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별이 빛나는 밤에
별들은 가시광선으로만 반짝이는 것이 아니다. 만일 적외선과 자외선, 마이크로파, X선과 감마선까지 볼 수 있다면 밤하늘은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P 씨는 최근 인공안구 펌웨어를 업그레이드한 뒤로 밤 산책에 매료되었다. 지상 세계도 각종 전자기파로 넘쳐 나긴 하지만, 인공적인 빛들은 대개 일정한 파장이 등록되어 있고, 데이터베이스와 연동해 필터링하면 남는 것은 별빛이 휘황하게 쏟아지는 은하수 아래에서의 황홀한 산책이다.
물론, 밤 산책을 하려고 P 씨가 인공안구를 이식받은 것은 아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인공감각기를 이식받았고, 그 다음으로 P 씨를 비롯해서 직업적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엄격한 심사와 오랜 심의를 거쳐 이식 수술을 받았다. 의사, 과학자, 초정밀공학자들이 많이 받았고, 고고학자, 조류학자와 곤충학자들, 보석이나 미술 감정사들, 전위음악가, 건설업자, 어부, 조리사, 조향사들 중에도 눈이나 코, 귀를 인공센서로 교체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물론 군인과 경찰들도. P 씨가 인공안구를 이식받은 것도 20여 년 전 공채로 경찰에 임용될 때였다. 퇴직한 뒤로도 P 씨는 보험사에서 조사원으로 일하며 몇 가지 사양만 제한된 인공안구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낮 동안 P 씨가 인공안구로 증강된 시야를 사용하는 것은 대개 도난, 강도, 상해, 사망 등이 사고 장소에서다. 사고 장소에는 언제나 무엇인가 부서져 있고 핏자국이 묻어 있거나 신체의 일부가 흩어져 있다. 그렇지 않다면 또 무엇인가를 감시하는 센서들, 예를 들어 적외선 거미줄이나 자외선 조명처럼 기계에 의해 감시받는 인간의 처지를 상징하는 기호들만을 쳐다봐야 한다. 그러니 지상에서의 삶이란 얼마나 시끄럽고 혼잡하며 조악하고 어지럽고 들쑥날쑥하고 더러운 것이란 말인가. 또 그에 비하면 이 밤, 이 거리, 이 고요, 이 광휘는 이 얼마나 찬란하고 아름답고 황홀하고 순수하단 말인가.
고양된 기분에 휩싸여, P 씨는 마침 옆으로 지나가는 S 씨에게 다정하게 인사했다. S 씨도 밤마다 나오는 산보객이다. 커피 가게에서 일하는 S 씨는 코가 유전자 개량으로 강화되어 후각이 개보다도 민감한데,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뒷산이나 공원을 산책하며 꽃과 풀, 냇물과 자갈들의 미세하고 복잡한 향기를 감상한다고 했다. P 씨는 S 씨의 후각으로 재구성된, 증폭된 세계를 상상해 보았다. 지금 바라보이는 저 은하수처럼 휘황하고 찬란할까? 인공귀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또 얼마나 기묘하고 아름다운 소리로 가득 차 있을까? 인공감각을 통해 결국은 자연이 더욱 아름답고 신비로워진다는 아이러니를 곰곰이 생각해 보며 P 씨는 계속 걸었다.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울고, 아직은 따뜻한 밤공기가 한순간 산들바람으로 흘러간다. 인공귀를 가진 사람들에게, 인공혀를 가진 사람들에게 저 울음소리는 어떻게 들리고 이 밤바람은 어떤 맛으로 느껴질까?
집으로 걸어가는데 문득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P 씨는 새삼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이 감각 센서를 이식받는 것은, 선천적이거나 후천적인 장애를 제외하면, 결국은 확장된 감각 정보를 처리할 장치가 아직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제대로 된 인공지능이 나온다면 왜 굳이 인간의 뇌에 불편하고 억지스럽게 제한적으로 확장된 감각 데이터를 입력하겠는가. P 씨는 무제한적으로 확장된 인공감각 기관으로 사람처럼, 혹은 사람보다 더 잘 보고, 듣고, 맡는 로봇이 범죄를 감시하고, 추적하고, 건물을 짓고, 초미세회로를 설계하고, 제작하고, 조립하고, 아픈 사람들을 검진하고, 수술하고, 치료하고, 새와 나비, 개미들을 관찰하고, 보호하고, 별들을 바라보고, 우주의 비밀을 궁구하고, 나무를 가꾸고, 꽃을 키우고, 보석을 연마하고, 음식을 조리하고, 아름다운 향기들을 만들어 내고, 세상을, 사람들의 삶을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별들은 인류가 출현하기 한참 전부터, 인간의 그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색채로 빛나고 있다. 회전하고 부서지고, 흐르고 섞이고, 소용돌이치고 쏟아진다. 인공지능도 이 광경 앞에서 경외와 장엄, 숭고와 경이를 느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P 씨는 산책을 마치고 현관으로 들어갔다.
