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cture 01우주 세기의 ‘인간의 조건’?!「프롤로그」와 「제1장 인간의 조건」을 읽다
─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는 누구일까요? 인물부터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렌트는 유대계 독일인으로 본래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 등에게 철학을 배우고 교부 아우구스티누스353~430의 사랑 개념에 대해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그 후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 1771~1833이라는 유대인 여성의 전기적 연구에 몰두합니다. 파른하겐은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대에 여러 유명 지식인과 교제하며 문화적인 모임을 주최하는 한편, 지식인들과 서신을 교환해 문학적, 사상적으로 흥미로운 편지를 남겼습니다. 아렌트는 19세기 초에 유대인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차별 속에서 자기표현을 실현하고 세상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한 이 인물에게 흥미를 느꼈던 듯합니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자 프랑스를 경유해 미국으로 망명한 아렌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에서 교편을 잡았고, 전문 영역을 정치철학으로 옮겼습니다.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에 나치즘, 스탈린주의 등 ‘전체주의’의 기원을 역사적·사상사적으로 해명한 『전체주의의 기원』을 출판함으로써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58년에 아렌트는 이번 강의에서 읽을 『인간의 조건』을 출간합니다. 이 책이 아렌트의 주요 저서입니다.
─ 제목 ‘인간의 조건’과 ‘인간’에 대해
이 책의 독일어판은 오리지널 영어판이 나오고 2년 후인 1960년에 아렌트 자신의 번역으로 콜하머Kohlhammer와 피퍼Piper라는 두 군데 출판사에서 간행합니다. 오늘날에도 새로운 판본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피퍼 판입니다. 독일어판은 제목부터 다를 뿐 아니라 영어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서술한 부분도 있습니다. 아렌트는 독일어가 모어이기 때문에 독일어 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훨씬 수월하게 글로 옮길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영어판 제목은 일본어판과 동일하게 ‘The Human condition’입니다. 일본어로 ‘인간의 조건’이라는 제목을 보고 휴머니즘적인 것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요. 영화나 드라마 제목에도 있을 법하고요. 실제로 고미카와 준페이五味川純平, 1916~1995는 만주국을 무대로 삼아 『인간의 조건』1956~1958이라는 소설을 썼고, 이 작품은 영화1959~1961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 1933~의 『인간의 증명』1976 같은 소설에서도 비슷한 반향이 느껴집니다.
당연하게도 아렌트의 저작은 인간이기 위한 결사 투쟁 같은 것을 장려하지 않습니다. 심오한 뜻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휴먼 드라마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상대화하는 냉철한 이야기입니다.
조금 에둘러 갑니다만, 우선 ‘human’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영어 ‘human’의 계통에 속하는 ‘humanity’나 ‘humanism’에는 일본어의 ‘휴먼’을 통해 상상하기 어려운 의미의 계보가 깔려 있습니다. ‘humanity’는 기본적으로 인간성을 의미하지만 이것의 복수형인 ‘humanities’는 인문과학을 가리킵니다. 일본어로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인도주의밖에 염두에 두지 않지만, 세계사 교과서에도 나오듯 르네상스 시대의 ‘umanismo=humanism’은 인문주의를 의미했습니다.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나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도 ‘휴머니스트=인문주의자umanista’였습니다. 왜 ‘인문’일까요? 어째서 ‘문文’이 붙었을까요? 그것은 이 시대에 ‘휴머니스트’라고 불렸던 사람들이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의 ‘humanitas’에 관한 고전 텍스트를 독해하고 소개했기 때문입니다.
‘humanitas’란 당연히 ‘humanity’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입니다. 이 말은 고대 로마에서 ‘인간다움=시민으로서 익혀야 할 소양’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수사학이나 문법, 논리학 등 변론술에 관한 소양을 가리켰지요. ‘다른 시민들=공중公衆’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시민이 지녀야 할 소양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humanitas’에 관련된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43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기원후 65 등의 텍스트를 읽는 것이 본래적인 의미의 ‘휴머니즘’입니다.
