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의식의 의식
의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의식을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이 의식의 의식을 의식이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다.
의식을 의식할 때 우리는 의식이야말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자명한 것이라고 느낀다. 우리는 의식이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 기분과 감정, 기억과 사고, 주의와 의지력 등을 규정하는 속성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의식이 개념의 기초요, 학습과 추리, 사유와 판단의 기초라고 확신하는 데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는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무엇을 경험할 때 그것을 기록하고 저장하게 하며, 우리 마음대로 그 경험을 내성하게 하고 경험을 통해 배우게 하는 것이 의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의식이라고 불리는 이 모든 놀라운 심리작용과 내용이 우리 뇌 어딘가에 있다고 확신한다.
엄밀하게 따져본 결과, 이 모든 말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수세기에 걸쳐 의식이 차려입고 다닌 의상일 뿐이었다. 이들이야말로 의식의 기원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풀 기회를 막아온 주범들이다. 이 오류를 입증하고 의식이 아닌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 장의 과제인데, 길지만 흥미진진하게 읽기를 기대한다.
의식의 포괄성
우선 의식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즉시 버려야 할 몇 가지 잘못된 것들일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머리에 타격을 입은 후 “의식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이 옳다면, 우리는 분명히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인데도 기절한 사람과는 다르게 장애물에 반응하는 임상기록상의 몽유병 상태를 접할 때 이를 묘사할 말이 없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선 머리에 심한 타격을 입은 사람은 의식과 함께 내가 반응성reactivity이라고 부르는 것을 잃은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이 둘은 서로 다르다.
이 구별은 일상 삶에서도 중요하다. 우리는 그때그때 사물을 의식하지 않은 채로 늘 사물에 반응한다. 나무에 기대앉아 있을 때 나는 그 나무와 땅, 내 몸의 자세에 계속 반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걷고 싶을 때 무의식적으로 그 땅에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제1장에 담을 생각에 깊이 빠져, 나는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글을 쓸 때, 나는 내 손 안에 있는 연필에 반응하고 있다. 내가 그것을 계속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노트에 반응하고 있다. 내가 그것을 지금 내 무릎 위에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노트에 처진 줄에 반응하고 있다. 내가 지금 그 줄 위에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내가 말하려는 것과 여러분에게 내 생각을 명확히 전달하고 있는지 아닌지만 의식하고 있다.
이때 새 한 마리가 근처 덤불 숲에서 푸드득 솟아올라 지평선 쪽으로 울며 날아간다면, 나는 그것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쳐다보고 그 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런 다음 나는 이 행동을 의식하지 않은 채 다시 지금의 이 책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요컨대 반응성은 내 행동이 어떤 방식으로든 고려하고 있는 자극을 모두 관장하는 반면, 의식은 이와는 구별된 어떤 것으로서 전자에 비해 훨씬 드물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것들을 가끔씩만 의식한다. 반응은 행동적으로, 신경학적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의식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그렇게 규정될 수 없다.
