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철학자들은 죽었는가?
철학자들은 죽었는가? 철학자가 90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걸으면서 이야기하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졸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큐멘터리 <성찰하는 삶Examined Life>을 세상에 내놓으며 이 두 가지 질문이 계속 내 머리를 맴돌았다. 첫 질문은 철학을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활동으로 보는 일반인의 시각을 반영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우리 다큐멘터리가 역사물로 보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투자할 시간도, 추적할 인내심도 없는 유별나고 무모한 기획 말이다. 두 번째 질문 앞에서 나는 늘 한탄하게 된다. 철학은 인간의 지식이 가지고 있는 힘과 한계를 연구하는 분야고, 우리가 집단으로 살아가는 환경에 자리 잡은 핵심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분야다. 이런 문제는 기본적이지만 쉽게 다루기 힘들다. 그럼에도 두 번째 질문은 철학자들을 피곤한 사람으로 만든다. 다르게 보면 호기심과 교양, 역동성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받을 그런 사람들인데 말이다.
철학이 이처럼 곰팡내 나는 분야라는 평가를 받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특히 오늘날 지성인을 좋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반反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프랑스 같은 나라와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프랑스에서 철학자들은 문화와 정치에 비교적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프랑스 텔레비전은 수십 년 동안 철학 토론을 방송하고 있는데, 이런 오랜 전통이 일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인문학이나 비판적 사고, 예술 등을 강조하는 인문교육을 멀리하고 시장 친화적 분야를 가까이하는 흐름이 철학의 대의를 훼손하고 있다. 물론 철학이 전문화되고 철학의 언어가 협소해지는 현실도 이런 상황에 이바지했다. 일반 대중은 오늘날 진행되는 학문적 논쟁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더라도 별난 세계의 신비한 이야기 정도로 여긴다. 그렇다고 이들을 비난할 수 있는가?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한번쯤은 철학에 관심을 보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다른 자구책을 찾고 있다. 인간의 본성이나 우리 세상을 이해할 통찰을 구할 때 [철학 대신] 과학을 바라본다는 얘기다. 동시에 통신 기술은 끈질긴 ‘연결성connectivity’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이 연결성은 종종 덧없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에게 황홀감과 고통을 안겨 준다. 우리는 이런 황홀감과 고통에 몰두하면서 인내심과 지구력을 잃어버렸다. 철학이 인도하는 독특한 명상과 대화에는 이런 인내심과 지구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큐멘터리 <성찰하는 삶>은 이러한 단절을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성찰하는 삶>은 영상과 단순한 대화법으로 철학과 일상을 연결한다. 이 제목은 소크라테스가 남긴 유명한 격언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를 가리킨다. 플라톤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서양철학의 탄생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와 겉으로 드러난 현상appearances, 창조의 기원, 좋음善의 의미, 대중적 지혜의 변덕스러움 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 책에 나오는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격언을 가리켜 영원한 모순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찰하는 삶은 정말 어렵다. 성찰하는 삶 때문에 많은 사람이 회의에 빠져 생활이 마비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광기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성찰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혼란에 빠진 사회의 공분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소크라테스 생애에 일어난 일처럼 말이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는 삶은 열정과 용기가 아로새겨진 매우 소중한 삶이며 보상도 따르는 삶이다.
