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올리는 글1
군주의 호의를 얻고 싶은 자들은 소유물 중에서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귀한 것이나 자신들이 보기에 군주가 가장 좋아할 것 같은 선물을 가지고 알현합니다. 이것은 관례입니다. 따라서 군주들2은 종종 자신들의 위대함에 걸맞게 말, 무기, 훌륭한 옷, 귀한 보석, 이에 못지않은 장식물들을 선물로 받습니다. 저 또한 제가 당신의 충성스러운 신하라는 증거로 몇 가지 선물을 가지고 알현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지닌 보물 중에서 위대한 인간들의 행적에 관한 저의 이해만큼 소중하고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최근의 문제에 대한 저의 오랜 경험과 고대의 문제에 대한 저의 끊임없는 독서로 얻은 것들입니다. 저는 제가 고찰한 것을 폐하3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이 보잘것없는 책은 제가 오랜 기간 아주 면밀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고찰한 바를 집약한 것입니다.
1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헌정한 로렌초 및 메디치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7장 <체사레 보르자>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2 첫 문장에서 ‘군주’는 단수로 되어 있고, 두 번째 문장에서는 복수로 쓰여 있다. 첫 문장에서 단수로 쓴 이유는 여러 신민이 한 명의 군주에게 선물을 들고 찾아간다는 사실을 표현하고자 함이다. 두 번째 문장에서 복수형으로 쓴 것은 군주들이 여러 신민으로부터 갖가지 선물을 받는 일반적인 경향이나 사실을 이야기한 것이다.
3 전하와 폐하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전하는 사전적으로 “제국의 황태자나 황태자비, 황자 등의 황족, 왕국의 왕과 왕비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폐하는 사전적으로 “황제나 황후를 공경하는 뜻으로 사용하는 칭호”이다. 따라서 전하는 다수일 수 있지만 폐하는 한 명 또는 두 명뿐이다. 예를 들면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부르십니다”라는 말을 보면 그 차이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하에게 책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폐하에게 책을 바치는 것이 옳다.
선물에 대하여
이 글에 제목을 붙인다면 ‘선물에 대하여’이다. 마키아벨리는 선물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받는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전자는 흔히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고, 후자는 대개 물질적인 것이다. 전자는 선물을 제공하는 자에게 가치 있는 것인 반면, 후자는 선물을 받는 자의 입장에서 가치 있는 것이다.
제공자와 받는 자 간에 가치를 두고 판단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선물의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주는 사람 처지에서는 가장 귀한 것을 선물로 주었는데 받는 사람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주는 사람 입장에선 별 가치 없는 것인데도 받는 사람이 상당히 좋아할 수도 있다.
연애하는 남녀를 예로 들어보자. 남성이 자신에게 가장 의미 있는 물건인 ‘돌아가신 어머니의 손때 묻은 손수건’을 사랑하는 여성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가정해 보자. 어쩌면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남녀는 헤어질지도 모른다. 반대로 남성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여성에게 선물했다고 가정해 보자. 특별한 일이 없다면 연인관계가 지속되어 결혼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아주 커질 것이다.
대다수 군주는 전자와 후자 중 어떤 선물을 좋아할까? 구구절절 좋은 말로 윤리와 도덕을 설명한 책을 좋아할까? 웬만한 군주라면 아마 다 싫어할 것이다. 군주는 대개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며 윤리와 도덕을 싫어한다. 특별한, 정말 특별한 군주만이 이런 잔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늉을 할 것이다.
대부분의 군주는 후자, 곧 경제적 가치가 있는 것을 선물로 원한다고 봐야 한다. 강한 권력을 지닌 군주일수록 더 많은 금이나 은, 귀한 옷감 같은 선물을 좋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속물적인 면에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마키아벨리를 대신하여 《군주론》을 바쳤던 프란체스코 베토리가 헌정을 마치고 화를 내며 나왔다는 일화가 전한다.
동시에 누군가가 사냥개 한 쌍을 바쳤는데, 로렌초는 개를 바친 사람에게 더 고맙다는 얼굴로 친절히 대했고, 이에 분개한 그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마키아벨리 또한 군주들이 경제적 가치가 있는 선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한다. 그는 지극히 가난했기에 군주가 받으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준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원래가 빈한하게 태어나서 즐거움보다는 궁핍을 먼저 알게 된 나이니까”라고 썼겠는가!
