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행
1985~86
그렇게 소풍 가듯 떠나온 고향을 다시 찾은 것은 사십여 년 만인 1989년이었다. 방북 이야기에 앞서 나는 그보다 몇 해 전 내가 처음 나라밖으로 나갔던 1985년의 경험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 그때의 경험이 내가 방북을 결심하게 된 큰 동기였기 때문이다. 1967년에 해방대로 베트남에 갔었지만 당시에는 부대 주둔지 외에는 다른 지역으로 갈 수 없는 군인이었으니 바깥 세계를 경험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 때는 기차나 배를 타고 만주를 거쳐 시베리아와 유럽에까지 갈 수 있었지만 분단 이후 남한은 위로는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으며 삼면이 바다여서 섬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된 것은 1989년부터였으며 이전에 일반인은 해외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기 몇 년 전부터 이른바 상용 또는 문화 여권이라고 해서 외국의 초청장을 받은 경우에 한하여 대기업 회사원과 해외 공연이나 전시에 참가하는 문화인에게 단기여권을 내주었다. 당시에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신원조회’였는데 여권 신청자가 약간의 법적 정치적 문제라도 있으면 발급이 거부되었다. 다행히 신원조회를 통과했다 할지라도 이른바 ‘소양교육’이라고 해서 일정 기간 정보기관의 안보교육을 받고 그 수료증을 첨부해야 했다. 특히 미국을 가려면 비자를 받아야 했는데, 세금납부증명서와 재정보증이니 초청장이니 각종 서류를 제출하고 까다롭기 짝이 없는 미국대사관 면접을 통과하기까지 수개월씩 걸리는 일이었다. 여권을 갖는 일 자체가 특권이었던 셈이다. 내가 나가던 무렵에는 과거의 통과의례는 다소 느슨해져 있었고 경제와 문화 분야의 출국에 대하여 문호가 열리던 때였다. 그렇지만 신원조회는 과거와 달라진 점이 없었으므로 반정부 인사였던 나 같은 사람은 애초에 해외 출국은 꿈도 꾸지 못할 처지였다. 그 무렵에 나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광주항쟁에 대한 실록을 출판하게 되고 그로 인해 첫 출행길에 오르게 된다.
1979년 종신집권체제를 강압적으로 끌고 가던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하여 암살되자, 군 보안장교들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독재자의 죽음을 계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신군부는 이듬해인 1980년 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 수천 명을 무차별 살상했다. 광주에서 시민들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무장을 하고 십여 일 동안 포위된 광주의 치안을 유지하며 도청을 중심으로 저항했다.
광주항쟁이 무자비한 진압으로 종결된 뒤에 우리는 이 사실을 한국 국민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에 모든 언론과 매스컴은 정부의 ‘보도지침’에 묶여 있었고 일상적인 검열의 덫에 걸려 있었다. 광주 참사에 대한 보도는 이따금 종교단체를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외신에 의해 일부 사람들만 몰래 접할 수 있었다.
나는 197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문화운동조직을 결성했는데 이들 문화 일꾼들은 학생, 교사, 문인, 예술가 등 지식인에서 차츰 현장의 노동자 농민들로 참여 계층이 확대되었다. 문화운동조직의 첫 번째 임무는 여러 가지 매체를 동원하여 광주의 진상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일이었다. 여러 가지 현대적 장치가 동원되는 극장 공연을 할 수 없었던 우리는 먼저 마당극이라는 형식을 개발하여 마을이나 공장의 공터 아무데서나 순회공연을 했고, 노래를 만들어 악보와 가사를, 나중에는 카세트테이프를 제작하여 보급했다. 화가들은 판화를 찍었고, 미디어에 눈뜬 젊은이들은 사진, 8밀리 영화, 비디오 등으로 서툴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을 복사하거나 담아냈다. 이들은 훗날 유명한 연출가, 극작가, 문인, 작곡가, 가수, 배우, 화가, 영화인 등으로 성장하게 된다. 광주항쟁 5주년을 앞두고 우리는 보다 정확하게 진실 규명을 해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광주에서는 대략 세 개의 팀이 항쟁의 각종 자료들을 모아나가고 있었다. 이들은 외신, 검열에 걸려 누락된 국내 기자들의 보도, 사진, 영상 등을 모으고 무엇보다도 항쟁에 참여하거나 목격한 각계각층의 시민들의 증언과 체험담을 개별적인 인터뷰를 통하여 수집했다.
