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폭력, 미국을 비추는 거울
Violence: A Mirror for Americans
어떤 상황에서도 선행을 하고자 하는 충동은 미국인의 타고난 본성이다.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은 누구에게 선행을 베풀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 그리고 실제로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자신들에게만 있다고 믿는 듯하다. 궁극적으로 이런 태도는 다른 나라 사람에게 미국이 던지는 선물 세례나 받아먹으며 살게 이끌 뿐이다.
1968년 초 나는 몇몇 친구에게 바깥에서 본 미국의 이런 이미지를 이해시키려고 끈질기게 노력했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주로 펜타곤 시위행진을 조직한 활동가였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을 그들과 나누고 싶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나면 전쟁을 지지한 매파나 비둘기파가 다 같이 합세해 제3 세계의 빈곤을 퇴치한다는 명분으로 끔찍한 전쟁을 벌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빈곤과의 전쟁’이 큰 실패로 끝나고 대도시 소요만을 일으킨 것을 기화로 하여 미국인들은 ‘진보를 위한 동맹’이 라틴아메리카에서 거센 반란 사태만 일으키고 실패로 끝난 이유에 대해서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 두 사례는 남베트남을 지키는 것이 영웅적인 자비심의 발로라 여기면서 막대한 인명과 자금을 쏟아 붓고도 아시아 민중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한 베트남 전쟁과도 관련이 있다. 즉 뉴욕 할렘과 과테말라, 베트남, 이 세 지역의 실패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세 지역에서의 시도가 다 불발로 끝난 이유는, 미국이 전하고자 한 물질적 풍요의 복음을 전 세계의 압도적 다수가 신뢰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나는 미국이 베푸는 선행의 의미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이나 아시아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는지 미국인들이 알아차린다면, 자국의 빈민가 문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깨달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그렇게 되면 더 새롭고 효율적인 정책을 생각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외국에서 온 착한 착취자
나는 쿠에르나바카의 학생들과 접촉하면서 위 세 지역에서 실패를 낳은 공통의 뿌리에 대한 인식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쿠에르나바카의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CIDOC에서는 지난 2년 동안 자본이 넘치는 사회와 자본이 부족한 사회에서 각각 가난을 어떻게 겪고 있는지 비교하는 토론회를 열었다. 이 토론회에는 ‘빈곤과의 전쟁’에 헌신했던 미국인들도 상당수 참여했는데, 나는 이들이 라틴아메리카를 연구 관찰하면서 미국의 소수 극빈층과 제3 세계의 다수 빈곤층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고 충격을 받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들이 보여준 감정적인 반응은 이성적 통찰에 따른 반응보다 대체로 훨씬 격렬했다. 지금까지 균형을 잡아준 신념이 갑자기 무너지자 중심을 잃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 신념이란 말하자면 “미국의 방식이야말로 인류를 위한 해결책”이라는 믿음이다. 얼마 전 흑인 폭동이 일어난 로스앤젤레스 와츠 지역에서 온 사회사업가건, 볼리비아로 파견되어 가는 선교사건, 하나 같이 선한 동기로 일해온 이들은 인류의 90퍼센트가 자기들을 어떻게 보는지를 깨닫고는 끔찍한 고통과 낭패감에 빠졌다. 그들은 ‘외부에서 온 착취자’에 다름 아니었다. 그들은 민주주의, 기회균등, 자유기업이라는 이상으로부터 이득을 얻을 가망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이상을 믿게 부추겨 자신의 특권을 강화하는 사람들이었다.
전쟁 국면에 있는 베트남에서는 폭력의 양상이 너무나 끔찍하여 무엇이 폭력을 유발하는지 그 원인을 선명하게 분석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다른 두 가지 프로그램, 즉 ‘빈곤과의 전쟁’과 ‘진보를 위한 동맹’에 쏟는 미국의 관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더 의미가 있겠다. 빈곤과의 전쟁은 사회사업가가 수행하는 전쟁이고, 진보를 위한 동맹은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3분의 2에서 군사정권을 유지하거나 그들에게 권력을 넘기려고 결성한 동맹이다. 둘 다 선의의 이름으로 시작했고, 현재는 평화를 위한 프로그램들로 보이지만, 사실은 폭력을 잉태한 것들이다.
