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철학은 일반적으로 진리 추구의 학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오히려 진리라는 말의 중압감으로 인해〕 우리 시대에 철학이 현실에 적용되는 일은 드물어졌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학사를 공부하면서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으며 진리를 향해 다가가려고 하는 일도 거의 무의미하다고 판단해버리기 때문이다. 둘째, 설령 진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발견하는 일은 철학이 해야 하는 일의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발견된 진리가 소비되도록 하는 것, 즉 진리를 통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은 〔진리의 발견보다〕 훨씬 더 어렵다. 게다가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과제에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의 진리 시장은 과포화 상태처럼 보인다. 잠재적인 진리 소비자는 다른 시장 영역의 소비자들과 마찬가지로 과잉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모든 방면에서 진리 광고로부터 규칙적으로 공격받고 있다. 우리가 도처에서 모든 미디어를 통해 발견하는 진리는 학문적, 종교적, 정치적 진리이거나 실제 삶에 적용될 수 있는 진리들이다. 따라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보물을 발견하여 널리 알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작은 우연을 기대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한 추구를 단념하게 된다. 진리에 관한 한, 현대인들은 동시에 두 개의 근본적인 확신으로 치장하고 있다. 바로 진리가 없다는 믿음과 진리가 너무 많다는 믿음이다. 이 두 개의 확신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은 동일한 결론을 낳는다. 진리 추구는 할 일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진리 추구의 상황으로 묘사된 이러한 장면은 동시에 철학의 본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장면의 축소판을 그리스의 아고라에서 관찰할 수 있다. 당시에 최초의 전형적인 진리 소비자로서 소크라테스는 진리 공급에 관한 시장조사를 시작하였다. 진리를 발견했노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바로 소피스트였다. 그들은 진리를 판매용으로 제공하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스로를 소피스트가 아니라 철학자라고 규정하였다. 즉 진리(지혜Weisheit와 지식Wissen, 소피아Sophia)를 사랑하지만 소유하려 하지 않는 사람으로 규정하였다. 다르게 말하자면 철학자는 판매할 진리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진리의 겉모습만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진리에 관한 것이 있다면, 철학자는 언제든지 진리를 획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소피스트에서 철학자로의 신분 변화는 진리의 생산으로부터 진리의 소비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철학자는 결코 진리의 제작자가 아니다. 그는 또한 보물을 찾는 자나 천연자원을 찾는 자라는 의미라면 진리의 추구자도 아니다. 철학자는 단지 길 위의 사람이다. 그는 진리의 거대한 글로벌 슈퍼마켓에서 방황하는 사람이다. 그는 거기에서 올바른 길을 찾거나 최소한 비상구의 표지판을 찾으려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종종 철학이 자신의 역사적 흐름을 발전시키지 못한다고 개탄한다. 이 말은 철학이 어떤 결실도 거두지 못하고 어떤 역사적 진보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만일 철학이 역사적으로 전개된다고 한다면 엄청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의 생산자로서의 입장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데 진리의 소비자로서의 입장은 항상 동일한 채로 남아 있을 테니 말이다. 단지 진리 제공자만이 변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제공에 직면할 때 생기는 소비자의 당황스러움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진정성 있는authentisch’ 철학은 이러한 당황스러움의 언어적 표현과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러한 당황스러움이 표현되고 정식화되어야만 하는가? 왜 〔철학자는〕 단지 침묵한 채로 있을 수 없는 걸까?
