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을 자르고 마음을 매만지는 가위
미용사 태기봉 씨
당신의 스타일을 찾아드립니다
분무기로 머리카락에 물을 뿌리고 정성스레 빗질을 한다. 머리 모양을 유심히 살핀다. 삭삭삭. 엄지와 약지로 움켜쥔 미용가위가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한다. 가지런히 빗어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모은 모발을 단가위(짧은 가위)로 쳐낸다. 빗질과 가위질을 반복한다. 한쪽 날이 지그재그 모양인 숱가위(틴닝가위, 머리숱을 정리하는 가위)로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간다. 덥수룩하던 두발이 단정해진다. 사각사각. 곧게 편 왼손 엄지로 옆머리 각을 잡고 날 끝을 세운 장가위(긴 가위)로 뒤통수까지 한 바퀴 돌아나간다. 삐죽삐죽 잔머리가 사라진다.
세 개의 가위와 빗이 오가는 사이, 커트가 끝났다. 샴푸를 할 차례. 열 손가락이 뒷목부터 정수리까지 두피를 마사지한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가지런히 빗는다. 나이 지긋한 노신사의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배어난다. 오늘 첫 고객이다. 미용사 태기봉 씨도 미소 짓는다.
두 명의 젊은 친구들이 들어온다. 바빠서 3개월 만에 미장원에 왔다는 청년의 지저분한 머리. 곱슬머리의 애환이다. “투블록으로 잘라볼래요? 어울릴 것 같은데.” 아랫머리는 짧게 치고, 윗머리는 길게 내려서 덮는 스타일이다. 왼손에 빗, 오른손에 바리캉을 든다.
‘바리캉’은 프랑스의 이발기계 제조사명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위잉. 바리캉이 옆머리를 사정없이 쳐나간다. 삭삭삭. 빗질한 모발을 검지와 약지에 끼우고 빠져나가지 않게 중지로 붙잡은 뒤 잘라나간다. 사사삭. 숱가위로 뒷머리를 다듬고 단가위로 앞머리를 손질한다.
샴푸가 끝나고 드라이한 머리를 롤브러시로 말아 올린다. 손끝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스타일을 잡아준다. 말끔해진 곱슬머리가 얼굴로 떨어져 눈썹에 살짝 걸리면서 상큼한 느낌을 준다. “친구는 머리 손질을 안 하는 게 좋겠어요. 곱슬머리가 안쪽으로 돌아서 댄디한 느낌을 주거든요.” 청년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같이 온 친구는 짧은 머리다. “조금 더 짧게 깎아주세요. 원장님 스타일이 멋진 것 같아요.” 바리캉을 들어 옆머리와 뒷머리를 깎는다. 의자를 내려 바리캉으로 윗머리까지 깎는다. 숱을 솎아내고 뒤통수를 동그랗게 다듬는다. 윗머리 가운데로 머리카락이 모이게 하는 모히칸 스타일이다.
스피커에서 밥 말리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밥 말리 팬이신가봐요?” “자메이카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때 밥 말리 콘서트에 정부군과 반군 대표가 참석했다고 해요.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을 거예요. 예술을 통해 혁명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사람이라서 좋아해요.” “레게 음악 좋죠?” “문자가 없던 시절, 아프리카에서 역사를 외우게 한 게 레게의 시초라고 하더라고요.” 가위 세 개와 빗, 바리캉이 머리 위를 누비는 사이, 기봉 씨는 손님들과 쉴 새 없이 이야기꽃을 피운다.
부스스한 머리, 둥글넓적한 얼굴의 젊은이가 들어온다. 염색과 파마를 한 머리가 많이 자랐다. 다듬어달라고 한다. 두상을 골똘히 살피던 기봉 씨가 스타일을 제안한다. 손님이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집게로 머리를 집어 올리고 옆머리부터 깎아나간다. “내가 잘라준 머리가 아닌 것 같은데?” “네, 다른 곳에서 깎았어요.” “우리가 손님 얼굴은 기억 못할 때가 있어도 자른 머리는 기억해요.” 미세한 차이인데 신기하다. “앞으로 막 쏟아지는 머리잖아요. 옆으로 머리를 흘리면 훨씬 괜찮을 것 같아요.”
세 개의 가위가 엉킨 머리카락을 솎아 개성을 엮어낸다. 평범함을 깎아 특별함을 입히고, 진부함을 잘라 세련미를 더한다.
