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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는 노래를 노래하였다.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로 투명한 강물을 치며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른다.
아득히 멀다, 내가 품고 있는 마음.
하늘 한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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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파는 손님을 맞이하여 적벽 아래 배를 띄운다. 그와 손님의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다. 바람은 나지막이 불어오고 물결은 잔잔하다. 술을 마시니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구절들을 주고받는다. 그들의 노래는 예로부터 불리던 것들이다. 동파와 손님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곳은 옛날의 전장戰場. 수많은 생명들이 소멸된 곳이다. 애상哀想이 깃들어 있다. 강물과 적벽은 자연물이고, 그 위에 떠다니는 배와 술잔은 인공물이다. 그들과 그것들은 놀이를 하면서 자연물과 인공물을 무형의 시로 만들어 낸다. 동파와 손님의 머리 속에 떠올라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정동情動의 소산일 것이다. 노래로 발화되기 전에 그들의 심정 속에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정서의 응축이 있었을 것이다.
동파와 손님은 뱃놀이를 하며 정서의 응축을 가슴에 품고 갑자기 그 강물을 떠나 위로 오른다. 이제 계수나무 노와 목란 상앗대는 현실의 강물을 치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들은 먼 옛날 초楚 지방에서 하늘에 오를 때 쓰던 것들이다. 강물을 거슬러 오른다는 것, 이는 더 이상 현실의 강물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동파와 손님은 현실을 떠났다. 그들은 먼 길을 간다. 아득히 먼 길. 그들이 가는 곳은 그들의 마음속에만 있는 길이다. 그 길의 끝에는 미인이 있다.
미인, 동파와 손님이 바라보는 미인, 그 미인은 하늘 한구석에 있는가, 아니면 마음속에 있는가. 아니면 애초에 미인은 없는가. 그저 동파와 손님이 마음속에 품고 있을 뿐인, 뭔가 아득한, 계수나무와 목란 상앗대에 몸을 의지할 때에야 생겨나서 아름다움이라 이름 붙여진 환영幻影인가.
우리는 마음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며 솟아나오는 것, 그것을 흔히 순수한 정감이라고들 말한다. 몽롱한 상태에서 우리는 그것을 막연히 바라본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바깥의 무엇인가를 보면서도, 어느 순간 그 무엇이 감각에서 아련히 멀어져 사라지면서 우리의 내면에 무엇인가를 남긴다. 그것을 인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을 아름다움이라 한다면, 그 아름다움은 무엇인가를 모방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요,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만이 오롯하게 느끼는 것이다.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 순전히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우리 자신이 느끼는 아름다움이 이렇게 생겨나듯이 동파가 손님과 함께 만들어서 내놓은 아름다움도 그렇게 생겨났을 것이다. 동파는 머나먼 옛날에서 오늘의 우리에게로 손을 내밀어, 그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하늘 한구석에 비쳐 바라보던 미인을 함께 보자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동조同調할 것인가. 그러한 동조가 가능한 것은 어떠할 때인가. 우리도 적벽 아래 가서 배를 띄우고 손님과 더불어 술을 마셔야만 하는가. 동파의 정감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것이라 여긴다면, 아무리 노를 저어도 우리는 하늘의 미인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동파의 것은 동파만의 것, 우리의 것은 우리만의 것으로 그치게 될 것이다.
더러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공감에 이른 이들은 말조차 하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고 동파에게 감성의 끝을 가져다 댄다.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몽롱한 도취가 어딘가에서 솟아나온다. 동파의 부름에 응답하면서, 그들과 동파 사이에는 다른 이들이 간취해 내지 못하는 정동이 생겨난다. 그것이 동파의 정동과 똑같은 것이라 강변하는 일이 있다 해도 얼마만큼은 승인해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옛날 초나라라는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아주 다른 목적으로 불리던 노래가 동파의 기억 속에 담겨 있다가 북송北宋의 적벽赤璧이라는 시공간에서 불리고, 그렇게 불리던 노래는 다시 오늘 여기서 불린다. 이 모든 것을 이어 주는 끈이 무엇일까? 무엇이 이 시간과 공간과 정서를 연결할까?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시계열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공간의 질서를 무시하고 밀고 들어온다. 들어온 것들은 우리의 정신 속에서 이리저리 묶이고 모이고 뒤섞인다. 동파를 읽고 있는데, 동파에게 떠올랐던 초나라의 주술사가 나타나고, 좁은 방에 물이 흘러들어 적벽 아래 강물이 된다. 그러면서 가 볼 일도 없을 장강長江 이남의 땅들을 상상한다. 마음 가는 대로 붙잡는다. 우리 안에서 심상心象이 생겨나는 대로 곧바로 시상詩想과 영상影像이 된다. 아득하게 열린 심상계心象界와 질료계質料界가 무질서하게 경계 없이 이어져 있다. 재현이 일어나는 듯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발생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만들어 내는 근원적인 재형성이다. 우리에게 만들어진 것은 기억 속에 있었으나 기억 속에 있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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