛰어났다. 백선엽은 중공군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반사적으로 대응한 덕분에 그나마 병력 대부분을 구할 수 있었다. 그는 즉각 사단 전체를 운산까지 후퇴시켰다. 압도적인 숫자의 인디언이 백인이 탄 마차 주변을 빙빙 돌며 공격하는 미국 서부시대의 한 장면 같았다. 백선엽 사단은 매복 중이던 대규모 중공군 기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다른 한국군 부대는 운도 없었지만 지휘력도 형편없었다.
교전 첫날 제15연대 예하 부대에서 포로를 사로잡았는데 중공군이 틀림없었다. 백선엽 장군이 직접 심문을 했는데 서른다섯 살 정도에 두꺼운 누비로 만든 군복을 입고 있었다. 한쪽은 카키색이고 다른 쪽은 흰색인 양면 군복이었다. 백선엽은 “단순하지만 눈이 내린 지형에서는 효과적인 위장법”이라고 기록했다. 포로는 두껍고 무거운 귀마개가 달린 모자를 쓰고 가죽 즈크화를 신고 있었다. 말 수가 많은 편은 아닌 것 같았는데 뜻밖에도 심문에는 적극적으로 임했다. 그는 관동 지방 출신의 정규 중국 공산군으로, 인근 산악에 수만 명의 중공군이 있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한국군 사단 하나가 통째로 걸려든 셈이었다.
백선엽은 즉시 군단장 프랭크 밀번(Frank Milburn)에게 보고하고 포로를 본부로 후송했다. 이번엔 백선엽이 통역하고 밀번 장군이 심문했다. 기록에 남은 심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디 출신인가?”
“중국 남부에서 왔다.”
“소속 부대는?”
“39군.”
“전투 경험은?”
“국공내전 때 하이난 섬 전투에 참가했다.”
“중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인가?”
“아니다. 중국인이다.”7
백선엽은 그의 진술이 사실이라고 확신했다. 거짓으로 꾸미거나 질문을 피하려는 낌새가 전혀 없었다. 포로가 밝힌 중요한 정보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최소 30만 명이 넘는 중공군이 압록강 너머에 진을 치고 적절한 시기에 전쟁에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건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중공군을 참전시킬 거라고 전 세계에 경고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엄포에 불과할 거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않았다. 밀번은 즉각 제8군 사령부에 새로운 정보를 보고했다. 제8군 사령부는 이를 더글러스 맥아더의 핵심 정보참모 찰스 윌로비(Charles Willoughby)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윌로비는 한반도에 중공군이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그는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고 개입하더라도 문제가 될 정도의 규모는 아닐 거라고 주장했다. 그의 지휘관 맥아더도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정보참모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지휘관의 생각을 지지하는 거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또한 맥아더 사령부에서 별안간 중공군과 접촉한 사실을 보고하면 그때까지 소극적으로 방관하고 있던 워싱턴 본부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려 할 터였다. 그렇게 되면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는 애초 계획과는 달리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는 절대 맥아더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맥아더는 윌로비가 자신의 예측을 지지해주길 바랐다. 그러자 윌로비는 압록강 북쪽에서 중공군이 대규모로 이동하고 있다는 최초 보고를 받고도 이를 부인하며 ‘외교적 협박’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8 그리고 유별나게 말이 많았던 중공군 포로의 진술도 거짓으로 꾸몄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며 자발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는 식이었다. 이렇게 포로가 제공하는 정보를 애써 축소하다 보니 엉뚱한 결과가 나왔다. 결국 포로는 자신이 누구고 국적이 어디고 소속 부대가 어디이며 함께 온 부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모르는 존재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분석은 중공군 고위 지휘관들에게만 이로운 거짓 정보였다. 그들이 원하는 그대로 정보를 해석했던 것이다.
미군이 오만해질수록 중공군의 승리는 더 확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군이 덫에 걸려들면 중공군은 바로 전쟁에 뛰어들 게 분명했다. 중공군은 이미 수적으로 열악한 미군과 한국군이 압록강 이북으로 북진하면 거대한 산악지대에 부딪혀 결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 제1해병대 소속 대원이 횡성에서 벌어진 전투 도중 중공군을 사로잡았다. 1951년. ⓒ Pfc. C. T. Wehner / U.S. Department of Defense.
