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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의 아이들과 괴물이 된 청년들
: 유교적 근대성과 메리토크라시
세월호 대참사 이야기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자. 이 대참사는 바로 시민적 주체의 부재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 사회의 교육과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함을 너무도 분명하게 지시해 주기 때문이다. 세월호는 우리 교육이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권위에 대한 일방적인 순응만 너무 지나치게 강요하고 자주적인 비판적 판단 능력을 키워주지 못했음을 뼈아프게 환기하게 해 주었다. 우리 민주주의의 결손성과도 깊숙하게 연결된 이런 우리 교육의 어두운 이면들은 이른바 ‘일베충’을 통해서도, 또 학력위계주의에 찌들어 ‘괴물’이 되었다고까지 이야기되는 우리 사회의 보통 청년들을 통해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고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단지 이런저런 몇몇 교육 관행들이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근본적인 교육 패러다임 그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 핵심에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경쟁에서 진 사람 등에 대한 사회적 배제를 부추기는 메리토크라시, 곧 능력지상주의라는 ‘생활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우리 청년들이 자신들이 사는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르게 한 배경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 그들에게 깊은 ‘자존감’의 상실을 안겨 주었다. 이것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보면 내가 ‘유교적 근대성’이라고 규정하는 한국 근대성의 어떤 본질적 면모와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런 연관들을 하나씩 추적해 보자.
‘가만히 있으라’고?
세월호 대참사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어떤 집단적 트라우마다. 희생자는 대부분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어린 고등학생들이었다. 사건 초기 ‘전원 구조’라는 오보에 안심하고 있다가 그게 사실이 아님을 뒤늦게 알게 된 사람들은 물에 잠긴 그 거대한 배의 선수 부분만을 텔레비전 화면에서 밤새도록 쳐다보며 발을 동동거렸더랬다. 그 어린 생명들이 스러져 가는 것을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했다. 초기에 구조되었던 몇십 명을 제외하고는 생환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다음 날도 그랬고 또 그다음 날도 그랬다. 이른바 ‘골든 타임’이 다 지나도록 그랬다. 우리는 그 시간을 그저 주체할 수 없는 눈물과 함께 보내야 했다.
많은 사람이 가장 가슴 아파했고 문제라 여겼던 것은,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승무원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 방송을 계속 내보내며 자신들만 탈출을 시도했고 그 방송만 곧이곧대로 믿고 객실에 가만히 있던 수많은 어린 학생들은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던 장면이었다. 물론 이 장면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도 많았던 데다 오해의 소지도 커서 불쑥 이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은 무척 조심스럽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장면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 불편하더라도 정면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당시 어느 외신은 이 장면을 지적하면서 그 많은 어린 생면들이 돌아오지 못한 것은 유교 전통에 따른 순응주의적 교육의 탓이 크다고 했다. 우리로서는 참으로 불편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반발감부터 생겨서 당장 의문이 든다. 그런 지적은 서구적 시선으로 동양을 멋대로 재단하는 어떤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 아닐까? 미국이나 유럽의 학생들은 유사한 상황에서 승무원의 안내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라고 교육받는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승무원의 권위를 무조건 부정하는 것이 반드시 올바른 행동이기만 할까? 또 당시 그 장면을 두고 ‘착한 아이들만 죽었다’는 식의 세간의 입방아도 많았다. 역시 이런 인식은 자칫 문제를 호도하고 상처를 덧내는 위험한 냉소로 번질 수도 있다. 그럼 살아 돌아온 아이들은 모두 ‘나쁜 아이들’이어서 그럴 수 있었다는 말인가? 일단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두고 논의를 시작하자.
이 장면에는 확실히 우리가 부정할 수도 없고 부정해서도 안 되는 분명한 진실 하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희생된 학생들은 안타깝게도 ‘가만히 있으라’는 승무원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침몰 직전까지 카카오톡을 하고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당연히 희생 학생들의 잘잘못을 따질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진짜 중요한 진실 하나는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다른 학생들도 대부분, 유사한 상황에서, 비슷하게 그랬음 직하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교육의 기본적인 특성이나 경향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아프더라도 이 진실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냉정하게 대면해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교육은 일반적으로 학생들에게 권위에 대한 일방적인 순응만 너무 지나치게 강요하고 자주적인 비판적 판단 능력을 키워주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는 그 자체로 우리 교육의 가장 결정적인 단면을 상징한다. ‘나중에 커서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딴생각하지 말고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가만히 앉아 열심히 공부만 하라’, 말하자면 이런 식의 ‘지상명령’이 오늘날 우리 교육의 가장 본질적인 면모인 것이다. 그래서 세월호는 처참하게 병들고 일그러진 우리 교육 현실의 가장 적절한 알레고리다.