이 책은 또 다른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를 본보기로 삼는다. 키케로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아고라를 오가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열정을 다해 토론을 벌였다. 사람들이 성가신 나머지 근거도 없는 가정이나 주장을 내세우며 장난기 섞인 그의 엄밀한 논증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가정이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두루 다니며 철학을 하려는 충동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역사 속에 살아남아 루소는 이 충동을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Reveries of a Solitary Walker』으로, 키에르케고르는 우울한 산책으로, 임마누엘 칸트는 유명한 정시 산책으로, 발터 벤야민은 수수께끼 같은 도시의 한량으로 표현했다. 여기저기 다니며 철학을 하려고 했던 니체는 『우상의 황혼Twilight of the Idols』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늘 앉아만 있는 삶은 실제로 성령을 거스르는 죄다. 걸으면서 도달한 사고만이 가치가 있다.” 그러나 철학적 사색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집이나 대학 강의실로 들어갔고 서가에도 자리를 잡았다. <성찰하는 삶>은 철학자 여덟 명을 거리로 초대한다. 그리고 카메라 앞에서 자기 생각을 사람들과 나누게 한다. 철학을 다시 밖으로 불러 내 철학과 산책이 오랫동안 맺어 왔던 중요한 관계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철학자의 산책은 단순한 행동이지만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역사적 선례를 떠올려 보면, 철학자의 산책에는 철학의 과거가 살아 숨 쉰다는 걸 알 수 있다. 영화 기법 면에서 보자면 산책 모티프는 움직임과 몸짓, 다양한 장면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다. 덕분에 자리에 앉아 인터뷰를 진행하는 침체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상징적으로 산책은 철학을 상아탑에서 끄집어내 현실로 들어가게 한다. 정치와 문화의 관점에서 이 대화들이 펼쳐지는 배경은 공공 공간이 줄어드는 사회며, 속도와 효율성을 숭배하는 사회가 된다. 동시에 산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즉 예측할 수 없는 발견이나 우연한 마주침이 빚어내는 조용한 성찰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산책 접근법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이 접근법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자동차나 노 젓는 배, 휠체어 등, 다른 이동 수단을 활용하는 세 차례 짧은 여행을 기획했다. 이런 이동 수단으로 처음 내구상은 확대되고 현대화됐다. 특히,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내 동생 수나우라 테일러Sunaura Taylor와 통찰력 있는 대화를 나누며 이 과정을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두 사람의 산책은 우리가 통상 이해하는 산책의 의미에 도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성찰하는 삶>을 구상하면서 나는 사회 문제나 윤리 문제를 주로 다루는 사상가에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우리의 집단 환경을 개선하려는 모든 노력의 핵심에는 진지한 성찰이 자리 잡고 있다는 내 신념과 개인적인 관심사를 모두 반영한 결정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 철학 분야가 많다. 언어철학과 논리학, 과학철학, 현상학, 심리철학 같은 분야 말이다. 이 책은 포괄적인 철학 개론서가 아니다. 내가 원한 것은 지역과 문화, 지적 전통 등이 서로 달라 한데 모이기 쉽지 않은 여러 사상가를 만나고 그들의 시각이 가진 특징을 파악하면서 주제의 통일성을 얻는 것이었다. 나는 분석학이나 실용주의, 공리주의의 전통에 있는 사상가와 대륙 철학, 정신분석학, 퀴어 이론,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해체주의처럼 이른바 ‘학설’로 분류되는 이론에 관련된 사상가 사이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했다.
나는 내 사유에 오랫동안 흔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이 기획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의 연구가 나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면 시청자나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열두 살 때 읽은 피터 싱어Peter Singer의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은 내게 채식주의를 이해할 윤리의 틀을 마련해 주었다. ‘페미니스트’와 ‘여성’(혹은 문제가 된다면 ‘남성’)의 의미를 알려고 씨름하던 십 대에는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을 꼼꼼하게 읽었다. 시간이 흘러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처한 현실을 다룬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연구를 접하고 나서는 장애인 문제를 어떤 식으로 사고해야 하는지 알게 됐고 수나우라의 경험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다큐멘터리 <지젝Žižek>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함께 고생한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나, 마이클 하트Michael Hardt는 내가 정치에 대해 갖고 있던 가정들을 재평가하도록 끈질기게 자극했다. 코넬 웨스트Cornell West와 콰메 앤서니 애피아Kwame Anthony Appish는 지역적인 것과 전 세계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그리고 인종과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물론 지젝과 하트도 이들만큼이나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분야에 막 발을 들여놓은 시기에 공교롭게도 대학원에서는 아비탈 로넬Avital Ronell과 이미 고인이 된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공동 강좌가 개설되었다. 당시 나는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쉽게 철학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강의가 큰 영감을 주었다. 나는 영화와 철학에 늘 독특한 매력을 느낀다. 철학의 여러 이론들이 까다로운 사안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해 세상을 새롭게 볼 기회를 준다면 영화는 주변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방식을 변화시켜 우리의 인식을 바꾸는 비슷한 능력이 있다.