이 구별은 영향력이 매우 광범위하다. 우리는 의식의 현상학적인 성분이 개입되지 않아도 끊임없이 사물에 반응한다. 물론 어느 때나 그런 것은 아니다. 사물을 볼 때, 우리의 눈과 망막 상은 초당 20번씩 변하면서 대상에 반응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른 입력정보가 계속 이어지거나 이들이 한데 묶여 대상을 구성하는 것은 조금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안정된 대상을 본다. 적절한 환경에서는 어떤 사물의 망막 상이 비정상적으로 작으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먼 곳에 있는 물체로 보이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수정작업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색과 빛의 대비효과나 그밖의 다른 지각 항등성은 생시의 경험에서나 심지어 꿈속의 경험에서나 매순간 일어나지만 우리는 이들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례들은, 의식 이전의 정의에 따르면 당연히 의식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실제로는 수많은 과정이 거의 의식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말은 의식을 ‘지금 발생하고 있는 정신과정의 총체’라고 명명한 적이 있는 티치너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이론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좀더 이야기를 진행해보자. 의식이란 것은 우리가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작은 부분의 정신활동일 뿐이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은 쉽지만 이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가! 이것은 깜깜한 방에서 무엇을 찾기 위해 사용하는 손전등에 비유할 수 있다. 그 손전등은 자신이 도는 방향마다 빛이 있으므로, 모든 곳에 빛이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의식이 모든 정신생활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의식이 작용하는 시간 또한 흥미 있는 문제다. 깨어 있을 때 우리는 언제나 의식하고 있나? 우리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확신한다. 눈을 감으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한다 할지라도 의식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사유, 이미지, 기억, 내적 대화, 후회, 소원, 결심 등의 이름으로 배워온 상이한 조건의 연쇄 속에 담긴 엄청난 내용물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선택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외적 감각들의 끊임없는 변화의 행렬과 잘 짜여 있다. 간단없는 연속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분명히 이것은 느낌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든 간에, 우리의 자아, 즉 우리의 심층적 정체성이라는 것은 연속적 흐름인데, 이 흐름은 잠을 잘 때, 그것도 꿈을 꾸지 않거나 꿈을 기억할 수 없을 때만 멈춘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상가들은 이 연속성의 정신을 철학이 출발하는 장소, 즉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의 근거라고 생각해왔다. 사고하기 때문에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연속성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까? 1분은 6만 밀리세컨드인데, 우리는 밀리세컨드마다 의식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신경원의 점화firing는 유한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시간단위들을 더 잘게 나누어보라. 이런 작업이 의식의 연속성 지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의식이 신경원의 불응기refractory period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신경체계의 주변을 떠다니는 안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의식의 이 외양적 연속성은, 의식에 관한 다른 비유들만큼이나 실제로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앞의 손전등 비유에서, 손전등은 그것이 켜 있을 때만 켜 있는 것을 의식할 것이다. 엄청난 시간차가 있었을지라도 그밖의 일들이 대체로 변하지 않은 채로 있는 한, 손전등에게 불빛은 계속 켜져 있던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는 의식이 없을 때는 의식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시간을 의식하지 못한다.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도도히 흐르는 풍성한 내적 경험에 대한 느낌은, 꿈결 같은 기분을 타고 천천히 흘러들기도 하고, 격정적인 급류를 타고 험한 통찰의 계곡을 굴러내리기도 하며, 고결한 시간 속으로 잔잔히 밀려들기도 한다. 이런 느낌들은, 앞에서도 언급했는데, 주관적 의식이 어떻게 의식되는지를 비유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좀더 잘 부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왼쪽 눈을 감은 채 이 책장의 왼쪽 가장자리를 바라보라. 당신은 시야의 오른쪽으로 10센티미터가량 되는 곳에 큰 구멍이 생긴 것을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오른쪽 눈으로만 쳐다보며 손가락을 들어 왼쪽 가장자리에서 오른쪽 가장자리로 행을 따라 움직여보라. 당신은 그 손가락 끝부분이 바로 그 구멍난 시야를 지날 때에는 사라졌다가 계속해서 옆쪽 면을 지날 때 다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은 코 쪽의 망막에 있는 2밀리미터가량의 구멍 때문인데, 이곳에 시신경 섬유가 모여 눈에서 뇌로 연결된다. 이 구멍이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통상 맹점이라 부르는 의미의 맹점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점이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은 자신의 어두움을 본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 시야에서 어떤 구멍도 볼 수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 맹점을 둘러싼 주변공간이 한 치의 구멍도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의식도 시간의 구멍을 스스로 채워넣어 연속성의 환상을 갖게 된다.