물론 이런 식의 교육을 밀어붙이는 가장 근본적인 동력은 ‘물질(만능)주의’일 것이다. 지독한 물질주의의 전제專制, 바로 그것이 우리 사회 성원들로 하여금 생명이나 안전 같은 가치를 등한시한 채 맹목적인 이윤 추구에 몰두하게 했고 사회 거의 모든 영역에서 온갖 부패와 부정이 만연하도록 만든 문화적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병든 교육도 경제적 안정과 풍요가 보장되는 삶만이 가장 인간적이고 좋은 삶이라는 어떤 문화적 합의에 바탕을 두고 있을 게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일단 옆으로 제쳐 두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지향이 우리 교육이 길러내고자 하는 어떤 ‘사회적 인간’에 대한 상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교육은 비판적이며 독립적인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율적인 개인을 길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기성의 권위와 질서에 맹목적으로 순응하는 ‘착한 사람들’만 길러내려 했을 뿐이다. 그래야 ‘잘 먹고 잘살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 교육이 칭찬하고, 이제는 『인성교육진흥법』이라는 법까지 만들어 더욱더 체계적으로 길러내려는 좋은 ‘인성’을 갖춘 인재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이는 앞서 여는 글에서 지적했던 시민의 부재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 전반의 어떤 문화적 문법하고도 관련된 문제다.
세월호 참사의 다른 장면들도 살펴보자. 우선,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을 계속했다는 승무원을 보자. 그도 사실은 그 방송이 적절치 않을 수도 있음을 의심하고 계속해서 지휘부와 연락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런 ‘지시’가 없자 그저 지침서대로 똑같은 방송을 계속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강변한다. 왜 그는 극단적인 비상 상황인데도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했을까? 왜 스스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을까? 다음으로, 승무원들만 구조하고는 배에 올라 적극적인 구조 활동을 하지 않았던 해경들을 보자. 그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상부의 ‘명령’이 없었다고 또는 그 명령에 따라 ‘가만히 있었다’고 해야 한다. 또 비상대책본부의 공무원들도 보라. 그들의 무능과 혼란은 기본적으로 그런 상황에 대한 행동지침서가 없었고 제대로 된 지휘체계가 확립되지 못했던 탓이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그들은 그저 의전이나 챙기는 일밖에는 한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고도 스스로 무얼 잘못했는지 아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이 모두에게서 어떤 직업윤리적 사명감에 따라 자율적으로 자기 일을 다하는 책임감 있는 비판적 주체를 볼 수 없었다. 물론 어떤 조직원으로서 지휘 및 명령 체계를 따랐다는 점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운 절박한 위기 또는 비상 상황에서는 업무 담당자들이 스스로 책임 있는 주체가 되어 판단하고 나중에 조직의 인준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사람의 생명이 걸린 사안에서라면 말이다. 내가 볼 때 ‘책임 소재’나 따지는 이들의 관료주의적 행태나 직업윤리의 망각이라는 바탕에는, 상황을 스스로 판단하고 장악할 수 있는 독립적인 주체성의 부재라는 문제가 깔렸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적 순응주의 문화라는 배경 위에서 교육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한 차원에서 확인되는 이 독립적인 시민적 주체의 부재라는 문제는 세월호 참사의 근본 원인은 아니더라도 그 참사를 더 비극적으로 만든 중요한 배경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민주주의는 공동체가 마주한 문제들을 집합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가장 창조적으로 실천하는 연대의 형식이다. 그 창조성은 민주주의가 자발적 연대의 틀 안에서 모든 개인의 잠재력과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내게끔 격려하고 보장하는 데서 발휘된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며, 권위주의적 위계를 거부하고, 어떤 문제에 대한 개개인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비판과 성찰을 고무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와 같은 민주적 역량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할 때, 그 사회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 사회가 마주한 문제들도 적절한 방식으로 해결하기 힘들다.
세월호 참사가 그와 같은 민주적 역량을 갖춘 사회적 주체, 곧 시민의 부재라는 문제와 연결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해경들이나 승무원들이나 공무원들의 경우에는 더 심하겠지만, 저 헬조선을 한탄하는 청년들이나 세월호의 아이들이나 모두 자라면서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사유 및 자율적 행위 능력을 가진 주체로서 제대로 교육받아 오지 못했다. 그러니까 세월호 참사에서나 헬조선 담론에서나 결국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미래 세대가 일정한 민주적-정치적 역량을 갖춘 주체, 곧 시민으로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월호 참사는 바로 민주시민교육의 부재와 연결된 교육 대참사인 것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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