하지만 철학은 논증 전개 과정이 고도로 전문화돼 있고, 그 과정에서 분석을 위해 사용하는 범주도 언뜻 보면 너무 복잡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위대한 철학자들이 품고 있던 핵심 전망은 본래 단순하다.” 언젠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을 인용하며 한 이야기인데 내 생각도 그렇다. 철학자들이 가진 기본적인 힘impetus이나 통찰을 제시하되, 일반인이 알아듣기 힘든 말은 모두 빼고 일상의 경험과 관심사가 배어나오게 정리해 제시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사실 사람들이 철학을 하면서 강한 전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은, 처음에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개념이 갑자기 분명해져 좀처럼 헤아릴 수 없던 문제나 상황, 감각이 완벽하게 해명될 때일 것이다. 나는 이 책에 정리해 놓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런 감격을 여러 번 맛보았다. 독자들도 평범한 사건이나 경험을 통해 직관적으로 진리의 전모를 파악하는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이 없었다면 내가 그런 순간을 맛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사상가들이 비범한 지성과 집중력,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때로는 엉뚱하기도 하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됐다. 또한 사상가들은 자기 사상을 더 넓은 세상에 전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종종 우리 문화에 만연한 반지성주의에 맞서 싸우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의 복잡한 사상을 일반인에게 쉽게 전할 방법을 고민하면서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고,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협력하고, 공개 강좌를 열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출연하며, 유선방송 뉴스쇼에 초대 손님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이들은 학문과 지식의 민주성을 지키는 투사인 셈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나는 철학자들과 인터뷰를 진행할 때 다른 철학자들과 서로 논쟁이 될 만한 주제를 골랐고, 모든 대화가 그 주제에 매우 핵심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폭넓게 진행됐다. 동시에 이 기획에서는 모든 철학자가 여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주제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불평등과 박해와 고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의미를 찾고 타인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규명하는 것이다.
덧붙여 나는 인터뷰 무대가 단지 수동적인 배경이 아니라 [인터뷰의] 핵심 성격을 드러내는 곳이 되도록 노력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지나가는 행인들이 [우리의 토론에] 개입해 주길 바랐으며, 사소한 것들이 주제에 대한 내 상상력에 불을 지펴 주길 원했고, 장소의 지정학이 우리가 갈 수 있고 갈 수 없는 길을 결정해 주길 기대했다. 피터 싱어의 소비 윤리나 슬라보예 지젝의 생태처럼 어떤 경우에는 논제를 확정하는 순간 저절로 촬영 장소가 결정됐다. 피터 싱어는 현명하게 명품 쇼핑 거리인 맨해튼 5번가에서 촬영하자고 직접 제안했고 슬라보예 지젝의 경우 논제를 정하자마자 쓰레기 처리장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다른 무대들은 인터뷰 내용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마이클 하트와 맨해튼 센트럴파크 호수에서 노를 저으며 배를 탄 것과 코넬 웨스트와 차를 타고 맨해튼을 가로지른 것도 그렇다. 하지만 모든 무대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어, 우리가 계획할 수도 없고 예상하지도 못한 반응과 통찰을 이끌어 냈다. 이 기획 덕분에 우리는 내가 점유한 공간과 ‘나’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 공간은 우리를 틀 짓고,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우리의 물리적 움직임을 인도하고, 우리의 정신 상태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사유 과정에 개입하며,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형성한다.
철학자들과 산책을 하며 어디가 됐든 90분에서 네 시간 분량의 영상을 촬영했지만 결국 그렇게 오랫동안 나눈 대화를 10분 분량으로 정리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예리하고, 도발적이며, 해학적인 장면을 많이 잘라내야 했다. 잘려나간 장면은 다른 매체를 통해 전하면 된다고 생각하니 편집 과정의 고통을 덜 수 있었다. 영화는 장점도 많으나 내용을 압축해야 하는 구성상의 한계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인터뷰 내용을 모두 제시해 대화의 어감을 잘 전달하고 흥미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 독자들은 나름의 리듬에 맞춰 명상에 잠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스스럼없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고자 했지만, 그 대화를 책에 담을 때는 좀 더 엄격한 산문 형식에 맞게 재구성했다.
