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
모든 지식은 언젠가 만난다
: 별에 대하여
당신은 지식을 얻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일반적으로는 지식이 책 속에 있고, 내가 그것을 읽음으로써 그 지식을 얻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식은 그런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조금 이른 나이에 지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것이 성인이 될 때까지 배움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심어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행운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당신에게도 알려주고자 한다.
스무 살의 봄이었다. 이렇게 말하니 무언가 희망차고 아름답게 들리지만 그때 나는 재수생이었다. 왜 그랬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데, 사회에 대한 나름대로의 불만 표시였는지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사진을 남기지 않은 당시의 나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재수학원은 콩나물시루처럼 수험생들로 빼곡했다. 나는 언제나 교탁 바로 밑의 맨 앞자리에 앉아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옆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 필기에만 열중했다. 지금 같아서야 남들보다 한 해 더 공부하는 게 뭐 그리 대수냐며 느긋하게 생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당시의 나는 심약했다. 내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티내고 싶었다.
입시 공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미안했다. 어머니가 빚을 내어 마련해준 시간이 아닌가. 입시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보지 않으려 했다. 한눈팔지 않고 교과서와 문제집만 보겠다고 다짐했다. 그토록 보고 싶은 세계문학도 당분간 펼쳐보지 않기로 했다. 못내 아쉬워 가방 속에 넣고 다녔지만.
그렇게 각박하게 지내던 어느 날, 사회문화 수업시간이었다. 사회문화 선생님은 연세가 많았다. 언제나 오래된 갈색 양복 차림에, 입술 가까이 마이크를 대고 일정한 톤으로 잔잔하게 수업을 진행하셨다. 수업은 거대한 칠판의 왼쪽 윗부분부터 시작해서 오른쪽 아랫부분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필기로 채워졌다. 보는 눈이 없는 학생이라도 대번에 느낄 만큼 연륜이 묻어나는 수업이었으나 인기 있는 수업은 아니었다. 사회문화라는 과목 자체가 입시에서 비중이 크지 않을뿐더러,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 한 번 하지 않는 나이 많은 선생님의 수업을 학생들이 반길 리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날도 그저 선생님의 빈틈없는 필기와 목소리에 집중해서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선생님의 다른 말이 시작되었다. 칠판 필기가 중간 즈음에 이르렀을 때였다. 너무도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하게 시작되어서, 미처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던 학생이라면 수업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생님의 이야기는 지식을 얻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별 모양을 그리며 말씀하셨다.
“별 모양의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별 모양의 지식이 담겨진 책을 읽으면 될까요? 한 번에 읽으면 안 될 것 같으니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보는 거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방법으로는 별이라는 지식을 얻을 수 없어요. 지식은 그런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책을 펴야 해요. 삼각형이 그려진 책, 사각형이 그려진 책, 원이 그려진 책, 이런 책들을 다양하게 읽었을 때, 삼각형과 사각형과 원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비로소 별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는 필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은 칠판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수업을 이어나가셨다.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의 필기를 공책에 옮겨 적었다.
무엇이나 잘 잊는 사람이 있다. 조금만 오래 되어도 기억을 못하는 사람. 내가 전형적으로 그런 사람이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직장생활에서의 기억도, 군에서의 기억도, 대학생 때의 기억도, 재수생 시절의 기억도. 그런데 이 순간이 가끔 기억난다. 칠판에 그려진 단조로운 삼각형과 사각형과 원의 도형들. 그 옆에 동그랗게 표현된 사람과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진 별 하나.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나는 건, 그 무렵부터 다시 세계문학을 펼쳤다는 것이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승강장 벤치에 앉아서, 들어오는 지하철을 몇 대 더 지나쳐보내며 입시에 나오지 않는 소설들을 읽었다.
그때는 맥락을 이해하지 않았다. 왜 뜬금없이 선생님이 수업을 멈추고 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셨는지. 많은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알 것 같다. 선생님은 수업 중에 학생들과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심리가 어떤지, 그러한 심리상태로부터 어떤 생각에 도달해 있는지를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조급한 마음에 스스로 입시의 틀 안으로 들어가서는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범위 내에서만 사유하려고 했다. 변명거리는 충분했다. 시간이 없지 않은가? 어차피 입시에 나오는 범위는 정해져 있는데 그것만 반복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 밖으로 걸어나가서, 그것에서 벗어난 뒤, 다른 것을 둘러봐야만 한다. 그것은 비단 입시뿐만이 아니다. 전공이 되었든, 업무가 되었든, 모든 지식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이 아닌 것들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궁극의 지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여 마지막에 반드시 얻게 될 삶에 대한 이해, 그 궁극의 지식은 몇몇의 책에서 단번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의 오해와 노년의 오만과 무수한 시행착오와 상실과 고통과, 그 속에서도 기어코 피어나는 작은 행복과 사랑하는 이의 부드러운 손과 깊은 눈동자와 내면의 고요. 그것들 속에서 우리는 삼각형과 사각형을 얻을 것이고, 마침내 인생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삶이라는 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인생 전체에 흩뿌려진 모든 지식은 내 안에서 언젠가 만난다.