당시 내 두 아이의 엄마이자 아내였던 홍희윤은 활동가와 구속자의 부인들이며 교사, 사회단체 직원 등으로 구성된 광주 여성회 ‘송백회’를 맡고 있어서 자금을 모아 자료팀을 뒷바라지하고 있었다. 나는 내게 넘겨진 기록을 간추리고 줄거리를 구성하여 압축하는 작업을 했다. 자료 수집과 기록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나와의 직접 접촉을 끊고 ‘현대문화연구소’의 정용화와 전용호가 그들과 나 사이에서 연락을 해주었다. 현대문화연구소는 그 무렵 미국으로 밀항하여 망명한 윤한봉과 내가 1979년에 창설했는데, 항쟁 이후 겉으로는 모두 해산된 것처럼 연구소를 폐지했지만 기능은 지하에서 그대로 돌아가고 있었고 정용화가 3대 소장을 맡은 상태였다.
나는 모아진 자료를 들고 서울에 올라와 출판사 근처에 방을 정하고 한 달 동안 최종 정리 작업을 했다. 먼저 배포된 팸플릿이 대학가로 퍼졌고 선발된 서울의 각 대학 활동가들이 미국문화원에 들어가 농성했다. 광주 진압을 위한 군대 파견은 한반도의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의 암묵적 동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며 따라서 신군부의 배후인 미국의 책임임을 국내외적으로 부각시키자는 의도였다. 예정대로 책은 5월 초에 출판되었는데 용기 있는 인쇄업자를 만나 초판 이만 부를 찍어 서점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출판을 맡은 풀빛 출판사 나병식 사장은 민청학련 이래 두 차례나 수감된 경력이 있어서 열흘쯤 피해다니다가 자수했고, 나는 그가 수사를 다 받고 사건의 윤곽이 나올 때까지 한 달쯤을 도망다니기로 했다.
책이 풀려나가자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힌 것 같았다. 광주에서는 우리 집에 합동수사반이 들이닥쳐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고 화단까지 파헤쳤다. 현명한 홍희윤은 자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미리 마당 한켠에 있던 허름한 창고 건물의 슬레이트 지붕을 걷어내고 그 밑에 깔아놓았다. 그들은 창고도 뒤졌지만 얇은 합판 천장은 뜯어내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서울 외곽에 사는 후배 문인들의 집을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중에 풀려나간 책의 절반쯤이 다 팔리기도 전에 압수당했지만 곧 당시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복사기로 해적판이 복사되어 새끼를 쳐가며 퍼져나가고 있었다. 한 달쯤 지나서 나는 전화를 걸어 자수했고 안기부로 끌려가지 않고 중부경찰서에 수감되었다. 남산과 가까운 거리여서 안기부 수사관들이 경찰서에 내려와 수사 지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안기부에서 조사하는 것을 피하려 했는데 신군부의 가장 큰 약점이던 광주 진압과정의 소문이 대중에게 일파만파로 퍼져나갈 것을 우려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조사하면서도 1970년대에 국내외로 파장이 커진 시인 김지하의 구속 사태를 예로 들면서 내 행위가 유언비어 유포에 지나지 않는 작은 일이라는 것을 애써 강조했다. 그 무렵에 대학가에 번지기 시작한 시위로 유치장마다 잡혀온 학생들이 가득했는데, 그들은 내가 젊은이들과 함께 있으면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 유치장으로 나를 면회하러 오는 인사들이 많아지자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급히 수사를 마무리하고는 나를 중심가에서 먼 변두리 경찰서로 옮겼다가 다시 공항 부근의 출입국법 위반자를 유치하는 시설로 옮겼다. 입감되던 날 옆방에서 영국 여자가 헬로, 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홍콩에서 여행을 왔고 누군가 돈을 주면서 물건을 전해달라고 해서 무심코 가방에 넣어왔는데 그게 마약이더라고 했다. 영국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다. 그 옆방에는 중동 사람 두 명이 들어와 있었다.