그 후 몇 주에 걸쳐 미군과 한국군은 연이어 중공군 포로를 사로잡았다. 포로들은 소속 부대를 밝히고 대규모 중공군 부대가 압록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윌로비는 계속해서 이러한 정보를 무시했다. 그리고 이제 사단, 군단, 군, 극동사령부가 일제히 중공군 포로가 진짜 중공군인지, 소속 부대가 어디인지, 적의 공격에 취약한 유엔군은 어떠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의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정보가 최전방 부대까지 전달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제8기병연대 장병들은 인민군 오합지졸 잔당을 추격하면서 평양에서 운산으로 진격했고, 곧 압록강에 도달하여 승리의 표징으로 그곳에다 오줌을 갈길 거라고 확신했다.
제8군 사령부 지휘부에는 위험천만한 안도감이 만연해 있었으며 누구보다 맥아더가 가장 낙관적이었다. 미군에서 가장 경험이 많다는 사령관이 전황을 너무나 낙관하고 확신했기 때문에 군단과 사단의 고급 장교들을 비롯해 사령부에도 그런 분위기가 팽배했다. 사령부, 특히 도쿄에서는 고위급으로 올라갈수록 전쟁은 끝났으며 남은 임무는 잔적(殘敵)을 소탕하는 것이 전부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과신을 뒷받침하는 징후는 많았다. 첫 중공군 포로를 사로잡기 사흘 전인 10월 22일에 제8군 지휘관 월튼 워커(Walton Walker)는 탄약을 대량 적재한 함선을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환시켜 달라고 맥아더에게 요청했다. 맥아더는 요청을 승인하여 105mm와 155mm 포탄을 실은 함선 여섯 척을 하와이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지난 4개월 동안 엄청난 실탄 소비로 탄약에 굶주렸던 군대가 이제 탄약이 너무 많다고 반환을 요청한 꼴이었다.
10월 25일 제8군 전투지역에서 제2보병사단장 로렌스 카이저(Laurence Keiser)는 특별 참모회의를 열고 장교들을 모두 소집했다. 전방 관측장교였던 제37야전포병대대 소속 랄프 호클리(Ralph Hockley) 중위는 회의 날짜와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사단장이 치열했던 전투는 대부분 지나갔으며 이제 곧 한국을 떠나게 될 거라고 말하자 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카이저는 “모두 귀국할 것이다. 아마 크리스마스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라면서 “명령을 받았다.”라고 장교들에게 전했다.9 한 장교가 언제쯤 돌아갈 수 있는지를 묻자 밝힐 수는 없지만 원하는 시기에 돌아가게 될 거라고 대답했다. 도쿄에서,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에서, 그리고 유럽 주둔 미군기지에서 무성한 추측이 나돌았다.
제1기병사단 8연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운산에 도착했다. 허버트 밀러(Herbert Miller) 중사는 한국군을 지원하기 위해 부대가 평양을 떠나 운산으로 북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8연대 3대대 러브중대 부소대장이었던 밀러는 평양에서 즐겼던 시간을 아쉬워하며 명령을 따라 운산으로 향했다. 그들의 임무는 한국군의 구멍을 메우는 것이었다. 장교들이 왜 한국군을 최전방에 두어 북진을 선도하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부대원들이 아직도 얇은 하절기 군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추운 날씨만 걱정했다. 평양에서 들은 바로는 동절기 전투복이 오고 있는 중이며 이미 트럭에 실려 다음 날 내지 그 다음 날에는 도착한다고 했다. 하지만 말만 그랬을 뿐 며칠이 지나도 동복은 오지 않았다. 7~8월까지만 해도 풋내기 같았던 밀러의 연대는 그간 많은 전투를 치렀다. 그들은 10월이 되자 노련한 부대로 거듭나 있었다. 밀러는 가까운 전우이자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였던 미주리 주 조플린 출신의 리처드 헤팅거(Richard Hettinger)와 의형제를 맺었다. 크리스마스 전에 귀국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밀러는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실제로 가야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밀러는 뉴욕 주의 작은 마을인 풀라스키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제42사단에서 복무했으며 종전 후 귀향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1947년에 다시 입대했다. 원래 제3보병사단 7연대 소속이었는데 제1기병사단에 파견 배속되었다. 1950년 7월에 한국전쟁 참전 명령을 받았을 때는 3년 복무 기간 중 6개월을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모든 행동이 다 옳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전쟁에서는 도무지 제대로 된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밀러가 속한 중대는 7월 중순 어느 아침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중대 국면을 맞고 있던 대전 인근 최전방으로 급파되었다. 밀러는 모든 국면을 잘 헤쳐 나갔고, 그래서 불과 스물네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부대원들은 그를 패피(Pappy: 미국 중남부 지역에서 아빠라는 뜻으로 사용함-옮긴이)라고 불렀다.