이 책에 담긴 대화들은 해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코넬 웨스트가 다큐멘터리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는 것처럼, 총체성이나 절대 진리를 얻고자 하는 우리의 낭만적 욕구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시각이 도덕적 상대주의의 수렁으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불온한 산책자』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시각은 오히려 지적인 탐구, 연민, 그리고 정치적 헌신이라는 광활한 윤리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이것이 『불온한 산책자』가 전하는 주된 메시지일 것이다. 우리의 기획은 모든 것을 다 다루지도 않으며, 여기서 다루는 어려운 문제에 뚜렷한 답을 제시하는 체하지도 않는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면 철학은 필요 없을 것이다. 이미 철학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오히려 그들을 처음 철학으로 이끌었던 호기심과 궁금증, 그리고 도덕적 분노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상은 언제나 사람과 시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철학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그들을 끝없이 탐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이 책에 들인 노력으로 사람들이 잠시라도 쉬면서 자기 신념이 어디서 왔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거나, 당연하게 여기는 윤리적 가정과 선입견에 의문을 제기해 보거나, 타인에 대한 책임을 재고하거나, 어떤 문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만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큐멘터리를 보거나 이 책을 읽은 뒤에 사람들이 일상에서 철학을 실천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히고 그 훈련에서 억누를 수 없는 큰 즐거움을 맛본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2009년
애스트라 테일러Astra Taylor
1장 코넬 웨스트: 진리Truth
코넬 웨스트는 프린스턴 대학 철학과 교수로 『뉴스위크Newsweek』는 그를 가리켜 “저항하는 달변의 예언가”라고 했다. 최근의 저서 『외줄 위에 놓여 있는 희망Hope on a Tightrope』에서 웨스트는 인종과 리더십, 믿음, 가족, 철학, 사랑, 봉사 등 미국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다양한 사안에 대해 거침없이 논평하고 있다. 웨스트의 또 다른 책으로는 『뉴욕 타임즈New York Times』의 베스트셀러로 꼽혔고 “전미도서상American Book Award”을 받기도 한 『인종 문제Race Matters』와 『민주주의 문제Democracy Matters』 등이 있다.
맨해튼에 땅거미가 깔릴 무렵 우리는 코넬 웨스트를 태우려고 도시 한복판의 호텔 앞에 차를 세웠다. 코넬 웨스트는 철학자 사이먼 크리츨리Simon Critchley와 함께 뉴스쿨New School에서 강연을 하기로 했는데, 마침 같은 날 우리와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이다.(코넬 웨스트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사이먼 크리츨리는 뉴스쿨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옮긴이) 내 원래 기획은 산책을 하며 인터뷰를 하는 것이었지만 드라이브를 하면서 인터뷰하는 것도 산책 개념을 현대화하는 적절한 방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이보다 더 여유로운 여행이 또 어디 있을까? 카메라맨은 앞좌석에 앉았고 보조 카메라를 든 음향 기사와 웨스트가 뒷자리에 앉았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퇴근 시간 붐비는 거리를 헤치고 나가면서 최선을 다해 대화를 이끌었다.
웨스트 마침내 이렇게 빅애플(Big Apple, 뉴욕 시의 별칭. 옮긴이) 한가운데서 만나는군요.
테일러 대화 주제를 미리 정해 놓지 않았는데, 주제를 몇 가지 제시해도 될까요? 진리나 믿음, 사랑……, 이런 건 어때요?
진리가 좋겠습니다. 그게 좋아요. 아주 마음에 드는 주제입니다.
좋아요. 그럼 진리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무거운 주제네요.
(우리는 시동을 걸고 번화가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내 생각에 궁극적인 질문은 이거예요. “진리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진리를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이해하려고 씨름합니까?”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Adorno의 말이 맞아요. 아도르노는 진리의 조건은 고난이 말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진리에 실존적 의미를 부여하죠. 그래서 우리는 삶의 방식으로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그렇지 않나요? 세상에 일련의 사물에 부합하는 일련의 명제가 있다면 그것들과 대립하는 그런 진리가 있죠.
