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기지 국가의 탄생
우리가 아는 모습의 기지 국가는 1940년 9월 2일 탄생했다. 이날은 2차 대전 역사서들에서 대개 세부 항목으로 다루어지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대단히 과소평가된 순간이다. 하지만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 대통령은 바로 이 순간 펜을 한 번 휘두름으로써 미국을 세계 주요 강대국 중 하나에서 견줄 데 없는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글로벌 초강대국으로 변모시키기 시작했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기 1년여 전인 바로 그 중요한 날, 루스벨트는 영국과의 협정을 승인하겠다고 의회에 통보했다. 미국이 영국 식민지에 있는 공군·해군 기지에 대한 통제권을 받는 대가로 파산 일보 직전인 동맹국에 1차 대전 시절의 구축함 50척을 제공한다는 협정이었다.
이런 협정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지만, 루스벨트는 협정이 마무리되었다고 간단히 선언해버렸다. 훗날 “구축함-기지 교환destroyers-for-bases” 협정이라고 불리게 된 이 결정에 따라 미국은 바하마, 자메이카, 세인트루시아섬St. Lucia, 세인트토머스섬St. Thomas, 앤티가섬Antigua, 아루바-퀴라소, 트리니다드, 영국령 기아나 등에 있는 기지들에 행사할 수 있는 99년간의 임대권과 주권에 맞먹는 권한을 갖게 되었고, 버뮤다와 뉴펀들랜드의 기지에 대한 임시 사용권도 얻었다. 루스벨트는 이 협정이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 * 이래 우리의 국가 안보를 강화한 가장 중요한 조치”라고 규정했다. 과연 이 거래가 국가 안보에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보면, 이 기지 획득을 나라의 크기를 거의 2배로 늘린 1803년의 조약과 비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99년이라는 임대 기간 역시 원대한 야망을 반영하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적어도 향후 1세기 동안 미국의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공고히 할 생각이었다.
*1803년 미국 정부는 2,147,000제곱킬로미터의 루이지애나 영토를 프랑스로부터 1,500만 달러에 사들였다. 이것은 알래스카 매입과 더불어 미국 역사상 가장 현명한 거래라고 일컬어진다.
루스벨트가 내린 이토록 놀라운 결정의 뿌리는 루이지애나 매입이 이루어졌던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독립 직후부터 1800년대까지 내내 영토 외부에 작지만 중요한 기지망을 구축해왔다. 미국 지도자들의 제국을 향한 대담한 꿈을 드러내 보여준 이 기지망은 20세기로 들어설 무렵 미국이 세계 강대국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했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전례 없이 많아진 미국의 해외기지는 세계 나머지 지역과 미국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질적, 양적으로 달라진 미국의 힘을 보여주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이 보유한 기지의 규모와 지리적 분포는 엄청나게 늘어났다. 전에는 그렇게 많은 미군 병력이 해외에 상시 주둔한 적이 없었다. 또한 미국 지도자들이 국가 방위를 위해 미국 군경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군사력을 상시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역사상 어느 민족이나 국가, 제국도 넘보지 못할 수준으로 전 세계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정복의 지렛대
고대 이집트, 로마, 중국 시대 이래로 군사기지 ─ 특히 해외기지 ─ 는 제국이 땅과 사람들을 지배하는 데 핵심적인 토대였다. 이집트 중고中古왕국Middle Kingdom **은 제국 경계에 군사 요새를 설치했으며, 요새 도시는 바빌론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비옥한 중동 전역에서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테네 언덕 위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본거지라고 생각하는 아크로폴리스는 원래 이스라엘의 마사다Masada에서 페루의 마추픽추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산꼭대기 성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로마 역시 아크로폴리스였는데, 로마인들은 제국 곳곳에 임시적인 카이사르 막사Caesar’s camp와 상설 기지castra stativa를 건설했다. 로마의 몇몇 요새는 나중에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침략해서 성을 세울 때 토대가 되었다. 영국의 상징물로 꼽히는 런던 탑Tower of London은 원래 정복왕 윌리엄이 1066년을 막 지났을 때 세운 해외기지였다. 제노바의 항해가 콜럼버스는 아메리카로 처음 항해했을 때, 오늘날의 아이티에 속하는 히스파니올라섬에 산타마리아호의 부서진 목재로 요새를 건설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1484년의 두 번째 항해에서는 푸에르토그란데Puerto Grande라고 이름 붙인 배를 정박시켰다. 그곳은 바로 현재 우리가 관타나모라고 부르는 곳이다.