첫날 대전 인근 전선으로 이동하는 중에는 전투라고는 전쟁 영화에서 본 것이 전부인 풋내기 신참병들이 인민군 엉덩이를 걷어차줄 거라며 허세를 부렸다. 이들이 의기양양하게 허풍을 떠는 동안 밀러는 잠자코 지켜만 보았다. 전투가 시작하기도 전에 들뜨는 것보다야 끝난 후에 승리감을 만끽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지만 애송이들에게 말해봐야 입만 아프기 때문이었다. 모름지기 그런 감정 조절은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법이라 생각했다. 첫 번째 전투는 혹독했다.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뿐더러 상대편 인민군은 경험이 많은 노련한 부대여서 아주 효과적인 방식으로 공격해왔다. 그 다음 날 중대 병력은 160명에서 39명으로 줄어들었다. “첫날 밤에 거의 전멸해버리다니.” 밀러는 혼잣말로 탄식했다.10 그 뒤 인민군을 혼쭐내주겠다는 말은 쑥 들어갔다.
단지 애송이들이라서 형편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전투에 나서느라 제대로 준비를 하지 못했고 인민군의 수가 너무 많은 탓이 컸다. 아무리 잘 싸워도 적은 언제나 더 많았다. 적은 아군의 후방으로 슬쩍 들어와 퇴로를 차단한 다음 측면을 공격했다. 첫 번째나 두 번째 전열은 소총을 가지고 진격했지만 그 뒤를 따르는 인민군들은 앞 대열에서 쓰러진 전우의 무기를 집을 요량으로 무기도 없이 계속해서 전진했다. 이렇게 많은 적을 상대로 싸우려면 모든 군인이 자동화기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미군의 장비는 열악했다. 기본적인 보병 장비는 쓰레기 같은 것들뿐이었다. 마치 포트 드벤스(Fort Devens: 1917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을 훈련하기 위해 세운 임시 숙영지-옮긴이)로 돌아간 것처럼 관리도 제대로 안 되어 쓸모없는 훈련용 구식 소총을 지급받았다. 미국이 평상시 군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탄약도 충분하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 실탄 클립이 죄다 풀려 있는 탄약상자를 지급받아 힘겹게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군인들이 직접 탄약 클립을 끼워야 했다. 적군에게 수적으로도 밀리는 상황에서 도대체 어떤 군대가 부대의 생사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보병들에게 클립이 풀린 탄약을 보낼 수 있는지 한심스러웠다. 아마추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민군은 성능 좋은 소련제 A-34 탱크를 몰고 왔는데, 미군이 보유한 구형 바주카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탱크 철판도 뚫을 수 없을 만큼 한심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적어도 목표가 무엇인지, 좌우 측면에서 누구와 교전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마치 눈을 감고 싸우는 것처럼 측면에 적이 있어도 도무지 식별할 수 없었다. 십중팔구는 인민군과 외양이 같은 한국군이었기 때문이다.