요약하면 ‘humanitas’는 생득적인 것이 아니라 지적인 훈련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른바 ‘교양’입니다. ‘humanitas’의 언어·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는 측면은 아렌트의 강의에도 반영되어 있다고 봅니다. 아렌트는 ‘humanitas’라는 개념 또는 ‘humanitas’적인 ‘인간’관을 고려하면서 Human Condition을즉 『인간의 조건』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 독일어판 제목 Vita Activa
다시 책 제목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독일어판의 제목은 ‘Vita Activa’입니다. 이는 라틴어로 ‘활동적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부제 ‘oder vom tätigen Leben’은 ‘또는 활동적 생활’이라는 뜻으로 라틴어 제목을 독일어로 바꾸어 말한 것입니다.
이 책은 실제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활동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activa’라는 말은 일본어로 표기한 ‘アクティブ액티브’와 뜻이 다른 것은 당연하고, 영어 ‘active’의 통상적인 의미와도 상당히 다릅니다. ‘액티브’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이지요. 이 점은 본문을 읽어 가다 보면 저절로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생활’이라는 말도 주의해야 합니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연상하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옛날에 좌파 담론에는 개념이나 언어가 아니라 ‘생활’에 뿌리내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활동’과 ‘생활’을 붙여 말하면 마치 좌익 사상을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는 말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렌트의 사상은 그런 것과는 완전히 반대입니다. 하나의 사상을 절대시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생활의 전부를 바친다는 것은 아렌트의 사고방식과 정반대입니다. 이 점도 차차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의 만듦새에 대한 또 하나 자세한 이야기를 해 두지요. 영어판 「프롤로그」에는 제사題辭, epigraph가 없습니다. 제사란 본문 앞에 자기가 아닌 대개는 옛날 사람의 유명한 저자의 시나 경구 등을 인용해 어떤 내용인지를 암시하는 글입니다. 영어판으로 번역한 치쿠마문고의 번역본에는 당연히 제사가 없습니다. 독일어판에는 제사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시가 붙어 있습니다.
브레히트는 아렌트보다 약간 연배가 높은 독일의 극작가입니다. 현대 연극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이지요.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연극을 ‘노동’ 또는 ‘생산’이라는 관점으로 파악하는 이론을 전개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동독에서 활동했습니다.
아렌트는 마르크스주의적인 인간관과 대조적인 입장을 취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인간을 강하게 의식하고 차별화된 견해를 내려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아렌트는 ‘노동’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와 대립하는 견해를 제시하는 반면, 마르크스가 전개한 소외론의 논의와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꽤 공감을 표합니다. 아렌트는 인간 본래의 모습에 비추어 소외에 대해 깊이 사유했습니다.
제사를 한번 볼까요? 『바알Baal』이라는 희곡 첫머리에 나오는 「위대한 바알의 찬가Der Choral vom Baal」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바알’은 이 희곡의 주인공인 시인의 이름인데요. 시인 바알이 자기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 시를 지었다는 설정인지, 바알이라는 주인공의 운명을 암시하는 시를 다른 주체브레히트가 지었다는 설정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시에 등장하는 바알은 시인 자신이 아니라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교의 신, 악의 상징입니다. 원래는 시리아 지방의 우가리트 신화에 나오는 ‘풍작의 신이었다고 합니다. 악마 사전 등에 나오는 베르제브브Beelzebub나 바아르는 바알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이교에서는 풍작의 신이었지만, 기독교에서는 악마로 여겨집니다. 시인 바알은 그러한 이중성을 내포한 존재입니다.
인용한 부분은 시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입니다. 같아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시구를 사용해 대조적인 성격이 도드라집니다.
독문학자 이시구로 히데오石黒英雄, 1931~2010가 번역한 시가 쇼분샤昭文社의 『바알 / 밤에 울리는 큰북 /도회의 정글バール·夜うつ太鼓·都会のジャングル(ブレヒト・コレクション2)』1981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엄마의 하얀 자궁 안에서 바알이 달을 다 채웠을 때,하늘은 이미 휑뎅그렁하고, 죽은 듯 고요한 남색이었지.어렸고, 발가숭이였고, 오싹할 만큼 기괴했다.바알이 태어나, 그것을 사랑할 때와 똑같이.(…)어슴푸레한 지구의 태내에서 바알이 썩어 문드러졌을 때,하늘은 이미 휑뎅그렁하고, 죽은 듯 고요한 남색이었지.어렸고, 발가숭이였고, 오싹할 만큼 기괴했다.바알이 살아, 옛날에 사랑했을 때와 똑같이.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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