열정페이와 조기폐업 사이
기봉 씨가 주로 쓰는 가위는 단가위, 장가위, 숱가위 3종이다. 모두 10년이 넘은 가위들로 하나에 20만 원이 넘는다. 독일제 재규어 미용가위는 60만 원을 호가한다. 양날이 빗처럼 갈라져 있고, 갈라진 날에 홈이 4개씩 파여 있는 가위로, 섀기커트(머리카락 끝을 뾰족하게 깎는 커트)를 할 때 칼과 함께 쓴다.
사람의 머리카락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서 비싼 가위도 2, 3년 쓰면 무뎌진다. “습기를 머금었던 머리카락이, 건조한 계절에는 습기가 날아가면서 단단해져 가윗날도 더 많이 닳아요. 머리를 깎다보면 날이 밀린다는 느낌을 받죠.” 대부분의 미용사들은 수리를 맡기지만, 그는 가윗날을 연마용 숫돌로 갈고, 코팅용 숫돌로 다듬어 사용한다.
커트, 파마, 염색 중에서 미용의 핵심은 커트다. 커트 실력이 디자이너의 수준을 결정한다. 일명 ‘깍두기 머리’나 보브커트(턱선에서 어깨 사이 길이의 단발머리)가 쉬운 것 같아도 제일 어렵다. 긴 머리는 잘못 깎아도 웨이브에 감춰지는데 단발은 눈에 확 띄기 때문이다. 두상과 머리카락이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손님 머리에 물을 뿌리고 빗질을 하는 순간, 뒤통수 모양부터 머리카락 굵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두상의 형태, 굴곡진 모양, 모발 상태를 분석하고 가위질을 해나간다.
사실 기봉 씨는 늦깍이 미용사다. 20대를 항해사와 회사원으로 보낸 그는 서른 즈음에야 미용의 길로 들어섰다. 영등포 미용학원과 노진태 커팅스쿨에서 공부했지만, 나이가 많아 실습생으로 취직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경기도 시흥에서 미용실을 하던 이훈헤어칼라 원장이 같이 일해보자고 제안했다. 그에게 미용을 배워 서울 화곡동에 제법 큰 미용실을 냈지만, 실패했다.
기봉 씨는 2008년부터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서 1인 미용실을 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손님이 무서웠어요. 한번은 그만 손님 귀를 베어서 피가 났는데, 괜찮다며 저를 안심시키더라고요. 정말 고마웠죠.”
그 시절, 미용을 배우겠다고 하면 3개월은 바닥 쓸고 1년 동안 샴푸만 하게 했다. 기봉 씨의 친구는 경기도 안양에서 서울 강남까지 도시락 싸들고 미용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미용업계는 ‘열정페이’의 대명사다. 통계청 조사에서 미용실(5%)은 편의점(6%) 다음으로 최저임금을 받지 못하는 업계였다.(2016년 기준) 고용노동부가 미용, 패션, 제과제빵 등 인턴을 다수 고용한 사업장 151개를 대상으로 근로감독을 실시한 결과, 68%인 103개 업체가 근로계약서 없이 일을 시키거나 최저임금도 주지 않는 등 불법을 저지른 것이 적발됐다.
실습생 교육을 법으로 규정해 보호하는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실습생을 실제 노동자로 사용하면서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유럽에서는 미용노조가 활발히 활동하는데, 한국의 미용노조는 찍히면 살아남기 힘든 업계 문화 탓에 얼굴도 드러내지 못한 채 페이스북에서만 활동한다.
기봉 씨 가게 주변 100미터 안에 미용실이 7개나 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미용실은 전국에 12만 개, 그중 20%인 2만 2433개가 서울에 몰려 있다. 2011년에 비해 20% 가까이 급증했다. 97% 이상이 근로기준법도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이다. 두발 관련 미용 종사자 수는 14만 명, 피부 미용업 종사자를 더하면 20만 명이다. 인구당 미용사 비율은 세계 최고인데, 3년 내 폐업하는 비율이 33%에 이른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대기업의 미용업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미용실과 안경점 등 11개 분야에 법인 진출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했고, 국회에서 ‘규제프리존 특별법’을 통과시킨다는 계획이다. “동네 빵집이 실력이 없어서 망하는 게 아니잖아요. 주먹 센 놈이 이기듯이, 돈 많은 놈이 이기는 무법천지 세상 아닌가요? 정부가 규제를 해야죠.” 동네 빵집은 식료품 회사 CJ가 집어삼키고, 동네 미용실은 화장품 회사 LG가 잡아먹는 시대. 선거철만 되면 너도나도 골목 상권을 보호하겠다고 떠들어대지만, 이제 미용실은 통닭집과 함께 자영업자의 무덤이 될 판이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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