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그 시절 이야기
1
그때 독재자는 무얼 했지*
1970년대 세계사는 몇 명의 독재자들을 기억한다. 이란의 팔레비, 필리핀의 마르코스, 칠레의 피노체트가 그 예들이다. 그들은 모두 미국의 후원을 받는 제3세계의 독재자들이었다. 이들 무리에 한국의 독재자 박정희도 낀다. 박정희는 1961년 탱크를 앞세워 권력을 장악한 후 18년 동안이나 장기 집권을 했다.
박정희 군부집단은 국민을 독재의 노예로 부려먹기 위해 아주 교활한 세뇌공작을 했다. 북한이 쳐들어온다는 남침 위협을 앞세워 국민을 협박하고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북한을 무찔러야 할 원수로 간주하는 반공주의는 독재를 보장하는 안전판이었다.
*2016년 12월 작성, 미발표.
시대의 성찰: 〈대한뉴우스〉
상기하자 6.25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미국과의 적대적 공존이 북한 지배집단의 체제 유지의 비결이라면, 다시 북한과의 적대적 공존이 남한 독재집단의 체제 유지의 비결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채찍이 있으면 당근이 있어야 한다. 독재자 박정희는 국민의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기 위해 이른바 3S 정책, 스크린과 섹스와 스포츠를 아주 잘 활용했다. 우리들은 철따라 봉황기 야구대회와 청룡사자기 야구대회를 청취했다. 매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참여하는 미녀들의 몸매를 시청할 수 있었다.
독재집단이 국민을 꼬신 당근, 그것은 성장이었다. 박정희는 성장이라는 전쟁의 맨 선두에 서서 이 전쟁을 지휘하는 장군 행세를 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박정희가 선택한 전략은 불균형 성장전략이었고 수출의존 성장전략이었다. 수출 100억 달러의 달성은 시대정신이었다. 박정희는 어린 학생들에게 기생충 퇴치를 교시하기도 했고, 때로는 쥐잡기를 교시한 적도 있다. 어린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우리 대통령, 일 잘하는 대통령” 하며 독재자를 찬양했다.
일 일하시는 대통령
이 이 나라의 지도자
삼 3·1정신 받들어
사 사랑하는 겨레 위해
오 5·16 이룩하니
육 6대주에 빛나고
칠 70년대 번영은
팔 팔도강산 뻗쳤네
구 구국의 새 역사는
십 10월 유신 정신으로
박정희와 그의 군부집단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구실삼아 대한민국을 거대한 병영으로 바꾸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았고, 교사들은 독재자의 지침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독재의 충직한 하인이 되었다.
학원질서 확립조치
10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은 요즘 일부 학생들로 인해 소란해진 대학의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특별 명령을 내각에 시달했습니다. 학원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주모학생을 학원에서 추방하고 불법 농성을 주도한 학생은 학적에서 제적하는 것입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선포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것은 박대통령 일인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었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대통령의 장기 독재를 보장하기 위한, 박정희 일인에 의한, 일인을 위한, 일인의 헌법이었다.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한 김기춘
1971년 법무장관이 된 신직수는 검찰총장 시절에 점찍은 5·16 장학생 출신의 ‘똘똘한 검사’ 김기춘을 법무부로 데려와 유신헌법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김기춘은 그 공로로 3기수 선배들과 함께 부장검사로 승진했다. 유신헌법을 완성한 뒤 중앙정보부장에 기용된 신직수는 1974년 9월 다시 김기춘을 중앙정보부로 데려갔다.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를 공포하고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했다. 이어 4월 3일 박정희는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했다. 박정희와 그의 졸개들은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천여 명의 대학생들을 검거했고,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180명의 학생들을 서대문 교도소에 투옥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조직 명칭은 박정희와 그의 졸개들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대학가 술집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던 일단의 대학생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반체제 조직에 연루되어 대부분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교도소의 마룻바닥에서 찬 겨울을 보냈다.
박정희의 하수인들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조직의 배후에는 대학생들의 체제 변혁 활동을 지도한 인민혁명당이 암약하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도예종, 여정남 등 8명의 청년들로부터 인민혁명당을 결성한다는 거짓 자백을 받은 뒤 사형을 선고했다. 물론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 선고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박정희는 이들 젊은이들에게 사형을 집행하도록 지시했다.
가족들은 너무나 어이없는 현실 앞에 반 미친 사람처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여덟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고 24시간도 채 되기도 전에 가족도 모르는 사이에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사형이 집행된 다음 날은 오전 10시부터 목요기도회가 있는 날이었다. 사형당한 분들의 가족들은 함세웅 신부가 계시는 응암동 성당에서 합동장례식을 가지려했으나 경찰들이 시체를 탈취해서 빼돌려버렸다.
시체를 인수받지 못한 한 부인이 죽은 시체지만 하룻밤이라도 집에서 지내고 화장지로 가도록 그 시체를 반환해달라고 피를 통하는 호소를 했으나 끝내 허락을 받지 못했다. 한 어린 학생은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게 해달라며 경찰을 향해 울며 애원했다.
1975년 4월 9일, 땅도 울고 하늘도 울었다. 서울대 학생 김상진은 불의한 권력에 항의하여 자신의 배를 갈랐다. 독재자는 또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했다. 1975년 5월 13일의 일이었다. 세 사람이 모여 정치 이야기를 해도 경찰은 영장 없이 국민을 체포했다. 거대한 병영 대한민국이 거대한 감옥으로 바뀌었다.
경찰들은 가위를 들고 청년들의 긴 머리를 잘랐고, 자를 들고 다니며 여대생들의 짧은 치마를 단속했다. 오후 다섯 시가 되면 국민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 국기를 바라보며 경례를 하도록 강요받았다.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볼 때에도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영상이 나오면 자리에서 모두 기립했다.
장발단속
남잔지, 여잔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청년들. 자신은 멋으로 알고 기르는지 모르지만 장발은 위생에도 좋지 않고 보기에도 흉합니다. 남이 기른다고 덩달아 기르고, 그 지저분한 모양이 과연 멋있게 보인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치안당국은 머리가 귀밑으로 내려오는 등 성별이 구분되지 않는 장발자들에게는 머리를 깎아주고 응하지 않을 경우 즉결재판에 넘기고 있습니다. 단속에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위생과 품위를 생각해서 머리를 단정하게 깎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 헌법은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었다. 법률에 의하면 노동자는 단결할 수 있었고, 단체로 교섭할 수 있었으며, 단체행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동자의 권리는 책 속에서 잠자는 권리였다. 1970년 어느 가난한 청년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을 지키는 세상’을 외치며 자기의 몸에 신나를 부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다. 박정희의 유신체제가 들어선 1972년 이후 대한민국의 노동 현장은 단테도 묘사할 수 없는 끔찍한 지옥이 되었다.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면, 먼저 달려오는 자들은 경찰이었다. 경찰서 대공과 형사들은 힘없는 노동자들을 연행하여 온갖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너희들이 만나고 있는 지식인, 누구야?” 노동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지식인들은 ‘제3자 개입’이라는 죄목으로 엮어 투옥되었다. 그 시절 노동자들은 숨도 쉬기 힘들었다. 공장 입구엔 분명 ‘노동자를 가족처럼’ 대우하자는 팻말일 걸려 있었으나, 들어가 보면 공장은 ‘노동자를 가축처럼’ 부려먹는 착취의 현장이었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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