관직을 얻으려면 선물을 주어야 한다. 군주의 마음에 드는 선물을 주지 못하면 군주의 호의, 달리 말하면 마키아벨리가 원하는 관직을 얻을 수 없다. 가난한 마키아벨리는 교묘하게 논법 전환을 한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기에 군주 당신에게도 가장 좋은 선물이라고 에둘러 말한다. 다소 엉뚱한 논리이다. 내 어머니의 손때 묻은 손수건이 당신에게도 소중할 것이라는 궤변! 그 선물은 군주라면 마땅히 이러해야 한다는 ‘잔소리로 가득 찬 책’ 《군주론》이다. 그것도 위대한 군주였던 인물들을 본받으라고 훈계하는 책이다.
군주가 이 선물을 받아들였든 그러지 않았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포장지를 뜯어낸 선물의 내용이다. 마키아벨리가 이 글을 집필할 수 있었던 뒷심이자 선물의 근거이다. 그것은 경험과 독서이다. 그는 실천적 관점의 경험과 이론적 관점의 독서를 통해 얻은 것을 창조적으로 융합한 게 바로 《군주론》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더 자세한 말을 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지 찾아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짧은 구절로 독자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한다. 그는 선언한다. 이 책을 읽어라. 그러면 이론적 사변에 빠져들어 경험적 현실을 간과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채근한다. 이 책에 적힌 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경험적 현실에 매몰되어 상황 전체를 이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는 조용히 강권한다. 이 책을 읽고 실천한다면, 행동하면서 되새김질한다면 경험과 이론 양자의 균형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군주로서 성공할 것이다. 네가 누구든 네가 일하는 분야에서 성공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최근의 문제”와 “고대의 문제”란 단 두 마디로 《군주론》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밝힌다. 그는 ‘최근’과 ‘고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로 제시한다. 《군주론》의 대부분 장과 절은 ‘최근’으로 표현된 ‘현재, 즉 마키아벨리 당대’와 ‘고대’로 재현된 ‘과거, 인간이 살아있던 그리스와 로마’의 협화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독자는 마키아벨리가 말한 이 구조를 숙지하고 읽어야 한다. 독자는 각 장과 절을 읽을 때, 우선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둘째 고대 과거의 어떤 사건과 인물로 논증하고, 셋째 현재 어떤 사건과 인물에 적용되는지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그의 주장이 적실한지 파악해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오랜 경험”과 “끊임없는 독서”란 단 두 마디로 《군주론》을 어떻게 집필했는지 밝힌다. 그는 ‘경험할 수 없는 과거는 독서의 대상’이고, ‘글로 표현되지 않아 읽을 수 없는 현재는 경험의 대상’임을 분명히 한다. 그는 《군주론》을 집필하기 위해 끊임없이 독서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그는 과거의 오랜 역사를 몇 시간, 몇 날 며칠 읽는 것으로 일반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켜켜이 쌓인 먼지와 같은 오랜 역사에서 일반화 가능한 명제를 도출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지치지 않는 글 읽기가 필요하다고 밝힌다. 그는 《군주론》의 집필 토대에는 무수히 많은 사건을 직접 수없이 체험하고, 그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과의 만남이 있다고 담담하게 밝힌다. 그는 곳곳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사건을 한두 번의 경험으로 일반화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목적 없이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현재의 사건들을 일반화 가능한 명제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오랜’ 체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상을 종합해 보자.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읽는 독자에게 한 가지 지침을 내린다. “최근의 문제에 대한 오랜 경험”과 “고대의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독서”를 구분하라고 권고한다. 그는 과거와 현재의 구체적 사례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서 읽기를 바란다. 그는 이 사례들이 살아 있는 생생한 군주, 바로 글을 읽는 당신에게 어떻게 적용될지 생각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과거와 독서, 그리고 현재와 경험을 비교하며 읽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며 《군주론》 읽는 즐거움이다.