모두가 부자가 되는 꿈
빈곤과의 전쟁은 미국의 이른바 ‘혜택 받지 못한 비주류’를 미국식 생활방식의 주류로 통합하는 것이 목표다. 진보를 위한 동맹은 라틴아메리카의 이른바 ‘저개발’ 국가를 산업국가 대열로 통합하는 데 목표가 있다. 두 정책은 모두 가난한 사람을 ‘아메리칸 드림’에 동참시키려고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두 정책 모두 실패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남의 명령에 따라 꿈을 꾸지는 않겠다고 거부했다. 돈을 주며 꿈을 꾸라는 명령은 오히려 그들을 난폭하게 만들었다. 막대한 자금이 미국의 소수와 라틴아메리카의 다수를 미국식 중산층의 세상에 통합시키는 데 쓰였다. 그 세상이란 많은 이가 대학에 다니고, 일반적인 소비수준을 유지하며, 적당한 가구용품을 갖추고, 보험에 들고, 휴일에는 교회나 영화관에 가는 곳을 말한다. 미국을 움직이는 이런 행동 동기를 심어주려고 일군의 자비로운 자원봉사자들이 뉴욕 빈민가와 라틴아메리카 밀림을 떼지어 누비고 다녔다.
지금 현장에서 좌절을 맛보고 돌아온 사회사업가와 전직 평화봉사단원들은 가난한 이들이 미국식 복음으로 개종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미국 주류층을 설득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다. 진보를 위한 동맹이라는 대규모 선교단이 출범하고 7년도 되지 않아 미국의 소요 진압 경찰과 라틴아메리카의 군사정권, 베트남으로 파견된 군대는 벌써 추가자금을 요구한다. 하지만 현재 이 돈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미국식 생활방식으로 이득을 챙겨온 소수 개종자들이 중산층으로 가기 위해 확보한, 취약한 교두보를 지키는 데 쓰인다는 점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그들만의 세상
미국의 선교 활동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세 작전지역을 비교해 보면 미국인은 금방 자명한 이치를 깨달을 것이다. 양당제와 의무교육 제도를 갖춘, 성공한 사람과 소비자의 나라인 미국사회는 가진 자에게는 적합한 사회일는지 모르지만 전 세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결코 맞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1년에 3천 달러도 못 버는 미국의 15퍼센트 소수와 1년에 300달러도 못 버는 전 세계 80퍼센트 다수가 풍요 속의 삶이라는 틀에 자기들을 끼워 맞추려는 획책에 맞서 폭력으로 반발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미국인은 자신들이 선택한 삶의 양식이 다른 사람들과 나눌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8년 전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의장인 고故 마누엘 라레인Manuel Larrain 주교에게, 필요하다면 라틴아메리카로 선교사가 오지 못하게 헌신할 각오가 서 있다고 말했다. 그의 대답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우리 라틴아메리카 사람에게 선교사는 필요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만나서 교육시킬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입니다. 그들에 대해 그 정도 책임은 우리에게 있는 거죠.”
지금 시점은 돈으로 유혹하건, 설득력을 발휘하건, 총으로 제압하건, 폭력이 일어날 가능성을 완전히 없애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 빈민가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내고 과테말라, 볼리비아, 베네수엘라 등에서 1년을 꼬박 지내본다면, 우리는 방어전이 벌어지는 주요 세 현장에서 미국의 정책에 어떤 반발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유사점을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쟁은 와츠, 라틴아메리카, 베트남에서 사이비종교와도 같은 미국의 이념을 지키고자 하는 전쟁이다. 세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전쟁이다. 즉 이 전쟁은 “서구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인 것이다.
이 전쟁의 기원과 외양은 인류에게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겠다는 고결한 이상과 너그러운 동기에서 나온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이상 뒤에 감춰진 음모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원래 계획은 다 압살되고 한 가지 강력한 목표만 남게 되었다. 그 목표란 극소수에게만 풍요를 가져다주는 삶의 양식과 죽음의 양식을 지켜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삶과 죽음의 양식은 널리 확산시키지 않으면 지켜낼 수 없는 것이므로, 풍요를 누리는 자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의 의무라고 선언한다. “모두가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라는 구호는 이미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말은 “내가 덜 가질까봐”로 들린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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