주제를 결정하니 마음은 벌써 플라톤을 향해 달려가네요.
그렇죠. 나도 사람들이 버트런드 러셀보다는 플라톤을 생각했으면 합니다. 비범한 분석철학자 러셀은 진리란 실제로 세상의 사물에 부합하는 명제에 관한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했습니다. 반면 플라톤은 늘 진리를 삶의 방식과 연결된 것으로, 특정한 존재 양식으로 이해했고요. 플라톤은 우리에게 파이데이아에 함께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나도 모든 진지한 철학적 기획의 중심에는 결국 파이데이아가 놓여 있다고 생각해요. 당신은 이 과정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나요? 플라톤이 볼 때 파이데이아는 생성becoming에서 존재being로 나아가는 것이지만 나는 그 과정의 특징을 이렇게 봅니다. 피상적인 것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경박한 것에서 진지한 것으로, 나아가 자아를 갈고 닦아 현실과 역사, 필멸성과 씨름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영혼의 성숙입니다. 물론 플라톤의 경우에도 생성에서 존재로 나아가는 과정은 영혼이 진정한 본성으로 돌아서서 특정한 인격을 갖추게 되는 일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존재 양식으로 이해하는 나 역시 고전 철학의 전통에 서 있는 셈이죠. 따라서 철학은 삶의 양식에 더 가까워집니다. 삶의 양식은 담화 양식과는 대립하는 것이고요.
그럼 철학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면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이 기획의 제목이 “성찰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지금 소크라테스의 격언을 큰 화면에 옮겨 놓으려고 노력하는 셈이죠.
좋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소크라테스 방식으로 성찰하고 있습니까? 플라톤은 『변명Appology』(『소크라테스의 변명』,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1999) 38a행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성찰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자신을 심문할 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당신이 암암리에 갖고 있는 가정과 논리 정연하지 못한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다른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플라톤은 철학이란 죽음에 대해 명상하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죽음은 사건event이 아닙니다. 삶이 끝나는 사망을 의미합니다. 죽음이 없으면 다시 태어남도 없고 변화도 없으며, 변환transformation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은 죽는 법을 어떻게 배우나요? 물론 몽테뉴도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죽는 법을 배우는 것To Philosophize Is to Learn How to Die」이라는 에세이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죽는 법을 배우지 않고는 진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법입니다. 죽는 법을 배우고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옛 자아를 더 나은 자아로 바꾸어야 당신은 실제로 더 열심히, 더 비판적으로,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죠. 죽는 법을 배우는 일과 변화하고 변환을 맞이하는 일은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당신 세계의 위아래가 바뀌고, 당신의 세계가, 루트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년~1853년. 독일의 소설가, 극작가. 슐레거 형제, 피히테, 셸링 등과 친분을 다졌으며, 그들과 함께 초기 낭만파 운동의 기틀을 다졌다. 여기서 코넬 웨스트는 『위 아래가 뒤바뀐 세상The world turned upside down』이라는 제목이 붙은 루트비히티크의 희곡을 언급하고 있다. 옮긴이)가 자신의 유명한 희곡에서 강조하는 방식으로 뒤집히면 당신은 새로운 자아를 갖게 됩니다. 진리와 죽음에 대해 말할 때 사랑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옛 자아가 죽고 당신이 사랑하게 된 또 다른 자아와 깊은 관계를 맺는 새로운 자아의 출현을 뜻하니까요. 이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겁니다.
사랑에 대해 더 이야기하기로 해요. 생각하기에 따라 사람들은 사랑이 적절한 철학 개념이 아니라고 볼 수 있어요.
아니요, 사랑은 모든 철학적 담화의 중심에 있습니다. 플라톤은 진리에 대해 말하려면 에로스eros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어요. 철학이 사실상 소피아sophia를 기반으로 하는 지혜 탐구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혜 탐구는 지혜 사랑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플라톤은 구체적인 인간과 대립하는 추상적인 형상을 사랑합니다. 이 점에서 나는 플라톤을 비판합니다. (웨스트는 잠깐 말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본다. 거리는 행사를 보러 온 사람들로 흘러넘친다.) 아, 무슨 개막식이 있나 보네요. 멋있지 않습니까? 길 양쪽으로 사람들이 늘어서 있네요. 이게 뉴욕입니다. 레드 카펫이며 온갖 것이 다 있죠!