저는 이 저작이 당신에게 그리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친절하기 때문에 이 책을 받아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랜 동안 수많은 혼란과 위험을 겪으면서 분명히 인지하고 이해한 것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을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이해하는 수단들을 당신에게 선물하는 일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책을 과장된 구절들, 또는 허황되고 화려한 어휘들, 또는 저속하고 주제를 벗어난 미사여구로 치장하거나 채우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저자가 이런 것들로 책을 가득 채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책이 다른 어떤 것으로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제 책이 특수한 문제와 중요한 주제로 즐거움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좋은 문제의식에 대하여
이 절은 ‘좋은 문제의식에 대하여’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줄 자신의 선물이 멋진 글이 아니라 좋은 문제의식이라고 말한다. 멋진 문장과 좋은 문제의식, 둘 중 어느 것이 나을까? 가장 바람직한 것은 좋은 문제의식을 멋진 문장으로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단연코 좋은 문제의식이 중요하다.
문학, 철학, 사회과학 등 어느 분야이건 우리가 아는 고전 중에 문제의식이 동일한 것은 하나도 없다. 서로 다른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동일한 문제의식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기에, 고전은 고전이 된다. 고전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문제의식의 현재적 생생함 때문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동일한 문제의식, 같은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그것은 짝퉁이고 표절이다. 이런 책은 출간된 당대에는 참신한 말장난으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린다.
마키아벨리는 말장난과 화려한 미사여구로 일관한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저자들과는 달리 참신한 문제의식으로 책을 썼다고 호언장담한다. 이 말은 단순한 말잔치가 아니다.
좋은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주목이라는 나무에 빗대어 말해보자. 주목은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간다고 한다. 좋은 문제의식은 살아 있는 문제의식으로서 ‘천 년’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어야 하고, 문제의식이 소멸된 뒤에도 ‘천 년’은 탐구 대상이 되어야 한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아주 멋진 말을 한다.
아울러 나의 학문적 성취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는 정도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일을 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좋은 문제의식이다. 좋은 문제의식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보통 용기와 창의적 사고와 감수성, 이 세 가지로 구성된다. 《군주론》에는 이 세 가지가 분출되고 있다.
《군주론》을 집필하면서 마키아벨리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용기이다. 그 내용은 중세 천 년을 관통하는 기독교 세계관과의 철저한 단절이며, 그 사유는 플라톤 이후 2천여 년에 가까운 철학적 흐름과의 완전한 절연이다. 전자는 마키아벨리에게 죽음을 불사할 용기를 요구했고, 후자는 그에게 모든 지성으로부터 받게 될 손가락질과 모멸과 경멸을 이겨낼 용기를 강요했다.
그는 초인과 같은 용기를 발휘한다. 진정한 용기란 옳은 것을 선택하고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다. 그는 중세 천 년의 기독교적 종교관을 벗어나는 선택을 했고, 플라톤 이후 2천여 년의 도덕적·윤리적 세계관으로부터 탈출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밀어붙였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밀고 나가며 자신의 글이 불러올 파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용기가 있었기에 그는 《군주론》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그 용기를 잃지 않았기에 《군주론》을 완성했다. 그의 용기 덕분에 우리는 지금 《군주론》을 읽을 수 있다.
둘째, 창조적 사고이다. 창조성이란 남과 다르게 보는 것, 새로운 각도로 보는 것이다. 똑같은 사과 하나를 놓고 열 사람이 사진을 찍어도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되는 것과 같다. 찍는 순간 각자의 고유한 시각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의 창조성은 당대의 인물과 사건, 과거의 사건과 인물을 교직한 데에 있다. 마키아벨리는 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과의 비교를 통해 과거의 어느 누구도 말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은 인간관·세계관·가치관을 설파한다. 마키아벨리만큼 독창적이고 과감한 주장을 한 사람은 지금도 찾기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감수성이다. 중세 천 년은 “착하게 살아라, 그러면 천당에 간다”라는 종교적 세계관이 지배했다. 이는 플라톤 사유의 연장이자 확장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다루고자 했던 것은 한마디로 ‘올바름이란 무엇인가’였다. 그 이후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플라톤 이후 모든 학문은 결국 도덕과 윤리의 강조이다. 오랜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이런 사유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마키아벨리는 천 년의 종교적 세계관과 플라톤 전통에서 아주 쉽게 벗어나버린다. 그는 본능적인 감각으로 인간이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바탕을 두고 완전히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한다. 그가 만약 플라톤적인 타성과 중세적인 사유에 매몰되어 있었다면, 옛 정치 질서에 대한 향수와 고리타분한 윤리적 사유에 젖어 있었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감수성이란 무엇인가? 시대와 사건에 대한 남다른 느낌이자 인식이다. 느낌은 겉으로 감지하는 것이고, 인식은 머릿속으로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느낌만 있는 감수성은 체계화가 부족하고, 인식만 있는 감수성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 느낌과 인식이 함께 작용하는 감수성이야말로 진정한 감수성이다.
