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991년 서울
1990년 한소수교韓蘇修交는 냉전시대의 마침표였다. 그것은 여러 낯선 현상과 더불어 왔다. 마르크스주의 서적의 대유행도 그중 하나였다. 공산국가들이 무너지자 공산주의 서적에 대한 금기가 풀렸다는 건 역설이었다. 그리고 철의 장막 저편에 있던 소련이 열렸다.
1991년 4월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소련 국적을 가진 한 여성이 고르바초프 방한보다는 조촐하고 사사롭게, 그러나 일부 기자와 학자들과 정보기관의 긴밀한 관심 속에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엘 들어왔다.
동그스름하고 오밀조밀하게 생긴 전형적인 한국 여인의 얼굴이지만 한국말을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그녀의 이름은 비비안나 박. 모이세예프 무용학교 교수. 1928년생. 우리 나이로 64세. 러시아인 남편 빅토르 마르코프와 동행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생애 처음으로 이복동생을 만났고 몇몇 사람과 공개적인 또는 은밀한 인터뷰를 했다. 그녀를 인터뷰한 사람들은 그녀가 아버지를 만난 적 있는지, 아버지와 관계는 어떠했는지, 그녀는 지난 60년 동안 어찌 살아왔는지 등을 물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박헌영, 1950년대 이래 남과 북 모두에서 지워진 이름이었다. 또한 냉전체제가 무너져가고 있다 해도 여전히 위험한 이름이었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본 기억이 있습니까?”
“아니요. 열여덟 살 때던가. 전쟁 끝나고 아버지가 김일성 주석하고 같이 모스크바에 왔는데 그때 처음 봤어요.”
“어머니는 1930년대에 폐렴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아니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스탈린이 죽은 해였으니까 1953년이었어요.”
“어머니와 같이 살았나요?”
“같이 산 적은 없어요. 모스크바에 사실 때 가끔 만났고 어머니가 카자흐스탄에 가신 뒤로는 만나기 힘들었죠.”
“어머니는 왜 카자흐스탄에 가셨지요?”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죠.”
“그러면 어머니는 혼자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남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남자라니, 고려인이었나요? 아니면 러시아인이었나요?”
“고려인이었던 것 같아요. 어머니도 내게 말하지 않았고 나도 물어보지 않았어요.”
“모녀지간인데 그런 정도의 대화도 없었습니까?”
“솔직히 어머니한테 정이 없었어요. 나는 어머니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어요. 엄마라 한다면 혁명가보육원 선생님이 엄마였지요. 어머니는 자식을 보육원에 맡겨놓고 다른 남자하고 살았으니까요. 또 몇 년씩 보육원에 찾아오지 않았어요. 솔직히 어렸을 적엔 어머니를 싫어했어요. 어머니가 부끄러웠지요.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 생각했어요.”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신여성이자 공산주의운동가, 그리고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은 딸에게 그렇게 기억되고 있었다. 그녀가 부모의 나라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88올림픽을 한 나라라는 정도.
그녀는 어머니 유품에 들어 있었다며 빛바랜 흑백사진 몇 장을 내놓았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진들이었는데 대개 소련으로 탈출한 이후 찍은 것들이었다. 그중 한 장의 사진이 이채를 띠었다. 칙칙한 흑백사진들 가운데 유난히 밝고 화사한 한 컷.
봄인가, 아니 여름인가. 세 여자가 개울에 발 담그고 노닥거리고 있다. 하얀 통치마 저고리 위로 한낮의 햇볕이 부서진다. 팽팽한 종아리와 통통한 뺨, 가뿐한 단발은 세 여자의 인생도 막 한낮의 태양 아래를 지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세 여자가 물놀이하는 개울은 청계천인가.
가운데 앉은 양장의 여자, 이마가 넓고 콧날이 반듯한 이 여자는 주세죽이 틀림없다. 오른쪽 여자는 주세죽과 단짝이었던 허정숙 아닐까. 그러면 또 한 여자는 누구일까.
세 여자 모두 단발이다. 식민시대 한때 경성을 풍미했던 월간지 〈신여성〉에서 이 사진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나와 나의 친구 두 사람 합 3인이 단발하던 때는 지난 8월 21일 오후 6시경이었습니다. 혹 어떤 이는 3인단발동맹이나 혹은 신경이 과민한 양반들은 어떠한 비밀결사가 아닌가, 의심하였습니다. 우리 3인은 본래 동지로서 친구로서 단발하기로 작정하기는 이미 오랜 일이었습니다. 서로 깎기로 언약하고 곧 머리를 풀고 긴 것만을 추려서 집었습니다. 자르고 나니 머리숱이 퍽 많아 보였습니다. 3인 중에서 제일 먼저 자른 사람은 나였습니다. 머리를 잘리우는 그 자신은 쾌활한 용기를 내어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손에 가위를 들고 남의 머리를 자르는 그때는 이제까지 잠재하였던 인습의 편영片影이 나타나며 몹시 참담하고 지혹至酷한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삽시간에 3인은 결발의 신여성으로부터 단발랑 송락머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다 깎은 뒤에 서로서로 변형된 동무의 얼굴을 쳐다보며 비장하고도 쾌활미가 있는 듯 웃어버렸습니다. 웬일인지 서로 아지 못한 위대한 이상과 욕망이나 이룬 듯이 무조건으로 기뻤습니다. 우리는 머리가 자리가 안 잡혀서 앞으로 나오려는 것을 ‘찝는 핀’으로 찌른 뒤에 각각 집으로 헤어져버렸습니다.