운산에 도착한 날 밀러는 주둔 기지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 남짓까지 정찰을 나갔다가 늙은 농부를 만났다. 농부는 이 지역에 중공군 수천 명이 있으며 상당수가 말을 타고 왔다고 알려주었다. 꾸밈이 없고 확신에 차 있어서 거짓이 아니라 믿고 그를 대대 본부로 데려갔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공군이라고? 수천 명의 중공군? 중공군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더구나 말을 타고? 그래서, 아직 오지 않았나?” 이런 식이었다. 그렇지만 밀러는 정보 전문가라면 이런 사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제8연대 3대대 아이템중대의 신참 하사 레스터 어번(Lester Urban)은 위험 상황을 가장 먼저 감지할 수 있는 병사였다. 본부중대에 배속된 전령이라 주로 대대 본부에 머물며 장교들의 말을 주워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이었던 어번 하사는 키 162센티미터에 몸무게가 45킬로그램에 불과해서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작은 마을 델바톤에 있는 고등학교 풋볼 팀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기병사단에서는 땅콩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다부지고 빨라서 전령으로 뽑혔다. 미군의 통신 상태는 장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열악한 수준이어서 대대에서 중대까지 구두 및 서면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일이 빈번했고 그것이 어번의 임무였다. 아주 위험한 일이었지만 어번은 자신의 임무와 생존법을 잘 알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하루에 같은 지역을 네다섯 번 왕래해야 하는 경우에는 항상 경로를 달리했으며 이런 원칙을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다. 그는 적에게 예측당하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어번은 측면에 미군 부대가 없어서 적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지난 몇 주 동안 별다른 낌새가 없어서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운산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운산에 당도한 연대는 퉁퉁 부은 엄지처럼 튀어나와 있어서 조금만 생각해봐도 3개 대대의 부대 배치와 간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도상에는 대대 간격이 연대 본부 뒤편 어딘가에 작게 표시되어 있지만 어번처럼 대대 사이를 실제로 달려보면 그 간격이 너무 넓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제8연대 3대대장이었지만 최근에 제5연대장으로 영전한 헤럴드 존슨(Harold Johnson) 중령이 예전 대대를 점검하러 온 10월 31일에 어번은 대대 본부 근처에 있었다. 존슨 중령이 평양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전사한 제3대대 장병 약 4백 명을 위한 추도식을 거행하는 일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함께했지만 애석하게도 몇 명밖에 남지 않은 부대원들과 추도식에 참석했다.
예전 대대에서 헤럴드 존슨은 부하들에게 존경을 넘어 사랑을 받았다. 한국에 도착한 날부터 부하들과 항상 함께했으며 부대원들은 그가 내린 결정이 늘 옳다고 믿었다. 전시에는 병사들의 목숨이 장교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병사들은 장교들을 평가하여 나름대로 등급을 매기곤 했다. 전쟁 초기에 존슨은 연대장으로 진급할 기회가 있었지만 부하들에게 일종의 의무감을 느꼈기 때문에 부대원들과 함께 싸우려고 이를 거절했다. 부대원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 바탄(Bataan) 죽음의 행렬 때 숨진 병사들. 퍼블릭 도메인.
존슨은 오랜 지옥을 경험한 사나이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바탄에서 일본군에게 사로잡혀 ‘죽음의 행진(제2차 세계대전 초 일본군에 사로잡힌 7만 명의 미국인과 필리핀 전쟁 포로들이 강제적으로 행한 행진-옮긴이)’을 했고 거기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3년 넘게 전쟁 포로로 지냈다. 일반적으로 전쟁 포로는 장교 경력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특히 한국전쟁에서는 인민군이 미군 포로를 유독 잔인하게 대하고 세뇌까지 하는 바람에 일부 군인들은 뇌 손상을 입기도 했다. 그런데도 존슨은 미 육군의 참모장까지 지냈다. 레스터 어번은 나중에 존슨을 이렇게 기억했다. “지도력을 타고난 최고의 군인이었다. 늘 부하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를 능가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11
바탄에서의 경험 탓인지 존슨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예측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으며 지나친 낙관론이 갖는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당시에는 이전에 제3대대장으로 근무한 대대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단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작전 지역 전역에서 대규모 적군 병력이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적이 도로를 차단하면 제8연대가 고립될 수도 있음을 염려했다. 존슨은 직접 차를 몰고 북쪽으로 가서 상황을 점검했다. 도로에는 백선엽 장군이 불안해했던 것과 같은 정적이 흘렀으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후에 그는 그곳의 정적이 섬뜩했다고 말했다. 예전에 통솔하던 대대에 도착했을 무렵 존슨은 부대 배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존슨의 눈에는 후임자인 초임 대대장 로버트 오몬드(Robert Ormond)가 대대를 어설프게 떨어뜨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병력 대다수는 평지인 논에 자리를 잡았으며 참호도 제대로 구축하지 않은 상태였다.