마키아벨리는 종교적 세계관이 던져주는 숨 막힐 듯한 질서에 감각적으로 저항하고, 플라톤의 사유가 옭매는 생각의 질서를 인식론적으로 파괴한다. 그의 모토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모든 생물의 근본 원리는 자기 보전이며 생존이다”일 것이다. 인간은 자기 보전을 위해서, 생존을 위해서 어떤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본 인간의 본성이다. 이를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이 원리를 역사 속의 수많은 영웅에게서 찾아내고, 현재의 인물들에게서 확인한다.
결론적으로 마키아벨리는 모든 전복적 사유가 그렇듯이 생물학과 역사학에 의존한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생물학의 세계를 역사에 적용하고,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끌어낸다.
마키아벨리의 문제의식이 성공할지의 여부는 시대와의 조응에 달려있다. 시대와 시대정신을 거역하는 자, 그는 풍운아이다.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않다. 딱 반걸음만 앞서가는 자, 그는 참신한 자이다. 보수이건 진보이건 중요하지 않다. 그는 반드시 성공한다. 돈, 권력, 또는 명예를 얻고 싶다면 무엇이든 쟁취할 것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자, 그는 몽상가이거나 혁명가이다. 성공한다면 혁명가이고, 실패한다면 몽상가이다.
시대와 시대정신을 열 걸음 앞선 자이거나 시대를 초월한 자가 있다면 그는 영원한 연구 대상이다. 바로 마키아벨리는 용기, 창조적 사고, 감수성의 측면에서 열 걸음 앞서간 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점에서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연구 대상이다.
지위도 낮고 비천한 자가 감히 군주들의 행위를 논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게 너무 주제넘다고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것은 제 바람입니다. 왜냐하면 나라의 지도를 그리려는 자들이 산맥이나 높은 지역의 자연(또는 본성)을 관찰하려면 평지 위에 서 있어야 하며, 낮은 지역의 자연(또는 본성)4을 응시하려면 산꼭대기에 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민의 본성을 명백히 파악하려면 관찰자5는 군주여야 하며, 반대로 군주들의 본성을 명백히 이해하려면 관찰자는 인민 중의 하나여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4 대개 이 부분을 자연 또는 본성을 빼고 ‘높은 지역을’, ‘낮은 지역을’이라고 번역한다. 읽는 맛은 떨어지지만 자연 또는 본성을 살려주는 것이 좋다. 마키아벨리가 자연을 빗대어 군주의 본성과 인민의 본성을 논의하기 때문이다.
5 ‘지도를 그리려는 자들’은 복수를 쓰고, ‘관찰자’는 단수로 쓰여 있다. 마키아벨리는 단수와 복수를 일부러 구분해서 썼다. 마키아벨리는 나라마다 지도를 그리는 자들은 많지만, 군주들의 본성에 대해 쓴 자는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결국 마키아벨리는 자신만이 군주의 본성을 파악하고자 한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연구 방법에 대하여
이 절을 정의하자면 ‘연구 방법에 대하여’이다. 앞에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좋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지만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서 비로소 좋은 문제의식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그것은 ‘군주와 인민’, ‘군주와 인민의 관계’이다.
그는 군주와 인민, 양자 간의 관계를 설명하려면 두 가지 연구 방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설계도면에 빗대어 말해보자. 하나는 조감도이고 다른 하나는 어안도다. 그는 조감도와 어안도를 이용하여 군주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설명한 배치도인 《군주론》을 군주에게 선물한다.
마키아벨리는 지도를 그리려는 자와 군주를 연구하려는 자를 비교한다. 낮은 지역을 그리려는 자는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인민의 본성을 이해하려면 높은 곳에 있는 군주의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마치 하늘 높이 나는 새가 땅을 쳐다보듯이 말이다. 이것이 조감도이다. 반면에 높은 곳을 그리려는 자는 평지에서 위쪽을 바라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높은 곳에 있는 군주의 본성을 이해하려면 인민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치 물고기가 수면 밑에서 하늘을 쳐다보듯이, 땅을 헤치고 나온 두더지가 하늘을 쳐다보듯이 말이다. 이것이 어안도이다.