이야기 둘
기억을 저장하는 몇 가지 방법
미효는 잊지 않아야 할 것과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자유롭게 살려면 많이 덜어내고 많이 흘려보내야 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미효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주변에서 발생하는 일과 머릿속에서 형성되는 생각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파란 머리띠를 항상 머리에 쓰고 있다. 머리띠와 미효의 애증 관계는 어느 날 의사가 알려 준 사실과 함께 시작되었다.
의사가 정확히 뭐라고 했더라? 미효는 머리띠 오른쪽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조정했다. 소음과 흐릿한 영상이 스쳐 지나가고 1년 전 만났던 의사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검사 결과 환자분께서는 인지장애증입니다. 인지장애에는 여러 가지의 이유가 있는데 그중 초기 알츠하이머로 보입니다.”
미효는 머리띠를 조작해 다음 기억으로 건너뛰려다가, 진단명을 처음 듣고 받았던 충격을 또 한 번 깊이 되새기려고 눈을 감은 채 기억의 흐름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미효는 두 주먹을 꼭 쥐고 몸을 살짝 떨었지만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기억 속 의사가 말을 이었다.
“치매라는 용어가 쓰이던 시절처럼 무서운 병은 아닙니다. 이제는 노화 현상의 일부라는 게 밝혀졌고요. 뇌 조직이 더 많이 손상되지 않게 막고 재생하는 치료를 바로 시작하면 됩니다. 문제는 꽤 긴 치료 기간에 유실되는 기억이죠.”
미효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머리띠를 샀다. 색은 파랑으로 골랐다. 아직 알츠하이머에 대한 편견이 남아 있어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는 반투명이나 검정색을 선택한다지만 미효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파란 머리띠는, 그것만으로는 약간 비싸고 그리 예쁘지 않은 머리띠일 뿐이었다. 하지만 무선으로 연결되는 저장 장치와 함께라면 미효의 두려움을 크게 덜어 줄 수 있었다. 머리띠는 뇌 전달 물질이 전파하는 신호와 시냅스를 오가는 정보를 모두 스캔해서 저장 장치에 담아 준다. 미효는 세상 무엇보다 그 저장 장치가 소중했다. 만약 병이 급히 진행되어 기억의 유실 속도가 보관 속도보다 빨라진다면, 정신 활동이 남는 곳은 저장 장치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미효는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 눈을 뜨는 순간 머리띠부터 찾는다. 그리고 손바닥 크기의 절반 정도 되는 저장 장치 두 개를 양쪽 주머니에 넣는다(‘백업은 많을수록 좋다’는 사실은 컴퓨터뿐 아니라 사람의 기억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저장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녹색 불빛이야말로 그가 자아상실의 공포로 일상생활을 포기하지 않도록 안심시켜 주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미효는 머리띠의 전송 모드를 ‘자동’에 놓고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그가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머리띠는 조금씩 약해지는 두뇌의 연상 및 기억 활동을 보조해 주었다. 치약의 민트 냄새는 나흘 전에 마셨던 차를 연상시켰고, 차의 향과 맛에 대한 기억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연인과 연결되었다. 미효는 연인이라는 개념으로부터 얼굴을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손상된 현재 뇌 상태 그대로라면 온종일 괴로워하다가 자신이 돌이키려 애쓰는 것이 뭔지도 잊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자동’ 모드에 있는 머리띠와 저장 장치 속의 회로는 미효의 연상 패턴을 학습했다가 단절된 부분을 즉시 연결시켰다. 미효의 기억은 연인의 눈 코 입과 목소리, 민규라는 이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다각적으로 이어졌다.
미효는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지 않은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게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밴드를 조작해서 민규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오늘 만나. 언제쯤이 좋아?”
“어디 보자. 네 시 반에 회사 앞으로 올 수 있어?”
민규. 회사. 회사는 명동에. 명동까지는 대중교통으로. 시각은 네시 반. 그 정보들 역시 두 개의 저장 장치로 전송되고, 저장되고, 머리띠로 피드백 되어 다시 뇌에 도달했다.
“응. 그럼 이따 봐.”
미효는 그처럼 의학과 기술의 도움으로 잊지 않아야 할 것과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을 지켜 가면서 두뇌를 재건하고 있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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