우리는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가
: 관계에 대하여
타인과의 관계. 나에게 가장 어려운 분야다. 사람마다 낯설고 서툰 분야가 있지 않은가. 나에게는 타인과의 관계가 그러하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맞는 말이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문제의 전부라고 해도 과하지 않으니 말이다.
다만 내가 ‘어렵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의미가 조금 다른데, 그것은 마치 이런 것과도 같다. 하나의 수학 문제가 있고, 수학 전공자가 이렇게 말한다. ‘이 수학 문제는 어려운 문제다.’ 그리고 동일한 수학 문제를 보고 영혼까지 문과생인 학생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수학은 어렵다.’ 내가 타인과의 관계가 어렵다고 말한 의미는 후자에 가깝다. 그것은 나에게 서랍 속에서 발견한 엉킨 실타래처럼 느껴진다. 나는 서랍을 다시 닫고 싶다.
그렇다고 모든 관계를 어렵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좀 덜 어려워하는 관계도 있다. 인생 전반에 걸쳐 형성하는 관계를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해보면, 하나는 ‘자아와 세계’의 관계, 다른 하나는 ‘자아와 타인’의 관계가 될 것이다.
우선 세계와의 관계는 나에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가장 흥미롭고 익숙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표현하는 언어로 나는 ‘신비’나 ‘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이에 대한 탐구의 결과를 책과 강연으로 많은 분과 공유하고 있다. 물론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에서도 자아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서는 빠뜨리지 않고 다룬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고, 또한 당신이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주제이므로.
반면에 나는 타인과의 관계가 어렵다.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내가 외부의 타인에게 닿을 수 있는지를 의심한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세계와의 관계문제를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계와의 관계 문제에서 지금까지 내가 도달한 잠정적인 결론은, 자아 밖에 외부세계가 존재하는지 매우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만약 외부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의 실체에는 결코 접근할 수 없다. 눈앞에 드러나는 세계는 내 마음에 의해 재구성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 당신 앞에 펼쳐진 세계, 창밖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책장의 감촉과 적당한 소음과 익숙한 냄새. 이 모든 것은 세계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왜곡되고 재구성된 모습일 뿐이다. 나는 세계의 ‘실체’를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감각기관과 뇌가 그려주는 세계의 ‘그림자’를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 자폐아다. 모든 의식적 존재는 자신의 마음 안에 갇혀 산다. 이러한 결론은 엉뚱한 상상이 아니다. 서구의 관념론 철학뿐만 아니라 고대 인도인들의 중요한 결론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 세계가 자기 자신에 의해 재구성된 자아의 세계임을 지혜롭게 설명한다.
이러한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한번은 그림으로 표현해본 적이 있다. 다음 그림이다.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다. 자아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세계는 내 외부가 아니라 나의 내면에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 책의 4부 [의미] 부분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계관은 낯설다. 그것은 상식적이고 평균적인 정규 교육 과정을 이수한 현대인에게 이 문제가 한 번도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당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일수록 사회는 그것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당신의 자유, 당신의 내적 성장, 당신의 영혼, 당신의 깨우침, 당신의 깊은 이해. 그 어떤 것도 사회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세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놀랍도록 독특하고 유일한 자아라는 존재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의 신비로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경제는 소비자와 시장의 관계를 말하고, 정치는 시민과 정부의 관계를 말하며, 사회는 대중과 지역사회의 관계를, 과학은 인류와 자연의 관계를 말할 뿐이다. 그 어디에서도 자아와 세계가 맺고 있는 관계는 다뤄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렇게 세계가 자아의 내면이라는 과정에 심취해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타인의 실존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었다. 타인은 어디에 있는가? 타인은 세계의 일부이고, 따라서 나의 내면에 있다. 위의 그림에 타인을 그려 넣는다면, 타인은 다음의 자리에 위치한다.
물론 내 외부에 세계도 없고 타인도 없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갖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눈앞에 드러난 세계와 타인이 적어도 실제의 세계와 타인과는 큰 차이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그림자에 가깝다.
타인에 대한 이러한 관점. 이것이 내가 타인과의 관계를 어렵게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다. 나는 어차피 타인에게 닿지 못하고 타인은 어차피 나에게 닿지 못한다. 나는 그림자를 보며 이야기하거나 벽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지혜로운 이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왜 사람들을 만나고 말하고 글을 쓰는가. 그것은 내가 믿기 때문이다. 내 외부에 당신의 의식이, 세계의 또 다른 관찰자가 실재하기를 바란다.
우리의 소통이라는 것이 슬프게도 수화를 모르는 사람들 간에 이루어지는 수화 같고 작은 바늘구멍을 통해 오고 가는 외침 같을지 모르지만, 나의 언어가 정제되고 다듬어져서 당신에게 전해진다면 내가 느끼는 감정의 미묘함을 당신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관계의 아득함. 소통의 노력이 온갖 오해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이해. 이것이 외로움의 본질이다. 당신에게 불현 듯 휘몰아치는 깊은 고독과 쓸쓸함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 모른다.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외로워지거나, 타인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매번 좌절하거나.
그래서 타인과의 관계는 나에게 가장 어려운 분야다. 그리고 이 책은 가장 어려운 분야에 대한 탐구 결과이고, 고독한 무인도에서 허황된 기대와 함께 띄워 보내는 유리병 속의 편지다. 이것이 당신에게 가 닿기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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