조감도와 어안도를 합쳐놓으면 어떤 도면이 나올까? 마키아벨리는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군주로 하여금,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한다. 예민한 독자나 민감한 군주라면 군주와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부대끼며 공생하는 귀족·부자·관료·군인 등이 빠져 있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근대 시민사회가 도래하기 전의 정치에서 중요한 주체였던 귀족과 부자, 관료와 군인을 날카로운 비수로 포를 뜨듯이 과감히 제거해버린다. 그는 ‘정치의 두 주체는 높은 곳의 군주와 낮은 곳의 인민!’이라는 위대한 선언을 한다.
그는 조감도와 어안도를 합쳐 배치도를 제시한다. 배치도는 사전적으로 “물자나 인원을 적당히 나누어놓은 자리나 위치를 표시한 그림이나 도표”이자, “공장 따위의 안에 여러 기계를 장치할 위치를 나타낸 도면”이자, “정원 따위의 설계에서 배치할 건물이나 수목 따위의 위치를 표시한” 설계도이다. 국가의 배치도는 계급·계층 간의 권력 배분을 나타내는 도표이자, 국가 안에 필요한 장치를 어디에 나타낼 것인지를 표현하는 도면이자, 국가라는 커다란 정원에 중요한 시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를 표시하는 설계도이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국가 배치도에는 귀족·부자·관료·군인이 있을 곳이 없다. 배치도에 있는 것이라곤 위에서 내려다보는 군주의 시선과 밑에서 바라보는 인민의 관점뿐이다.
그는 에둘러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멋진 군주가 되려면 귀족·부자·관료·군인을 염두에 두지 말고 오로지 인민의 본성만 이해하라. 인민에게 돌팔매질을 당하지 않는 군주가 되려면 오로지 인민이 군주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만 생각하라. 바로 이것이 《군주론》 연구 방법의 핵심이다. 따라서 《군주론》에는 조감도적인 군주의 시선과 어안도적인 인민의 시선만이 존재한다. 나머지는 다 사족일 뿐이다. 그가 이런 연구 방법론을 자신의 입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다.
첫째, 나는 군주와 인민에 대해서만 말하겠다. 국가를 구성하는 두 주체는 이들뿐이다. 다른 계층이나 계급은 모두 다 불필요한 존재이거나 이들 두 주체에 기생하는 자들이다.
둘째, 나는 군주와 인민의 중간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무시하겠다. 그들은 혈통적 권리로 군주를 압박하고 인민을 억압하는 귀족이거나, 부를 바탕으로 군주를 위협하고 인민을 수탈하는 부자이거나, 지식을 바탕으로 군주의 권력을 위임받아 인민에게 독점적 권력을 행사하는 관리들이거나, 간헐적으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군인들이다.
셋째, 나는 군주와 인민의 소통과 교류에 대해서 말하겠다. 군주와 인민이 직접 소통하거나 교류한다면 군주와 인민의 중간에 있는 귀족·부자·관료·군인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불필요하거나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마키아벨리는 낮은 곳에서는 낮은 곳을 제대로 볼 수 없고, 높은 곳에서는 높은 곳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낮은 곳을 보려면 높은 곳에 서야 하고, 높은 곳을 이해하려면 낮은 곳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바로 군주를 연구하는 자의 기본자세라고 선언한다.
마키아벨리는 독자들에게 《군주론》에 숨겨져 있는 낮은 곳의 인민을 반드시 찾아보라고 조용히 속삭인다. 낮은 곳의 인민은 《군주론》에서 절대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군주론》의 인민은 군주가 행하는 정책의 대상이지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는 《군주론》을 읽을 때 돋보기로 확대해 보듯이, 현미경으로 세밀하게 들여다보듯이 숨겨진 인민을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독자들에게 《군주론》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높은 곳의 군주를 찾아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군주론》은 군주에 관한 책이므로, 군주가 주인공이므로 구태여 찾아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군주는 신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군주에게 간청합니다. 제가 이 보잘것없는 책을 바치는 마음 그대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폐하께서 이 책을 주의 깊게 읽어보시고 깊이 생각하신다면, 이 책 속에서 저의 놀라운 열망을 명확하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소유하고 있는 모든 역량과 행운 덕분에 당신이 바라는 그러한 위대함에 도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높은 자리에서 이 낮은 자리로 당신의 눈을 돌려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 지독한 악운에 시달리고 있는지 알게 되실 겁니다.
