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민주주의의 약화
우리 시대의 핵심 질문은, 세계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는 현상과 자유민주주의가 일종의 포퓰리스트 권위주의로 대체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의 뚜렷한 징조가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 푸틴이 이끄는 러시아, 모디가 이끄는 인도, 에르도안이 이끄는 터키에서 발견되고 있다. 게다가 이미 기존 권위주의 정부(헝가리의 오르반 정부, 폴란드의 두다 정부)와 프랑스·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연합EU 국가의 권위주의 우익통치를 지지하는 주요 정치인 사례도 허다하다. 이런 국가들의 총인구는 세계 인구의 거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처럼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우경화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고 있지만 이 상황을 제대로 파헤친 설명은 별로 없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대안을 찾기 위한 유럽식 접근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지도자와 지지자
우리는 주변에서 대두하고 있는 새로운 포퓰리즘에서 지도자와 지지자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전통 분석 방식으로 보면 자칫 정치 영역에서 주된 사회적 경향은 통솔력, 선전, 이데올로기 같은 요소와 관계가 있으며, 이 모든 요소가 지도자와 지지자 사이에 강한 연결고리를 이룬다고 여기기 쉽다. 물론 오늘날에도 지도자와 지지자는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연결은 지도자의 야망·전망·전략과 지지자의 두려움·상처·분노 사이의 우발적·부분적 겹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새로운 포퓰리즘 운동의 물살을 타고 급부상한 지도자들은 대개 외국인 혐오·가부장주의·권위주의 경향이 있다.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향 중 일부를 공유하기도 하겠지만, 또한 동시에 사회가 자신들에게 해온 또는 자신들을 위한다고 해온 일들에 대해 두려움, 억울함, 분노를 품고 있다. 이런 정서는 당연히, 특히 선거에서 (부정하게 조작되거나 세심히 관리되어) 결집된다. 그러나 이런 결집의 장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왜 인도와 미국의 일부 이슬람교도가 선거에서 모디와 트럼프를 뽑을까? 왜 미국의 일부 여성이 트럼프를 좋아할까? 왜 구동독 출신 집단이 오늘날 선거에서 우익 정치인들을 뽑을까? 이런 난문제를 다루려면 새로운 포퓰리즘의 지도자와 지지자에 대해 따로따로 생각해봐야 한다.
위로부터 메시지
새로운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국권이 위기에 처한 시대에 국가 대표직을 노린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국권 위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증상은 현대의 어떤 국민국가도 자국의 이른바 국가 경제를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부유한 국가와 빈곤한 국가 모두에 똑같이 문제다. 미국 경제는 실질적으로 중국 손에 달려 있고, 중국은 아시아 여러 국가는 물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의 원자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모든 국가가 중동의 석유에 어느 정도 의지하고, 현대의 모든 국민국가가 사실상 소수 부유한 국가의 군비에 의존한다. 국권의 기반으로서 경제 주권은 늘 미심쩍은 원칙이었다. 오늘날 경제 주권은 갈수록 무의미해지고 있다.
오늘날 국가가 보호하고 발전시키겠다고 주장할 수 있는 국가 경제가 없는 상황이라, 효율 위주 국가와 야심에 찬 많은 포퓰리즘 운동에서 문화적 다수결주의, 민족국가주의, 내부의 지적·문화적 반대 의견에 대한 억압을 지향함으로써 국권을 행사하려는 경향이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세계적인 경제 주권 상실 때문에 문화 주권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국권 자리를 대신하는 문화로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이 권력을 잡은 러시아를 예로 들어보자. 2014년 12월, 푸틴은 “러시아는 유럽이 아니다”라는 원칙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의 국가 문화 정책 수립 결정에 서명했다. 푸틴이 다분히 성적 표현인 “중성적이고 불임”이라는 말로 규정한 서양 문화와 유럽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노골적 적대감을 반영한 이 원칙은 러시아의 남성성을 정치적 힘으로 동원한다. 이런 표현은 러시아의 전통 가치관으로 회귀하라는 명백한 요구로, 슬라브인 숭배 정서와 친러시아 문화 정책의 오랜 역사에 근거한다. 이 문서의 가장 가까운 배경은 2014년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둘러싼 싸움과 이 사태를 둘러싸고 러시아 정부 반대편에 선 록 가수 안드레이 마카레비치Andrey Makarevich의 콘서트 취소였고, 멀게는 오랜 골칫거리였던 2012년 반정부 록 그룹 푸시 라이엇Pussy Riot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이 정책은 러시아 곳곳에 ‘통일된 문화 공간’이 필요하다고 촉구하며, 러시아의 문화 고유성과 일관성이 자국내 문화 소수집단과 해외 정적들에 대항하는 결정적 도구임을 명확히 한다.
또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이 통치하는 터키도 문화를 주권의 무대로 바꿔놓았다. 에르도안의 전략에서 주요한 수단은 오스만제국의 전통, 언어 형태, 위엄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다(이는 에르도안 비판가들이 ‘신오스만주의’라고 부르는 이데올로기다). 이 포부는 터키의 세계적 야망, 러시아의 중동 개입에 대한 터키의 저항, 유럽연합에 가입하고자 하는 터키의 염원도 표현한다. 이러한 신오스만주의 태도는 근대 터키의 우상인 케말 아타튀르크Kemal Atatürk의 세속 국가주의를 더 종교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통치 방식으로 대체하려는 에르도안의 시도에서 핵심 요소다. 터키에서는 예술과 문화 단체에 대한 강력한 검열이 지속되어 왔으며, 2013년에는 게지 공원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를 강제 진압하기도 했다.
