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행성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의자만 뒤로 계속 물리면 하루종일 석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너와 나는 이 별의 반대편에 집을 짓고 산다.
내가 밤이면 너는 낮이어서
내가 캄캄하면 너는 환해서
우리의 눈동자는 조금씩 희미해지거나 짙어졌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고 지나친 유성에 대해
행성의 반대편에만 잠시 들렀다가 떠난 외계인들에 대해.
너는 거짓말하지 마, 라며 손사래를 친다.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우리는 금세 등을 맞대고 있다가도 조금씩 가까워지려는 입술이 된다.
지구의 둘레만큼 긴 칼로 사람을 찌른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질까.
죄책감은 칼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권총과 장미
포개놓은 접시처럼 단단하면서도 위태로운 장미의 꽃잎
손가락으로 권총 모양을 만들어 겨누었는데
폭격이 시작된다
봄은 전방위적으로 와서 무작위로 쓸려내려간다
세계는 피의 정원
권총을 장미로 장식한다고 해서 총구에서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다
총구를 손가락으로 막을 수는 없다
심장과 총구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장미 꽃다발에서 권총을 꺼내 누군가의 심장을 겨누는 시절은 갔다
표적도 없이 밤의 아가리에 실탄을 쏘아댈 때
총구에서 붉고 노란 장미가 피어났다
달아오른 총구는 오랫동안 식지 않았다 덜덜거리는
오른쪽 어깨를 부여잡고 잠이 들었다
권총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겨누고 널 사랑해
두 손을 모아 장미꽃을 바치며 널 사랑해
우리는 서로의 눈이 아니라 발밑을 보며 춤을 추고 있었지
권총을 들고 우는 사람
자신의 발끝을 보면서 맹수의 송곳니 같은 방아쇠를 당긴다
심장이 멈출 때까지
관자놀이에서 쿨럭거리며 장미가 피어난다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는 눈꺼풀처럼 장미는 시들고
검게 타들어간다
봄의 야윈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다
(본문 중 일부)
★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