구차한 구직 부탁에 대하여
이 절은 ‘구차한 구직 부탁에 대하여’이다. 그 이유는 “놀라운 열망”에서 잘 드러난다. 마키아벨리가 밝힌 놀라운 열망은 두 가지이다. 첫째, 메디치가 이 글을 읽고 위대함에 도달하는 것이고, 둘째, 메디치가 낮은 자리로 눈을 돌려 자신을 봐주는 것이다. 전자는 메디치가 위대한 군주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고, 후자는 마키아벨리의 구직 부탁이다.
마키아벨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가련하게 취직을 시켜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메디치가 이 글을 읽고 “지독한 악운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을 구원해 주기 바란다고 간청한다. 왜 마키아벨리는 이 글을 바치면서 이토록 절실하게 구직을 부탁했을까?
우선, 가난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약 14년간 공직에 복무하다 1512년 모반 혐의로 투옥된다. 부자로 태어나지 못한 그는 공직 생활을 통해, 그나마 넉넉하지는 않아도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실직을 한 것이다. 실직은 곧 궁핍이고, 시간이 더 흐르면 하데스의 입구에 서 있는 것과 다름없다. 1512년 무렵 그에게는 약 열 살 안팎의 자식 서너 명이 있었다. 변변한 직업이 없었던 그는 경제적 곤궁함과 인생의 고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을 정도이다.
그렁저렁하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집에 가서 가족과 식탁에 둘러앉아 이 가난한 산장과 보잘것없는 재산이 허용해 주는 식사를 들곤 하지.
해가 뜨면 일어나 숲으로 가서 벌채 감독을 하던 마키아벨리에게는 곤궁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절대적으로 더 나은 일자리가 필요했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그는 실천하고 활동하는 이론가였다. 그는 공직 생활 전부를 일종의 외교 업무, 아니면 군 관련 업무로 이어왔다. 그가 쓴 글의 절반이 “끊임없는 독서”의 산물이라면, 나머지 절반은 “오랜 경험”의 산물이다. 경험은 공직 생활에서 얻은 것들이다. 공직 생활은 마키아벨리에게 사색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어떤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지침이다. 마키아벨리에게 공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길을 잃는 것과 같다. 그가 길을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점이 편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 다음 한길로 돌아서 선술집으로 가네. 거기서는 나그네들과 이야기를 나누지. 그들 나라의 새로운 사건에 관해서 물어보기도 하고, 그들의 입으로 전해지는 정보에 귀를 기울이곤 하면서 말일세. 그러면 사람들 취향의 차이랄지, 생각의 차이 같은 것을 알 수가 있다네.
가난에서 벗어나고 다시 옛날처럼 생각의 자양분을 얻는 것, 이 두 가지가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취직을 간절히 원하게 했던 요소이다. 그래서 그는 《군주론》을 집필하고, 시작 부분에 “최고의 군주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올리는 글”이라는 헌정사를 배치했다.
이 글은 일반적인 헌정사와 다르다. ‘헌정’은 일반적으로 금전적·정신적·학문적인 도움을 받은 보답으로 글이나 음악 등을 바칠 때 쓰는 말이다. 학자나 문학가 또는 음악가들이 그 받은 은혜에 보답하는 형식이 헌정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에 은혜를 입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메디치가에 의해 해직당했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모의 놀이’를 한 탓에 역모죄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헌정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말하자면 메디치에게 이 책을 헌정할 테니 관직을 달라는 식이다. 주객전도! 글을 바치는 마키아벨리가 주체이고, 이 글을 헌정 받는 메디치가 객체인 셈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마디로 직업을 얻으려는 구직서인 셈이다. 그는 아마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바치는 글이 마음에 들면 관직을 달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네가 이 글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이 책으로 직업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한 울림이 있을 구직서 《군주론》은 실패한 셈이다. 직업을 얻지 못한 이유는 무얼까? 물론, 헌정했는지 안 했는지 불분명하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일단 메디치에게 책을 헌정했다 치고 구직 실패의 다른 이유를 헤아려보는 것도 독자 몫의 재미이리라.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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