두 지휘관이 대면하는 것을 보면서 어번은 존슨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존슨은 다른 장교를 호되게 꾸짖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뜻밖에도 오몬드에 대해서만큼은 모질게 말했다. “골짜기에 있는 병력을 빼서 당장 높은 지대로 올려 보내게. 지금 있는 곳은 너무 취약해서 현 상태로는 귀관의 부대가 적의 공격을 제대로 방어할 수가 없네.” (어번은 나중에 “존슨이 바로 그 자리에서 오몬드의 엉덩이를 걷어찰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존슨은 오몬드가 귀담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자신의 충고를 무시했음을 알고는 어이가 없었다.12 부대 배치가 잘못된 것은 비단 3대대뿐만이 아니었다. 비극이 끝난 후에 고급 장교들 상당수는 제8연대 전체 부대의 위치가 엉망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마치 적군의 위협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병력을 배치했던 것이다.
운산 전투가 끝나자마자 연대로 전입해 온 휴렛 라이너(Hewlett Rainer) 중위는 그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하나씩 정리해보다가 연대의 부대 배치 방식에 충격을 받았다. 우선 대대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서로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다. 대대 사이로 중공군 1~2개 사단이 지나가도 모를 정도였다. 특히 야간에는 완전히 취약한 구조였다. 적은 측면을 따라 이동한 다음 상대를 에워싸고 압박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라이너는 “연대가 상급부대로부터 중공군에 대한 정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연대의 위치는 너무 북쪽으로 나갔어요. 그곳은 마치 인디언 마을 같은 곳이라 무언가는 분명히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 기동훈련으로 연습했던 대로 배치했다고 해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게 봐도 부주의함에서 비롯한 일이었어요.”라고 밝혔다.13
러브중대의 중화기소대 무반동총반 소속 빌 리처드슨은 1950년 10월 31일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속해 있던 분대는 3대대 남단에서 남면강을 가로지르는 작은 교량을 지키고 있었다. 하루 전날, 드디어 기다리던 동복이 지급되었다. 동복이라고 해봐야 야전상의와 양말뿐이었다. 그나마도 상의가 부족했기 때문에 리처드슨은 가능한 한 제일 좋은 상의를 골라서 병사들에게 먼저 나눠 주라고 지시했다. 나중에 그는 중대원들이 침낭에서 잤다는 기록을 보고 격분했다. 적의 공격을 받은 것보다 더 기분이 착잡했다. 도대체 침낭이 어디 있었단 말인가. 부대원들은 침낭 대신 담요를 둘둘 말고 잤다.