에로스는 모든 것의 중심에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소크라테스는 자전적 방식으로 에로스를 정의합니다. 한편으로는 부족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독창적이기도 하죠. 플라톤은 『향연Symposium』(강철웅 옮김, 이제이북스, 2010)에서 사랑과 씨름하는 가운데 에로스를 정의합니다. 알다시피 『향연』은 사랑을 다룬 위대한 책이랍니다. 에로스는 중요합니다. 지혜를 사랑하지 않으면 철학적 사유는 없습니다. 이 점은 단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철학에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생각을 좋아해요. 이 기획을 준비하면서 “철학은 거리에서 이루어진다”는 표어를 내걸었는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철학은 살면서 겪는 경험, 말하자면 거리의 삶, 다양한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한 것입니다. 그게 철학의 전부죠. 거리 철학을 굳이 도시의 철학으로 제한하고 싶지는 않아요. 시골에서 할 수도 있거든요. 철학은 근본적으로 자기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려는 방식에 대한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열정과 용기를 가지고 분수에 맞게 사는 삶을 뜻하고요. 이렇게 말하면 되겠네요. 나는 철학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유한한 상황을 다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라는 관점에서 말이죠. 우리는 대소변 사이에서 깃털 없이 태어나 두 발로 다니면서 의식도 있고 언어도 사용하는 피조물입니다. 우리 몸은 언젠가는 땅 속의 벌레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는 먹이가 되겠죠. 이것이 우리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동시에 시간과 공간 안에 머무는 동안에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욕망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바라는 욕망이지요. 물론 우리는 신념을 가진 존재기도 합니다. 신념이란 확실성을 부여잡기 위한 다양한 노력, 여러 형태의 우상 숭배라 할 수 있죠. 한편으로 당신은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화를 합니다. 또한 구조와 제도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실천합니다. 사람들은 책임 있는 엘리트들에게 왕, 여왕, 봉건영주, 기업 엘리트, 정치인의 지위를 부여합니다. 이런 엘리트에게 사람들, 즉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맡기려는 것입니다. 당신은 한편으로는 죽음과 신념과 지배를 받아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 앞에서도 욕망하고, 신념이 있음에도 대화하며, 지배를 받으면서도 민주주의를 실천합니다. 그렇다면 철학 자체는 죽음 앞에서 욕망과 씨름하고, 신념 앞에서 대화하려 노력하며,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비판적 성향을 띠게 됩니다. 철학은 지배와 가부장제, 백인 우월주의, 제국주의 권력, 국가 권력 앞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매우 허약한 실험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합니다. 집중화된 권력은 그 권력 아래 영향 받는 사람들을 결코 책임지지 않거든요.
철학은 “권력을 향해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말인가요?
맞아요. 바로 그겁니다. 그러나 당신은 권력 없는 사람들에게도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알다시피 권력 있는 사람들만 탐욕이나 증오심, 두려움, 무지를 독점하는 게 아니니까요. (빨간 불이 들어와 차를 세웠다. <뉴욕 공공 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 앞이었다. 도서관 계단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기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세요. 여기서 힙합 그룹을 보게 되네요. 힙합에서도 저런 걸 브레이크댄스라고 하지요. 멋지지 않습니까? 어젯밤 모임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힙합 대가들이 모두 모여 네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요.
나도 방금 전 당신 시디를 봤어요.
<잊지 못할 계시 여행Never Forget: A Journey of Revelation> 말이군요. 프린스Prince와 <아웃캐스트OutKast>의 안드레3000André3000, 위대한 고故 제럴드 레버트Gerald Levert, <데드 프레즈Dead Prez>의 엠 원M-1, 케이알에스 원KRS-1 등과 함께 만든 앨범입니다. 전부 예언적이고 진보적이고 비범한 힙합 아티스트들입니다. 알다시피 케이알에스 원은 철학자이고요. 열세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거리 생활을 하다 힙합 1세대가 된 사람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