일상으로 하는 행동 중 얼마나 적은 부분만을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는 도처에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그중에서도 피아노 연주는 참으로 특이한 예다. 피아노 연주에는 여러 가지 복잡하게 배열된 과업이 동시에 수행되고 있는데도, 이들은 거의 의식되지 않는다. 상형문자처럼 생긴 두 행을 단번에 읽어야 하며, 오른손으로는 한 행을 따라가고 왼손으로는 다른 행을 따라가며, 열 손가락마다 각각 다른 과업이 주어진다. 일일이 자각하지 않은 채 여러 근육을 움직이는 문제를 해결하여 손가락을 움직이며, 정신은 반음올림표와 반음내림표, 온음으로 돌아가게 하는 음표를 읽어 어느 건반을 누를지 해석해주어야 한다. 온음표와 4분음표와 16분음표와 쉼표와 트릴의 시간길이에 따라야 하며, 한 손으로는 한 음절에 3박자를, 다른 손으로는 4박자를 연주해야 할 때도 있고, 양 발은 여러 음을 부드럽게 또는 느릿느릿하게 또는 계속 이어주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하는 동안 연주자는, 의식하고 있는 연주자는, 이 모든 엄청난 작업의 결과로 예술적 도취상태에 빠져 7층천에 있거나, 자신을 위해 악보를 넘겨주는 이성異姓에 대한 상념에 젖어, “지금 저 사람은 연주자인 나에게 자신의 영혼을 속삭이고 있는 거야”라고 멋대로 판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일반적으로 의식은 그런 복잡한 활동의 학습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런 활동을 실제로 실행할 때는 의식이 꼭 필요한 것 같지는 않은데, 바로 이 점이 내가 주장하려는 것이다.
의식은 종종 불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없는 게 훨씬 더 나을 수 있다. 피아니스트가 격렬한 아르페지오 부분을 연주하는 중에 갑자기 자신의 손가락을 의식하게 되었다면 그는 연주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니진스키Nijinsky는 언젠가 춤을 추는 자신이 무대가 아니라 자기 뒤를 바라보고 있는 오케스트라석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모든 동작을 의식하는 게 아니고 단지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의식한다고 말했다. 단거리주자는 경주 중에 다른 선수들 사이에서 자신이 어디쯤 달리고 있는지를 의식할는지는 모르나, 한 다리를 다른 다리 앞으로 옮기는 것을 의식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러고 있다가는 정말로 넘어질지도 모른다. 나처럼 테니스를 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서비스를 갑자기 ‘엉망으로’ 만들고, 연속해서 서비스 범실을 하게 하는 감정악화를 경험할 것이다. 다시 범실이 더 많게 되면 될수록 자기의 동작을 (그리고 자신의 기질을) 더 많이 의식하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사태는 더 엉망이 된다.
이런 현상은 노력이 많이 필요하여 신체적으로 흥분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처럼 힘들지 않은 일상의 일에서도 의식과 관련해 동일한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앉아 있는지, 당신 손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얼마나 빨리 읽고 있는지를 의식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언급했기 때문에 이들을 지금은 의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책을 읽는 동안에도 글자나 단어, 심지어 구문이나 문장 또는 구두점을 의식하지 않는다. 당신은 단지 그 의미를 의식할 뿐이다. 연설을 듣고 있는 중에도 음소들은 단어 속에서 사라지고, 단어들은 문장 속에서, 문장들은 그것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 즉 의미 속에서 사라진다. 연설의 요소들을 의식하고 있는 한, 연설의 의도는 파괴될 것이다.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말하는 단어나 음절의 분절을 모두 의식하면서 말하려고 해보라. 결국 말을 중단하고 말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하려는 것과 독자에 몰두해 있을 뿐이고, 단어를 쓰고, 띄어쓰기를 하고, 구두점을 적절하게 찍고, 다음 줄로 옮겨가고, 연속되는 문장들이지만 다른 방식으로 시작하며, 여기에는 의문부호를, 저기에는 감탄부호를 찍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마치 연필이나 펜 또는 타자기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쓰거나 말할 때 우리가 실제로 의식하는 것은 구체적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을 어떻게 말할까, 언제 그것을 말할까를 결정할 때만 나타나는데, 그러고 나면 질서정연하고 완성된 음소열이나 문자열이 부지불식간에 만들어진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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