존슨 중령이 대대 지휘소로 돌아가는 길에 교량에 들렀을 때 리처드슨은 근무 중이었다. 존슨은 뭔가 할 말이 있는데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귀관, 이 지역에 도로 장애물이 몇 개 있다는 보고가 있네. 그리고 인민군 잔당이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강 만곡부로 올지도 몰라.”라고 말했다. 리처드슨은 그 말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존슨에게 “연대장님, 적이 강 만곡부로 올 거라면 진작 왔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존슨은 조심하라고 주의시키며 악수를 건넸다. 존슨은 리처드슨에게 행운이 따르길 바랐지만 리처드슨 또한 시골길을 혼자 운전해 가는 연대장이야말로 정말 운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매사추세츠 주 포트 드벤스에서 훈련을 받은 이후로 줄곧 함께했다. 리처드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유럽에서 복무했지만 너무 늦게 참전한 탓에 전투는 참가하지 못하고 전쟁의 폐허만 지켜보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에서는 그냥 일반 전투가 아닌, 미군이 치렀던 어떤 전쟁보다도 힘들고 위험한 전투를 치렀다. 리처드슨은 필라델피아에서 자랐으며 부모는 둘 다 예능인이었다. 착실한 학생은 아니었던지라 학교 교육이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며 대학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직업훈련학교에 진학했다. 정규 교육 과정은 9학년으로 끝내고 육군에 입대했으며 이내 군을 좋아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악의 상황을 견뎌낸 노련한 교관한테서 훈련을 받으면서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몇 가지 특기를 전수받기도 했다. 1950년 이른 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군을 축소하는 와중에 그는 복무기간을 세 번이나 연장한 상태라 군에서는 그를 내보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때 마침 인민군이 남침을 했고 하룻밤 새 입장이 달라진 군은 연장 복무를 허락했다.
그래서 6월 말 포트 드벤스에서 제대하는 대신에 제8연대 3대대라는 3/8 부대번호를 받았다. 리처드슨은 인민군이 침공한 직후인 6월 26일이나 27일 경에 헤럴드 존슨이 지휘소 극장에 전 대대를 소집했는데 당시 부대 병력이 너무 적어 첫 번째 두서너 열만 채워졌다고 회상했다. 참전 용사들이 은성훈장과 청동성장을 수여받는 것으로 끝나는 보병 선전 영화를 관람한 후 존슨은 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군들, 몇 주 후면 저 훈장을 목에 걸지 못하는 부대원들이 생길 것이네.” 리처드슨은 그때 그 말을 이상히 여겼다.14 며칠 후 전 병과에서 다양한 주특기를 가진 병력이 속속 도착했다. 보병을 비롯해 헌병, 취사병, 보급병 등 극장을 가득 채울 만큼 병력이 채워지자 이들은 배를 타고 떠났다.
리처드슨은 중공군의 공격을 받은 후에야 존슨이 자신에게 중공군이 지역 내에 있으며 제8연대로 들어오는 진입로가 열려 있다는 걸 경고하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하사관에게 ‘중공군’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공포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생각에 우회적으로 경고를 했던 것 같았다. 만약 그때까지 존슨이 대대장이었다면 부대를 높은 지대로 이동시키고 재배치하여 상호 지원 화력을 결집시킴으로써 방어력을 높일 수 있었을 거라고 확신했다. 오몬드도 언젠가 훌륭한 장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전투 데뷔전을 치르기엔 시간도 장소도 적절하지 않았다.
제3대대 작전장교 필모어 맥아비(Filmore McAbee) 소령 역시 헤럴드 존슨처럼 연대가 흩어져 있는 것을 염려했지만 오랫동안 존슨과 이를 의논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 후 2년 반을 포로수용소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한 유능한 전투 지휘관이었던 맥아비는 한국에 왔을 당시에는 제1기병사단의 중대장이었다. 맥아비는 뛰어난 전투 지휘관이었지만 중공군이 기습한 순간에는 절망에 빠진 장교에 불과했다. 오몬드 대대장과 행정관 빌 모리아티(Veale Moriarty) 소령이 새로 부임하여 대대를 지휘했지만, 맥아비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주로 연대급 참모로 지낸 탓에 실전 경험이 부족했다. 두 사람은 서로 잘 아는 사이였고 자신들과 달리 실전 경험이 많은 맥아비를 제쳐 놓곤 했다. “제가 거북했겠죠. 하지만 저도 방관자였어요.”라고 맥아비는 회고했다. 오몬드에게 대대의 열악한 위치에 대해 조언하려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부대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 상관을 비판할 생각도 없었다. 병력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준비 태세도 안일하고 경망스러웠다. 한국전쟁이 끝나면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만 무성했다. 이들이 말하는 다음 단계란 오직 두 가지뿐이었다. 압록강 아니면 집, 그것이 전부였다. 중공군 포로가 포획되었지만 제3대대 같은 야전부대에는 이와 관련한 경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을 나중에 알았을 때에는 사령부에서 뭔가 결정적인 정보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감춘 게 아니라면,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무시하는 건 군인의 책무를 완전히 저버린 행위로밖에 볼 수 없었다. 중공군 군사 전술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게 된 맥아비는 그 당시 연대가 뿔뿔이 흩어져 있었던 것이 중공군의 유인책에 걸려들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15
■ 호바트 게이 소장이 레이몬드 윌렌 소위에게 은성훈장을 수여한 후 축하인사를 건네고 있다. 1950년. ⓒ U.S. Department of Defense.