**기원전 2050? ~ 기원전 1800년?
오늘날 남북 아메리카를 찾는 관광객들은 여전히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섬에 처음 세운 요새에 이어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이 남긴 기지 유적지를 찾는다.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이 유적들은 이미 사라져버린 제국의 영광과 이런 요새들이 남북 아메리카의 식민화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프랑스는 1562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패리스Parris섬 근처에, 그리고 1564년 플로리다의 세인트존스강에 최초의 기지들을 세웠다. 그 뒤를 이어 스페인인들이 플로리다와 산후안, 아바나에 기지를 건설했다. 영국은 미국혁명 직전에 북아메리카에서 식민 권력이 정점에 달했을 때 노스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매사추세츠, 그 밖의 여러 곳에 기지를 만들었다.
대체로 학자들은 이상하게도 독립 직후에 만들어진 기지들은 간과하고, 관타나모 만을 미국의 첫 번째 해외 군사기지라고 본다. 미국은 수백 개에 달하는 국경 요새 덕분에 서부로 팽창할 수 있었는데, 이 요새들은 당시에 명백히 해외인 땅에 세워진 것이었다. 제일 처음 만들어진 것은 1785년 서북부 준주에 세워진 하마 요새Fort Harmar였다. 이어 디파짓Deposit, 디파이언스Defiance, 해밀턴Hamilton, 웨인Wayne, 워싱턴Washington, 녹스Knox 요새 등이 오늘날의 오하이오 주와 인디애나 주에 들어섰다. 이 기지들 덕분에 미국 정착민들이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의 땅으로 밀려들면서 인디언들을 점점 서쪽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1802년경에는 5대호에서부터 뉴올리언스까지 미국의 요새망이 만들어졌다.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은 1812년전쟁에서 영국 편을 들었다가 결국 땅을 뺏기고 쫓겨났으며, 그 자리에는 더 많은 요새가 세워졌다.
1830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모든 원주민 부족들이 미시시피강 동쪽의 땅을 포기하고 서부로 이주해야 한다고 강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인디언 이주 정책”을 발표했다. 캔자스 주의 레번워스 요새Fort Leavenworth는 원래 “문명의 서쪽 경계”와 “영원한 인디언 변경”을 가리키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 요새는 샌타페이 가도와 오리건 가도의 출발점을 보호함으로써 유럽계 미국인 정착민, 광부, 상인, 농부 등이 서부 이주를 한층 촉진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군은 한 역사학자가 말한 것처럼 미국 정복의 “사전 준비자”이자 “지렛대”가 되었다. 레번워스 요새를 넘어서 빠르게 확대된 서부 요새망은 이 지렛대를 한층 강화하면서 서부 팽창 경계선을 나타냈다. 19세기 중반경 미시시피강 서쪽에 들어선 대규모 요새는 60개에 이르렀고, 서부 영토의 군 주둔지는 138개에 달했다.
유럽계 미국인의 이주가 계속되면서 신생국가는 곧 멕시코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그 규모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주 전체와 애리조나 주의 대부분을 포함해 55만 제곱마일에 달했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오리건 준주를 취득했고 텍사스 공화국을 합병했다. 1853년에는 개즈던 매입Gadsden Purchase으로 멕시코 땅을 추가로 손에 넣었다. 이때 사들인 애리조나와 뉴멕시코 주의 기다란 땅은 오늘날의 웨스트버지니아 주보다도 넓다. 수많은 육군기지 ─ 텍사스의 블리스 요새Fort Bliss부터 애리조나의 와추카 요새Fort Huachuca, 샌프란시스코의 요새Presidio부터 오리건 카운티Oregon County *의 밴쿠버 병영에 이르기까지 ─ 가 속속 생겨나면서 팽창에 힘을 보탰다.
***북위 42도 북쪽, 북위 54도 40분 남쪽, 그리고 로키산맥의 서쪽에서 태평양까지의 북미 서쪽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재의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 일부, 미국의 오리건, 워싱턴, 아이다호 주 전역과 몬태나, 와이오밍 주의 일부가 이 지역에 속한다. 미국이 1846년 영국과 오리건 조약을 체결해 미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정복을 완료한 뒤 미국이 건설한 기지들은 유럽계 미국인들의 계속되는 서부 이주를 보호하고, 아직 정복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던 소수의 인디언 부족들과 싸웠다. 군대는 유니언퍼시픽 철도 건설 경로를 따라 벌어진 반反중국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도 다른 곳에 새로운 기지를 세웠다. 원주민들의 대규모 무장 저항이 끝나자 미국 정부는 많은 변경 요새를 통합 정리하고 북아메리카 대륙 바깥으로 관심을 돌렸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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