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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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연 게 먼저인지 전등 스위치를 올린 게 먼저인지 알 수 없었다. 문 손잡이와 전등 스위치가 달린 위치가 가까우니 손이 동시에 움직였을 수도 있었다. 낡은 집전기 때문에 형광등에 불이 들어오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리면서 어둠과 밝음이 엇섞이고 옅은 정화조 냄새가 찬 공기 속에 떠돌았다.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나, 왔네.” 시간과 후각에 이어 청각까지 열렸다. 밝아진 형광등 불빛 아래에는 욕조와 세면대, 변기와 그 위의 선반뿐이었다. 정화조에서 올라오는 역한 냄새도 날씨에 따라 한번씩 나던 것이니 별다를 것이 없었다. 문제는 환청이었다. “나, 왔네.” 박 영감이 조금 전에 긴가민가 귀청에 닿았던 소리를 되씹으며 거울로 시선을 돌렸을 때 흐릿한 얼굴 형체가 언뜻 보이다 사라졌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다. 발에 막 끼운 슬리퍼를 타고 타일 바닥으로 주르르 미끄러진 건 그때였다. 두 팔을 휘저으며 무엇인가를 잡았을 테고 엉덩이를 뒤로 밀며 발에 잔뜩 힘도 주었을 것이었다. 무릎께가 욕조에 부닥치고 오른손으로는 세면대 한 귀퉁이를 잡다보니 누운 것도 일어선 것도 아닌 이상한 자세가 되었다. 박 영감은 욕조와 세면대 귀퉁이를 붙들고 겨우 바로 섰다. 거울 앞이었다. 혼이 빠진 듯 창백한 늙은이의 얼굴은 박 영감 자신이었다. 문제는 미끄러지기 전에 거울에서 만났던 흐릿한 얼굴 형체들이었다. 그것도 찌그러지고 포개진 괴이한 모습이었다. 제대로 본 게 맞기나 한가. 박 영감은 머리를 흔들었다. 제대로 보았다 하더라도 목소리가 하나면 얼굴도 하나여야 했다. 그는 수도꼭지를 틀고서 손을 쪼물거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얼굴을 씻기 위해 팔을 올렸을 때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왔다. 팔을 내린 뒤 두 손을 아주 조금씩 천천히 들어보니 왼쪽 팔꿈치와 어깨에 심한 통증이 왔다. 그는 팔을 내린 뒤 오른손만으로 얼굴을 서너번 문지르고 수건을 찾기 위해 뒤로 돌아섰다. 허리도 아프고 발을 옮기기도 마뜩찮았다. 태연하게 움직여야지 하며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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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그라요? 어디 아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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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을 차리던 아내의 눈이 그를 빤히 붙잡았다. 통증을 참으며 제대로 걷는다 했지만 마누라 눈에는 절뚝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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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매 미끄러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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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해야지요. 화장실 문을 조금 열어두면 바닥이 잘 마를 긴데 꼭꼭 닫아두니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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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영감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마누라가 주방 쪽으로 몸을 돌리자마자 조심스러우면서도 재빨리 식탁 의자로 다가갔다. 오른쪽 다리 어딘가가 불에 덴 듯 뜨거워왔지만 그는 이를 악다물고 두걸음을 옮겨 의자 등받이를 꽉 붙잡았다. 마누라가 김이 나는 뚝배기를 들고 돌아섰다. 그는 식탁이 붙어 있는 벽을 보며 서 있었다. 달력이 걸려 있었다.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두르고 ‘증산’이라고 써 놓은 내일 날짜에 눈길이 갔다. 그곳에서 장인의 산소 이장이 있을 것이다. 마누라가 다시 몸을 돌렸을 때 그는 식탁에 바투 붙어 있는 의자를 뒤로 당기고 엉덩이를 천천히 걸쳤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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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앉으소. 차비 안 내고 버스 앉은 사람처럼 그기 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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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가 숟가락을 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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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당신 얼굴에, 땀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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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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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등줄기도 땀이 나는지 축축했다. 선뜻 이마로 손을 올리지도 못한 채 할 말을 찾느라 머뭇대는 박 영감을 보던 마누라가 일어났다. 뚱뚱한 내동댁은 몸피에 비해 행동이며 말이 재발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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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지면서 용을 썼구마는. 밥 잡숫고 어디 한번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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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는 뭘 본다 말이고, 파스나 붙이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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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영감이 마누라 뒷말에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내동댁이 한마디 보태면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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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사람이 짐이 돼서 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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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말은 같았지만 뜻은 달랐다. 부부는 내일 일찍 아들 차를 타고 증산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마누라가 하는 소리야 말뜻 그대로이겠지만 박 영감은 다친 일로 아예 끼이지 못하게 될까 걱정이었다. 그는 대꾸 대신 숟가락을 들었다. 의자를 앞으로 당기지 않아 엉거주춤한 자세였지만 몇숟가락 들고 얼른 방으로 들어갈 궁리뿐이었다. 하지만 된장국을 뜨는데 손이 떨려 국물이 식탁 위에 떨어졌다. 엉덩이는 뒤로 밀려 있었고 상체만 앞으로 내밀었을 뿐 고개를 숙이지 못한 상태였다. 어깻죽지만이 아니라 목이 뻣뻣한 게 더 큰 탈인지도 몰랐다. 박 영감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왼손을 식탁 밑으로 넣어 의자를 조금 당기려고 힘을 주다 “아야!” 하고 비명을 토하고 말았다. 내동댁이 수저를 놓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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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아프요? 우선 일어나 바로 앉아나 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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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동댁이 영감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다 말고 그냥 의자 등받이만 잡았다. 영감이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저어서이기도 했지만 살 닿은 지가 까마득한 데서 온 반사작용이었다. 박 영감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일어난 뒤 마누라가 밀어넣은 의자에 다시 앉았다. 내동댁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서툴게 수저를 놀리는 남편을 살피는 눈길까지 더해서 무슨 다짐이 선 뒤의 단호한 행동처럼 보였다. 박 영감은 마음과 몸이 모두 편치 않았다. 자기 불찰로 일어난 일이 후회되면서 통증은 통증대로 심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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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기를 겨우 비우고 박 영감이 일어나자 내동댁은 서둘러 식탁을 치웠다. 그러는 동안 박 영감은 현관에 세워둔 지팡이를 찾아 짚으며 아주 조심스럽고도 천천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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