일주일쯤 지나서 누군가 나를 불러냈다. 그는 안기부 요원이었는데 말이 별로 많은 편은 아니었다. 당국에서는 이번 사건을 유언비어 유포로 보는데 경범죄여서 처벌은 현행법상 구류의 최고형인 이십 일 구금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이튿날 정식 재판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가 뭔가 종이 두어 장을 내게 내밀었다. 들여다보니 독일어와 영어로 된 초청장이었다. 서독 베를린에서 당신에게 초청장이 왔는데 출국시키라고 어찌나 성화인지 우리도 골치가 아프다고 그가 말했다. 공연히 국내에서 시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외유나 다녀오겠다면 당국에서도 허용할 의사가 있다고 했다. 그 사내는 한번 더 나를 찾아왔다. 나는 유치장 안에서 여권을 위한 서류를 작성하고 지문 찍고 사진도 찍었다. 석방되는 날 나는 영치되어 있던 여권과 독일에서 보낸 비행기 표를 받았다.
그날 광주에서 올라와 나의 석방을 기다리고 있던 홍희윤과 만났다. 우리는 서울에서 하룻밤 같이 지내고 이튿날 백화점과 남대문시장에 가서 옷가지며 가방 등속을 샀다. 홍희윤은 어린 아들과 딸을 이웃에 돌봐달라고 맡기고 온 터여서 저녁차로 돌아가야 했다. 그 무렵에 우리는 많이 지쳐 있었다. 그녀와 나는 광주에서 수년째 주부와 소설가 사이에 사회운동가로 제각기 뛰어다녔다. 우리는 몇 번이나 번갈아 연행되거나 조사를 받았고 아슬아슬하게 구속을 면하곤 했다.
우리가 전라도로 하방한 것은 1976년이었는데 문화운동조직의 전국화가 이루어지던 초기여서 이 무렵부터 나는 일 년에 몇 차례씩, 길게는 한 달에서 짧아도 보통은 열흘 이상씩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다. 홍희윤은 언제 귀가할지 모르는 나를 기다리다가 구속된 후배들의 아내들과 어울려 여성회 모임을 꾸렸을 것이다. 우선 정치범들의 옥바라지를 시작했는데 이를테면 털실로 양말과 장갑을 짜서 정국의 정치범들에게 보내고 영치금을 모금했다.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연재중인 소설의 원고를 쓰느라고 식구들과 외식 한 번 제대로 했던 기억이 없다. 더구나 밤에 일하고 낮에 자는 불규칙한 습관 때문에 하루 한끼를 함께 먹기도 쉽지 않았다. 모두 내 잘못이었지만 언젠가부터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으면 서먹한 침묵이 둘 사이를 지배했는데, 어느 누구도 그것을 깨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밥을 먹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날도 강남의 버스터미널까지 내가 배웅해야 했건만 함께 저녁을 먹은 식당 앞에서 나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미안해, 될 수 있으면 편지 자주 할게.”
내가 행정적인 일에 무능한 탓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지방에서 전화 놓기가 어렵던 시절이라 우리집에는 그때까지도 전화가 없었다. 내 주위 사람들도 모두 “까짓것 전화 놓으면 뭘 해, 매일 도청이나 당할 텐데” 하고 자위하던 형편이었다. 홍희윤은 그때 무슨 예감이 있었는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돌아서서 얼른 물기를 훔쳐냈다.
“왜요, 걱정돼서 그래?” 내가 좀 당황하여 말했더니 그녀가 곧 냉정한 얼굴로 돌아가며 말했다. “어쩐지 오래 걸릴 것 같네요. 하여튼 잘 다녀오세요. 술 많이 드시지 말구.”
그녀가 택시를 타고 떠났고 나는 잠시 길 위에 서 있었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의 결별의 시작이 되리라고는 알지 못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힐 것 같은 압박감과 함께 깊은 회한이 밀려온다.
(본문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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