여러 면에서 새로운 권위주의 지도자가 포퓰리즘 전략을 만들고 유지하는 양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현재 인도 총리면서 우파의 이론적 지도자인 나렌드라 모디다. 모디는 오랫동안 인도 내 힌두교 신자의 권익 신장을 위해 정당원과 운동가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인도 구자라트 주 수석장관을 역임한 그는, 일부 이슬람교도가 힌두교 순례자가 탄 구자라트를 지나가는 기차를 공격한 것을 계기로 2002년에 구자라트 주 전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이슬람교도 집단 학살 사건에 연루되었다. 여전히 많은 진보 성향 인도인은 모디가 이 집단 학살을 적극 주도했다고 믿지만, 모디는 여러 차례 재판과 세간의 비난을 용케 모면하고 2014년 선거에서 승리해 총리로 선출되었다.
모디는 인도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힌두트바Hindutva(힌두 민족주의)를 공개 옹호하며, 현재 전 세계에서 대두되는 많은 권위주의 포퓰리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문화 국가주의를 신자유주의 정책과 사업에 결합시킨다. 모디가 통치한 거의 3년 동안 인도에서 성적·종교적·문화적·예술적 자유에 대한 공격이 전례없이 많이 일어났는데, 이는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의 세속주의·사회주의 유산과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의 비폭력주의를 조직적으로 해체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모디가 정권을 쥔 현재, 파키스탄과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를 일촉즉발 상황이며, 인도 내 이슬람교도들은 갈수록 커지는 생명의 위협에 나날이 시달리고 있고, 달리트Dalit(인도 카스트제도의 4개 계급보다 더 아래 최하 계급인 ‘불가촉천민’)는 매일 공개 공격과 굴욕을 당한다. 모디는 민족 순수성이라는 말에 청결과 위생이라는 담론을 결합시켰다. 디지털 현대성과 힌두교 정통성의 조합을 강조하는 인도의 해외 문화 이미지와 국내 힌두교 통치는 인도 주권의 토대다.
최근에 일어난 악몽 중 하나인 2016년 11월 8일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승리도 마찬가지다.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일이어서 분석할 자료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미 트럼프는 당선 직후부터 선거 공약을 바탕으로 내각 지명자들과 더불어 활동에 돌입했다. 선거에서 이겼다고 해서 트럼프의 스타일이 누그러지리라고 기대하면 오산이다. 최근 역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심각한 여성 혐오,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과도한 권력욕이 뒤섞인 트럼프의 메시지는 2가지 극단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는 함축적이고 다른 하나는 노골적이다. 노골적인 메시지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만들자가 트럼프의 목표라는 것이다. 이를 위한 방침은 미국의 대외 군사 활동 선택권을 늘리고, 미국의 부와 위신을 약화시킨다고 여기는 각종 무역협정을 재협상하며, 미국 회사들을 다양한 세금과 환경 규제에서 풀어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미국 내 모든 이슬람교도를 ‘등록’시키고, 모든 불법체류자를 강제 추방하며, 미국 국경 경비를 강화하고, 출입국관리를 대폭 강화한다는 공약을 지키겠다고 강조한다. 함축적인 메시지는 인종차별주의로, 정치·경제에서 우월한 위치를 흑인과 라틴아메리카인과 이주자에게 뺏겼다고 느끼는 미국 백인을 대상으로 한다. 트럼프가 수사적 표현에서 거둔 가장 큰 성공은, ‘미국’의 위대함이라는 트로이 목마에 ‘백인 우월주의’를 태운 것이다. 이를 통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미국 백인이 다시 위대해지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미국의 세계 패권에 대한 메시지가 백인을 다시 미국 지배계급으로 올려놓기 위한 개 부르는 호각dog whistle(정치인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메시지를 좋아하지 않을 다수 유권자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특정 유권자에게만 전달하는 방식-옮긴이)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미국 경제를 구원하자는 메시지가 백인을 구원하자는 메시지로 변형된 셈이다.
이는 새로운 권위주의 포퓰리즘 지도자들이 공통으로 가진 특성이다. 즉 이들은 외국 투자자, 세계 협약, 다국적 금융, 유동적인 노동자와 자금에 좌우되는 자국 경제를 통제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모두 국가 문화를 깨끗이 정화하는 것이 세계 정치권력 확보로 가는 길이라고 약속한다. 이들 모두 인도나 터키나 미국이나 러시아를 성공시킬 나름의 전망을 가지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우호적이다. 이들 모두 소프트 파워(정신과 문화 같은 무형의 힘-옮긴이)를 하드 파워(군사력과 경제력 같은 물리적 힘-옮긴이)로 바꿀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리고 모두가 아무 거리낌 없이 소수자와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고, 언론 자유를 억압하고, 반대자를 제거하기 위해 법을 이용한다.
이런 전 세계적인 현상은 유럽, 테리사 메이Theresa may가 이끄는 영국, 빅토르 오르반Viktor Orbán이 이끄는 헝가리, 안드레이 두다Andrzej Duda가 이끄는 폴란드, 그리고 사실상 다른 모든 국가들 내의 갈수록 목청을 돋우는 ‘주류’ 우익 정당들에서 분명히 보인다. 유럽에서 이런 추세의 발화점은 최근 거세진 이주 물결에 대한 두려움, 주요 도시에서 일어난 각종 테러 공격에 따른 분노와 충격,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브렉시트 투표 결과의 충격이다. 이렇듯 포퓰리스트 권위주의 지도자들과 선동 정치가들이 구대륙 곳곳에서 발견되며, 또 그들 모두는 이 글에서 논한 주요 사례들처럼 신자유주의, 맹목적 문화 우월주의, 이주 반대자들의 분노, 다수결주의자들의 격노라는 동일한 조합의 운용을 선보인다. 따라서 이는 새로운 권위주의 포퓰리즘 지도자들과 그들의 매력을 살펴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다. 그렇다면 지지자들은 어떨까?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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