─ 허정숙,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 중에서, 〈신여성〉(1925년 10월호)
글을 쓴 허정숙은 당시 〈신여성〉편집장이었다. 1925년 10월호 〈신여성〉은 단발특집호였는데 이참에 세 여자가 미뤄오던 단발을 결행했던 것 같다. 세 여자의 단발 의식은 비장하기가 흡사 피의 맹세거나 도원의 결의 같다. 단발을 한 날이 8월 21일이었으니 사진은 그 며칠 뒤였을 것이다. 허정숙 주세죽과 함께 단발을 했던 또 한 여자는 고명자 아닐까. 세 여자를 당시 잡지들은 ‘트로이카’라 불렀다. 하루에도 수십 개 사상단체가 생겨나고 없어지던 정치 에너지 대폭발의 시대에 세 여자는 그 최전선에 있었다. 주세죽의 남편 박헌영, 허정숙의 남편 임원근, 고명자의 애인 김단야, 이 세 남자 역시 ‘트로이카’로 불렸다. 1900년생 동갑내기 세 남자는 실제로 그 무렵 청년공산주의운동을 이끌고 가던 세 마리 말이었다.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연대는 우정과 애정과 이념으로 반죽되어 시멘트처럼 공고했다. 1920년대 지식인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름이 마르크스와 톨스토이, 간디였다면 그중 현실정치에서 가장 파괴력을 지닌 인물은 단연 마르크스였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의 심장 모스크바로부터 뜨끈뜨끈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때 나이, 주세죽은 스물다섯, 허정숙은 스물넷, 고명자는 스물둘이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 단발 여성은 아직 두 손에 헤아릴 정도였고 백주대낮 개울가에 ‘단발랑斷髮娘’이 셋이나 출현했으니 구경꾼이 몰려들지 않았을까.
천변의 구경꾼 중에 여자들은 머리를 땋아 내렸거나 틀어 올렸거나 비녀로 쪽 찌거나 했을 것이고 개중에는 몸종을 앞세우고 쓰개치마 뒤집어쓴 채 얼굴만 빼꼼히 내놓은 여자도 있었겠고 그런가 하면 짧은 하이칼라 머리 남자들 사이에는 갓 쓰고 수염 기르고 자기 팔만큼 긴 장죽을 뻐끔뻐끔 빨아대는 남자도 있었을 것이다. 교복 입고 책가방을 든 고등보통학교 남학생이라면 “저기 단발랑 있어! 현대미가 넘치네” 하고 좀 색다른 반응을 내놓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때 그곳을 지나는 사람 중에 낡은 양복을 걸치고 한눈에 봐도 무슨무슨 청년동맹 회원일 법한 남자가 있어 “저기 허정숙 아닌가”하고 알은체하고 옆에 가던 남자가 “뭐야, 단발이잖아” 하고 맞장구치면 “소문난 창부 아닌가. 남편 말고도 애인이 둘이나 더 있다네” “어허… 허헌 씨가 딸자식 하나 잘못 둬서 개망신이구먼” “요새 〈신여성〉이라는 잡지를 만드는데 목불인견이지” “아, 자네는 그 〈신여성〉인가 뭔가를 봤구먼” “아, 아니, 보지는 않았네만 뭐 뻔할 뻔 자 아닌가” 하고 뒷담화에 열 올렸을지도 모른다.
여자들의 단발은 과연 핫이슈였다. 1895 을미년 단발령 때 남자들은 머리를 자르느니 목을 치라며 자결하기도 했고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남자들이 상투를 자를 때 그것은 봉건왕조와의 인연을 자르는 일이었지만 지금 여자들이 쪽진 머리를 풀어 자르는 것은 ‘나, 독립된 인격체요’ 하는 1인시위였다.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여자들이 숨죽인 채 물밑에 빙산처럼 잠겨 있었지만 그 꼭대기에서 한 줌의 여자들은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서 자유연애주의자가 되었고 입센의 희곡에서 읽은 대로 인형의 집을 뛰쳐나갔으며 사상단체에 가입해서는 맑스걸 엥겔스레이디가 되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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