오몬드 대대장을 비롯하여 대대 참모들은 중공군이 공격하기 전 상급 본부에서 논의 중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제8기병연대장 홀 에드슨 대령은 부대를 후퇴시키고 싶어 했다. 그는 부대 위치가 적에게 노출되기 쉬우니 긴장과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경고했다. 11월 1일에 눈을 떴을 때 산불 때문에 하늘에는 연기가 자욱했다. 에드슨과 참모들은 미군 항공 관측망에 이동 행렬이 노출되지 않도록 적군이 고의로 불을 지른 게 아닌가 의심했다. 제1기병사단장 호바트 게이(Hobart Gay) 소장은 전투지역에서 중공군에 관한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초조함을 느꼈다. 그는 11월 1일에 사단 지휘소를 운산 남쪽 용산동에 설치했다. 한동안 군단에서 제멋대로 사단을 분리하고 다른 사단 소속 대대를 배속시키는 통에 게이 소장은 기병사단 자체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특히 제8연대가 너무 튀어나와 사방이 적에게 열려 있는 상태라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제1장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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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필 피터슨 인터뷰.
2. 빌 리처드슨 인터뷰.
3. 벤 보이드 인터뷰.
4. William Breuer, Shadow Warriors, p. 106.
5. 바버라 톰슨 폴츠, 존 아이젠하워 인터뷰.
6. Paik Sun Yup, From Pusan to Panmunjom, p. 85.
7. Ibid., pp.87~88.
8. Russell Spurr, Enter the Dragon, p. 161.
9. 랄프 호클리 인터뷰.
10. 허버트 밀러 인터뷰.
11. 레스터 어번 인터뷰.
12. Caly Blair, The Forgotten War, p. 381; 헤럴드 존슨의 구술 기록, U.S. Army War College Library.
13. 휴렛 라이너 인터뷰.
14. 빌 리처드슨 인터뷰.
15. 필모어 맥아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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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데이비드 핼버스탬 (David Halberstam, 1934-2007)
1934년 4월 10일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하버드 예술대학을 1955년에 졸업했다. 대학시절, 하버드 크림슨이라는 학보 편집자로 활동하던 그는 대학 졸업 후 미시시피의 작은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가 <내쉬빌 테네시안>에서 'the American Civil Rights Movement' 기사를 연재하였다. 1960년대 중반에 <뉴욕 타임스> 재직하면서 'Civil Rights Movement'를 연재하였고, 베트남전의 진실을 밝히는 보도로 1964년 서른살의 나이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그는 정치, 역사, 비즈니스, 미국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점차 스포츠 저널리즘으로 관심사를 변경하였다. 저서로는 민권운동을 취재한 기록인 『아이들』, 베트남전을 다룬 최고의 베스트셀러 『최고의 인재』, 스포츠 저널리즘을 다룬 『게임』 등 모두 21권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했으며, 특히 『최고의 인재』를 통해 뉴저널리즘의 창시자이자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2007년 4월 23일,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의 원고 탈고 후 닷새 만에 자동차사고로 사망했는데, 1958 NFL 챔피언십에 관한 책의 자료 수집차, 유명 풋볼선수인 Y.A. Tittle를 인터뷰하러 가던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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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소개
정윤미
언어를 통한 새로운 소통 방식인 번역의 매력에 푹 빠져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출판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경제 경영을 위주로 인문, 마케팅, 비즈니스 등 다양한 분야에서 번역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은진
전문번역가 겸 프리랜서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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