사실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그는 가까이하기 꺼려지고 만성적으로 불만을 드러내며 언짢은 기분으로 다투기 좋아하는 소비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아름다운 말들을 들을 때면 언제나 이러한 말들에서 어떤 논리적 결함과 불충분한 점을 찾아 좋은 분위기를 망친다.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거나 불편해하지 않는 결함들인데도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인물들을 일상에서 자주 마주친다. 상점에서 호텔에서 음식점에서. 그들은 언제나 불만족스러워하며 직원들에게 기꺼이 싸움을 걸고 다른 손님들에게 강하게 신경질을 부린다. 이렇게 성내기 좋아하고 신경질적인 인물들을 마주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옛날의 좋았던 시대로 되돌아가고 싶어진다. 그 시대에는 이러한 유형의 인물〔소크라테스〕을 독배의 도움으로 재빨리 조용히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 있었던 비판적 논증은 매우 양가적으로 보인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듣다 보면 그가 비판적 소비자로서 등장하는 것인지 아닌지 분명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는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진리 제공자를 비판하지만 언젠가는 진짜 진리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면 그는 〔자신만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상품으로 다루고 시장에 내놓는 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지도 모른다. 후자의 가정이 더 그럴듯하다는 증거는 많다. 소크라테스는 시장비판의 실제 고안자다. 특정한 진리 제공이 시장경제의 테두리 안에서 상품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그러한 진리 제공을 거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소크라테스가 모든 개별적인 진리 제공에서 모순과 불충분을 발견하고 노출시키는 것은 아마도 그 자체로 교훈적이고 긴장감을 주긴 하지만, 일반적인 이의 제기의 태도로 보기에는 좀 지나친 면이 있다. 그러나 진리론의 상업화를 규명하고 이에 상응하는 진리의 상품성을 통찰하여 이론의 정식화와 전파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경제적 이익을 폭로하는 것은 그러한 진리론의 진리 요구를 거절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소크라테스로부터 마르크스를 거쳐 프랑크푸르트에서 기원한 비판 이론에 이르기까지, 상품으로 등장하는 진리는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입장은 유효하다. 그리고 이는 진리가 일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제로 의미한다. 왜냐하면 시장경제의 조건하에서는 어떠한 진리론도 상품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에는〕 진리를 넘어선 진리die Wahrheit jenseits der Wahrheit에 도달한다는 ‘약한 메시아적인 희망’이 여전히 남아 있다. 다시 말해 한 번도 진리나 가르침, 책, 이론, 방법으로 나타난 적이 없으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결코 나타난 적이 없는 절대적으로 다른 종류의 진리에 대한 희망이 아직 남아 있다. 그 진리는 상업화의 가능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희망은 매번 실망을 주기 위해서 요구될 뿐이다.
이러한 희망은 이미 플라톤에 의해서 진단되었다. 동굴의 비유에서 그는 진리를 추구하는 인물을 묘사한 바 있다. 진리를 보는 데 성공한 그 인물은 자신의 경험을 알려주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되돌아온다. 동굴의 비유는 철학자에 관한 것이라고 흔히 주장되지만 사실은 소피스트에 대한 이야기다(왜냐하면 철학자에게 진리의 관찰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실제로 진리를 본 소피스트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그는 진리를 보았다는 사실 때문에 진리에 눈이 멀게 된다. 소피스트들을 위해 맞춤형으로 매끄럽게 잘 고안된 아름답게 들리는 말들이 그를 지배하게 된다. 이러한 소피스트는 서투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가 진정한 소피스트라는 점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소피스트가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그를 죽인다. 이 미숙한 소피스트는 십자가에서 생을 마친 신의 아들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진정한 낭만주의 예술가, 작가, 혁명가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그들이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그림을 잘 그리거나 시를 잘 짓거나 성공한 혁명을 수행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사이에 우리는 계산된 실패가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상품화될 수 있다는〕 이러한 주장이 불완전한 주장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이 주장 자체도 상품 형태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
철학적 비판은 각 진리를 상품으로 규정하고 이로 인해 진리를 불신하게 되는 상황으로 인도한다. 이러한 결과는 무엇보다도 다른 의심이 생겨나게 만든다. 철학 자체가 각 진리를 상품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사실 철학적인 태도는 일종의 수동적이고 사색적이고 비판적이고 따라서 궁극적으로 소비적인 태도다. 이러한 태도에 비추어볼 때 모든 현존하는 것들은 상품으로 나타나며,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전에 유용성을 시험한다. 그러나 이 시험 과정을 실행하는 데 사람들이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오히려 우연히 수중에 들어온 것을 단순히 선택한다고 해보자. 아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책, 대화, 이론, 종교, 권위와 진리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 경우에 진리는 그 상품 형식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시험되는 것이 아니라 곧장 실제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공기를 들이마시는 경우, 즉 사람들이 실제로 호흡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이 들이쉬는 공기가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러나 숨을 쉬지 않으면 당연히 더 치명적이다. 사람들은 숨 쉬는 일에 관해서는 거리를 두고 사색하고 비판하고 소비하는 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다. 공기 정화를 위한 새로운 장치를 사서라도 사람들은 계속 숨을 쉬어야만 한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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